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영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았다.그러다 은설아 옆에서 같이 웃으며 나오는 소채은과 윤구주를 보고는 머리가 멍해졌다.“정말 소채은이잖아? 아니 쟤가 왜 저기 있어?!”주세영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와, 저 언니 진짜 대박인데? 은설아랑 친분도 있고 같이 밥도 먹어? 미쳤다 진짜.”천해윤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녀에게 은설아란 단순히 연예인이 아닌 신과 같은 존재였다.그런데 오늘 본 사촌 언니가 그런 존재와 함께 웃으며 밥까지 먹었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큰일이네... 엄마!”천혜윤은 갑자기 주세영을 불렀다.“왜? 또 뭔데?”“저 언니가 은설아랑 함께 밥까지 먹은 걸 보면 오늘 우리한테 준 그 영지버섯 정말 귀한 게 맞나 본데요...?”그 말에 주세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천해윤의 말대로 연예인과 겸상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히 평범한 신분은 아닌 게 분명했다.몇십억이 넘는 영지버섯이 고작 강아지 뱃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떠오르자 주세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뺨을 몇 대 후려치며 탄식했다.“다 나 때문이야. 내가 멍청했어. 그걸 바닥에 버리지만 않았어도 강아지 뱃속에 들어갈 일은 없었을 건데, 아이고!!”천해윤도 속상하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사실 방금까지만 해도 소채은이 가지고 온 영지버섯이 가짜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은설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그 영지버섯은 높은 확률로 진짜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미향각에서 나온 윤구주는 은설아에게 물었다.“은설아 씨, 혹시 지금 묵고 계시는 곳이 어딘지 여쭤봐도 될까요?”“호텔에 있어요.”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윤구주는 은설아가 혼자 묵고 있다는 것을 듣더니 잘됐다는 얼굴로 제안했다.“그러면 저희와 함께 백화궁에서 지내는 건 어떨까요?”오늘 그런 일을 겪었는데 트라우마가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윤구주는 처음부터 이대로 손을 털 생각이 없었다. 천음 엔터 사장을 죽였으니 남
백화궁.은설아가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에 백화궁의 미녀들은 하나둘 입구로 나와 구경했다. 그중에는 연규비도 있었다.백화궁이 서남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명 연예인을 보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윤구주 일행이 차에서 내리자 입구 쪽에 있던 사람들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발을 동동 굴렀다.“어떡해. 정말 은설아잖아!”“‘세기말의 사랑’의 여자주인공 맞지?”“그래. 그 은설아!”“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날이 오다니. 그런데 어떻게 은설아는 화면보다 실물이 더 예뻐?”이 말을 하는 그들도 쭉 뻗은 다리에 하나같이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절세미녀라 불리는 연예인 앞에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연규비도 은설아를 보고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은설아 씨, 이따 사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함께 사진 찍어주시면 안 돼요?”“팬이에요!”곧 있으면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올 듯한 그들을 보며 연규비는 못 말리다며 고개를 저었다.“이제 그만해. 이곳까지 찾아와 주신 손님한테 이게 무슨 무례야. 너희들 때문에 더 피곤하시겠다.”“어머, 그러면 안 되죠! 궁주님 말대로 이곳의 손님인데 저희가 편히 모셔야죠!”그때 윤구주가 은설아를 데리고 다가왔다.“은설아 씨, 먼저 소개부터 하죠. 이쪽은 백화궁의 주인, 연규비 궁주입니다.”윤구주의 소개에 은설아는 속으로 멈칫했다.눈앞에 있는 여인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연규비는 예쁜 것에 더해 그녀 특유의 아우라가 있었다. 게다가 몸매 역시 시선을 뗄 수 없었고 말 그대로 완벽한 여자 그 자체였다.“안녕하세요. 은설아라고 해요.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어요.”“실례라니요. 이곳 백화궁에 와줘서 너무 기뻐요.”두 사람은 서로가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눴다.“그렇게 말해줘서 저야말로 너무 기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얘기해주세요.”“네, 그럴게요.”인사를 마친 후 윤구주는 은설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은설아는 백화궁과 윤구주의
