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에야 남편이 후회했다

이혼 후에야 남편이 후회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04
By:  Doong_E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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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짜리 계약 결혼이 끝나는 날, 서윤은 남편 태오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사랑은 없다고 선을 긋던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한 번도 그녀를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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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계약이 끝나는 밤

비가 오고 있었다.

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흰 도자기 잔이 차가운 물에 닿자 작은 소리가 났다. 맑고 짧은 소리였다. 꼭 무언가가 끝났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낮은 전자음이 울리고,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차태오. 태경그룹 전략기획본부장. 그리고 서윤의 남편.

정확히는, 오늘 자정까지 남편인 남자.

“아직 안 잤습니까.”

태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서윤은 물기를 닦은 손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가 낀 손가락이 낯설었다. 3년 동안 익숙해지려 애썼지만, 끝내 제 것이 되지 못한 물건처럼.

“기다렸어요.”

태오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곧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무슨 일입니까.”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낮고 건조했다.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다정함은 없었다.

서윤은 식탁 위에 놓아둔 봉투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

태오의 시선이 봉투에 닿았다.

“이게 뭡니까.”

“이혼 서류예요.”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밖에서는 빗물이 창문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집요하게.

태오는 서류를 바로 열지 않았다. 봉투 위에 놓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흰 종이 위에 보이지 않는 흠집이라도 있는 것처럼.

“날짜가 오늘이긴 하군요.”

그가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날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어요.”

태오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서류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종이 위에는 이미 서윤의 서명이 있었다. 한서윤. 세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태오는 그 이름을 오래 보았다.

“갑자기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갑자기는 아니에요.”

서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3년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잖아요.”

그 말에 태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윤은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서를 받았을 때, 예상 밖의 변수를 마주했을 때, 그는 딱 저만큼만 표정을 흐트러뜨렸다.

서윤은 한때 그런 미세한 변화까지 사랑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집은 이번 주 안에 비울게요. 필요한 절차는 변호사 통해서 진행하면 될 것 같고요.”

“한서윤 씨.”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었다.

아내라고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여보도, 당신도 아니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서윤 씨, 집에서는 한서윤 씨.

그 거리감이 처음에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선이라고 알았다. 지금은, 그저 끝내 넘지 못한 벽처럼 느껴졌다.

“말하세요.”

태오가 서류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조건을 바꾸고 싶습니까?”

서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조건.

역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윤이 이 밤까지 기다린 이유가 돈이나 집, 주식, 위자료 때문이라고.

“아니요.”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없어요.”

태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없다?”

“네. 아무것도요.”

서윤은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빠지지 않았다. 3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빼 본 적 없는 반지는 살 위에 옅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서윤은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힘을 주었다.

반지가 손가락을 빠져나왔다.

작은 금속음과 함께 식탁 위에 놓였다.

태오의 시선이 그 소리에 붙들렸다.

“그건 두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건 아니었으니까요.”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시선 하나에 먼저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의 침묵이 불편해서, 그의 무표정이 무서워서, 혹은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3년 동안 고마웠어요.”

서윤이 말했다.

태오의 입술이 굳었다.

“그 말은 이상하군요.”

“뭐가요?”

“마치 정말 끝내는 사람처럼 들립니다.”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창밖의 불빛들이 물에 번져 흐려졌다. 이 집은 늘 지나치게 넓고 조용했지만, 오늘따라 더 낯설었다.

“끝내는 거예요.”

그녀는 조용히 답했다.

“오늘이 그날이니까.”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가방은 이미 현관 옆에 놓여 있었다. 큰 짐은 낮에 모두 옮겼다. 태오가 회사에 있는 동안, 이 집에서 자신의 흔적을 하나씩 지웠다.

화장대 위의 립밤, 욕실의 칫솔, 드레스룸 한쪽에 걸려 있던 얇은 원피스들. 냉장고 안의 반찬통까지.

마지막으로 남긴 건 식탁 위의 반지뿐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갑니까.”

태오가 물었다.

“제 집으로요.”

“여기가 당신 집입니다.”

서윤의 손이 현관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말, 3년 전에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등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윤은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복도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실내의 온기와 전혀 다른 공기였다. 어쩐지 숨이 쉬어졌다.

