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궁의 가장 안쪽은 사적인 공간이었기에 인해민 같은 급이 아니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인해민은 안으로 들어온 뒤 세 할매 중 한 명인 홍할매를 보았다. 그녀는 굳게 닫힌 방문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아주머니, 궁주님은요?”인해민은 가까이 다가간 뒤 홍할매에게 물었다.“궁주님은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계셔!”제사를 지낸다는 말에 인해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서남에는 오래된 규칙이 하나 있었다.미망인은 매일 7, 8시쯤 죽은 남편, 죽은 아내의 제사를 지낸다.이런 풍습은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인해민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더니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아주머니, 저희 궁주께서는 아직도 구주왕을 잊지 못한 걸까요?”“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홍할매는 한숨을 쉬었다.“아주머니, 전 항상 궁금했어요. 그 구주왕이란 사람 대체 어떤 인물이었어요? 죽은 지 반년도 넘었는데 왜 우리 궁주께서는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매일 제사를 지내는 걸까요?”인해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그녀가 보기에 궁주처럼 엄청난 미녀는 세상 그 어떤 남자라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그런데 그녀는 왜 오직 윤구주만을 사랑하고 또 그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걸까?“넌 평생 모를 거야. 구주왕처럼 전설적인 인물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존재야.”홍할매가 말했다.“네?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게 강하다고요?”인해민은 깜짝 놀랐다.“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 그를 형용할 수 있는 건 아마 전설뿐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구주왕이 어떻게 화진의 천하방, 천방과 지방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겠어? 그리고 화진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왕이 바로 구주왕이야. 그는 10개국 간의 전쟁에서 홀로 군대를 이끌고 10국을 도살했어. 10국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물러났었다고.”그 말에 인해민은 넋이 나갔다.그녀는 비록 전설 속 구주왕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다들 구주왕의
“음? 윤씨 성을 가졌다고요? 홍할매, 혹시 구주왕의 성이 윤씨인가요?”인해민은 뒤늦게 반응하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윤씨가 왜?”홍할매가 물었다.“홍할매, 저희가 오늘 밤 초대한, 설씨 일가를 멸족시킨 그 잘생긴 오빠도 성이 윤씨예요!”인해민은 갑자기 떠올랐다.홍할매는 차갑게 웃었다.“너도 참, 바보 같구나. 화진에는 다양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또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도 많아. 윤씨 성을 가진 사람도 많겠지. 너 설마 네가 알게 된 그 무명의 남자가 과거 화진의 왕이었던 구주왕이라고 할 생각은 아니지?”홍할매의 말을 듣자 인해민은 서둘러 부정했다.“아뇨, 그 사람을 어떻게 과거 화진의 왕이었던 구주왕과 비교해요?”“그러면 됐어.”홍할매가 중얼거렸다.인해민은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한때 화진의 왕이었던 전설 속 인물은 이미 반년 전 죽었기 때문이다.그런 생각이 들자 인해민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터무니없는 생각을 떨치려 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렀고 인해민과 홍할매는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안에서는 그들의 궁주가 사랑했던 사람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그동안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8시가 다 돼서야 굳게 닫혔던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문이 열리자 홍할매가 입을 열었다.“궁주님께서 제사를 다 지내셨나 보네! 해민아, 이젠 들어가도 돼!”인해민은 시선을 들어 열린 방문을 바라보더니 짧게 말했다.“네!”그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커다란 방 안은 썰렁했다.인해민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앞에서 전해지는 향냄새를 맡았다.가까이 다가가 보니 백화궁의 궁주 연규비가 보였다.흰옷을 입은 그녀는 마치 선녀 같았다.그녀는 맨발인 채로 책상다리를 하고 위패 앞에 앉아있었다.그 위패는 화진의 왕 구주왕의 위패였다.그러나 그 위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궁주님!”인해민은 안으로 들어온 뒤 그녀를 불렀다.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연규비는 그녀의 말
