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웅은 사람을 죽이고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리를 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중얼거렸다.“곧 가성에 도착하니 저하를 만날 수 있겠네.”암부에는 세 미치광이가 있었는데 다 오너 9급 이상의 경지였다.호존은 용맹하고 백곰은 살인에 중독되어 있고 늑대는 계략에 능했다.이 사람들이 바로 화진에서 이름난 암부의 3대 지휘사였다....한시간 뒤.용인 빌리지 앞에 한 택시가 멈춰 섰다.거기에 차를 대고 있던 랜드로버 차량 행렬이 너무 이목을 끌었기에 원성일은 일단 차를 빼고 용인 빌리지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하여 지금 용인 빌리지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안개만이 빌리지를 맴돌고 있었다.택시가 멈춰서고 동글동글한 몸집의 남자가 깔끔한 서생 한 명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바로 암부의 백곰과 늑대였다.“늑대야, 저하가 정말 여기 있는 거 맞아?”차에서 내린 정태웅은 흥분하며 눈앞에 보이는 용인 빌리지를 올려다봤다.“그럼 이 뚱땡이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저하를 뵐 수 있게 된 거야?”정태웅의 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그래.”“어머나.”“드디어 저하를 만나게 되었어. 아아아! 저하 혹시 살이 빠지거나 초췌해지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오래 못 봤는데 우리가 보고 싶지는 않았을까?”정태웅은 이렇게 말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코까지 훌쩍였다.울면서 콧물까지 흘리는 정태웅을 보며 천현수는 그의 튼실한 엉덩이를 걷어찼다.“멍청아, 그만 울어.”“가자, 저하 뵈러.”천현수는 이렇게 말하더니 용인 빌리지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던 정태웅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얼른 그 뒤를 따랐다.용인 빌리지.암부의 백곰과 늑대가 도착했을 때 윤구주는 원성일, 박창용, 그리고 주세호와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이때 윤구주의 눈동자가 반짝 빛나더니 바깥쪽을 내다봤다. 익숙한 두 개의 기운이 순간 윤구주의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밖을 내다봤다.“왔네.”“저하, 누가 왔다는 거예요
잠깐 사이에 정태웅은 먼저 산 정상에 도착했다.그가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절세의 그림자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윤구주였다.윤구주 뒤로는 창용 부대의 박창용과 천하회의 원성일, 그리고 강성 갑부 주세호도 있었다.윤구주를 발견한 정태웅이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저하!”“정말 저하 맞아요?”“이 뚱땡이가 드디어 저하를 뵙습니다.”털썩.정태웅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뒤에서 빠른 속도로 따라오던 늑대 천현수도 윤구주를 보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무릎을 꿇었다.“천현수, 저하를 뵙습니다.”윤구주는 환한 미소로 옛 친우들을 맞이했고 그들이 무릎을 꿇는 걸 보고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부축했다.“일어나. 형제끼리 무슨 인사치레야.”정태웅은 바닥에 꿇어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윤구주의 다리를 끌어안더니 아들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저하,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그거 아세요? 반년 전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뚱땡이 그만 울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존경하고 숭배하던 왕이 10국의 왜놈들에게 당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근데 그 모든 게 가짜였죠.”“10국의 졸병들이 어찌 천하무적의 저하를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정태웅은 이렇게 구시렁거리더니 윤구주의 다리를 끌어안고 계속 울기만 했다.이 광경에 박창용 등은 폭소하기 시작했다.“태웅아, 콧물을 저하의 옷에 묻히면 어떡하니. 우리 저하는 화진의 제일 인왕이야. 한 개 군으로 10국의 전사와 대적했고 그 결과 10국의 전사들이 무기를 버린 채 땅을 내어주며 화해를 빌었지. 근데 무슨 수로 우리 저하를 무찔러?”박창용이 패기 넘치게 말했다.“어?”“사령관님, 사령관님이 왜 여기 계세요?”정태웅은 박창용의 목소리에 빨개진 눈으로 올려다봤다.“하하하하! 저하의 결혼식인데 안 올 수가 있나.”박창용이 박장대소했다.“네?”“저하께서 결혼하신다고요?”정태웅이 듣더니 넋
