”암흑의 일맥이라 불리는 두씨 가문의 계집애가 어찌하여 저하의 곁으로 왔어요?”민규현이 궁금해서 물었다.그러자 윤구주는 지난번에 있었던 전주 흑룡상회의 일을 요약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흑룡상회가 원래 두씨 가문의 부속 사업이라는 것도 알려줬다.이 말을 듣자 민규현이 말했다.“그렇군요! 화진의 4대 가문이 국내의 모든 세력의 근원을 장악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역시 거짓이 아니네요!”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계집애는 보기에 버릇없어 보이지만 사실 마음은 나쁘지 않아! 규현아, 이번 일을 마치면 네가 서울에 갈 때 이 계집애를 두씨 가문으로 데리고 가줘!”민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저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민규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말했다.“뭐가?”윤구주가 물었다.“저하! 저하께서 곧 형수님과 결혼하시는데. 제 말은, 이런 큰일은 아무래도 형제들에게 알려야 할 거 같아서 그래요. 어찌 됐든, 우리 암부는 저하께서 직접 만드셨잖아요! 둘째, 셋째가 지금까지 저하를 위해 슬퍼하고 있어요! 정태웅 그 뚱보는 저하께서 죽음의 바다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살이 쏙 빠졌어요! 매일 눈물로 지새우지 않으면, 혼자서 저하의 저택에 가서 묵묵히 무릎을 꿇고 있어요! 휴...”암부의 3대 지휘사.호존이라 불리는 민규현 외에 두 명의 독한 사람이 있었다!그들 셋은 호랑이, 백곰, 늑대라고 불렸다.민규현은 호존, 정태우은 백곰, 천현수는 늑대!화진의 암부에서 3대 지휘사는 각각 10만 명의 암부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그들 셋은 부하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모두 대가급 이상 실력의 초강자였다!그들 셋은 윤구주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고 윤구주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지금 윤구주가 결혼한다 하니 민규현은 3대 지휘사 중에 나머지 두 사람도 저하를 위해 마땅히 결혼식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민규현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잠시 망설였다.“저
“아니야, 됐어!”말을 마친 윤구주가 고개를 들자 살벌한 눈빛이 나타났다.“지금의 국방부는 애초의 국방부가 아니야! 게다가 지금의 왕은 그 악마 같은 여자가 하고 있으니, 네가 현모에게 소식을 전하면 현모만 난처하게 될 것이야. 그 악한 여자의 감시를 받을 수도 있어!”민규현이 이 말을 듣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빌어먹을 독한 여자! 언젠가는 나 민규현이 저하를 대신해 꼭 이 여자를 죽여버리겠어요! 저하를 위해 복수를 하겠어요!”윤구주는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윤구주가 결혼할 것이다!이 소식이 용인 빌리지로부터 주세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그리고 남부 창용 부대에도 전해졌다.바로 이때.남부 창용 부대 총지휘부 안.군복 차림의 박창용은 주세호 쪽에서 온 소식을 보고 기뻐서 큰 소리로 웃었다.주변의 국방부 참모장과 몇몇 사단장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총사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웃고 기뻐하는지 아무도 몰랐다.박창용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가 평생 가장 존경했던 저하께서 마침내 곧 결혼할 것이다!“내가 오늘부터 며칠 동안 강성으로 가야겠으니, 그다음 일은 잠시 자네들에게 맡기겠네!”총사령관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니 옆에 있던 몇몇 사단장들과 군부 참모장은 모두 멍해졌다.“하지만 총사령관님, 우리는 이제 곧 1년에 한 번씩 가장 중요한 군사훈련을 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번 훈련에는 서울의 몇몇 큰 인물들이 와서 직접 시찰할 거예요! 사령관님께서... 이렇게 갑자기 강성에 가면, 좀 안 좋지 않아요?”박창용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안 좋을 게 뭐가 있어! 내 명령을 전달해. 군사훈련을 연기시켜!”“연기시키라고요?”몇몇 사단장들이 듣자 어이가 없었다.“맞아! 아무리 큰일이라도 내가 이번에 강성에 가는 일 만큼 중요하지 않아! 됐어. 나 할말 다 했어. 나머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해!”박창용은 말을 마치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총지휘실을 떠났다.몇몇 사단장들과