백경재가 소리를 지르자, 윤구주도 백화궁 앞에 줄지어 선 긴 다리의 미녀들을 보았다.확실히 눈 정화가 되었고 아주 아름다웠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백화궁 앞에 서 있던 미녀들도 윤구주와 백경재를 보았다.“어머, 얘들아. 저기 봐. 저 노인 뒤에 서 있는 남자 정말 너무 멋진데?”긴 머리의 여자가 윤구주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흥분해서 말했다.“어머, 확실히 잘생겼어. 게다가 분위기도 좋아!”“설마 저 사람이 오늘 우리가 기다리던 잘생긴 오빠인 걸까?”미녀들이 재잘대며 말하고 있을 때 윤구주는 백경재를 데리고 백화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여러분.”백경재가 음흉한 얼굴로 눈앞의 200명쯤 되는 미녀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안타깝게도 그들은 백경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전부 윤구주만 쳐다보고 있었다. 백경재는 풀이 죽었다.“두 분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제일 앞에 서 있던 단발머리 미녀가 물었다.“궁주님을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거든요.”윤구주가 덤덤히 말했다.윤구주의 말을 들은 단발머리 미녀는 흥분해서 펄쩍 뛰었다..“설마 해민 언니가 말한 그 남자가 바로 당신인가요?”윤구주는 싱긋 웃었다.“세상에, 정말 당신이었군요! 정말 잘생기셨어요! 해민 언니가 한눈에 반한 이유가 있었네요!”단발머리 미녀는 윤구주를 힐끔 보았다. 마치 아주 귀한 보물을 보듯 말이다.뒤에 있던 미녀들도 전부 윤구주만 바라보고 있었다.“잘생겼어!”“진짜 잘생겼어!”“게다가 분위기도 있어. 정말 최곤데!”백화궁 여자들이 잘생긴 윤구주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을 때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백화궁 안쪽에서 들려왔다.“이 계집애들, 다 뭐 하는 거야?”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자들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고 안에서 걸어 나오는 잔혹한 나찰 인해민을 보았다.“해민 언니, 우리 잘생긴 오빠 환영하고 있었어요!”고개를 든 인해민은 윤구주가 문 앞에 서 있자 기쁜 얼굴로 달려갔다.“어머, 오빠. 벌써 도착했어요? 전 오빠가 절 속이고 오늘 오지
인해민에게 내쫓긴 뒤 200명쯤 되는 긴 다리의 여자들은 미련 가득한 얼굴로 나갔다.여자들이 전부 떠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인해민은 고개를 돌려 윤구주에게 말했다.“오빠, 미안해요. 못 볼 꼴을 보였네요.”윤구주는 손을 저었다.“괜찮아. 궁주는?”윤구주는 안으로 들어온 뒤 물었다.“궁주님은 지금 내전에 계세요.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지금 당장 궁주님께 얘기하러 갈게요!”인해민은 말을 마친 뒤 서둘러 안쪽으로 백화궁 궁주를 부르러 갔다.커다란 대전 안에는 윤구주와 백경재 두 사람만 남았다.“저하, 백화궁 으리으리한데요! 이것 좀 봐요! 궁전이 얼마나 커요! 밖에 있는 여자들도 다 연예인이나 모델 같아요!”백경재는 눈을 껌뻑이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윤구주는 그의 말에 대꾸해 주기 귀찮았다.그는 주위를 둘러본 뒤 중얼거렸다.“그녀를 만날 때도 되었지.”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곧장 인해민이 향했던 내전 방향으로 걸어갔다.“어? 저하, 어디 가십니까?”백경재는 윤구주가 갑자기 내전으로 들어가자 답답한 마음에 그를 불렀다.“난 상관하지 마. 백 선생은 여기 남아있어.”윤구주는 한마디 한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전 쪽으로 걸어갔다.백화궁 내전은 금지 구역이었다.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홍할매, 노할매, 남할매와 잔혹한 나찰 인해민을 제외하면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백화궁 여자들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그런데 윤구주가 정정당당하게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내전.안으로 들어간 윤구주는 옅은 향기를 맡았다.너무도 익숙한 향기였다.윤구주가 내전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차가운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누가 감히 백화궁 금지 구역에 멋대로 쳐들어온 것이지?”호통 소리와 함께 붉은 도포를 입은 홍할매가 광풍처럼 윤구주를 향해 달려들었다.연규비의 곁에는 그녀를 지키는 세 명의 할매가 있었다. 홍할매의 실력은 대가 5픔 이상이었다.그녀는 두 손을 움직이면서 윤구주를 할퀴려 했다.그녀의 손이
