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산의 안경언을 쫓은 뒤 윤구주는 계속해 전진했다.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윤구주는 고시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마치 그녀가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곧 윤구주는 고시연의 안내에 따라 호텔에 도착했다.고시연이 윤구주를 위해 예약한 것은 스위트룸이었다. 그 스위트룸은 아주 크고 안에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서남에서 유명한 소금물 온천도 있었다.윤구주는 안으로 들어간 뒤 방 안을 쓱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시연은 겁먹은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오늘 네가 한 일 모두 만족스러워. 이제 가서 물 받아.”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네? 뭐라고요?”고시연은 당황했다.“온천물에 몸담고 싶어. 물을 안 받으면 어떻게 온천에 몸을 담가?”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에게 온천물을 받아달라고 하다니.그녀는 무려 고씨 일가의 셋째 아가씨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하인이나 할 법한 일을 한단 말인가?하지만 윤구주가 자신의 목숨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떠올린 고시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물을 받으러 갔다.콸콸콸...곧 고시연은 욕조 안에 온천물을 가득 받았다.그리고 난 뒤 윤구주는 곧장 옷을 벗고 온천에 몸을 담을 준비를 했다.고시연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 옷을 벗자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서둘러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면서 속으로 욕했다.‘젠장, 젠장! 이 마귀, 감히 내 앞에서 옷을 벗어? 아아아아!’고시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자신의 체내에 금안화련 낙인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결국 참았다.윤구주는 고시연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마치 고시연이 공기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툭툭.윤구주가 옷을 벗고 있을 때, 눈을 가리고 있던 고시연은 윤구주의 옷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살짝 벌리면서 손 틈 사이로 윤구주를 몰래 힐끔댔다.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윤구주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고시연
윤구주의 말에 고시연은 너무 무안했다.당당한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인 고시연이 몰래 낯선 남자의 몸을 훔쳐보다니, 게다가 더욱 중요한 건 상대방에게 들켰다는 점이었다.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고시연이 뻘쭘해하고 있을 때 윤구주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뭘 넋 놓고 있어? 이리 와서 내 등이나 밀어.”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윤구주는 정말로 그녀를 종으로 여기는 듯했다.그녀에게 그의 등을 닦으라고 하다니.비록 무척 화가 났지만 그녀의 체내에는 금안화련 낙인이 있었고, 또 윤구주의 완벽한 몸매까지 떠올린 고시연은 결국 짧게 대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완벽한 남자를 위해 등을 밀어주는 것이니 손해 볼 것도 없었다.고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욕조 안, 윤구주는 상의를 탈의한 채 그 안에 누웠다.그의 등에는 눈에 띄는 용 머리가 그려져 있어 시각적인 충격이 컸다.고시연은 다가간 뒤 조심스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옆에 놓인 흰색 타월을 들고 마치 종처럼 윤구주의 등을 닦기 시작했다.윤구주는 편안하게 누워있었고 고시연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타월이 그의 피부를 조금씩 스쳤다. 고시연은 심장이 쿵쾅댔다.‘세상에!’그녀는 고씨 일가 셋째 아가씨로서 처음으로 낯선 남자의 등을 닦아줬다.심지어 화진의 4대 가문 출신인 그녀의 약혼자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렀다.윤구주는 그렇게 편안하게 누워있었고 그의 뒤에 있는 고시연은 열심히 윤구주의 등을 닦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줬다.고시연이 힘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늘 네가 종으로서 한 일에 난 아주 만족스러워.”윤구주의 어깨를 주물러주던 고시연은 그 말을 듣더니 말했다.“그러면 전 언제 풀어줄 거예요?”“이제 가 봐.”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뭐라고?’“절 풀어주겠다고요?”고시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맞아. 이제 가보도 돼. 하지만 나
