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씨 가문을 떠올리니 다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리고 아까 오는 길에 나씨 가문 집사와 통화했던 내용을 장선명에게 다시 한번 얘기해 주었다.끝까지 들은 장선명은 입가를 매만지며 물었다.“유서만 남기고 사라졌다고?”“그래요. 이건 또 뭐 하려는 수작인지...”안지영은 이미 나태웅에 대한 호감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것도 그저 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정말... 어떻게 보면 표도 안 사고 나태웅의 일인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대단한 쇼라서 안지영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몰랐다.안지영뿐만이 아니라 장선명도 지금 이 상황에 약간 놀랐다.“그럼 지금 나씨 가문에 가려는 거야?”“가야죠. 그리고 나씨 가문 사람들한테도 알려줘야죠. 나는 이미 유부녀라고. 그러니 날 어쩌지 못한다는 걸요.”나씨 가문을 떠올리면 안지영은 그들은 뻔뻔함 빼면 시체라고 생각했다.“그럼 같이 가.”“괜찮아요. 설마 날 잡아먹기라도 하겠어요?”안지영이 손을 저으면서 얘기했다.장선명도 바쁜 몸이었다. 하지만 나씨 가문 일 때문에 안지영과 함께 다녔던 것이다.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얘기했다.“그러면 하나만 더 가져가.”“뭐요?”“일단 차에 타서 얘기해.”말을 마친 장선명은 외투를 안지영 몸에 걸어주었다.장선명의 온도가 안지영을 품에 안는 것만 같았다.걱정했던 안지영은 그 덕분에 안심되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장선명은 안지영의 혼인 관계 증명서를 건네주면서 청첩장을 건네주었다.이 청첩장은 전부터 준비한 것이다.하지만 나씨 가문 사람들 때문에 날짜를 연거푸 몇 번이나 고쳤다.“청첩장이요?”“어쩌다가 나씨 가문에 가는 건데 청첩장도 돌려야지.”“...”나태웅이 유서를 남긴 이 시점에, 나태범에게 청첩장을 돌리라니.장선명의 수단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안지영이 청첩장의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청첩장을 펼쳤다.결혼 날짜는 보름 뒤였다.“이 날짜... 더
“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요.”안지영이 중얼거리면서 얘기했다.안지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웅의 죽음에 왜 본인이 결혼을 취소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장선명은 안지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나태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지영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장선명은 안지영과 함께 가지 않았다. 나씨 가문에 도착한 안지영은 이곳의 분위기가 아주 음산해진 것을 느꼈다.안으로 들어가니 나태범이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면서 안지영을 찢어버릴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집사의 태도도 좋지 않았다.“이거 보세요.”집사는 나태웅의 유서를 안지영에게 건네주었다.안지영은 그 유서를 받지 않고 집사를 보면서 물었다.“제가 볼 필요가 있나요?”안지영은 본인과 나태웅의 사이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싶었다.안지영의 차가운 태도에 집사와 나태범은 마음이 아팠다.나태웅이 안지영 때문에 무슨 짓까지 했는데, 안지영의 태도는 여전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지금 나태웅은 유서를 쓰고 사라진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안지영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다.안지영은 집사와 나태범의 시선 아래서 대답했다.“저랑 나태웅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안지영이 직설적으로 얘기하자 나태범이 불만스럽게 말했다.“태웅이가 지금 사라진 건 다 너 때문이야!”“왜 저 때문이죠”“지금까지 태웅이한테 전화라도 해 봤어? 태웅이 비서랑은 연락해 봤어?”“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왜 나태웅 씨한테 전화하고 나태웅 씨 비서한테 연락을 해야죠?”마치 나태웅이 사라져서 안지영이 안달 난 것처럼 말이다.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나태범의 질문에 안지영은 어이가 없었다.나태범은 무표정한 안지영을 보면서 화를 뿜어냈다.“태웅이는 너 때문에 사라진 거라니까!”“어르신 때문이잖아요!”안지영이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나태범과 집사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의아함과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안지영은 마른침을 삼키고 이어서 얘기했다.“그렇게 보지 말아주세요.”“너 아직 장선명과 결혼한 것도 아니면서, 왜 유부녀라고 하는 거야.”나태범이 정신을 차리고 화를 냈다.