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 씨, 지금 여기서 비서랑 이렇게 쓸데없이 얽매일 시간은 있으면서 정작 보너스 서류는 결재할 시간이 없어요? 이게 대표이사가 할 짓이에요?”남설아는 서유라에게 쏘아붙인 후 다시 배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지금 당장 결재해요. 보너스는 한 푼도 빠짐없이 지급해야 합니다.”“남설아, 그렇게 날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 보너스야 별거 아니지만, 계약을 못 따내게 되면 네가 계속 이렇게 날뛸 수 있을지 두고 보겠어.”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남설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서유라의 손을 잡아끌고는 자리를 떠났다.서유라는 새침하게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가는 내내 훌쩍였다.“서준아,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너까지 난처하게 만들었어. 하지만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그저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설아 씨가 아직도 우리한테 앙심을 품고 있어. 게다가 저렇게 많은 걸 쥐고 있으니, 너한테 해코지할까 봐 너무 걱정돼.”서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눈물을 흘렸고 얼굴엔 깊은 자책과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남설아가 가진 것들로는 나를 건드리지 못해.”배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에게는 그것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결국 배씨 가문의 재산은 배씨 가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남설아 같은 외부인은 단 한 푼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그 말을 들은 서유라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남설아가 할아버지에게서 금고 두 개를 상속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질투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회사 지분은 당장 현금으로 쓸 수 없지만, 금고 안에는 진짜 돈이 있을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 서유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의 금고는 원래 네 것이어야 해. 설아 씨가 뻔뻔하게 그걸 차지한 거야. 서준아, 다 내 잘못이야. 나만 없었더라면 설아 씨가 널 이렇게 괴롭히지는 않았을 텐데.”“바보야, 남설아가 뭔데 어떻게 나를 괴롭힌다는 거야?”배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서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됐어. 걱정하지
휴대폰으로 전송된 사진을 확인한 남설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이제는 쓰레기만도 못한 저 두 남녀가 어떤 애정 행각을 벌인다 한들, 더 이상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한심한 남자와 저급한 여자, 아주 천생연분이다.비록 이 사진이 지금 당장은 별다른 힘을 가지진 않겠지만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풀어준다면 꽤 괜찮은 동정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남설아는 사진을 바로 저장해 두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조금 전의 소란 때문에 기술팀 내부 분위기가 어딘가 묘하게 변해 있었다.회사 사람들은 남설아와 배서준이 부부 관계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비록 대부분이 이과 출신이라 사내 소문에 둔감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큰 이슈는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오늘, 배서준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남설아를 몰아세우고 오히려 그 여자 편을 들며 감싸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자기 남편이 이러는 모습을 본다면 누가 됐더라도 속이 상할 것이다.하여 모두 남설아를 위로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남설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더 집중해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이전보다 더 몰입하는 듯 보였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원준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팀장님, 괜찮으세요?”“제가 왜요?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혹시 보너스 때문에 하는 말이면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저의 작은 성의일 뿐만 아니라 팀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에요.”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방금 일어난 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망신당한 쪽은 그녀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었다.배서준은 이제 서유라를 위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회사 규정을 무시하고 회사에 들여놓은 것도 모자라 아예 그녀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회사 전체가 엉망이 될 것이다.그런 생각이 들자, 남설아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지금 회
그녀는 전혀 거만한 태도가 없었고 전체적으로 매우 소탈했다. 심지어 식사하러 온 가난한 대학생들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어? 이런 우연이! 설아도 여기 있었어?”강연찬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밖에서 걸어 들어왔고 손에는 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히아신스꽃을 들고 있었다.“남 팀장님, 혹시 밥 좀 얻어먹어도 될까요?”장난스럽고도 다정한 그의 모습에 남설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밥은 얻어먹어도 되지만 식기는 혼자서 가지고 와요.”그러면서 히아신스를 자연스럽게 받아서 자신의 옆에 두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지금 그들은 라이벌 관계에 있는 회사 소속이었고 같은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다들 젊은 기술자들이라 금세 어울려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다.남설아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자, 사양하지 말고 마셔요. 마음껏 먹고 마시자고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그때 배서준이 서유라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이 장면을 본 그는 순간 넋이 나갔다.눈앞의 남설아는 생기 넘치고 활기찼다. 그런 모습은 배서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였다. 분명 자신이 그녀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둘 사이에는 한때 아이도 있었고 오랜 시간 부부로 지내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배서준은 그녀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어쩌면 그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남설아는 그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설아 씨도 여기 있었어? 나... 몰랐어.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누나, 사과는 무슨 사과야. 누나랑 무슨 상관인데? 여기에 남설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강연찬도 있잖아?”서도현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배건 그룹이 사업 전환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주원 그룹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남설아가 기술팀 전체를 데리고 강연찬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의도란 말인가.배서준의 시선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강연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시계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은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다시 봐요.”그리고는 남설아를 보며 말했다.“설아야, 먼저 갈게. 잘 먹고 좋은 시간 보내.”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배서준을 지나쳐 남설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다정하고 익숙한 태도였다.둘 사이에 특별한 신체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자연스러운 친밀함은 배서준의 주먹을 조용히 움켜쥐게 했다.옆에 서 있던 서유라는 더욱 난감했다. 