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필요 없어요. 변호사한테 받을 서류나 기다리시죠.”강연찬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내뱉고는 그대로 지나쳐 나가버렸다.남설아는 오히려 그녀를 동정하듯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기자님, 시간 되시면 강씨 가문 법무팀 수준 좀 알아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그러고는 문을 쾅 닫았다.이제 배씨 가문은 체면도 실속도 완전히 잃었다. 반격도 엉망진창으로 망해버렸다.배건 그룹, 홍보팀.“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평소의 냉철하고 침착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질려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그대로 책상 위에 내던졌다.홍보팀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하나같이 억울한 심정이었다.누가 이런 사태를 예상했겠는가? 결정적으로 이 사단은 자기네들이 만든 것도 아니지 않은가?‘못된 짓들은 다 자기가 해놓고 왜 지금 와서 책임을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야?’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배서준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지다가 폭발했다.“다 죽은 거야? 왜 말을 안 해?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고함이었고 홍보팀 사무실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모두 숨조차 죽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간 누구든 한 방에 잘릴 분위기였다.그때, 천기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대표님, 이사님들이 모두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 사람들이 지금 왜 온 건데!”배서준은 다시금 분노했다.그들이 왜 왔겠는가?말할 것도 없이 자산 유용 건을 따지러 온 것이었다.회사 통장이 텅 비어 있지는 않은지 그걸 확인하러 온 게 분명했다.그 시각, 남설아도 회의 참석 통보를 받았다.지금 그녀는 배건 그룹의 최대 주주이기에 이사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거울 앞에 선 그녀는 차분하게 검정 수트를 꺼내 입고 옅은 메이크업을 했다.분위기는 냉정하고 단호했다.눈빛은 더없이 매서운 것이 말 그대로
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 향하는 게 아니야. 배서준이지.”만약 배서준이 재산을 빼돌리고 배건 그룹을 무력화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질책하려고 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남설아는 단순히 전달자이자 증인일 뿐이었다.이렇게 생각하니 남설아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서준이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그를 처음 만난 이후 줄곧 높은 곳에 서 있던 배서준의 모습만 봐왔다. 남설아는 그런 모습을 이제 질릴 만큼 충분히 보았다.그녀가 이렇게 확신에 찬 모습을 보이자 강연찬은 만족스러워하며 미소 지었다.“그래, 이게 바로 너야. 우리 설아.”학창 시절 강연찬은 남설아를 ‘우리 설아’라고 불렀었다. 지금 다시 불러도 너무나 자연스러웠지만 정작 남설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두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움켜쥔 채 그녀는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여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얼굴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곧 배건 그룹에 도착했다. 남설아는 차에서 내리기 전, 미리 준비해 둔 하이힐로 갈아신었다.그러고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살짝 웃어 보인 뒤, 바로 몸을 돌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입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천기준이 직접 내려왔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한 뒤, 함께 위층으로 향했다.“사모님...”“설아 씨라고 불러요.”남설아는 단번에 호칭을 정정했다.예전에도 밖에서는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진 사이인데 왜 굳이 가식적으로 예의를 차려야 한단 말인가?“설아 씨, 지금 모든 이사진이 회의실에 모여 있습니다. 대표님의 상황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버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남설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꼬듯
지금 남설아는 배건 그룹에서 배서준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였다. 따라서 이 자리는 당연히 그녀가 앉아야 할 자리였다.그러나 한 남자가 이를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냉소를 내뱉었다.“네가 뭔데? 그저 집에서 빨래나 하고 애나 보는 가정주부 주제에 지분 좀 있다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이 말은 분명 의도적으로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주식 보유량도 중요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었다.배건 그룹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배서준의 뛰어난 사업 수완 덕분이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이사진들 역시 속으로는 그에게 더 기대고 있었다.반면 남설아는? 그들의 눈에는 단지 집에서 빨래하고 요리하며 아이나 키우는 가정주부일 뿐이었다.조용히 집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모를까 경영에 간섭하려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그러나 남설아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컵을 그대로 들어 올려 그 남자의 머리에 힘껏 내리꽂았다.“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순종적이고 나약하기만 했던 여자가 감히 이렇게 대놓고 폭력을 행사할 줄은 말이다.머리를 감싸 쥔 채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그는 남설아를 바라보았다.“감히...!”“왜요? 내가 감히 못 할 것 같아요?”남설아는 반으로 깨진 컵을 단단히 쥐고 위협적으로 내밀었다.“더 맞아보고 싶으면 한 번 더 떠들어 봐요.”남자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지만 여기서 더 나섰다가는 정말 들것에 실려 나갈 수도 있었다.결국 억울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남설아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냉정한 시선으로 배서준을 바라보았다.“배 대표님, 이렇게 주주들을 모두 모아놓고 무슨 중요한 안건이라도 있나요?”“제가 알기로 오늘은 주주총회 일정이 아닌데요?”이 말 한마디가 배서준을 그대로 궁지로
