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20시, 소채은은 천희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원피스를 입은 소채은은 옅은 붉은색 코트를 걸치고 흰색 운동화를 신고 청순하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소채은이 외출하려는 듯 하자 대문을 지키던 민규현은 재빨리 달려왔다.“형수님, 늦음 밤에 어딜 가려는지요?”소채은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어머니를 모시고 기차역에 가서 친척 마중을 하려고요.”“하지만 너무 늦어서 이렇게 외출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민규현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는 윤구주의 명을 받아 그녀의 안전을 지켜야 하니 불안하기 마련이었다.“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8시인데요. 게다가 기차역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으니 괜찮습니다.”소채은의 말을 듣자 민규현은 고민에 빠졌다. 어두컴컴한 길거리를 살피더니 마침내 민규현은 입을 열었다.“형수님이 굳이 마중 나가시겠다면 제가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시죠.”“네? 함께요?”천희수가 말했다.“네!”민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자 천희수는 어이가 없어 소채은을 바라보았다. 소채은도 민규현이 윤구주의 명을 받아 선의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엄마, 그럼 함께 가요.”천희수는 뭔가 찜찜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렇게 민규현은 두 사람과 함께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8명의 암부 부하를 데리고 밴에 탑승했다. 소채은와 천희수는 미니 쿠퍼에 타고 민규현은 8명의 암부 부하를 데리고 밴에 탑승했다.민규현의 차는 소채은 차 뒤에 있었고 앞뒤로 강성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채은아, 하루 종일 우리 집 앞에만 있는 저 덩치 큰 놈은 대체 누구야?”천희수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엄마, 저 사람들은 윤구주의 친구들이에요.”소채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친구? 분명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친구가 이렇게 많아? 게다가 저 사람은 분명 높은 직위에 있는 군부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때 소룡이가 그랬잖아. 자기 상사라고. 기억을 잃은 구주에게 이
민규현은 직접 소채은의 안전을 지키기로 했다. 소채은과 천희수는 대낮에 위험할 것이 뭐가 있냐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민규현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기차역 출구에서 대략 10여 분을 기다린 후 KTX 한 대가 도착했다. 안내방송으로 도착 소식을 들은 천희수는 격동되는 어조로 말했다.“왔네! 채은아, 고모할머니를 본지 오래되지 않았어? 그거 알아? 어릴 때 고모할머니가 너를 엄청나게 이뻐해 주셨어. 너를 시골에 자주 데려가 미꾸라지도 잡고 그랬었는데...”천희수는 소채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그러자 소채은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럼요. 기억하죠. 고모할머니 집에 연못도 있었잖아요. 제가 어렸을 때 한 번 떨어진 기억도 있는데. 고모할머니가 저를 구해주셨어요.”“하하. 기억하는구나!”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승객들은 캐리어를 끌고 출구에서 계속 나오고 있었다. 소채은과 천희수는 까치발을 하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출구에서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모할머니를 찾고 있었다.이순자는 이미 70여 세의 고령이었다. 일 년 내내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피부는 거칠고 까무잡잡했다. 곁에는 6~ 7세의 어린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는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것처럼 지저분했지만 눈은 맑고 또렷했다.“채은아, 고모할머니 나오신다!”천희수는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후 소채은에게 말했다. 소채은도 얼른 반갑게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고모할머니!”출구에서 나오던 고모할머니는 소채은의 목소리를 듣자 활짝 웃었다.“아이고. 우리 채은아!”이순자는 사투리로 반갑게 소채은을 부르고 여자아이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소채은도 얼른 가서 마중하며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순자를 꼭 껴안고 기뻐하며 말했다.“고모할머니, 드디어 오셨군요! 거의 10년 동안 고모할머니를 보지 못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그래, 그래. 나도 우리 채은이가 엄청 그리웠어.”고모할머니는 너무 기쁜