인해민이 그렇게 말하자 홍할매는 윤구주를 화가 난 눈빛으로 보았다.인해민은 홍할매에게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고개를 돌려 윤구주에게 말했다.“제가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왜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저희 궁주님 아직 안에 계신다고요!”“난 연규비를 만나는 걸 기다릴 필요가 없어.”윤구주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인해민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아무리 잘생기고 실력이 좋아도 이렇게 건방져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인해민이 말을 이어가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굳게 닫힌 방문 안쪽에서 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라고 해.”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백화궁의 궁주 연규비였다.그 목소리에 인해민은 그제야 윤구주를 바라보고 말했다.“가요. 궁주님이 들어오라고 하네요.”윤구주는 별말 없이 인해민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방 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맴돌았다.윤구주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방 중앙에 위패가 있는 걸 발견했다.그 위패는 그의 것이었다.그 위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구주왕을 기린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윤구주는 탄식했다.위패 앞에는 흰옷을 입은 여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녀는 윤구주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그래서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바로 백화궁의 궁주 연규비였다.“궁주님, 데려왔습니다.”인해민은 윤구주를 안으로 데려온 뒤 연규비에게 보고했다.“멋진 오빠, 얼른 궁주님께 인사해야죠!”인해민이 고개를 돌려 윤구주에게 말했다.윤구주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연규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규비야.”그 목소리에 위패 앞에 앉아 있던 백화궁의 궁주는 흠칫했다.잔혹한 나찰 인해민도 당황했다.“오빠... 미쳤어요? 어떻게 감히 우리 궁주님 이름을 부를 수가 있어요?”인해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릴 때 윤구주가 다시 한번 말했다.“규비야, 오랜만이다.”그의 말에 연규비는 다시 한번 흠칫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윤구주를
연규비가 윤구주를 끌어안고 울먹이면서 물었다.윤구주는 그녀를 살짝 안고 말했다.“난 계속 살아있었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이야.”“왜? 넌 죽지 않았는데 왜 화진 사람들은 다 네가 죽었다고 한 거야? 게다가 다들 네가 10개국 간의 전쟁 중에 죽었다고 했어.”연규비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이 일은 내가 다음에 얘기해줄게. 어쨌든 지금 나는 살아서 네 앞에 서 있어.”윤구주는 미소 지었다.연규비는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윤구주의 잘생긴 얼굴을 만졌다.그녀는 눈앞의 윤구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고 싶었다.윤구주의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또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나니 그제야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확신했다.“궁주님... 잘생긴 오빠... 설마 두 분 아는 사이세요?”이때 옆에서 넋을 놓고 있던 인해민이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내 평생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거야?”연규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뭐라고?’그 말에 인해민은 굳어버렸다.“됐어. 넌 일단 나가 봐. 난 구주와 할 얘기가 많아.”연규비가 인해민에게 말했다.인해민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윤구주를 바라보다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네.”그리고 밖으로 나갔다.인해민은 밖으로 나간 뒤에도 몸이 굳은 상태였다.그녀는 큰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방 안.연규비는 윤구주와 만난 뒤 무척 기뻤다.그녀는 윤구주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고, 평생 윤구주만 사랑했다.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라고 욕해도, 윤구주의 불륜녀라고 욕해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그녀가 신경 쓰는 건 윤구주 한 명뿐이었다.그래서 윤구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화진 곳곳에 퍼졌을 때야 그녀는 마음을 접고 폐관을 마음먹었다.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남자가 서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구주야... 이거 꿈 아니지? 정