결국 천현수가 뒤에서 정태웅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뚱땡아, 그만 질척거려. 어렵게 저하를 만났는데 좀 진지해질 순 없니?”엉덩이를 맞은 정태웅은 그제야 아픈 곳을 주무르며 윤구주의 다리를 놓아주었다.“난 그냥 저하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야.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굴어?”“하하하하.”이 말에 사람들이 다시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암부의 3대 지휘사가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다.암부는 윤구주가 직접 창설했고 윤구주의 친위군이었다.민규현, 정태웅, 천현수는 윤구주가 직접 선발한 사람들이었고 끝내는 지금의 3대 지휘사가 되었다.그들을 윤구주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또한 윤구주가 제일 믿는 친우기도 했다.지금 그들과 한곳에 모였으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그 속에서 정태웅의 활약이 제일 돋보였고 기분도 제일 좋아 보였다.잔혹하고 살인에 중독되어 있었지만 윤구주에게만큼은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의 말에 따르면 윤구주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그는 윤구주가 살았던 구주전에서 지내며 단식으로 구주왕을 기렸다고 했다.“뚱땡아, 정말 저하를 위해 제사를 지내온 거야?”옆에 있던 박창용이 농담조로 물었다.“당연하죠.”“저하는 제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고 평생 존경하는 분이지요. 그런 분을 기리는 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정태웅이 이렇게 답했다.하하하!박창용이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뚱땡이가 말이 많고 사고도 잘 치지만 저하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죽도록 슬퍼했어요.”늑대 천현수가 이렇게 말했다.“보세요. 늑대도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헛소리 한 거 아니죠?”“저하, 저의 이런 충성심을 봐서라도 다리를 좀만 더 안게 해주면 안 될까요?”정태웅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봤다.하지만 돌아온 건 윤구주의 차가운 한마디였다.“저리가.”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다.사람들이 웃고 나니 정태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저하, 10국과의 전쟁은 어떻게 된 일이에요? 분명
진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저 여자라고? 저 여자는 저하의 약혼녀잖아!”정태웅이 첫 번째로 소리를 질렀다.늑대 천현수와 천하회의 원성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당시 윤구주와 문아름의 결혼 소식은 화진 전체가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비록 그 결혼식은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문아름이 윤구주의 약혼녀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렇기에 독을 써서 윤구주를 해친 사람이 문아름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들 깜짝 놀랐다.“내 약혼녀기 때문에 내가 경계하지 않은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누가 감히 날 독으로 해칠 수 있겠어?”윤구주가 매섭게 말했다.그 말에 사람들은 깨달은 얼굴을 했다.윤구주의 말대로 그의 실력이라면 독으로 그를 해친다는 건 말도 안 됐다.문아름이 윤구주의 약혼녀이기 때문에 방심해서 기린화독에 당했을 것이다.“빌어먹을!”“정말 못된 여자군요!”“정말 지독해요!”“저하를 해친 사람이 그 악독한 여자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정태웅은 펄쩍 뛸뻔했다.“그 지독한 여자가 자꾸 우리 암부를 견제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심지어 군부대 전체를, 저하를 따랐던 장군들을 전부 비밀리에 죽였어요.”“그 여자가 저하를 해쳤었군요!”천현수도 주먹을 꽉 쥐고 강하게 말했다.“정태웅, 천현수, 왜 비밀리에 서울로 와서 저하를 뵙게 된 건지 알겠지?”박창용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정태웅과 천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원성일, 자네도 이젠 내가 왜 저하가 살아있다는 걸 소문내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지?”박창용이 다시금 천하회의 원성일을 바라보며 말했다.원성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저하, 이제 그 지독한 여자가 저하를 해쳤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지금 당장 병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그 지독한 여자를 죽입시다!”정태웅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그가 말하자마자 천현수가 맞장구를 쳤다.“정태웅 말이 맞습니다!”“저하, 저하께서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저