고씨 일가에서도 그녀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윤구주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됐어. 이제 가봐.”윤구주는 욕조에서 나온 뒤 흰색 타월을 몸에 걸치면서 말했다.고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윤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네!”그렇게 그녀는 정말로 떠났다....남릉 고씨 일가는 수백 년 된 고대 무술 세가였다.서남의 다섯 개 도에서 고씨 일가의 세력은 군형 5대 가족보다 더 대단했다.그들은 서남 무도 연맹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재산도 서남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았다.고씨 일가의 어르신 고진용은 육신으로 신급 경지에 다다른 대단한 사람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적의 육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게다가 화진 무도 연맹 천방에서 7위였다.고씨 일가는 남릉에서 세력이 대단했고 발 한 번 구르면 서남의 다섯 개 도가 전부 흔들릴 정도였다.그뿐만 아니라 고씨 일가는 저력이 대단하고 인맥도 넓어서 다른 이들은 따라갈 수 없었다.이번에 고씨 일가 어르신의 80세 생신 때, 서남의 다섯 개 도의 모든 문파가, 심지어 옛 세대인 용호산의 천암도에서도 그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다.그런데 윤구주는 고씨 일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을 원한다고 했다.게다가 내일 열 시에 직접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널따란 고씨 일가의 장원은 남릉의 번화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수천 평에 달하는 고씨 일가의 장원은 기세가 웅장하고 아주 호화로웠다.고씨 일가 문 앞에는 두 개의 위엄 넘치는 사자 석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고씨 일가의 부하들이 가득했다.이때 고씨 일가의 웅장한 대전 안은 분위기가 삼엄했고 정중앙에 도포를 입은 도인이 서 있었다.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윤구주의 뒤를 밟았다가 그에게 죽을 뻔했던 용호산 천암사 출신의 안경언이었다.“안 대가님, 오늘 시연이를 만난 게 확실합니까? 시연이가 남릉으로 돌아왔다고요?”차가운 목소리가 정중앙 위쪽에 앉아 있는 건장한 중년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 남자는 분
고준형이 말을 끝맺자마자 내전 안에서 화려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왔다.“아빠, 큰일이에요! 조금 전에 고도 4대 문파 쪽에 연락해 봤는데... 4대 문파 사람들이 몰살당했대요! 게다가 시연이도 실종됐대요!”그 말에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급변했다.고준형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뭐라고? 고도 4대 문파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고? 확실해?”“확실해요!”화려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말했다.그는 고준형의 둘째 아들 고해식이었다. 고해식의 말에 고준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면 시연이는?”고해식이 말했다.“시연이는... 실종됐어요. 지금까지 전화를 받지 않아요.”“그럴 리가 없는데.”고준형은 그 말을 듣더니 넙데데한 얼굴 위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안 대가님, 조금 전에 오늘 은월 레스토랑에서 시연이를 봤다고 했죠? 그리고 낯선 젊은 남자랑 같이 있었다고 했었죠. 맞아요?”고준형은 서둘러 용호산 천암사 출신의 안경언에게 물었다.“맞습니다, 가주님.”“젠장,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고도 4대 문파 사람들이 다 죽은 거지? 게다가 시연이는 왜 갑자기 남릉에 돌아온 거지?”고준형의 안색이 한없이 흐려지자 안경언이 말했다.“고 가주님, 설마 이 모든 게 그 무시무시한 젊은이랑 관련이 있는 걸까요?”“시연이랑 같이 있었던 그 젊은이 말이에요?”“네! 오늘 은월 레스토랑에서 시연 아가씨는 그 젊은이 앞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어요.”안경언이 다시 한번 말했다.그 말에 고준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가 탁자를 쾅 내리치자 단단한 강향단으로 된 탁자가 부서졌다.“젠장! 서남에 감히 나 고준형의 딸을 위협하는 놈이 있다니. 해식아, 해진아. 