그때, 태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서윤.”

이번에는 씨가 붙지 않았다.

서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태오는 식탁 곁에 서 있었다. 늘 완벽하던 셔츠의 소매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손은 식탁 모서리를 짚은 채였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

하지만 서윤은 그 작은 흔들림을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았다.

“서류는 내일 오전까지 보내 주세요.”

서윤이 말했다.

태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지금 나가면 후회할 겁니다.”

예전의 서윤이었다면 멈췄을 말이었다.

그가 던지는 낮은 경고, 익숙한 통제, 차가운 확신.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윤은 가만히 웃었다.

슬프지도, 화난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후회는 제가 충분히 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이제 차태오 씨 차례예요.”

태오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서윤의 손목을 잡으려는 듯 팔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그녀의 코트 소매에 닿기 직전, 멈췄다.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그제야 떠올린 사람처럼.

서윤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녕히 계세요.”

문이 닫혔다.

태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관문 너머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숫자가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이혼 서류와 반지가 놓여 있었다. 식어 버린 찻잔은 사라지고 없었다. 늘 당연하게 있던 것들이, 오늘은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태오는 천천히 식탁으로 돌아갔다.

반지를 집어 들었다.

작고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바닥이 무거웠다. 숨을 쉬는 법을 잠깐 잊은 사람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계약은 끝났다.

분명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가 원했던 결혼은 처음부터 감정 없는 결혼이었다.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침범하지 않는 관계. 태경그룹에 필요한 안정적인 그림. 그리고 3년 뒤, 조용한 이별.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왜.

태오는 빈 현관을 바라보았다.

왜 집이 이렇게 낯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 안의 반지를 세게 쥐었다. 금속의 둥근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유라의 이름이 떠 있었다.

태오는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태오 씨, 기사 봤어요? 우리 약혼 얘기, 슬슬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이혼 서류 위에 멈췄다.

서윤의 서명.

한서윤.

태오는 그 이름을 보며 낮게 말했다.

“정리 못 합니다.”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네?”

태오는 천천히 반지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알았다.

끝난 건 계약뿐이었다.