배서준이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강연찬과 신경전을 벌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예전에 나은이 죽었을 때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저 여자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게 된 건가 말이다.남설아 이 여자는 정말 재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드시 사라져버려야 하는 사람이다.그때 서도현이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매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네 누나도 이제 우리 회사 직원이고 너도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며? 미리 동료들하고 친해지는 게 좋잖아. 앉아서 같이 먹자.”배서준은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서유라에게 자리를 권했다.서도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흥분해서 말했다.“매형, 그거 진짜예요? 정말 내가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거예요?”“홍보팀에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배서준은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은근슬쩍 남설아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라도 그녀의 표정에서 미묘한 변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남설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홍보팀이든, 마케팅팀이든, 배건 그룹 내부 일이야 그녀와 무관했다.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기술팀이었다. 그 핵심 인재들만 꽉 붙잡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생각에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정말 축하해. 이제 회사 청소부 자리까지 어머님께 가게 된다면 진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겠네.”“설아 씨, 내 동생도 대
“내 말은 우리 부서 직원들이랑만 노래방에 가겠다는 뜻이에요. 서준 씨는 비서랑 예비 처남이나 잘 챙기세요.”남설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서준은 원래 이런 분위기를 싫어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남설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뜻이야?”“내 말 그대로예요. 나는 당신이랑 놀고 싶지 않다고요. 노래방에 가고 싶으면 당신들끼리 가요. 우리는 같이 안 갈 거예요.”남설아는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이건 비단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여기 앉아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뿐이었다.남설아는 주주였고 대표의 부인이었지만 이들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설아 씨, 아무리 서준이를 싫어한다고 해도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서유라는 난처한 듯 한숨을 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는 바깥에서 체면이 중요한 법이에요. 당신이...”“남자의 체면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뻔뻔하게 굴어? 내 남편을 빼앗고 내 아이의 아버지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내 앞에서 훈계질까지 하겠다는 거야? 정말 염치도 없구나. 뻔뻔해서 못 봐주겠어.”남설아는 비웃으며 날카롭게 서유라를 몰아붙였다.“남설아!”배서준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하지만 남설아는 이제 그런 그의 분노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알았다.그녀는 테이블을 둘러보며 직원들에게 말했다.“끝까지 재밌게 회식을 진행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제시간에 출근해서 봐요.”이런 불청객들이 끼어든 마당에 계속 자리를 함께해봤자 어차피 분위기만 더 망칠 뿐이었다.괜히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나았다.한원준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오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리고 대표님도 감사합니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그를 시작으로 하
서유라는 조용히 배서준의 뒤를 따라 걸으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차에서 내리기 전 조심스럽게 배서준을 올려다보았다.“서준아, 나랑 도현이 정말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거야?”“내가 너한테 약속한 건 반드시 지켜.”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그는 그렇게 말한 뒤,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났다. 서유라를 바라보던 서도현은 답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언성을 높였다.“누나, 대체 왜 그래? 배서준이 남설아한테 대하는 태도가 전이랑 완전히 달라진 거 모르겠어? 누나는 불안하지 않아?”“너도 보아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마음이 떠난 남자를 누가 무슨 수로 붙잡아. 내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그녀는 서도현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계속 내 발목을 잡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어. 안 그래?”그 말에 서도현은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다.“누나가 무능한 건 누나 탓이지,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양심도 없냐?”“닥쳐. 지금 우리한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이렇게 가다간 우린 끝장이라고.”서유라는 차갑게 말을 내뱉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배서준이 인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생명이 가로막고 있거든.”서도현은 그녀의 앞에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그러네. 그럼 내가 사람을 시켜서 남설아를 죽여버릴게. 그럼 불안 요소가 없게 되잖아?”“멍청한 소리 그만해.”서유라는 단호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까지 애써 만든 걸 절대 물거품으로 만들진 않을 거니까.”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서도현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남설아는 가게를 나온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의 야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대학교 다닐 때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늘 이곳을 맴돌곤 했다. 그녀가 입던 옷도, 생활용품도 전부 여기서 샀었다.지금은 그때보다 돈이 훨씬 많아
배서준과 함께일 때, 남설아는 늘 그에게 어울리는 아내가 되려고 애썼다.그러다 보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마음껏 먹었던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역시 맛있는 음식은 크게 한입 베어 먹어야 제맛이다.강연찬은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그녀는 마치 풀밭에서 신나게 뛰노는 토끼 같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휴지를 집어 들고 그녀 입가의 묻은 양념을 닦아주며 말했다.“아무리 맛있어도 천천히 먹어.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닌데.”그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지만, 남설아는 자기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씹는 속도를 늦추고 강연찬을 올려다보았다.“연찬 오빠, 이렇게 잘해주면 내가 감당이 안 돼요.”“내가 너한테 잘해주고 싶어.”강연찬은 그녀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감당할 수 있는지는 네 문제고, 내가 잘해줄지는 내 문제야.”‘이 사람이 언제 이렇게 뻔뻔해진 거지?’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계속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야시장을 천천히 거닐었다.이곳에는 없는 게 없었다. 둘은 시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둘러보며 이것저것 사다 보니 어느새 손이 가득 찼다.“너 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자잘한 것들을 좋아해?”강연찬이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냥 좋아요.”남설아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강연찬이 든 물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아무래도 고급스러운 생활이 내 체질에 안 맞는 거 같다. 그런 딱딱한 생활보다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생활이 더 좋아.”그때, 어디선가 힘없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남설아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주먹만 한 작은 치즈 고양이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다른 건강한 새끼 고양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고 연약해 보였다.그 순간, 남설아는 불현듯 자기 딸, 나은이가 떠올랐다. 나은이가 태어났을 때도
