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년짜리 계약결혼의 종료일, 한서윤은 오만한 재벌 남편 차태오에게 이혼 서류를 내민다. 사랑은 없다고 선을 그었던 남자는, 그녀가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나 죽은 엄마의 수첩에서 차태오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서윤은 알게 된다. 그 결혼은 단순히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한 거래가 아니었다. 태경그룹의 비리를 덮기 위해, 그녀의 인생을 침묵시키려 만든 입막음이었다. 진실을 파헤칠수록 태오는 자신이 서윤의 삶을 얼마나 외면해 왔는지 깨닫고, 처음으로 아버지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맞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늦게 후회한 남자에게, 서윤은 다시 사랑을 허락할 수 있을까?
View More비가 오고 있었다.
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흰 도자기 잔이 차가운 물에 닿자 작은 소리가 났다. 맑고 짧은 소리였다. 꼭 무언가가 끝났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낮은 전자음이 울리고,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차태오. 태경그룹 전략기획본부장. 그리고 서윤의 남편.
정확히는, 오늘 자정까지 남편인 남자.
“아직 안 잤습니까.”
태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서윤은 물기를 닦은 손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가 낀 손가락이 낯설었다. 3년 동안 익숙해지려 애썼지만, 끝내 제 것이 되지 못한 물건처럼.
“기다렸어요.”
태오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곧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무슨 일입니까.”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낮고 건조했다.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다정함은 없었다.
서윤은 식탁 위에 놓아둔 봉투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
태오의 시선이 봉투에 닿았다.
“이게 뭡니까.”
“이혼 서류예요.”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밖에서는 빗물이 창문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집요하게.
태오는 서류를 바로 열지 않았다. 봉투 위에 놓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흰 종이 위에 보이지 않는 흠집이라도 있는 것처럼.
“날짜가 오늘이긴 하군요.”
그가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날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어요.”
태오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서류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종이 위에는 이미 서윤의 서명이 있었다. 한서윤. 세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태오는 그 이름을 오래 보았다.
“갑자기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갑자기는 아니에요.”
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3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잖아요.”
그 말에 태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윤은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서를 받았을 때, 예상 밖의 변수를 마주했을 때, 그는 딱 저만큼만 표정을 흐트러뜨렸다.
서윤은 한때 그런 미세한 변화까지 사랑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집은 이번 주 안에 비울게요. 필요한 절차는 변호사 통해서 진행하면 될 것 같고요.”
“한서윤 씨.”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었다.
아내라고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여보도, 당신도 아니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서윤 씨, 집에서는 한서윤 씨.
그 거리감이 처음에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선이라고 알았다. 지금은, 그저 끝내 넘지 못한 벽처럼 느껴졌다.
“말하세요.”
태오가 서류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조건을 바꾸고 싶습니까?”
서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조건.
역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윤이 이 밤까지 기다린 이유가 돈이나 집, 주식, 위자료 때문이라고.
“아니요.”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없어요.”
태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없다?”
“네. 아무것도요.”
서윤은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빠지지 않았다. 3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빼 본 적 없는 반지는 살 위에 옅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서윤은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힘을 주었다.
반지가 손가락을 빠져나왔다.
작은 금속음과 함께 식탁 위에 놓였다.
태오의 시선이 그 소리에 붙들렸다.
“그건 두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건 아니었으니까요.”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시선 하나에 먼저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의 침묵이 불편해서, 그의 무표정이 무서워서, 혹은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3년 동안 고마웠어요.”
서윤이 말했다.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그 말은 이상하군요.”
“뭐가요?”
“마치 정말 끝내는 사람처럼 들립니다.”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창밖의 불빛들이 물에 번져 흐려졌다. 이 집은 늘 지나치게 넓고 조용했지만, 오늘따라 더 낯설었다.
“끝내는 거예요.”
그녀는 조용히 답했다.
“오늘이 그날이니까.”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가방은 이미 현관 옆에 놓여 있었다. 큰 짐은 낮에 모두 옮겼다. 태오가 회사에 있는 동안, 이 집에서 자신의 흔적을 하나씩 지웠다.
화장대 위의 립밤, 욕실의 칫솔, 드레스룸 한쪽에 걸려 있던 얇은 원피스들. 냉장고 안의 반찬통까지.
마지막으로 남긴 건 식탁 위의 반지뿐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갑니까.”
태오가 물었다.
“제 집으로요.”
“여기가 당신 집입니다.”
서윤의 손이 현관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말, 3년 전에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등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윤은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복도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실내의 온기와 전혀 다른 공기였다. 어쩐지 숨이 쉬어졌다.
그때, 태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서윤.”
이번에는 씨가 붙지 않았다.