“남설아!”배서준이 갑자기 폭발하듯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돌진해왔다.남설아는 애초에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배서준이 평소에도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여 그녀는 주머니에 미리 숨겨두었던 전기충격기를 꺼내더니 그대로 배서준의 배에 찔러 넣었다.전류가 흐른 소리와 함께 배서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배 대표님, 여긴 회사입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지금처럼 폭력적인 행동을 반복한다면 정식으로 신고하고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남설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배서준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경고했다.이제는 감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는 태도였다.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이미 배서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모두들 일제히 노트북을 열고 메일함을 확인하며 그녀가 보낸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순식간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처음엔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던 이사들이 실제 자료를 보며 얼굴빛을 하나둘 굳히기 시작한 것이다.정작 온라인에서 퍼졌던 건 전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실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천기준이 다급히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배서준을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병원에 가보셔야...”하지만 배서준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남설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왜?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너랑 나는 부부잖아! 내 것이 곧 네 거 아냐?”“그래요? 그럼 당신 말이 맞는지, 당신 양심에 한번 손 얹고 생각해봐요.”남설아는 냉소를 띠며 한마디 한마디를 또렷하게 쏘아붙였다.“만약 당신 것이 내 거였다면 왜 내 딸은 고작 1억 2000만 원의 치료비 때문에 죽어야 했을까요?”1억 2000만은 남설아에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고통의 숫자였다.딸이 병원에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 배서준은 똑같은 돈으로 다른 여자를 위해 불꽃놀이를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다니 이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천 비서님, 뭐라도 말씀 좀 해보세요!”회의실 한가운데 천기준 혼자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불쌍할 정도로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내가 뭔 말을 해?’솔직한 얘기는 할 수 없고 거짓말은 아직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다.결국 그는 침묵으로 모든 걸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천기준의 그런 모습에 이사진들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당장이라도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들인 듯 보였다.하지만 이들은 끝내 선을 넘지 않았다.결국 그도 한 명의 월급쟁이일 뿐, 같은 처지의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누구도 진짜 책임을 묻긴 어려웠다.한편, 배건 그룹을 나온 남설아는 온몸이 가뿐했다.햇살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그동안 쌓였던 모든 어둠과 고통이 마치 한순간에 사라진 것만 같았다.“나은아, 보고 있지? 엄마가 해냈어. 엄마 멋지지? 걱정하지 마. 엄마, 진짜 열심히 살아볼게.”남설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잔잔히 웃었다.하지만 그 미소와 함께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그만큼 딸이 그리웠다.“남설아, 이 못된 년!”“혼자 살겠다고 서준이를 망치겠다는 거야?”갑자기 어디선가 서유라가 나타나 살기를 띠며 소리쳤다.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팔을 치켜올려 뺨을 후려치려 했다.하지만 지금의 남설아는 더 이상 참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서유라의 손목을 단번에 낚아채고 망설임 없이 똑같이 한 대 갈겼다.“서유라, 남의 가정 쑤셔놓고 숨도 못 쉬는 불륜녀 주제에 내 앞에서 떠들 자격은 없지.”“배서준이 그쪽한테 준 돈, 그건 다 내 몫 절반이 들어간 거야. 그건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니까 돌려받을 권리는 나한테도 있어.”남설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마치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강하게 말을 내뱉었다.“참, 너희 집 망해서 돈 없지?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보통 사람이었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남설아라는 것이었다.그 남자 없으면 못 산다던 여자가 지금은 완전히 미쳐버린 듯 날뛰고 있으니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였다.“서준아, 드디어 왔구나.”“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너까지 힘들게 해서... 설아 씨 지금 많이 화가 나 있으니까 둘이서 천천히 얘기 좀 해봐, 응?”