은설아는 이틀 동안 줄곧 백화궁에 머물렀다.연예인이라 그런지 소채은과 연규비는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이틀 동안 두 사람은 은설아의 옆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관심이 은설아에게 쏠려 윤구주는 관심 밖이었다.한편, 환을 제조하는 것에 여념이 없던 윤구주의 방에 정태웅이 들어왔다.“저하, 천음 엔터에 대해 알아 왔습니다.”그 말에 윤구주는 손동작을 멈추고 서서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얘기해 봐.”“이것 참, 조사해 보니 천음 엔터가 국내 최고가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었더라고요.”“계속해봐.”“천음 엔터 회장의 이름은 탁천수라고 합니다. 몸값만 해도 몇십조는 된다고 해요. 탁천수는 엔터 회사 말고도 영화 산업에도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예계 쪽에서는 탁천수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까지 나온답니다. 유명 연예인이든 감독이든 이 사람에게 찍히면 그날로 바로 매장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그리고 탁천수는 향문과 대헌 쪽 거물들과도 사이가 긴밀하고 해외의 비밀 조직과도 이런저런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사람인 거죠. 게다가 아들 바보로 유명하고 저하가 죽인 탁시현이 탁천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합니다.”정태웅은 조사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읊었다.윤구주는 그의 말이 끝나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대단한 아버지가 뒤를 봐주고 있어 탁시현이 그렇게 겁 없이 날뛰었던 거군.”“저하, 탁천수 쉽게 볼 놈은 아닌듯합니다. 그리고 지금쯤 제 아들이 서남에서 죽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고요.”정태웅의 말에 윤구주는 피식 웃었다.“잘됐네. 어디 탁천수가 얼마나 대단한 거물인지 한번 볼까?”“저하,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저하의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형과 천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행동을 개시하겠습니다. 그 둘이라면 아마 24시간도 안 돼 탁천수의 목을 저하 앞에 바칠 수 있을 겁니다.”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일반인 상대로 굳이 암부원들이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화진 암부는 화진의 비밀 병기 같은
당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윤구주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홀로 부성국으로 쳐들어갔다.윤구주는 부성국의 순찰함 세 대를 박살 냈을 뿐만이 아니라 부성국 군대를 단번에 쓰러트렸다.전투가 끝이 난 후 그는 부성국 땅을 밟고서 부성국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지금, 이 순간부터 화진 어선은 그 어떤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 근방을 항해할 거다. 의의 있으면 나를 찾아오도록!”그 사건 이후 남경 연해의 백성들은 윤구주를 신으로 모셨다.특히 어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준 윤구주를 사랑해 마지않았다.갑자기 연해 포격 사건을 들먹이는 정태웅을 향해 윤구주가 의문 섞인 눈길을 보냈다.“그런데 갑자기 그 일은 왜 꺼내는 건데?”정태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설아 씨의 본가가 남경 연해 쪽이랍니다.”“호오?”윤구주는 꽤 놀란 듯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그리고 5년 전에는 아직 학생이었다고 하네요.”“그런데 그 일이 나를 좋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조사에 따르면 은설아 씨 아버지가 부성국 쪽의 압박을 받았던 어민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저하가 연해의 백성들을 구제해줬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어요. 은설아 씨도 그 사건을 기점으로 저하를 몰래 숭배하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직 학생이던 시절 머리맡에 ‘구주왕’이라고 써 붙여두기까지 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 사모해 마지않는 남자가 저하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정태웅은 연애 얘기에 잔뜩 흥분한 사춘기 남자애처럼 키득거렸다.윤구주는 은설아가 그때의 그 어민 중 한 명의 딸일 줄은 몰랐다.“저하,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기묘하지 않습니까? 학창시절부터 좋아했던 저하를 갑자기 이렇게 만나게 된 것 말입니다. 이건 하늘도 돕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른 저하의 여자로 만드세요. 매일매일 저하만 생각하는 여인이 가엽지도 않으세요?”정태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구주는 옆에 있던 책으로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한 번만 더 그딴 헛소리 하면 그때는 꼬맹이한테 너 손봐주라고 할 거야.”