“안나야, 너 구주 좋아하지 않았니?”주세호는 윤구주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윤구주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네? 아빠, 뭐라는 거예요? 제... 제가 왜 윤구주를 좋아하겠어요?”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안나의 예쁘장한 얼굴은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살짝 빨개졌다.자신의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주안나는 서둘러 그릇 위에 놓여 있던 사과를 들고 깨작대기 시작했다.“아빠한테 숨길 생각 하지 말거라! 아빠 눈에는 다 보이니까 말이야.”주세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안나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애석하게도 네겐 기회가 없어.”‘응?’“아빠, 그 말 무슨 뜻이에요?”주안나는 어리둥절해졌다.“내 말뜻은 간단해. 넌 아마 평생 윤구주와 결혼할 기회가 없을 거다. 구주는... 구주는 곧 소씨 집안 아가씨와 결혼할 테니 말이다.”결혼이라는 두 글자에 주안나의 손가락이 흠칫 떨리면서 입가로 가져갔던 사과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주안나는 그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아빠, 농담이죠? 구주 오빠가 결혼한다고요?”주안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주세호를 바라보았다.주세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리가요... 이렇게 빨리요? 구주 오빠... 줄곧 용인 빌리지에 있던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거예요?”주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주세호가 말했다.“윤구주가 왜 갑자기 결혼하려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윤구주가 소채은 씨를 굉장히 사랑한다는 거야. 그리고 소채은 씨도 구주를 몹시 사랑하고!”주세호의 말에 주안나는 심장이 저렸다.그것은 칼로 난도질하듯,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막막함이 주안나를 휘감았고, 주안나 본인 역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솔직히 그녀와 윤구주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두 번의 간단한 오해를 제외하고 나면 밥 한 끼 같이 먹었던 게
“그리고 저희 대뿐만 아니라 우리 소씨 가문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게 될 거예요!”집 안에서 소청하는 들뜬 얼굴로 아버지 소진웅에게 말했다.윤구주가 소진웅을 치료한 뒤로, 소진웅은 외출 한 번 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내면서 식물을 다듬거나 불경을 외웠다.식물을 다듬고 있던 소진웅은 소청하의 말을 듣더니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쳤다.“대대손손 영광을 누릴 거라고? 네가 무슨 수로? 난 믿지 않는다!”“아버지, 절 무시하시네요! 네, 맞아요. 저로서는 저희 소씨 가문이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게 할 수 없지만 아버지, 제게는 훌륭한 딸이 있잖아요!”소청하가 웃으며 말했다.“내 손녀가 왜?”소진웅이 물었다.“하하, 아버지, 아버지 손녀 이제 곧 결혼해요. 전 그 소식을 알려드리려 왔고요.”소청하가 계속해 말했다.“결혼? 누구랑?”소진웅이 서둘러 물었다.“누구긴요. 당연히 아버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던 윤구주죠!”소청하가 자랑스레 말했다.“뭐? 저번에 날 치료해 줬던 그 윤구주 말이냐?”“네, 네! 맞아요! 아버지, 예전에 윤구주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윤구주가 우리 집 사위가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기도 했고요. 이제 만족하세요?”소청하의 말에 소진웅은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았다.“정말이냐? 내 손녀가 정말 윤구주랑 결혼을 한다고?”소진웅은 흥분에 겨워 물었다.“당연하죠. 제가 왜 아버지를 속이겠어요?”소청하가 말했다.“하하, 좋다, 좋아!”소진웅은 무척 기뻐했다.비록 윤구주와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그는 항상 윤구주를 자신의 손주사위로 여겼었다.그런데 손녀가 정말로 윤구주와 결혼하게 됐다고 하자 몹시 기뻤다.“둘째야, 네가 드디어 살면서 옳은 일을 하나 하는구나!”소진웅이 말했다.소청하는 원망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웃으며 말했다.“아버지도 제가 이번에는 옳은 일을 한 것 같으세요?”“당연하지! 구주 걔가 얼마나 훌륭한데! 인물도 훤하고 의술도 뛰어나잖니? 이렇게 잘난 손주사위를 두게 되었는데