“...”나태범의 얼굴을 마주한 안지영은 천천히 가방에서 혼인 관계 증명서와 청첩장을 꺼내 집사에게 건네주었다.집사는 그것을 받고 확인해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바로 나태범에게 달려가 건네주었다.나태범은 안지영과 장선명의 혼인 관계 증명서를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어버렸다.게다가 혼인신고를 한 날짜가 오늘이라니.그 순간 나태범은 호흡이 거칠어졌다.나태범이 안지영을 노려보면서 얘기했다.“너, 너 아까 전화를 받고 나서 장선명과 결혼하러 간 거야?”나태범은 이를 꽉 깨물고 겨우 얘기했다.혼인 관계 증명서에 적힌 시간을 보니 집사와 전화한 후였다.그러니까, 안지영은 나태웅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도 바로 달려오지 않고 먼저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이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나태범은 흉악한 시선 속에서 안지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런 안지영의 모습을 보면서 나태범은 화가 나서 당장 폭발할 것만 같았다.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오늘 같은 날 결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나태범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집사도 좋지 않은 표정으로 안지영을 보면서 말했다.“안지영 씨, 이건 선을 넘으신 겁니다.”마치 안지영이 혼인신고를 하러 간 게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은 너나 할 거 없이 안지영에게 비난을 쏟아냈다.안지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이건 나와 선명 씨의 선약이었어요. 우리의 결혼식이 나태웅 씨 때문에 자꾸만 미뤄졌으니까요. 그래서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안지영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설마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통보라도 해주길 바란 건가?나씨 가문이 뭔 대
그리고 나태범은 그런 나태웅을 믿었다.하지만 안지영은 나태웅의 유서를 믿지 않았다. 그저 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나태웅이 전에 하던 짓을 보면 이런 쇼를 벌이는 것도 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동영그룹에 있을 때는 멀쩡했던 사람이 왜 천락그룹에 오니 이렇게 된 것인지.안지영은 알 수가 없었다.나태범은 차갑고 예리한 시선으로 안지영을 쏘아보면서 겨우 입 밖으로 말을 뱉어냈다.“먼저 들어가 봐.”“어르신, 안지영 씨를 지금 보내는 건...”“가라고 해!”옆에서 집사가 말리자 나태범이 단칼에 거절하면서 얘기했다.안지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역시 어르신이 명쾌하시네요.”안지영의 말에 나태범은 더욱 화가 나서 차갑게 코웃음만 쳤다.‘모든 사람들이 다 본인처럼 교양 없이 사당이나 부수는 줄 알아?’안지영은 청첩장을 꺼내 나태범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가져가!”이런 상황에 청첩장을 돌리다니. 나태범은 기가 차서 화병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만약 나태웅이 있었다면 안지영은 나태웅에게도 청첩장을 줬을 것이다.나태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안지영은 소리를 지르는 나태범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나태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집사는 그런 안지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걱정스레 나태범을 쳐다보았다.“어르신,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나태범과 집사는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나태범은 숨을 몰아쉬면서 얘기했다.“얼른 사람을 풀어 찾아봐!”“이미 사람을 풀었습니다.”사람을 풀어 나태웅을 찾은 지는 한참이나 되었다.“이 유서를 누가 보낸 것인지는 알아봤어?”나태범이 힘이 다 풀린 채 물어봤다.나태범은 너무 걱정되었다.본인 아들이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나태범은 허씨 가문과의 약혼이 나태웅을 이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될 줄은 몰