서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태오는 식탁 곁에 서 있었다. 늘 완벽하던 셔츠의 소매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손은 식탁 모서리를 짚은 채였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
하지만 서윤은 그 작은 흔들림을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았다.
“서류는 내일 오전까지 보내 주세요.”
서윤이 말했다.
태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지금 나가면 후회할 겁니다.”
예전의 서윤이었다면 멈췄을 말이었다.
그가 던지는 낮은 경고, 익숙한 통제, 차가운 확신.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윤은 가만히 웃었다.
슬프지도, 화난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후회는 제가 충분히 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이제 차태오 씨 차례예요.”
태오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서윤의 손목을 잡으려는 듯 팔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그녀의 코트 소매에 닿기 직전, 멈췄다.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그제야 떠올린 사람처럼.
서윤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녕히 계세요.”
문이 닫혔다.
태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관문 너머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숫자가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이혼 서류와 반지가 놓여 있었다. 식어 버린 찻잔은 사라지고 없었다. 늘 당연하게 있던 것들이, 오늘은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태오는 천천히 식탁으로 돌아갔다.
반지를 집어 들었다.
작고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바닥이 무거웠다. 숨을 쉬는 법을 잠깐 잊은 사람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계약은 끝났다.
분명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가 원했던 결혼은 처음부터 감정 없는 결혼이었다.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침범하지 않는 관계. 태경그룹에 필요한 안정적인 그림. 그리고 3년 뒤, 조용한 이별.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왜.
태오는 빈 현관을 바라보았다.
왜 집이 이렇게 낯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 안의 반지를 세게 쥐었다. 금속의 둥근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유라의 이름이 떠 있었다.
태오는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태오 씨, 기사 봤어요? 우리 약혼 얘기, 슬슬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이혼 서류 위에 멈췄다.
서윤의 서명.
한서윤.
태오는 그 이름을 보며 낮게 말했다.
“정리 못 합니다.”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네?”
태오는 천천히 반지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알았다.
끝난 건 계약뿐이었다.
그는 아직, 한서윤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윤재헌이었다.빛에 드러난 옆얼굴은 아주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서윤의 차량 안 모니터에는 외부 지하 계단의 유리문과, 그 앞에서 봉투를 든 남자의 얼굴이 동시에 잡혀 있었다.태오는 출입구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확인했습니다.” 변호인의 목소리가 통화에 끼어들었다. “얼굴, 위치, 시각 모두 보존 중입니다.”윤재헌은 빛을 피하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비추는 출입구 CCTV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래전부터 태오가 어떤 선택을 할지 계산해 온 사람의 시선이었다.“차 본부장님.”지하 출입구 인터폰을 거친 윤재헌의 목소리가, 태오가 서 있는 1층 단말기 스피커로 흘러나왔다.“들어오지 않으면 폐기한다고 했습니다.”태오는 고개를 들었다.“폐기하십시오.”같은 대답이었다. 더 낮아졌을 뿐이었다.“한미정 씨 목소리입니다.”그 말에 서윤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태오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문으로 다가가지 않았다.“그 목소리를 인질로 잡은 사람의 얼굴이 먼저 남았습니다.”윤재헌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손에 든 봉투를 유리문 안쪽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부러 카메라를 향해 봉투 겉면을 보이게 했다.[한미정 원본_1차 사본]“원본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사본입니다. 하지만 한서윤 대표가 차 본부장님을 다시 보지 못하게 만들 정도는 될 겁니다.”서윤은 이를 악물지 않았다. 눈을 감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반응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봉투를 회수합니까?&rdqu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서윤은 그 문장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태오는 한 번의 신호음 뒤에 받았다.“그 말, 혼자 들어가겠다는 뜻이면 끊어요.”“아닙니다.”“그럼 설명해요.”전화 너머로 차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급하지 않았다.“윤재헌은 내가 당신을 막고 대신 들어올 거라고 계산했을 겁니다. 예전의 나라면 그랬을 테니까요.”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지금은요.”“문 앞까지만 갑니다. 권한 없는 사람이 들어가면 침입자가 됩니다. 나는 오늘, 들어가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길 겁니다.”“그리고 누가 문을 열어 주는지 보겠다는 거군요.”“맞습니다.”서윤은 곧바로 변호인에게 원본 메일을 전달했다. 장소와 시간, 발신 경로, 태오에게 보낸 답장까지 모두 묶었다. 보안 인력은 별관 주변 두 지점에 배치됐다. 서윤은 스튜디오에 남지 않았다. 대신 별관이 보이는 도로 건너편 차량 안에 앉았다.밤 열시 오십팔 분.태경메디컬재단 별관은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지하 보관실로 이어지는 직원용 출입구 위에 작은 CCTV가 깜빡였다. 