지금 당장 사람들을 소집해서 시연이를 찾으러 가!”고준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다.“명심해. 그놈이 감히 너희 여동생의 털끝 하나 건드린다면 그놈의 피부를 벗겨버려. 알겠어?”고준형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고, 첫째 아들 고해진과 둘째 아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고시연은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기절했던 이유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린 지금은 별문제 없었다.“시연아!”“시연아!”옆에 있던 고준형과 고씨 일가의 두 형제는 고시연이 정신을 차리자 서둘러 걱정스럽게 그녀를 불렀다.고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뒤 도우미에게 물을 한 컵 달라고 해서 물을 마셨다.그녀의 상태가 조금 호전된 것 같자 고준형은 그제야 걱정스레 물었다.“시연아, 괜찮니?”“괜찮아요.”고시연이 말했다.“아빠한테 얘기해 봐. 대체 고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듣기론 고도 4대 문파 사람들이 전부 죽임당했다면서?”고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그 말에 고준형은 곧바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대체 어떤 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감히 우리 무도 연맹의 사람을 죽인 거야?”고시연은 윤구주라고 바로 말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 일은 제 탓이에요... 제가 먼저 그 사람을 건드려서는 안 됐어요.”“누군데?”그녀의 말에 고준형은 흠칫했다.“전 그의 성만 알아요. 이름은 몰라요.”고시연은 윤구주를 떠올리면서 중얼댔다.“성이 윤씨라고? 설마 안경언 씨가 말했던 그 젊은이니?”고준형이 계속해 물었다.고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설명했다.“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네. 감히 우리 서남에서 그런 짓을 벌여? 심지어 내 딸까지 위협해?”분노에 찬 고준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맞아요. 그 자식 죽고 싶어서 그러는 게 틀림없어요. 아버지, 명령만 내리시면 저랑 둘째가 지금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그 자식을 찾아가서 갈기갈기 찢어 죽일게요!”옆에 있던 고해진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다들 윤구주를 찾으려고 할 때 고시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빠, 오빠, 그 사람을 찾아갈 필요 없어요.”“왜?”고해진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입을 뗀 고시연을 바라봤다.“그 사람이 내일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했
고준형은 의아한 얼굴로 자기 딸을 바라보았다.고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것 보세요.”그 말에 고준형과 고씨 일가 형제들은 고시연의 미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미간에 금빛 연꽃 낙인이 있었다. 그 낙인은 마치 불꽃 같아 보였는데 보일 듯 말 듯했다.“이게 뭐야?”화련 낙인을 본 고준형은 당황스러웠다.고시연의 입가에 비참한 미소가 걸렸다.“이건 그 사람이 제 몸에 남긴 생사 주술이에요.”“뭐? 생사 주술?”“네, 이제 그 사람 손에 제 목숨이 달려 있어요. 제가 살 건지, 죽을 건지는 그 사람 뜻에 달려 있죠.”고시연의 말을 들은 고준형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빌어먹을 놈! 감히 나 고준형의 딸을 위협해? 내가 그놈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옆에 있던 고씨 일가 형제들도 화를 내며 말했다.“맞아요. 정말 건방지고 악랄한 놈이네요. 감히 시연이를 협박하다뇨?”“시연아, 그 빌어먹을 자식 지금 어디 있니? 내가 지금 당장 널 위해 복수해 주마!”고준형은 화를 내며 말했다.고씨 일가의 현임 가주 고준형은 대가 8품 이상이었고, 육신을 단련한 무인이었다.대가 8품 이상이면 9품 태허 경지 법사를 상대할 수 있었다.고씨 일가 사람들이 화를 내는 건 서남 무도 연맹 전체가 화를 내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씨 일가가 서남 무도계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누군가 고씨 일가에서 가장 아끼는 셋째 아가씨의 몸에 생사 주술을 걸었다고 하니 고준형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따.“아빠, 아빠는 그 사람 상대가 안 돼요... 심지어 우리 서남 무도 연맹 전체가 그 사람 상대가 안 돼요. 유일하게 그 사람 사대가 될 수 있는 건 아마... 할아버지뿐일 거예요!”고시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시연이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고해식이 제일 처음 입을 열었다.“시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는 대가 8품이야.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맞