“문아름이 왜 널 해친 거야? 어떻게 감히?”연규비는 큰 충격을 받았다.윤구주는 10개국 간의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얘기해줬다.문아름이 전쟁 전에 윤구주에게 기린화독을 썼다는 걸 얘기하자 연규비는 멍해졌다.“그 망할 여자... 어떻게 그렇게 지독할 수 있어? 감히 구주 너에게 독을 쓰다니. 그 여자는 네 약혼녀였잖아...”연규비는 믿기 어려웠다.윤구주가 말했다.“나도 지금까지 이해가 안 가. 하지만 언젠가는 전부 알게 되겠지.”“빌어먹을 문아름! 빌어먹을 문씨 일가! 그 사람들이 널 해치려 했다니!”연규비는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규비야, 그 일은 일단 그만 얘기하자. 난 언제가 그들에게 복수해서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일단은 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마.”윤구주가 말했다.“응, 알겠어. 그런데 네 예전의 부하들은? 네 병력은?”연규비가 물었다.“내가 가장 믿는 몇몇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아직 몰라.”윤구주가 덤덤히 말했다.“그렇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네가 살아있다는 걸 내게 알린 사람이 없었던 거였어.”연규비는 말한 뒤 눈물을 글썽이면서 윤구주의 위패를 바라봤다.윤구주는 웃었다.그는 연규비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연규비를 그저 여동생으로 여길 뿐이었다.“참,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 일로 갑자기 서남에 온 거야?”연규비가 궁금한 듯 물었다.윤구주가 대답했다.“죽여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죽여야 할 사람들?”연규비는 흠칫했다.“맞아.”거기까지 말한 뒤 윤구주는 온몸에서 차가운 살기를 내뿜었다.“넌 그동안 계속 서남에 있었잖아. 군형 삼마에 대해 들어봤겠지?”윤구주가 말했다.“당연하지! 사람 죽일 때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놈들이야.”연규비가 말했다.“그래. 내가 이번에 서남에 온 건 그 세 자식을 죽이기 위해서야. 그리고 군형 5대 가족도 죽일 거야.”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윤구주는 웃었다....윤구주와 연규비가 회포를 풀고 있을 때 잔혹한 나찰 인해민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입구에는 여자들이 한군데 몰려서 윤구주가 나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어쩔 수가 없었다.윤구주가 아주 잘생겨서 다들 그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이때 쓸쓸해 보이는 여자가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녀는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빛으로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어머!”“해민 언니 나왔어!”입구에 있던 여자들은 인해민이 나오는 걸 보자 그녀에게 달려갔다.오늘 밤 아주 기뻤던 인해민은 지금 얼떨떨한 상태였다.특히 머릿속이 복잡했다.“세상에,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오빠가 우리 궁주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게다가 우리 궁주님과 서로 끌어안고 있었어.”조금 전 장면을 떠올린 인해민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설마 둘이 연인일까? 그럴 리가 없는데! 궁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화진의 왕 구주왕이잖아. 게다가 사랑하는 구주왕을 기리기 위해 궁주님은 반년간 폐관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왜 그 오빠를 보자마자 마치 연인을 본 사람처럼 구는 거지?”인해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함을 느꼈다.이때 충격적인 생각이 들었다.“설마... 설마... 그 잘생긴 오빠가 궁주님이 사랑하는 과거 화진의 왕 구주왕인 건가?”쿵!그 생각에 인해민은 벼락을 맞은 듯 얼어붙었다.동시에 그녀는 홍할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윤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빠지면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말 말이다.성이 같았다.조금 전 인해민은 방 안에서 연규비가 그를 윤구주라고 부르는 걸 똑똑히 들었다.“세상에, 이제 알겠어! 그 오빠가 바로 화진의 왕 구주왕이었던 거야!”그제야 인해민은 모든 걸 깨달았다.인해민이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밖에 있던 여자들이 재잘대면서 그녀에게 달려왔다.“해민 언니, 왜 혼자 나왔어요? 그 잘생긴 오빠는요? 왜 같이 나오지 않은 거예요?”여자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헤헤, 축하해요, 언니! 잘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