태오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출입구 앞에 섰다. 손에는 회사 사원증이 없었다. 개인 신분증과 변호사에게 보낸 위치 기록만 있었다.서윤의 휴대폰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는 켜져 있었다.“차태오입니다. 23시, 태경메디컬재단 별관 직원용 출입구 앞. 제 내부 출입 권한은 정지된 상태입니다. 저는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그는 문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한미정 씨 녹취는 지워진 게 아니라, 아직 누군가의 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파일 이름처럼 작아질 것 같았다.“보험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요.”전화 너머 태오가 대답했다.“윤재헌이 가진 카드일 가능성이 큽니다. 차명환 회장에게 버려질 때를 대비한.”“그럼 그 녹취는 진실이 아니라 거래 물건이네요.”“지금은 그렇습니다.”서윤은 창밖의 재단 건물을 보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이 누군가의 생명줄로 보관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분노보다 먼저 차갑게 들어왔다.“윤재헌을 찾죠.”“찾는다고 나오지 않을 겁니다.”“알아요. 그래서 부르려고요.”태오는 잠시 침묵했다.“어떻게 말입니까.”서윤은 강유라에게 답장을 보냈다.[윤재헌에게 전하세요. 보험을 가진 사람은 살고 싶어서 숨는 게 아니라, 가격을 올리기 위해 기다리는 거라고.]전송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강유라의 답이 왔다.[그 사람은 내 말 안 믿어요.][그럼 믿게 만들 문장을 보내요.]서윤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썼다.[차태오 본부장 대리 참석 기록과 대리 지정 요청서는 보존됐습니다. 다음은 원본 녹취입니다.]이번에는 답이 늦었다. 태오가 낮게 말했다.“윤재헌이 움직이면, 회장실도 알 겁니다.”“알아야 움직이죠.”“위험합니다.”“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여기까지 온 적
서윤은 휴대폰 화면을 덮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방 안에서는 서버가 재부팅되는 낮은 소리가 계속 울렸다. 복도에 붙잡힌 재단 직원은 자신이 무슨 일을 끊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서윤은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작은 바퀴를 부숴 봐야, 굴리는 손은 숨는다.“퇴실 시각까지 남겨 주세요.”변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문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 않았다. B-04에 남은 것은 이미 꺼진 화면뿐이었다. 하지만 꺼지기 직전의 문장들은 촬영본으로, 접속 시각은 보존 요청서로, 재부팅 지시는 직원의 휴대폰으로 남았다.“원격 재부팅 명령도 남았습니다.” 변호인이 말했다. “현장 직원이 오기 전에 서버가 먼저 꺼졌습니다.”“그럼 지운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네요.”“적어도 현장 직원은 아닙니다.”서윤은 그 대답만 듣고 건물을 나왔다.차로 돌아온 뒤에야 서윤은 태오에게 보안 링크를 보냈다.[확인하세요. 단, 설명은 먼저 듣지 않겠습니다.]전화는 바로 걸려 왔다. 서윤은 받았다.“봤습니까.” 그녀가 물었다.“보고 있습니다.”태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다. 화면 너머에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지, 서윤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2019년 6월 18일. 대외면담실 B. 권한 사용자는 차태오 본부장. 대리 실행은 YJH-06.”그가 천천히 읽었다.“방문자 명패는 ‘차태오 본부장 대리 참석’이고요.”서윤은 창밖을 보았다. 재단 본관 유리벽에 아침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저 건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했다.
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진 계약서가 바닥에 흩어졌다.종이 몇 장이 회의실 테이블 아래로 밀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정중한 미소와 형식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계약 결혼 의혹.그 짧은 단어 하나가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을 서윤에게로 끌어당겼다.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괜찮아.아니, 괜찮지 않았다.괜찮을 리 없었다.3년 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리였고, 스스로 견뎌 낸 시간이었
차태오는 그날 밤, 결국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다.펜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은 만년필의 뚜껑도 열려 있었다. 서류 맨 아래, 한서윤의 이름 옆 빈칸은 지나치게 깨끗했다.차태오.석 자만 쓰면 끝나는 일이었다.3년 전에도 그랬다. 결혼 서류에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결혼이란 사업상 필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한서윤은 그 결정의 조용한 상대였다.말수가 적고, 선을 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여자. 공식 석상에서 웃어야 할 때 웃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그의 곁에 있어
비가 오고 있었다.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서윤은 오전 아홉 시에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밤새 비가 내린 골목은 아직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앞 작은 화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간판 아래로 희미한 햇빛이 번졌다.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서윤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창백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입술에도 옅은 색을 올렸다.괜찮아 보이는 얼굴.그거면 됐다.딸랑.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새벽 시장에서 들여온 꽃들이 놓여 있었다. 흰 라넌큘러스, 연분홍 작약, 짙은 녹색 유칼립투스.서윤은 코트를 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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