그는 남설아가 그렇게 바쁘면서도 왜 작은 고양이를 키우면서까지 위안을 얻으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코코, 내가 엄마야.”남설아는 조심스럽게 작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녀는 고양이를 강연찬에게 내밀며 말했다.“오빠, 봐요. 예쁘지 않아요?”이 작은 덩어리는 온통 먼지투성이였고 딱히 예쁘다고 할 만한 구석이 없었지만, 강연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데려다줄게.”가게 주인은 그들이 정말로 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고양이에게 아직 사료를 먹이면 안 된다며 염소젖 분유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집으로 가는 내내 남설아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코코를 보고 있으면 나은이가 떠올랐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나은이가 돌아온 거예요. 내 나은이가 돌아왔어요.”강연찬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시렸다. 그녀가 딸에 대한 그리움을 한 마리 고양이에게 투영할 줄은 몰랐다.그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설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가슴 한편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을 억누른 채 그녀와 고양이를 함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집 앞에 도착하자 강연찬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양이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조심해야 해. 내일 병원에 데려가서 건강 상태를 확인하자, 응?”“네.”남설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챙겨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불쾌해졌다.배서준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날카로운 분노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배서준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돌아오길 네 시간이나 기다렸어. 어디 갔다 왔지?”남설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담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
그는 줄곧 자신과 남설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강연찬이 회복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특히 남설아는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한편, 멀리 리조트에 머무르고 있던 서유라는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서도현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전부 체포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구속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다. 남설아가 다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마저 회복되었으니 그동안 벌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이다.“뭐라고? 강연찬이 회복했다고?”서유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그 사람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남설아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도 그 여자 하나 못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된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는 뭐 하겠다는 거야? 적은 돈이 아니었잖아.”서도현은 배서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리조트 안으로 숨어들어와 서유라와 만났다.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누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그놈들이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놈들이 입이 무지하게 무겁다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어. 나도 계속 지켜볼 거니까 우리한테 불똥이 튀게 두진 않을 거야.”“쓸모없는 놈들! 전부 다 쓸모없어!”서유라는 온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이제 어떡해? 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혹시 이 일을 남설아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설아가 알게 되면, 나는...”“누나, 진정해봐.”서도현은 급히 달래며 말했다.“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는 없어. 게다가 그 킬러들은 내가 따로 구한 사람들이라서 우리랑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불안했다.“남설아 그 여자는 워낙 교묘해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알겠어.” 송우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를게.”“우민아, 고마워.” 남설아가 말했다.“네가 얼마나 복수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응, 알아.” 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도울게.”“좋아.”남설아가 미소 지었다.“우린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세 사람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연회가 끝난 후, 남설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강연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설아야, 우유 좀 마시고 일찍 쉬어.”강연찬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몸을 챙겨야지.”“응, 고마워, 오빠.”남설아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빠도 일찍 쉬어.”“난 안 피곤해.” 강연찬이 말했다.“너 일 마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괜찮아, 오빠. 몸도 아직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잖아. 푹 쉬는 게 좋아.”남설아가 말했다.“이 서류들은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그래도 옆에 있어 줄게.”강연찬이 말했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쉬어.”“응, 알겠어.”강연찬이 나간 뒤에도 남설아는 계속해서 일을 처리했다.그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더 강해져야만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은이를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남설아는 마침내 모든 서류를 정리했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가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은아, 보고 있어?”남설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줘.”다음 날, 남설아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회사의 핵심 팀을 소집해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 그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설아가 말했다.“배건 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선배...”남설아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두 사람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중, 남설아가 잔을 들어 모두와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하려는 찰나 강연찬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설아야,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술은 좀 줄여.”강연찬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남설아는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하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주스를 들었다.“알겠어. 선배 말 들을게.”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광경을 본 송우민은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남설아, 내가 한 잔 올릴게.”