“설아 씨, 날 미워하는 거라면 때리든 욕을 하든 다 괜찮아. 제발, 서준이만은 괴롭히지 말아줘. 이 사람 정말 힘들게 살아왔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유라의 눈에서 눈물부터 쏟아졌다.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당한 줄 알았을 것이다.그 연기를 보고 있자니 남설아는 실소가 나왔다.“서유라 씨, 처음 유라 씨를 봤을 때부터 느낀 건데 항상 연약한 척하고 살더라고. 근데 유라 씨 본성이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숨기고 사는 거 안 힘들어?”“설아 씨, 무슨 말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알아. 설아 씨는 서준이가 아직 날 못 잊었다고 늘 화가 나 있었다는 거. 그렇지만 우린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절대 떨어질 수 없다고.”서유라는 배서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말했다.마치 당장이라도 누가 데려가려는 듯 바짝 매달려 있었다.“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이 골칫덩어리를 난 나 질릴 만큼 갖고 놀았다고.좋으면 유라 씨가 가져.”남설아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예전엔 배서준도 그럭저럭 생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저 역겹기만 했다.이딴 남자를 예뻐 보이게 봤던 자기 눈이 한심할 지경이었다.“설아야, 차 타.”그때, 강연찬의 차가 딱 맞춰 남설아 옆에 멈춰 섰다.“남설아, 감히 너!”이번엔 배서준이 정말로 다급해졌다.사랑하지는 않지만 아내가 대놓고 다른 남자 차에 타는 건 용납 못 하겠는 일이었다.남설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올라탔다.그러고는 강연찬에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샤브샤브 먹으러 갈까?”“좋아.”강
서유라는 지금 온 신경이 주식에 쏠려 있어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설아 씨가 지금 나한테 화난 거 알아. 그러니 내가 가서 사과할게. 내가 사과하면 분명 설아 씨도 너를 용서하고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야. 어때?”예전에는 배서준이 서유라의 이런 사려 깊고 이해심 많은 모습을 좋아했다. 그는 현명한 여자를 좋아했고 그런 여자만이 자신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그녀가 울면서 매달리는 모습이 오히려 불만스럽고 거슬렸다.그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일단 돌아가.”이 말속에서 이미 바닥난 배서준의 인내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서유라는 단순히 우울증인 척할 뿐, 실제로 아픈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배서준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불안감이 엄습해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 화병 나면 안 되잖아.”“괜찮다고 했잖아.”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잡아끌어 차에 올랐다.그는 차 안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서유라는 처음으로 그가 자신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고개를 숙이고 조용하게 연약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것이 그녀가 배서준 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오랜 시간 배서준의 곁에 있으면서 서유라는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도착한 후, 배서준은 예전처럼 곁에 남아 그녀를 챙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로 떠나버렸다. 이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그 변화가 너무도 뚜렷했기에 서유라
남설아는 집으로 돌아와 나은이의 사진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나은아, 봤지? 엄마 해냈어. 엄마 정말 대단하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남설아가 문을 열자 예상대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길로 문 앞에 서 있는 배서준을 바라보았다.예전에는 그녀가 아무리 간절하게 그에게 집에 돌아와 달라고 애원해도 그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심지어 나은이가 애타게 부탁했을 때조차 그는 외면했다.그런데 인제 와서 마주하는 것조차 싫어지자 오히려 끊임없이 그녀의 세상에 발을 들이려 하고 있었다.‘대체 이 사람은 뭘 원하는 걸까? 혹시 일부러 거슬리게 하려고 이러는 걸까?’“서준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그날 네가 전화했을 때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야.”배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설아를 바라보았다.그는 굳이 왜 지금에 와서 이런 해명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뭐?’남설아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보았다.예전에 두 사람이 부부였을 때조차 배서준은 무슨 일이든 혼자 결정했고 그녀에게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와서 핸드폰까지 보여주며 변명을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게 고의였든 아니든 이제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는 당신한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전화도 중요하지 않았겠죠. 서준 씨, 만약 그날 저한테서 온 통화를 봤더라면 받았을 거예요?”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예전에는 이 사람이 한마디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었지만, 이제는 그가 눈앞에 서 있어도 그녀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과거에 작은 행동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사람이었어도 이제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오늘에서야 남설아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녀가 너무 순진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물었다.