“은설아 씨, 사인 해주세요.”“저와는 같이 셀카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가족들한테 은설아 씨 봤다고 자랑하게요.”“저는 셀카가 아니어도 돼요. 가까이에서 사진만 찍게 해주세요.”이른 아침, 은설아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백화궁의 여자들이 몰려와 사진과 셀카를 부탁하기 시작했다.요 며칠 크게 바쁜 일도 없었기에 은설아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같이 셀카도 찍어주었다.“은설아 씨는 어쩜 예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해요? 나는 연예인들이 모두 도도하고 차가울 줄 알았어요.”“그러니까요. 역시 톱스타는 다른가 봐요.”“그보다 은설아 씨 솔직히 한번 말해봐요. 연예계 쪽에서 대시 많이 받죠? 어떤 남자 연예인들이 들이댔는지 얘기해줘 봐봐요, 네?”가십거리에 눈이 초롱초롱해진 그들을 보며 은설아는 미소를 지었다.“그렇지도 않아요.”“에이, 솔직히 이런 미모를 어떤 남자가 가만히 놔둬요. 연상은 물론이고 연하들도 잔뜩 노리고 있을 것 같은데.”“그런데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들이대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잖아.”“하긴 그것도 그래. 겉만 멀쩡하지 속은 썩어버린 인간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다들 비밀리에 잘만 사귀던데?”은설아는 여전히 웃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하지만 확실히 그들의 말처럼 연예계에는 겉만 멀쩡한 사람들이 많고 힘든 순간에 은밀하게 스며드는 유혹도 많다. 그런 유혹들은 다 뿌리치고 고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은설아는 달랐다. 그녀는 데뷔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 흔한 스캔들 하나 없었다.본디 그런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고 제일 큰 이유는 그녀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은설아 씨는 지금 남자친구 있어요?”“남자친구는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대박, 누군데요?”“말해봐요. 대체 어떤 남자가 우리 은설아 씨 마음을 홀라당 가져가 버렸는지 알고 싶어요!”은설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제가
은설아는 이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후 1억이라는 거금을 들여 사진을 사들였고 그 뒤로는 줄곧 몸에 지니고 다녔다.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애정이 가득 쏟아져나왔다.은설아는 소파에 앉아 한참이나 사진을 바라본 뒤 천천히 자신의 심장 쪽에 가져다 댔다.그 누구도 톱스타인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가 구주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또한, 그 누구도 그녀가 그 남자를 위해 여태 순결의 몸을 간직했다는 사실을 모른다.오직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마음속에 품은 남자는 이미 죽어버렸다.그녀가 감상에 젖어 있던 그때, 휴대폰 알림음이 들려왔다.휴대폰을 집어 들고 알림을 확인해보니 회사에서 수십 통의 메시지가 날아왔다.메시지들의 내용은 모두 은설아의 대외 활동 정지에 관한 것이었다.그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던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서남에서 일어난 일을 천음에서 알았나 보네. 활동 정지라... 뭐 상관없어. 연예인 못하게 되면 다른 살길을 알아보면 될 일이니까.”은설아는 마지막 메시지까지 확인한 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때,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그녀는 노크한 사람이 사인이나 셀카를 원하는 여성 팬인 줄 알고 문을 열었다.끼익.하지만 방문이 열리고 눈에 들어온 사람은 팬들이 아닌 윤구주였다.“어머... 안녕하세요.”은설아는 조금 놀란 얼굴로 일단 인사를 건넸다.“안으로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네? 네네, 그럼요. 들어오세요.”은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그를 방안으로 모셨다.윤구주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방이 좀 어지럽죠? 하하... 참, 커피로 드릴까요, 아니면 차로 드릴까요?”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제가 이곳으로 온 건 은설아 씨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예요.”“그러시구나. 앉으세요.”은설아는 예쁘게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소파에 앉은 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조막만 한 얼굴
“그러다 부성국 순찰함이 공격을 해왔죠.”은설아는 윤구주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런데 그 사건은 갑자기 왜 묻는 거예요?”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확인할 게 있어서요.”“확인할 거요? 그게 뭔데요?”은설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혹시 구주왕이라고 아세요?”구주왕.이 세글자가 들려오자 은설아는 몸을 흠칫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윤구주는 여전히 미소만 지은 채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할 뿐이에요.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못 들은 거로 해요.”은설아는 잠깐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분의 명성은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전 그분을 숭배하고 또 존경해요.”“그래요? 실제로 만난 적은 없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존경하게 된 거예요?”“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어요. 존경하게 된 계기는 그분이 저희 부모님을 구해주셨거든요. 우리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남경 연해의 모든 어민들과 백성들에게 그분은 구세주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남자로 태어나면 군에 입대해 화진을 지키는 삶을 살며 여자로 태어나면 구주왕에게 시집 가 은혜를 갚는다는 말도 있을 정도예요.”은설아의 진지한 말에 윤구주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세상에, 이건 또 무슨 소리라는 말인가!“진짜예요. 저희 쪽 사람들은 그분께 정말 많이 감사하고 있어요. 물로 저도 그중 하나고요.”구주왕의 얘기를 하는 은설아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마 마음속 깊이 존경심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그리고 저는 그분 사진도 간직하고 있어요. 지금도 지니고 있고요. 혹시 보실래요?”자신은 진심이라는 것을 어필하듯 은설아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윤구주는 그녀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구주왕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요?”“네!”“하지만 제가 알기론 그분은 사진 같은 거 안 찍는 거로 아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사진이 있을 수 있죠?”