꾀죄죄한 소녀가 자신에게 갑자기 돈봉투를 건네는 것을 보자 소채은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소채은은 소라를 덥석 껴안고 그녀의 통통한 볼에 뽀뽀했다.“아이, 착해라! 너무 고맙지만 이모는 소라의 돈은 받을 수 없어.”그러자 소라가 말했다.“하지만 할머니가 그랬어요. 이모가 이걸 꼭 받아야 한다고. 이모 결혼식이니깐요.”소채은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순자는 봉투를 다시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채은아, 얼른 넣어 둬. 할매가 비록 돈은 별로 없지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소채은은 손에 든 봉투를 보며 마음이 울컥했다. 그녀는 소라를 안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이모가 감사히 받을게. 고마워, 소라야! 소라가 놀라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이모한테 말해. 아니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이모랑 함께 놀고먹고 신나게 즐겨보자!”그러자 소라는 쭈뼛쭈뼛하며 말했다.“저... 저는... 자동차를 타고 싶어요. 하늘로 막 올라가는 그런 자동차요...”응?“롤러코스터?”소채은이 웃으면서 말했다.“맞아, 롤러코스터. 소라가 TV에서 롤러코스터를 보고 나서부터 타고 싶다고 난리야. 그래서 대도시 구경도 시킬 겸 데리고 왔지 뭐야.”이순자는 웃으면서 말했다.소채은은 이순자의 말을 듣자 소라의 볼을 꼬집으며 사랑스럽게 바라봤다.“그럼 이모랑 내일 롤러코스터 타러 가자! 이모가 하루 종일 함께 놀아줄게.”“고마워요. 이모.”소라는 퐁퐁 뛰며 좋아했다.옆에 서있던 민규현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집생각이 났는지 마음이 울컥했다. 그들은 출구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차를 타고 떠날 준비를 했다.주차장에 도착해서 이순자와 소라는 소채은의 차에 탑승했다.그리고 민규현과 암부 부원들은 밴에 탑승했다.집으로 가는 길 내내 소채은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순자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날은 갈수록 어두워졌다.기차역을 나온 후, 그들은 오래된 상가가 가득한 거리를 지나야 했다. 이곳은 아직 재개발되지 않아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
“깜짝이야, 저거 뭐야?”차에 있던 천희수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소채은도 어리둥절해졌다.이렇게 괴이한 상황을 본 적이 없는 소채은은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피안개가 나타나자 8명의 암부 부원들은 일제히 소채은의 미니 쿠퍼를 보호했다.그러다 갑자기 사방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피안개 사이로 피범벅이 된 손발이 암부 부원들을 향해 튀어나왔다. 그리고 소채은의 차량마저도 공중에 붕 뜨면서 날아왔다.귀신같은 물체들이 공격해 오는 순간, 듬직하고 웅장한 그림자가 쿵 소리를 내며 소채은의 차 앞에 나타났다.민도살, 민규현이였다!그는 오른 주먹을 힘껏 휘두르며 말했다.“어디서 온 자식들이야? 감히 내 앞에서 제기랄이야.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그의 주먹은 천근도 넘는 물체를 쉽게 깨부술 수 있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자 길 양쪽의 유리까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쨍그랑!무적의 권법!민규현의 권법은 공기를 갈기갈기 찢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공격해 오는 괴이한 형태의 손발들도 모두 산산조각 냈다.“하하! 역시 암부의 민도살! 실력이 죽지 않았네.”피안개 속에서 갑자기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얼굴까지 검은 두루마기를 쓰고 있어 도저히 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만큼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민규현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남자를 노려보며 엄하게 말했다.“누구야? 이 새끼가 내 이름까지 아네.”“서울 암부 3대 지휘사, 대가 9급 경지의 광인 민도살, 내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그 남자는 차갑게 대답했다. 자기의 정체를 알고서도 날뛰는 그 남자를 보고 민규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가 누군지 알면서 이 난리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그래! 대가 9급 경지의 민 지휘사님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내 몸의 상처를 볼 때마다 너를 잊을 수가 없어. 아직도 아프거든. 꼭 너를 찾아 복수해달라고 나한테 말하는 것처럼