그는 줄곧 자신과 남설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강연찬이 회복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특히 남설아는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한편, 멀리 리조트에 머무르고 있던 서유라는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서도현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전부 체포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구속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다. 남설아가 다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마저 회복되었으니 그동안 벌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이다.“뭐라고? 강연찬이 회복했다고?”서유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그 사람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남설아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도 그 여자 하나 못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된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는 뭐 하겠다는 거야? 적은 돈이 아니었잖아.”서도현은 배서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리조트 안으로 숨어들어와 서유라와 만났다.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누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그놈들이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놈들이 입이 무지하게 무겁다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어. 나도 계속 지켜볼 거니까 우리한테 불똥이 튀게 두진 않을 거야.”“쓸모없는 놈들! 전부 다 쓸모없어!”서유라는 온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이제 어떡해? 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혹시 이 일을 남설아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설아가 알게 되면, 나는...”“누나, 진정해봐.”서도현은 급히 달래며 말했다.“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는 없어. 게다가 그 킬러들은 내가 따로 구한 사람들이라서 우리랑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불안했다.“남설아 그 여자는 워낙 교묘해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알겠어.” 송우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를게.”“우민아, 고마워.” 남설아가 말했다.“네가 얼마나 복수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응, 알아.” 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도울게.”“좋아.”남설아가 미소 지었다.“우린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세 사람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연회가 끝난 후, 남설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강연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설아야, 우유 좀 마시고 일찍 쉬어.”강연찬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몸을 챙겨야지.”“응, 고마워, 오빠.”남설아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빠도 일찍 쉬어.”“난 안 피곤해.” 강연찬이 말했다.“너 일 마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괜찮아, 오빠. 몸도 아직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잖아. 푹 쉬는 게 좋아.”남설아가 말했다.“이 서류들은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그래도 옆에 있어 줄게.”강연찬이 말했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쉬어.”“응, 알겠어.”강연찬이 나간 뒤에도 남설아는 계속해서 일을 처리했다.그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더 강해져야만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은이를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남설아는 마침내 모든 서류를 정리했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가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은아, 보고 있어?”남설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줘.”다음 날, 남설아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회사의 핵심 팀을 소집해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 그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설아가 말했다.“배건 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선배...”남설아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두 사람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중, 남설아가 잔을 들어 모두와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하려는 찰나 강연찬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설아야,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술은 좀 줄여.”강연찬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남설아는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하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주스를 들었다.“알겠어. 선배 말 들을게.”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광경을 본 송우민은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남설아, 내가 한 잔 올릴게.”송우민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번 성공, 정말 축하해.”남설아는 주스를 들고 잔을 맞댔다.“고마워, 우민아.”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얻진 못했을 거야.”“우린 친구잖아. 서로 도와야지.”송우민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정말 대단하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우민아, 너무 띄우지 마.”남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운이 좋았을 뿐이야.”“그건 아니지.”송우민은 단호히 말했다.“너의 실력, 결단력, 배짱, 모두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야.”“그 얘기는 그만하고...”남설아는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좋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설아, 내 생각엔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배건 그룹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배서준한테 확실하게 복수해야 해!”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집념이 가득했다.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배서준을 단죄하고 싶은 듯했다.그러나 강연찬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왜?”송우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배건 그룹은 거의 끝장난 상태잖아. 이