그녀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조금 신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작 이 사진 하나 갖겠다고 그런 거액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은설아는 사진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이 사진을 손에 넣고 난 뒤로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어요.”윤구주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녀는 지금 사진의 주인공을 바로 앞에 두고 사진 속 남자만 그리워하고 있다.게다가 얼굴이 나온 사진도 아니고 고작 뒷모습만으로도 이렇게나 애틋해 하고 있다.물론 그는 자신이 바로 구주왕이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다.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은설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자신을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측은지심이 들었다.“그분의 얘기를 꺼내시는 건 혹시 은인님도 저처럼 그분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인가요?”은설아는 예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이에 윤구주는 소리 내 웃었다.“뭐 그렇죠.”“역시 은인님처럼 좋은 분이라면 그분을 존경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은인님도 그분 못지않은 히어로세요.”윤구주는 그 말에 또다시 하하 웃었다.“저기 은인님...”은설아가 뭐라 얘기하려는 그때 윤구주가 갑자기 그녀의 말을 끊었다.“은인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저는 윤구주예요.”“그럼 앞으로 구주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네.”그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때 은설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은설아의 얼굴이 금세 굳어버렸다.그녀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가 속해있는 매니지먼트 회사 사장인 장철민이었다.“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은설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네, 사장님.”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설아, 너 미쳤어? 좀 뜨고 나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거야? 어떻게 감히 천음 엔터와 척을 질 수 있어?! 게다가 사람까지 고용해서 탁시현 사장을 죽였다며?! 빌어먹을, 너 때문에 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
서울 삼천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섭혼번이 작동되면 화진의 국운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우리 문씨 가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화진의 주인이다. 감히 누가 복종하지 않겠느냐?”문경우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어댔다.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공간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시체 한 구를 밟고 서울에 강림했다.“웃기고 있네. 문씨 가문이 화진의 주인이 되겠다고? 문씨 가문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냐? 나 윤구주가 용납하지 않겠다.”우르릉.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문경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윤구주의 기운이 섭혼번 아래에 나타나며 음의 기운을 찢어버렸다.거대한 섭혼번이 관통당하자 전법이 무너지고 문경우는 피를 토해냈다.고개를 돌리니 윤구주가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아사 신전의 신주 오딘의 시체가 보라색 번개에 휩싸여 있었다.“이게 무슨? 네가 신왕 오딘을 죽였다고?”문경우는 오딘의 시체를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이 개 같은 자들이 여러 번 화진을 범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오딘뿐만 아니라 아사 신족 전체를 멸했다. 이제 곤륜에 아사 신족은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가 공중에 우뚝 서서 음양의 기를 손아귀에 감아쥐었다. 그의 머리 위 갈라진 공간 너머로 아사 신전의 폐허가 보였다. 수만 신령이 죽어 아사 신족이 멸족한다는 종말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문경우의 눈에 비친 윤구주는 무적의 화신이었다. 그는 윤구주와 싸울 용기도 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너희들이 내가 없을 틈을 타 화진의 기운을 봉인하려 했다고? 문씨 가문은 정말 개수작만 부리는군. 예전에는 나를 죽이려 온갖 더러운 수작을 다 부렸잖아. 내가 없는 틈만 노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무서웠나 보지?”“팔기지, 술자결.”윤구주가 손짓하자 삼천만 생령이 국운 속으로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새 국운에 각자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고 모두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며 위기가 해소되었다.“팔기지, 어