용호산 천암사의 대사가 도착한 뒤 고준형이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홍진후 정도 항렬이면 고씨 일가 어르신과 엇비슷했다.고진용의 팔순 잔치만 아니었어도 그가 직접 산에서 내려왔을 리는 없었다.“안녕하세요, 대사님. 대사님께서 직접 저희를 찾아주신 건 저희 고씨 일가의 영광입니다!”고준형은 나온 뒤 곧바로 정중하게 홍진후를 향해 예를 갖췄다.홍진후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고 가주, 그럴 필요는 없어.”“아닙니다. 저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죠.”고준형이 정중하게 말했다.“천암사와 고씨 일가는 백 년 가까이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있지. 이번에 갑자기 날 초대하시다니, 무슨 일이야?”홍진후가 물었다.“홍 대사님, 홍 대사님께서 제 딸을 구해주셨으면 합니다!”고준형이 말했다.“뭐? 고시연 말이야?”홍진후는 의아한 듯 말했다.홍진후가 산에서 내려온 적은 아주 드물었지만, 그는 고시연에 대해 알고 있었다.그리고 고시연이 고씨 일가 어르신이 가장 아끼는 손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게다가 고시연의 약혼자는 화진 4대 가문 중 하나인 남궁 세가 출신이었다.그러니 누구라도 고씨 일가의 체면을 고려해야 했다.“네, 시연이 맞습니다.”고준형이 한숨을 쉬었다.“고시연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내게 도움을 청하시는 거지?”홍진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시연은 고씨 일가에서 애지중지 여기기로 유명한데, 어쩌다가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처지가 된 걸까?“대사님, 제 딸이... 제 딸이 생사 주술에 걸렸습니다.”‘응?’그 말을 들은 순간 용호산의 홍진후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생사 주술이라고?”“네! 그게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감히 대사님께 여기까지 와달라고 했겠습니까?”고준형은 탄식하면서 말했다.“그렇다면 얼른 들어가서 확인해 보지.”홍진후가 말했다.“대사님, 안쪽으로 드시죠.”고준형은 곧바로 용호산의 홍진후를 데리고 고씨 일가 안마당으로 걸어갔다.고씨 일가 안마당.그곳에는 고씨 일가 무인들이 많았다.태극문
“그러면 내가 한 번 봐도 되겠니?”홍진후가 물었다.고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대사님, 여기 보세요.”홍진후는 고시연의 미간을 살펴봤다.고시연의 미간에 화염 연꽃 낙인이 보일 듯 말 듯한 걸 발견한 용호산의 홍진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아주 포악한 술법이군.”“대사님, 이 생사 주술을 풀 수 있습니까?”고준형이 서둘러 물었다.홍진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동공에서 천둥과 번개가 미친 듯이 유영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벋어 고시연의 미간을 눌렀다.그 순간, 자색의 천둥 번개가 그의 손끝에서 고시연의 미간으로 흘러 들어갔다.그것은 용호산 천암사의 가장 강한 뇌법이었다.그 뇌법이 고시연의 미간으로 흘러드는 순간, 고시연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미간을 살펴보니 화염 연꽃 낙인은 공격을 받은 것처럼 천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건곤감리, 뇌정오역!”황진후는 한 손으로 수인을 맺었고 원형의 뇌법 낙인이 순식간에 고시연의 미간으로 쏘아졌다.그 뇌법이 출현하는 순간, 마치 뇌전을 온몸에 두른 것처럼 번개가 치지직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온몸을 유영했다.그 뇌전들은 서로 뒤엉켜서 고시연의 미간으로 흘러 들어갔다.마치 윤구주가 시전한 화련금안술을 제압하려는 듯 말이다.용호산의 홍진후가 고시연을 위해 생사 주술을 풀려고 할 때, 남릉의 금빛 찬란한 스위트룸 안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윤구주는 갑자기 뭔가를 감지하고 두 눈에 빛을 번뜩였다.“흥! 감히 내 화련금안술을 풀려고? 할 수 있겠어?”윤구주는 차갑게 말하더니 수인을 맺은 뒤 하늘을 가리켰다. 순간 빛 한 줄기가 별똥별처럼 고씨 일가로 날아갔다.고씨 일가 쪽.용호산의 홍진후는 뇌법을 통해 고시연의 화련금안술을 풀려 했는데 그 순간 빛 한 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고시연의 체내로 들어갔다.그 빛줄기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고시연은 처참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곧 그녀의 미간에서 뇌법에 제압당했던 호련금안 낙인이 갑자기 반짝였고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