군형 삼마의 실력은 당연히 허풍이 아니었다. 이 세 사람은 어릴 때부터 군형의 술법과 요술을 수련했다. 그리고 모두 귀선 경지에까지 이른 최강의 인물들이다.심지어 첫째 방지형은 수년 전에 최고 경지인 태허까지 이르렀다는 소문도 있었다.민규현이 돌진하는 순간 방지찬의 눈동자에는 초록빛이 스쳤다“오늘 내가 끝장을 내겠어!”방지찬은 두 손을 모아 주문을 외치자 순간 검은 부적들이 하늘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으로 부적을 가리키더니 부적들은 마치 화살처럼 민규형을 향해 날아갔다.휙휙휙!민규현은 소리를 지르며 내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짙은 자주색 빛이 그를 감싸면서 날아오는 부적들을 모두 깨뜨렸다. 그러자 방지찬은 맹호같이 몸을 날려 민규현을 공격하였다.그는 수법을 연마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민규현와 같은 대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는 몸을 빠르게 움직이더니 피안개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러자 민규현의 주먹은 그를 명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뒤에 있던 집 한 채를 부숴버렸다.두 사람이 싸울 때 8명의 암부 부원들은 고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차 안에 있는 소채은과 천희수 등인을 보호하고 있었다.차 안에는 소채은, 천희수 그리고 방금 강성에 도착한 이순자와 소라가 있었다. 이들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어 모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특히 천희수는 민규현이 주먹으로 집 한 채를 부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소채은에게 물었다.“채은아...이건... 무슨 상황이야?”소채은도 놀라긴 마찬가지이다. 그녀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소라는 오래전부터 겁에 질려 엉엉 울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지금까지 민규현과 방지찬은 서로 10번의 공격을 시도했다.“주화술! 민규현 이 자식식, 오늘 내 진짜 실력을 보여 주마!”방지찬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시 서울 전투에서 그는 민규현의 손에 죽을 뻔했다. 그래서 이 피맺힌 원한을 잊
그 포효소리에 땅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소리는 바람을 뚫고 성난 파도처럼 방치찬을 삼켰다. 방지찬이 호함공의 공격으로 무너지려는 순간 갑자기 캄캄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도깨비가 민규현을 향해 돌진했다.민규현도 등 뒤의 위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옆 구르기를 하더니 돌아서서 두 주먹으로 도깨비를 쾅쾅 내리쳤다.그러자 도깨비는 괴성을 지르며 10여 미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셋째, 내가 말했잖아. 대가 9급 경지인 민 지휘사님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민규현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을 차갑게 쳐다보았다.“네가 군형 삼마 첫째 방지형이야?”“하하! 대단하신 서울 암부 3대 지휘사님께서 내 이름을 알다니.”방지형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흥! 군형 삼마는 화진 수배록 중 9번째로 가는 악당이야! 내가 암부 지휘사로서 어찌 모를 수 있겠어?”민규현이 엄하게 말했다. 그러자 방지찬과 방지형은 껄껄 웃었다.“민규현, 패기는 여전하네! 하지만 너 혼자 우리 세 형제를 상대하기엔 턱도 없지? 안 그래?”방지형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시끄러워! 오늘 내가 어떻게 너희를 죽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암부 제일 광인인 민규현의 실력은 그야말로 실속 있는 대가 9급 경지이다. 그가 소리를 지르더니 뒤에 있던 호랑이는 3미터에서 5미터로 변했다. 민규현이 주먹을 휘두르자 호랑이에 거대한 기운이 실리면서 군형 삼마를 향해 돌진했다.방지형은 민규현의 공격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주문을 만들고 왼손으로 가슴을 치더니 순간 하얀 뼈칼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어떤 재료로 이 뼈칼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물체가 나타나자마자 전례 없이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방지형은 뼈칼을 손에 들고 살짝 흔들더니 순식간에 세 갈래 핏줄기가 공중에 나타나면서 민규현을 향해 달려갔다.그러자 민규현은 덤덤하게 피하지도 않고 손바닥을 펴고 내력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날아