그는 아직, 한서윤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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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 끝나는 밤
비가 오고 있었다.한서윤은 식탁 위에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 위로 얇은 김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입술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차태오는 오늘도 마시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다. 서윤이 우려 놓은 차를 보고도, 정작 손을 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서윤은 매번 새 찻잎을 골랐다. 새벽 두 시에 돌아오는 사람의 위장을 생각했고,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를 생각했고, 피곤할 때마다 조금 굳어지는 그의 미간을 생각했다.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서윤은 찻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흰 도자기 잔이 차가운 물에 닿자 작은 소리가 났다. 맑고 짧은 소리였다. 꼭 무언가가 끝났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낮은 전자음이 울리고,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들어섰다. 차태오. 태경그룹 전략기획본부장. 그리고 서윤의 남편.정확히는, 오늘 자정까지 남편인 남자.“아직 안 잤습니까.”태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서윤은 물기를 닦은 손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결혼반지가 낀 손가락이 낯설었다. 3년 동안 익숙해지려 애썼지만, 끝내 제 것이 되지 못한 물건처럼.“기다렸어요.”태오의 손이 잠깐 멈췄다.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곧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무슨 일입니까.”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낮고 건조했다.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다정함은 없었다.서윤은 식탁 위에 놓아둔 봉투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태오의 시선이 봉투에 닿았다.“이게 뭡니까.”“이혼 서류예요.”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밖에서는 빗물이 창문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집요하게.태오는 서류를 바로 열지 않았다. 봉투 위에 놓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흰 종이 위에 보이지 않는 흠집이라도 있는 것처럼.“날짜가 오늘이긴 하군요.”그가 말했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계약서에 적힌 날이에요.”“알고 있습니다.”“그래서 준비했어요.”태오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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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에 남은 남자
차태오는 그날 밤, 결국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다.펜은 손에 쥐고 있었다. 검은 만년필의 뚜껑도 열려 있었다. 서류 맨 아래, 한서윤의 이름 옆 빈칸은 지나치게 깨끗했다.차태오.석 자만 쓰면 끝나는 일이었다.3년 전에도 그랬다. 결혼 서류에 이름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결혼이란 사업상 필요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한서윤은 그 결정의 조용한 상대였다.말수가 적고, 선을 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여자. 공식 석상에서 웃어야 할 때 웃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그의 곁에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태오는 그런 서윤이 편했다.편하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는 그때 몰랐다.펜촉이 종이 위에 닿았다.차.거기서 멈췄다.태오는 한참 동안 미완성된 성씨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잉크가 종이 섬유 사이로 아주 조금 번졌다. 마치 지워지지 않을 흠처럼.그는 펜을 내려놓았다.서명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니었다.다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넓은 집 안에 길게 울렸다.그는 습관처럼 주방 쪽으로 걸었다.컵장 두 번째 칸. 서윤이 늘 찻잔을 두던 자리였다. 손잡이가 얇은 흰 도자기 잔. 그녀는 그 잔을 태오의 것이라고 했다.태오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이 잔은 당신이 쓰세요.”“굳이 정할 필요 있습니까.”“필요 없으면, 제가 정할게요.”그때 서윤은 살짝 웃었다. 눈꼬리가 아주 부드럽게 접히는 웃음이었다.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날도 차를 반쯤 남겼다.그 잔은 없었다.컵장 안은 정리되어 있었다. 지나칠 만큼 말끔하게.태오는 문을 닫지 못했다.그는 주방 상판을 짚었다. 손끝에 차가운 대리석 감촉이 닿았다. 새벽마다 불이 켜져 있던 주방. 아무 말 없이 데워져 있던 국. 그가 손대지 않아도 다음 날이면 사라져 있던 찻잔.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있었다.그는 그걸 너무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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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은 오전 아홉 시에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밤새 비가 내린 골목은 아직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앞 작은 화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간판 아래로 희미한 햇빛이 번졌다.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서윤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은 창백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입술에도 옅은 색을 올렸다.괜찮아 보이는 얼굴.그거면 됐다.딸랑.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작업대 위에는 새벽 시장에서 들여온 꽃들이 놓여 있었다. 흰 라넌큘러스, 연분홍 작약, 짙은 녹색 유칼립투스.서윤은 코트를 벗고 앞치마를 둘렀다.가위를 소독하고,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자르고, 물통을 채웠다. 손끝이 차가운 물에 젖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손을 움직이는 일은 좋았다.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카운터 아래 서랍에 넣어 둔 휴대폰은 조용했다. 새벽에 마지막으로 본 메시지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내일 오전 10시. 네 스튜디오로 가겠다.서윤은 장미 줄기를 자르던 손을 멈췄다.오지 말라고 했다.그런데도 오겠다고 했다.늘 그랬다. 차태오는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향해 직선으로 걸어가고, 상대가 물러서지 않으면 그것을 장애물로 여기는 남자.