태양으로 변한 그 부적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독한 태양 빛이 대지를 지지며 수많은 건물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있던 평민들도 산 채로 타죽고 말았다.“그만해. 화진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임정설이 분노에 차 외쳤다.“너와 나는 모두 화진의 절정 수련자인데 어찌 무고한 자들을 끌어들이느냐?”“하하! 무고하다니? 임정설, 현실을 직시하지. 이 하등한 것들은 개미나 다름없어. 한 무리를 죽여도 금방 다시 번식할 테니. 게다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삼천만 백성의 목숨으로 화진의 새 국운을 봉인하는 거라네. 우리 문씨 가문이 얻지 못하는 것은 부숴버려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야.”문경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는 윤구주가 문씨 가문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화가 났다.만약 윤구주가 그들에게 순종했다면 지금쯤 화진의 주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천추만대가 지나도 윤구주는 여전히 화진 최고의 명군으로 남았을 것이다.“저 빌어먹을 윤구주.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걸 모르나? 역사를 조작한 왕조가 그렇게나 많은데 유독 그놈만 고집을 부리잖아. 화진의 재난은 모두 윤구주 때문이야. 명군이 되길 거부한다면 영원한 역적으로 만들 거야. 윤구주는 역사의 수치주에 못 박혀 천년만년을 욕먹을 것이다.”“닥치거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다. 너 같은 쓰레기가 어찌 감히 구주를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그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임정설은 양혼을 불살라 목숨을 걸려 했다. 그러나 문경우가 이미 임정설의 기를 봉쇄하고 제삼의 전법으로 그의 영혼까지 잠가버렸다.“임정설, 내 앞에서 자살조차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목숨을 걸겠다고 떠드는 건가?”문경우는 기고만장했다. 임정설이 황자가 되면 뭐하나? 어차피 문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오늘이 바로 화진 황제의 멸망일이라네. 섭섭해하지 말게. 윤구주도 곧 자네 뒤를 따를 거니까. 하하!”그가 양손을 내리자 백 미터 크기의 사악한 검은 기발이 구름을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이, 이것은 섭혼번이군!”그 거대
말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쓸모없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임정설은 황제의 의지를 칼로 삼았다. 황자의 기세가 모여 금빛 칼날을 형성하더니 국운을 상징하는 그 칼로 문경우를 향해 내리쳤다.우르르.음과 양이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사령부 빌딩과 인근 건물들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빌딩 꼭대기에서 결투를 시작했다. 칼 빛이 번뜩이며 천지의 영기를 뒤흔들었고 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산해가 울부짖으며 서울은 보라색 번개와 금빛 불길에 휩싸였다.그들은 각각 화진 최강의 무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 아니라 임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결전이었다.서울 상공에서는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를 휘저으며 흉수와 피 묻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이게 바로 황자의 힘인가. 정말 굉장하군.”진동왕마저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다른 도시의 지원병들이 서울에 도착해 진동왕과 연락을 취했고 이 소식을 해외에 있는 현모와 주작에게 즉시 전했다.“국주께서 문경우와 결전을 벌이고 계신다고?”“국주께서 황자급 경지에 오르셨다니.”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윤구주와 임정설의 관계는 남달랐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너무 기뻐하지 마라. 저 문경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곤륜에서 오랫동안 잠적하며 수많은 신전의 공법을 익혔어. 저놈이 서울로 온 목적은 바로 임정설을 죽이기 위함일 것이야.”옆에 있던 황보웅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주작과 현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화진이 무사하고 임정설이 문경우를 물리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한창 싸우고 있던 두 강자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짓 하나에 산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그들의 기세는 수백 리 밖까지 영향을 미쳤다.임정설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임정설은 문경우가 극 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