“그리고 난 사실 이 모든 걸 개의치 않아. 내가 신경 쓰는 건 내가 복수를 하게 되면 10국이 혼란을 틈타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거야. 나랑 같이 오랫동안 싸워왔으니 다들 알겠지. 10국의 야심을 말이야! 만약 전쟁이 시작된다면 피해를 보는 건 무고한 백성들이야. 내가 과연 본인의 이익을 위해 화진 백성들의 생사를 무시할 수 있을까?”그 말에 사람들은 침묵했다.그의 말이 맞았다.윤구주는 복수를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그가 복수를 하게 되면 천하가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화진의 왕이었던 윤구주가, 백성들을 보살피던 그가 자신의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백성을 해칠 수가 있을까?“하지만 저하, 그러면 복수는... 어찌합니까?”정태웅이 가슴 아픈 얼굴로 말했다.윤구주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복수는 꼭 할 거니까.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야.”“저하...”정태웅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박창용이 갑자기 앞으로 나서면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정태웅, 닥쳐! 저하 말대로 해!”“저하께서는 화진의 왕이야. 저하께서 하는 모든 일은 화진의 백성을 위해서지. 그러니까 넌 알지 못하는 거야! 정태웅, 넌 그저 저하는 우리만의 왕이 아니라 화진 모든 백성의 왕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돼!”박창용의 말에 정태웅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그는 그렇게 많은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저하를 해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인다는 것뿐이다.그리고 죽인 뒤에는 시체까지 채찍질해야 분풀이가 될 것 같았다.윤구주가 진실을 얘기한 뒤 천현수, 원성일, 주세호까지 전부 침묵했다.그들은 묵묵히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들은 이제야 윤구주가 왜 화진의 왕이 될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고. 오늘 우리가 한곳에 모인 것만으로도 축하할 만한 일이니 말이야. 정태웅, 나랑 술 마시는 거 좋아하잖아? 사람 시켜서 술 좀 가져오라고 해. 오늘 거나하게 취해보자고!”윤구주가
정태우의 말에 주세호는 머쓱해졌다.소채은이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건 맞지만 명문가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주세호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소씨 일가는 강성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이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화진 전체를 놓고 보면 먼지 한 톨만도 못했다.그래서 주세호는 아주 머쓱했다.“왜 그래? 얼른 말해 봐. 그분 아주 예쁘시지?”정태웅이 작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그가 입을 떼자마자 옆에 있던 천현수가 그를 힘껏 걷어찼고 그 바람에 정태웅은 비틀거리면서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제기랄, 천현수, 난 왜 차는 거야?”천현수에게 차인 정태웅이 고개를 돌리며 욕했다.“멍청한 놈! 감히 저하의 약혼녀를 멋대로 품평하려 하다니, 당연히 처맞아야지!”천현수가 화를 내며 말했다.“하하하하! 잘했어, 천현수! 이 빌어먹을 돼지 새끼는 맞아야 해. 자기 입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멋대로 지껄이니 말이야!”옆에 있던 박창용이 동의했다.정태웅도 자신이 조금 전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건지 차인 곳을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난 저하가 걱정돼서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그만해. 궁금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알려주지!”윤구주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내 여자는 소채은이라고 해. 소씨 가문은 왕실 친척도 아니고 명문가도 아니야. 그저 강성시의 아주 평범한 가정이지!”“평범하다고요?”정태웅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과거 구주왕은 천하의 모든 여자를 홀렸었다.10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들 나라의 많은 황실 공주가 윤구주의 선택을 받기 위해 화진으로 왔다. 그런데 윤구주가 갑자기 자신과 결혼할 여자가 강성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라고 하자 정태웅은 믿을 수가 없었다.“맞아! 채은이 집안은 아주 평범한 가정이야. 심지어 솔직히 얘기해서 지금까지도 채은이 집에서 우리가 만나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세상에!그 말에 정태웅은 펄쩍 뛰었다.“장난이시죠? 화진의 그 어떤 사람이 감히 자