서윤은 그런 태오의 방식 안에서 3년을 살았다.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나오기로 했다.오전 아홉 시 사십오 분.첫 손님이 들어왔다.“예약한 부케 찾으러 왔어요.”서윤은 미소를 지었다.“네, 준비해 뒀어요.”그녀는 냉장고에서 작은 웨딩 부케를 꺼냈다. 흰 장미와 스위트피, 은은한 안개꽃을 섞은 부케였다. 손님은 부케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너무 예뻐요. 진짜 제가 원하던 느낌이에요.”“다행이에요.”“대표님은 결혼하셨어요?”리본 끝을 정리하던 서윤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왼손 약지는 비어 있었다.하지만 반지가 있던 자국은 아직 희게 남아 있었다.“했었어요.”손님은 당황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서윤은 먼저 웃었다.“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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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름 뒤에 숨지 않겠습니다.
서윤의 손에서 미끄러진 계약서가 바닥에 흩어졌다.종이 몇 장이 회의실 테이블 아래로 밀려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것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정중한 미소와 형식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계약 결혼 의혹.그 짧은 단어 하나가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을 서윤에게로 끌어당겼다.서윤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괜찮아.아니, 괜찮지 않았다.괜찮을 리 없었다.3년 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결혼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리였고, 스스로 견뎌 낸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시간은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추문이 되어 있었다.계약서의 조항도, 식어 버린 찻잔도, 끝내 불리지 못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를 판단할 것이다.태경그룹 본부장의 계약 아내.버려진 여자.혹은 돈을 받고 결혼한 여자.상상은 너무 쉽게 이어졌다.서윤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누가 흘렸습니까.”태오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르듯 낮게 울렸다.그는 서윤의 옆에 서 있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였다. 그의 시선은 담당 팀장에게 향해 있었지만, 손은 아주 미세하게 서윤 쪽으로 움직여 있었다.마치 그녀가 무너지면 받아 내기라도 할 사람처럼.하지만 서윤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담당 팀장은 창백한 얼굴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아직 기사화된 건 아닙니다. 몇몇 온라인 매체 쪽에 초안 형태로 돌고 있는 단계입니다. 제목은…”그가 말을 흐렸다.태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읽어.”“본부장님.”“읽으라고 했습니다.”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태경그룹 차태오 본부장, 3년간 계약 결혼 의혹. 이혼 직후 정략 약혼 추진설까지… 라고 되어 있습니다.”회의실 안에 낮은 술렁임이 퍼졌다.서윤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이혼 직후 정략 약혼.그 말에 강유라가 아주 작게 웃었다.정말 작았다. 그러나 서윤은 들었다.“흥미롭네요.”강유라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아직 기사도 안 났는데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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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몰랐던 결혼
“나만 몰랐던 건가요?”수화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낮고, 조용하고, 차가웠다.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숨겨 온 진실은 한 문장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웠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서윤은 웃었다.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그렇구나.”“서윤 씨.”“대답 안 해도 알겠어요.”“듣고 설명하겠습니다.”“설명?”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차태오 씨는 늘 그래요. 말하지 않고 숨겨 놓고, 일이 터진 뒤에야 설명하겠다고 해요.”태오는 눈을 감았다.틀린 말이 아니었다.그는 늘 중요한 것을 결정한 뒤에 통보했다. 상대가 받을 충격보다, 문제가 정리되는 속도를 먼저 생각했다. 그것이 책임이라고 믿었다.서윤에게도 그랬다.그게 얼마나 잔인한 방식이었는지, 그는 너무 늦게 배웠다.“지금 어디입니까.”태오가 물었다.“왜요.”“기자가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혼자 있으면 위험합니다.”“또 보호하려고요?”“그게 아닙니다.”“그럼 뭔데요.”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섞였다. 그녀는 밖에 있는 듯했다.그 사실에 태오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한서윤 씨, 지금 위치 말하십시오.”“명령하지 마세요.”그 한마디가 태오의 입을 막았다.서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저 지금 태경호텔 앞이에요.”태오의 몸이 굳었다.“거기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내가 갑니다.”“오지 마세요.”“서윤 씨.”“제가 물을 게 있어요.”태오는 입술을 다물었다.서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약해서가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의 떨림이었다.“3년 전 계약서에, 제 아버지 회사 채무 정리 조건이 있었다는 말. 사실이에요?”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사실입니다.”정적.수화기 너머에서 서윤의 숨이 아주 작게 끊겼다.“그러면…”그녀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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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빚