“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핏기없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유라야, 어디 아파?”깜짝 놀란 배서준은 침대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다 불편하고 아파...”서유라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부를게!”배서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가려 했다.“안 돼...”하지만 서유라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의사 부르지 마. 나 병원 가기 싫어...”“근데 지금 상태가... 그냥 둘 수 없잖아.”배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 주면 돼...”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 옆에 있을게.”그렇게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아무 데도 안 갈게. 여기서 널 지킬 거야.”“응...”서유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배서준은 서유라의 달콤한 말과 애정 어린 행동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녀의 진짜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한편, 남설아의 세심한 간호 아래 강연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그는 점차 회사 일에도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설아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 서며 경영에 힘을 보탰다.그 사이 남설아는 잇따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사업적으로 완전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성과가 이어졌고 배건 그룹은 연일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이러한 성과를 기념하고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설아는 대규모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다.연회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했고 모두의 얼굴엔 성취와 기쁨이 가득했다.그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성공의 기쁨을 나누었다.남설아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한가운데에 서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기준은 조용히 배서준의 현재 상황과 결정을 남설아에게 전했다.“대표님, 이제 배 대표님은 완전히 사방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천기준의 말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묻어났다.“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 여자 곁에 붙어 있으려 하네요.”“후,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죠.”남설아는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자기가 아직도 예전처럼 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금의 배서준은 그냥 여자한테 정신 팔린 멍청이일 뿐이에요.”“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천기준이 물었다.“지금처럼 그 사람이 회사에 없는 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절호의 기회입니다.”“당연히 병들었을 때는 끝장내는 게 기본이죠.”남설아의 눈빛엔 싸늘한 결의가 번뜩였다.“이젠 그 인간도 잃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해요.”“역시 대표님답습니다.”천기준이 말했다.“지시하신 대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좋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기억해요. 이번엔 반드시 속전속결로, 숨 돌릴 틈도 주지 마요.”“네, 대표님!”남설아와 송우민이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배건 그룹의 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고 원래 배건 그룹 쪽에서 따냈던 주요 프로젝트들마저 차지해버렸다.그 결과, 배건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고객사들은 잇따라 이탈했고 사내 분위기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주주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고 배서준에 대한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배서준, 진짜 쓸모없네!”“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지?”“당장 끌어내려야 해!”“그래! 더는 회사 말아먹게 놔두면 안 돼!”분노한 주주들의 외침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천기준은 그 상황을 남설아에게 보고했고 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계속 감시해요. 그 둘이 무슨 짓을
천기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소파에 앉은 배서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고 서유라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대표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천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회사 상황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러다 진짜 배건 그룹이 무너집니다!”“근데 유라가 지금 몸이 안 좋아. 어떻게 이럴 때 내가 유라를 혼자 두고 가겠어.”배서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와 한숨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대표님...”천기준이 설득을 이어가려던 순간, 서유라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았다.“서준아, 천 비서님 탓하지 마.”서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약했다.“회사 일이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냥 돌아가. 난 괜찮아.”“유라야, 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그래도...”서유라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바보야, 너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배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회사 일은 내가 방법을 찾을게.”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천기준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배 대표님 중에 제일 한심한 버전이야. 예전엔 그렇게 단호하고 냉정했던 사람이 이젠 여자가 곁에만 있으면 정신줄을 놓고 있잖아.’“대표님, 진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천기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주주들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어요. 계속 이렇게 계시면 정말로 해임당합니다!”“알아, 나도 알아.”배서준은 초조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렇지만 유라가...”“서준아, 돌아가.”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 혼자서도 괜찮아.”“유라야, 너 지금...”배서준은 놀란 눈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