고개를 들자 윤구주의 마음속으로 소채은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윤구주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10개국 간의 전쟁이 끝난 뒤 난 화독 때문에 죽음의 바다에 빠졌었어.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수련한 구양진용결 호신 공법 덕분에 깊은 바다에 빠져도 죽지는 않았어. 그리고 내가 바다에 빠져 실신했을 때 채은이가 바닷속에서 날 봤었어.”그녀에 관한 기억을 윤구주는 조금씩 얘기했다.그는 소채은이 자신을 구한 일, 그가 잠깐 기억을 잃었고 소채은이 그를 자동차 정비원으로 오해한 일, 소채은의 집안에서 돈 때문에 소채은을 억지로 중해그룹의 조성훈과 결혼시키려고 한 일, 소채은이 윤구주를 지키기 위해 집안에서 쫓겨난 일 등등을 얘기했다. 사소한 것까지 전부 말이다.지난 과거에는 웃음과 눈물이 있었지만 더욱 많은 건 사랑이었다.정태웅 등 사람들은 윤구주와 소채은의 만남과 오해, 그들의 사소한 일을 듣고 그것에 푹 빠졌다.특히 정태웅은 소채은이 사랑을 위해서 집안과 연을 끊으면서까지 윤구주를 지키려고 한 걸 알았을 때, 다시금 눈시울을 붉혔다.“정말 훌륭하신 분이군요! 전 비록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은 제 마음속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에요!”옆에 있던 박창용 또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맞아요.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서 자격이 충분하죠.”그들 중 주세호가 윤구주와 소채은의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이때, 윤구주와 소채은의 사랑 이야기를 들은 주세호는 흐뭇하기도 하고 개탄스럽기도 했다.윤구주가 평생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났다는 것이 흐뭇했고, 자기 딸에게는 그런 복이 없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웠다.“나 윤구주는 평생을 종횡무진하며 무적으로 살았어. 그러나 소채은은 그 사실을 전혀 몰라.”윤구주는 갑자기 감탄했다.“소채은의 눈에 난 그저 윤구주일 뿐이야. 기억을 잃은, 심지어 직장도 없는 바보일 뿐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소채은은 여전히 날 사랑하고 날 지켜주려 해. 이런 바보 같은 여자를 내가
5일 뒤면 윤구주와 소채은의 결혼식이다.소씨 집안 대문 앞.민규현은 암부 부하들을 데리고 바짝 경계하며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정태웅과 천현수가 강성에 도착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그는 자기 형제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정태웅의 뻔뻔함과 천현수의 침착함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저하를 뵀을 때 얼마나 흥분할지 생각해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정태웅 아마 또 울고 있겠지?”정태웅을 떠올린 민규현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소씨 저택 정원 안.소채은과 윤구주의 결혼식 날짜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소씨 집안 사람들은 바빠졌다.첫 번째는 소청하였다.그는 모든 친척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심지어 예전에 연락하지 않던 낯선 친척들에게도 전부 알렸다.이 때문에 천희수는 소청하와 싸우기까지 했다.천희수는 연락하지 않던 친척들에게는 왜 알렸냐고 면박을 줬고, 소청하는 우리 딸이 결혼하는 데 당연히 알려야지, 왜 알리지 말아야 하냐는 입장이었다.천희수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데다가 직장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데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말이다.소청하는 천희수의 말을 듣더니 그녀를 욕했다. 식견이 짧은 당신이 뭘 아냐, 윤구주의 험담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말이다.천희수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소청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윤구주를 감싸고 도는지 말이다.심지어 그는 윤구주가 기억을 잃은 것도, 직장이 없는 것도 못마땅해하지 않았다.답답한 천희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소청하가 모든 친척에게 다 연락을 돌리는 걸 지켜만 봤다.심지어 아주 오래전에 해외로 갔던, 염치없는 친척 누나에게까지 연락했다.그 친척 누나는 소지영이었다.과거 그녀는 소청하와 큰아버지 집안의 재산을 빼앗으려 들었고, 그의 친아버지를 산 채로 굶겨 죽여놓고는 훌쩍 해외로 떠나서 살았다.요 몇 년 동안 해외에서 꽤 잘 지낸다고 들었다.10년 동안 연락이 없었던 그들은 이번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