소청하는 그곳에서 나온 뒤 곧바로 소채은을 찾으러 가서 결혼 날짜에 대해 의논해 보려 했다.그러나 소채은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그래서 소청하는 소채은에게 얼른 윤구주를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했다.소채은은 별로 급하지 않았지만 소청하가 본인보다 더욱 급해하니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알겠어요. 제가 구주에게 물어볼게요.”소채은은 말을 마친 뒤 차를 타고 윤구주를 찾으러 갔다.가는 길에 윤구주에게 전화한 뒤 그녀는 곧장 용인 빌리지로 향했다.산기슭.윤구주는 그곳에서 소채은을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뒤 소채은이 차를 타고 도착했다.오늘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캐주얼하게 하나로 묶어 올렸다. 흰 피부에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그녀는 어딜 가든 항상 주목을 받았다.“구주야!”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소채은은 단번에 윤구주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윤구주는 행복한 얼굴로 품 안의 그녀를 바라보았다.이것은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뒤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구주야, 요 이틀 뭐 했어? 나 안 보고 싶었어?”소채은이 아름다운 눈을 깜빡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보고 싶었지. 매 순간 보고 싶었어!”윤구주가 대답했다.“정말?”“당연하지!”“흥, 그래야지. 난 너랑 결혼하기로 했으니 넌 날 당연히 보고 싶어 해야지. 그리고 날 괴롭혀서는 안 돼!”소채은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매일 네 생각을 만 번씩 할 거야. 그리고 영원히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윤구주가 다정하게 말했다.“헤헤, 역시 우리 구주가 최고라니까!”윤구주의 팔짱을 낀 소채은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구주야, 네가 사는 곳으로 가자. 나 너랑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소채은은 윤구주를 잡아당기면서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좋아. 자, 저기 빌리지로 가자.”윤구주가 용인 빌리지를 향해 걸어갔다.“잠깐만!”소채은이 갑자기 윤구주를 불러 세웠다.“왜 그래?”윤구주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구주야, 너 설마 저 용인 빌리
윤구주는 소채은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 용인 빌리지로 향했다.소채은은 이런 곳에 처음 와봤다.산길을 오르며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던 소채은은 눈앞의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윤구주의 뒤를 따라서 용인 빌리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소채은의 귀속을 파고들었다.“안녕하세요, 형수님!”목소리가 너무 큰 탓에 소채은은 깜짝 놀랐다.고개를 돌린 소채은은 입구 쪽에 듬직한 덩치의 남자가 서 있는 걸 보았다.마치 호랑이와도 같은, 온몸에서 엄청난 기세를 내뿜는 남자였다.그런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소채은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절 뭐라고 부르셨어요?”갑작스레 나타나는 민규현 때문에 소채은은 말문이 막혔다.“형수님이라고 불렀습니다!”민규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형수님?그 말을 들은 소채은은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래. 방금 형수님이라고 불렀어. 내가 민규현 형님이거든!”그 말에 소채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옆에 있던 민규현이 입을 열었다.“형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 민규현은 성격이 조금 투박하고 말주변도 없고 말투도 거칠긴 하지만 앞으로 형수님께 성가신 일이 생기신다면 언제든 절 불러주세요. 강성시에서, 더 나아가 화진에서 누군가 감히 형수님을 괴롭힌다면 저 민규현이 그 빌어먹을 놈을 죽여버릴 겁니다! 혹시 그걸로 부족하시다면 그놈 조상들의 무덤을 파고 그들의 시체를 꺼내 채찍질하겠습니다!”소채은은 남자의 말에 넋이 나갔다.그녀는 이 우람한 몸집의 남성이 대체 누군지 생각하고 있었다.‘왜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지? 그리고 조상들의 무덤을 파고 그들의 시체를 꺼내 채찍질하겠다고?’“호의는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소채은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암부 3대 지휘사 중 한 명인 민규현은 그동안 민도살이라고 불렸다.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채찍질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아주 흔한 일이