송우민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번 성공, 정말 축하해.”남설아는 주스를 들고 잔을 맞댔다.“고마워, 우민아.”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얻진 못했을 거야.”“우린 친구잖아. 서로 도와야지.”송우민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정말 대단하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우민아, 너무 띄우지 마.”남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운이 좋았을 뿐이야.”“그건 아니지.”송우민은 단호히 말했다.“너의 실력, 결단력, 배짱, 모두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야.”“그 얘기는 그만하고...”남설아는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좋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설아, 내 생각엔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배건 그룹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배서준한테 확실하게 복수해야 해!”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집념이 가득했다.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배서준을 단죄하고 싶은 듯했다.그러나 강연찬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왜?”송우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배건 그룹은 거의 끝장난 상태잖아. 이
“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핏기없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유라야, 어디 아파?”깜짝 놀란 배서준은 침대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다 불편하고 아파...”서유라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부를게!”배서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가려 했다.“안 돼...”하지만 서유라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의사 부르지 마. 나 병원 가기 싫어...”“근데 지금 상태가... 그냥 둘 수 없잖아.”배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 주면 돼...”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 옆에 있을게.”그렇게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아무 데도 안 갈게. 여기서 널 지킬 거야.”“응...”서유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배서준은 서유라의 달콤한 말과 애정 어린 행동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녀의 진짜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한편, 남설아의 세심한 간호 아래 강연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그는 점차 회사 일에도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설아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 서며 경영에 힘을 보탰다.그 사이 남설아는 잇따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사업적으로 완전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성과가 이어졌고 배건 그룹은 연일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이러한 성과를 기념하고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설아는 대규모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다.연회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했고 모두의 얼굴엔 성취와 기쁨이 가득했다.그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성공의 기쁨을 나누었다.남설아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한가운데에 서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기준은 조용히 배서준의 현재 상황과 결정을 남설아에게 전했다.“대표님, 이제 배 대표님은 완전히 사방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천기준의 말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묻어났다.“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 여자 곁에 붙어 있으려 하네요.”“후,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죠.”남설아는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자기가 아직도 예전처럼 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금의 배서준은 그냥 여자한테 정신 팔린 멍청이일 뿐이에요.”“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천기준이 물었다.“지금처럼 그 사람이 회사에 없는 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절호의 기회입니다.”“당연히 병들었을 때는 끝장내는 게 기본이죠.”남설아의 눈빛엔 싸늘한 결의가 번뜩였다.“이젠 그 인간도 잃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해요.”“역시 대표님답습니다.”천기준이 말했다.“지시하신 대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좋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기억해요. 이번엔 반드시 속전속결로, 숨 돌릴 틈도 주지 마요.”“네, 대표님!”남설아와 송우민이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배건 그룹의 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고 원래 배건 그룹 쪽에서 따냈던 주요 프로젝트들마저 차지해버렸다.그 결과, 배건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고객사들은 잇따라 이탈했고 사내 분위기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주주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고 배서준에 대한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배서준, 진짜 쓸모없네!”“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지?”“당장 끌어내려야 해!”“그래! 더는 회사 말아먹게 놔두면 안 돼!”분노한 주주들의 외침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천기준은 그 상황을 남설아에게 보고했고 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계속 감시해요. 그 둘이 무슨 짓을
천기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소파에 앉은 배서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고 서유라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대표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천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회사 상황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러다 진짜 배건 그룹이 무너집니다!”“근데 유라가 지금 몸이 안 좋아. 어떻게 이럴 때 내가 유라를 혼자 두고 가겠어.”배서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와 한숨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대표님...”천기준이 설득을 이어가려던 순간, 서유라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았다.“서준아, 천 비서님 탓하지 마.”서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약했다.“회사 일이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냥 돌아가. 난 괜찮아.”“유라야, 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그래도...”서유라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바보야, 너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배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회사 일은 내가 방법을 찾을게.”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천기준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배 대표님 중에 제일 한심한 버전이야. 예전엔 그렇게 단호하고 냉정했던 사람이 이젠 여자가 곁에만 있으면 정신줄을 놓고 있잖아.’“대표님, 진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천기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주주들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어요. 계속 이렇게 계시면 정말로 해임당합니다!”“알아, 나도 알아.”배서준은 초조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렇지만 유라가...”“서준아, 돌아가.”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 혼자서도 괜찮아.”“유라야, 너 지금...”배서준은 놀란 눈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