당신 아버지입니다.서윤은 화면 위의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처음에는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아버지. 너무 익숙한 단어라서, 오히려 낯설었다. 어릴 때 자신을 업어 주던 사람.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서 있던 사람. 서윤이 플라워 스튜디오를 처음 열었을 때,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와 어색하게 웃던 사람.그 사람이.자신의 결혼 계약서를.기자에게 넘겼다고.서윤의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휴대폰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강유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보았다.“무슨 연락이라도 받으셨어요?”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카페 안은 평범하게 시끄러웠다. 컵이 부딪히는 소리, 에스프레소 머신이 작동하는 소리,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그런데 서윤의 안쪽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기자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서윤은 천천히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화면에는 태오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당신 아버지입니다.그 아래로 새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정확히는 한서윤 대표님의 부친이 처음 자료를 넘겼고, 이후 익명 계정을 통해 확산된 정황이 있습니다. 지금 확인 중입니다.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확인 중.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확인할 필요가 있을까.사람은 가끔, 증거보다 먼저 진실을 알아차린다. 피하고 싶었던 조각들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다.아버지가 갑자기 연락이 뜸해졌던 것.이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래도 너무 섣불리 결정하지 마라”라고 말하던 목소리.태오와 정리하겠다고 했을 때, 대뜸 돈 이야기를 묻던 태도.그 모든 것이 이제 다른 의미로 되돌아왔다.서윤은 휴대폰 연락처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다.한기석.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잠시 멈췄다.누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누르지 않으면, 또 남들이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할 것이다.서윤은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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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의 아버지
스튜디오 유리문 너머로 아버지가 서 있었다.한기석.서윤은 그 이름을 속으로 천천히 불렀다.아버지라고 부르면, 또 무너질 것 같아서.그는 비에 젖은 코트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문은 잠겨 있었다.한기석이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아당겼다.딸랑.문 위의 작은 종이 흔들렸다.“서윤아.”유리문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문 열어. 아빠랑 얘기 좀 하자.”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작업대 위에는 아직 쓰다 만 공식 입장문이 떠 있었다.저는 제 인생을 더 이상 타인의 입으로 설명하게 두지 않겠습니다.그 문장을 적을 때까지만 해도 손은 떨리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손끝이 차가웠다.아버지의 뒤쪽, 골목 끝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우산 아래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서윤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알았다.아버지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문 안 열어요.”서윤이 말했다.한기석의 얼굴이 굳었다.“뭐?”“거기서 말씀하세요.”“이런 얘기를 밖에서 어떻게 하냐. 비 오잖아. 문 열어.”“카메라 보내고 오세요.”한기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아주 짧은 순간이었다.하지만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무슨 카메라?”“아빠 뒤에 있는 사람요.”“기자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이야.”서윤은 조용히 웃었다.아는 사람.기자에게 계약서를 넘긴 것도 직접 넘긴 건 아니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자기가 한 일의 이름을 흐렸다.거짓말이 아니라 오해.협박이 아니라 걱정.이용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선택.서윤은 휴대폰을 들어 녹화 버튼을 눌렀다.“그럼 저도 녹화할게요.”한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아빠가 데려온 사람도 찍고 있잖아요.”“찍는 거 아니라니까!”“저도 녹화하는 거 아니에요.”한기석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렸다.서윤은 유리문 가까이 다가갔다.하지만 문은 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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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수증
서윤은 한동안 봉투를 열지 못했다.젖은 종이봉투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가 빗물에 젖어 조금 울어 있었고, 안쪽의 서류들이 봉투 모양을 따라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아버지는 떠났다.카메라를 든 사람도 사라졌다.하지만 스튜디오 안에는 아직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네 엄마 병원비도 그 돈에서 나왔어.서윤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아버지의 빚.태경의 지원.계약 결혼.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그런데 거기에 엄마의 이름까지 얽혀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봉투 입구를 열었다.젖은 종이가 힘없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안에는 서류 뭉치가 들어 있었다.채무 조정 내역서.부속 합의서 사본.오래된 병원비 영수증.그리고 태경그룹 로고가 찍힌 내부 검토 문서.서윤은 가장 위에 있던 병원비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납부자명.차명환.그 이름을 보는 순간, 서윤은 숨을 멈췄다.차명환.태경그룹 회장.차태오의 아버지.영수증 위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한미정.진료일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약 1년 전이었다.서윤은 눈을 깜빡였다.글자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그녀는 영수증을 내려놓고 다음 서류를 펼쳤다.의료비 선지원 확인서.한미정 측 의료비 일부를 태경 측이 선지원한다.해당 금액은 한기석 대표의 기존 채무와 별도 관리한다.향후 혼인 계약 체결 시 별도 정산하지 않는다.서윤의 손이 멈췄다.혼인 계약.어머니의 병원비와 자신의 결혼이 같은 문서 안에 적혀 있었다.서윤은 다시 읽었다.그리고 또 읽었다.뜻은 바뀌지 않았다.엄마가 아팠을 때부터, 이미 자신은 태경의 계산 안에 들어가 있었다.3년 전 갑자기 시작된 계약이 아니었다.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진 거래였다.서윤은 의자에 앉았다.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그런데 웃을 수 없었다.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그런데 울 수도 없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차태오였다.서윤은 한참 동안 화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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