문지기라고 불린 천하회 구성원들은 찍소리 하지 못하고 오히려 웃는 얼굴로 소채은을 맞이했다.이러한 상황에 소채은은 경악했다.그녀는 윤구주를 따라 안마당으로 향했고, 안으로 들어서자 서둘러 물었다.“구주야, 너 정말 여기 살아?”“응.”윤구주는 소채은에게 물을 따라주면서 말했다.“그런데... 이렇게 많은 돈이 어디서 난 거야? 그리고 문 앞에 있던 사람들,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소채은은 바보가 아니었다.조금 전 소채은은 천하회의 노정연과 그 뒤의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고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우아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노정연이 유독 그랬다.소채은은 노정연이 입고 있는 옷이 자수계에서 가장 유명한 운자법으로 된 것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노정연이 입고 있는 옷은 아마 2,000만 원은 족히 될 것이다.게다가 노정연은 훌륭한 몸매에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다.그런 사람을 일개 문지기라고 하는데 누가 믿을까?“채은아, 이 일은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 결혼한 뒤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윤구주는 말을 아끼며 얼버무렸다.“참, 채은아. 오늘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야?”윤구주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소채은은 비록 조금 전 광경 때문에 호기심이 가득한 상태였지만 윤구주의 질문을 듣고 다급히 말했다.“당연히 우리 결혼에 관한 일을 의논하러 왔지!”“결혼?”“그래. 넌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는 우리가 결혼할 거란 걸 알게 되자 나보다 더 조급해하셔. 매일 나한테 우리 언제 결혼하냐고 재촉한다고! 오늘도 나한테 우리 언제 결혼하냐면서 너 찾아가서 얘기 나눠보라고 했어.”윤구주는 그 말을 듣더니 웃었다.“우리 결혼식 날짜는 네가 정해.”‘어?’“내가 정하라고?”“그래.”“너 바보 아냐? 나 혼자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같이 정해야지!”소채은이 말했다.윤구주는 결혼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몰랐다.“구주야, 결혼은 큰일이야. 그렇게 대책없이 굴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우리 결혼식 날짜는
결국 윤구주는 20일 뒤인 음력 10월 8일을 결혼식 날로 정했고 소채은도 흔쾌히 동의했다.결혼식 날짜를 정한 뒤 소채은은 그제야 용인 빌리지를 떠났다.마당으로 나올 때, 천하회 사람들과 백경재가 멀찍이 서서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소채은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이 소채은은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채은아, 내가 바래다줄까?”윤구주는 소채은이 어색해하자 입을 열었다.“아냐. 내가 알아서 돌아가면 돼.”소채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사람들을 힐끗 본 뒤 떠났다.소채은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를 묶은 어린아이가 안마당 쪽에서 뛰어나왔다.“그 여우 같은 언니는? 내가 죽여버릴 거야! 감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구주 오빠를 나한테서 빼앗아 가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어린아이는 두씨 집안의 두나희였다.두나희는 소채은이 용인 빌리지로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안 건지 과일칼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뛰쳐나왔다.그 광경을 본 천하회 사람들과 백경재는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심지어 윤구주마저 미간을 구겼다.“네가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여기서 난리 피우지 말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사탕이나 먹어!”백경재는 서둘러 달려가 두나희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그런데 그가 다가가자마자 두나희가 과일칼을 들고 설치면서 사납게 말했다.“상관하지 마요! 전 오늘 반드시 저 여우 같은 언니를 죽이고 말 거예요!”백경재도 미친 것 같은 두나희를 제압하지 못하자 윤구주가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그만해! 자꾸 소란 피우면 널 어두운 방 안에 한 달 동안 가둬놓을 줄 알아!”그의 차가운 말에 과일칼을 휘두르던 두나희는 몸을 흠칫 떨더니 처량한 눈동자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곧이어 두나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나쁜 오빠! 못된 오빠! 내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날 괴롭혀? 오빠 미워! 앞으로 다시는 오빠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흑흑흑!”말하면 말할수록 억울하고 자신이 가련하게 느껴졌다.두나희는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