큰 소리가 들리더니 피투성이 시체들이 민규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고 군형 삼마가 날린 부적들이 민규현의 눈 앞에서 하나둘 폭발했다.민규현이 기세를 온몸에 두르자 그의 주의로 둥그런 막이 생성되더니 곧이어 막이 붉은 피로 얼룩졌다.“어쩌지? 지휘사 님이 당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한 암부의 부하가 상황을 지켜보며 걱정을 내비쳤다.“빨리 가서 도와드리자.”암부의 부하들이 민규현을 도와주러 가려고 할때,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한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다가왔다.“누구야!”깜짝 놀란 여덟명의 부하들이 손에 들린 무기를 꽉 쥐며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군형 삼마의 셋째, 방지헌이 있었다.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검은 부적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검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자기 목숨도 잃게 생긴 마당에 민규현을 돕겠다고? 너희들 걱정이나 해.”그가 거북한 목소리로 말을 하더니 손을 들어 검은 병을 꺼냈다. 방지헌이 손가락으로 병을 짚자 병이 갑자기 폭파하더니 무수한 검은 벌떼들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날아들었다.이 벌은 보통벌과는 많이 달랐는데 크기가 컸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검붉은색의 살기를 두르고 있었다.이건, 혈고독벌이었다.군형은 고독으로 유명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군형에서 어떤 사람이 고독술을 연마하는 사람을 건드리자 다음 날 군형에 있던 2천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다.그 일은 널리펴져서 당시 강호를 들썩이게 했는데 지금 방지헌이 꺼낸 것이 바로 그 사람을 죽인 독벌이었던 것이다.“조심해!”부대장의 입에서 경고의 말이 터져나오자 부하들은 저마다 총을 꺼내들어 벌들을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다.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현장은 마치 전쟁터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벌이 워낙 많아서 이미 많이 죽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은 벌들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그때, 한 부하가 방심하는 사이 벌에게 목을 쏘였고 쏘인 곳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온몸에 혹시 부
말을 마친 방지헌이 몸을 날려 순식간에 소채은의 곁으로 왔다.“막아!”세명의 부하가 방지헌이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는 총을 쐈다.탕! 탕!총알이 두발 쏘아졌지만 방지헌의 몸을 맞추지는 못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손이 튀어나오며 한 부하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푹!부하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었다.나머지 두명의 부하는 동료가 죽은 걸 보더니 품에서 칼을 빼내며 소리쳤다.“소채은 씨, 어서 도망가세요! 저희가 막겠습니다.”말을 마친 두 사람이 방지헌을 향해 달려갔다.소채은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을 터뜨렸지만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어쩔수 없이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뒤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니 방금 싸우러 나갔던 두명의 부하가 순식간에 목이 잘린채 죽었다.방지헌이 기괴하게 웃으며 소채은 등을 쫓아갔다.“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방지헌이 살기를 내뿜으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흉악한 부적을 새긴 얼굴이 그녀들을 뚫어지게 주시했다.천희수는 두려움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오직 소채은 만이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며 소리쳤다.“너... 너 무슨 짓을 하려고!”“미안한데 한 거물께서 네 목숨을 원해서 말이야, 우리는 그냥 임무를 완수하는 것 뿐이라고.”방지헌의 말을 들은 소채은이 멍해졌다.그러나 그때, 예상밖에도 70살 넘은 고모할머니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개자식! 우리 채은이를 죽이려 든다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일거야!”노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절뚝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방지헌에게 달려들었다.그러나 방지헌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손을 들어 혈무를 노부인의 가슴에 쏘았다.소채은을 보호하려던 노부인은 그 자리에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했다.“고모할머니...”이순자가 눈앞에서 죽은 걸 본 소채은이 그녀에게로 달려갔고 방금 노부인을 죽인 방지헌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잡담은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