나씨 가문에서 나온 안지영은 바로 장선명의 회사로 갔다.안지영이 온다는 것을 안 장선명은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안지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장선명을 본 안지영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면서 기뻐했다.“아까 나태범 어르신 표정이 어찌나 볼만하던지.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표정이었어요.”안지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무섭지는 않았어?”장선명은 안지영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안지영은 가볍게 시선을 돌리다가 장선명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 이거 언제 찍은 거예요!”안지영이 놀란 목소리로 장선명을 향해 물었다.이 사진은 전에 장선명이 물려서 입원해 있을 때, 안지영이 그를 간호해 줄 때의 사진이었다.사진 속의 안지영은 두 눈을 꼭 감고 잠에 빠져있었다.장선명은 얼른 그 액자를 빼앗아 갔다. 마치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표정도 어색했다.“만지지 마.”“...”‘내 사진인데 보지 못하게 하는 거야? 게다가 왜 부끄러워하는 건데.’안지영은 장선명이 본인 사무실에 자기 사진을 둘 줄은 몰랐다. 장선명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나태웅이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되지도 않아?”장선명이 안지영을 품에 안아 물었다.누가 봐도 어색해서 화제를 돌리는 거였다.하지만 그 화제에 안지영은 바로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나태웅이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태웅과 안지영의 사이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안지영의 화를 사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장선명은 안지영이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두 사람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안지영은 상대를 믿고 상대에게 기대기도 한다.하지만 그 신뢰를 저버리는 순간, 안지영은 바로 상대방과 모든 것을 끊어버린다.나태웅이 어떤 실수를 해왔는지 알기에, 장선명은 그것들을 나쁜 예시로 삼으며 배워갔다.“그렇긴 하네.”엄밀히 얘기하
고은지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8시였다.어두운 복도를 따라 위로 올라가니 문 앞에는 량천옥이 서 있었다.그 옆에는 작은 캐리어까지 있었다.얼마나 기다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량천옥은 고은지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면서 얘기했다.“은지야, 나 너랑 같이 살려고 왔어.”“그러지 마세요. 당신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잖아요. 배씨 가문을 떠난다고 해도 그 신분은 바뀌지 않아요.”고은지의 말투는 아주 평온했다.량천옥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량천옥은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웃고 있던 눈에는 어느새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미안해.”지나간 과거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겠지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사과뿐이었다.하지만 그 사과만으로 지난날 고은지가 받은 상처를 모두 치유해 줄 수는 없었다.지금 고은지와 나태현이 대치 상황에 놓인 것도 다 량천옥 때문이니까 말이다.만약 량천옥의 친딸이 아니었다면, 나태현이 고은지의 아이를 빼돌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난 사과를 원한 게 아니에요. 그저 날 찾아오지 않았으면 해요.”고은지가 똑똑히 얘기했다.그 차가운 말투를 들은 량천옥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변명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널 방해하기 위한 게 아니야. 그냥 지금부터 내가 널 챙겨주고 싶어서 그래. 은지야, 제발 나한테 기회를 줘.”량천옥이 목이 메어 얘기했다.전에 고은지와 고은영을 짓밟고 무시하던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그런 기도 앞에서 고은지는 차갑게 량천옥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량천옥이 덧붙였다.“너랑 같이 살게만 해줘. 제발.”량천옥은 받아주지 않으면 가지 않으려는 태도로 얘기했다.고은지를 지켜주고 싶은 건 진심이다.량천옥은 나태범이 무슨 짓을 벌일지 너무 걱정되었다.나태범은 겉으로 봤을 때는 강경하고 무서운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겁쟁이에 불과하다.나태범이 안지영에게 뭐라 하는 것도, 그저 나태웅
결국 량천옥은 고은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조금 낡긴 했지만 고은지가 깨끗하게 잘 정돈해 놓고 있었다.량천옥은 여태껏 큰 집에서 살아왔지만 지금 이 집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 집은 편안한 느낌을 주니까 말이다.고은지는 이 집에 들어오고부터 량천옥과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주방에 들어갔다.결국 량천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희주의 일은 나한테 맡겨둬. 이제 슬슬 단서가 보이기 시작하거든.”면을 삶고 있던 고은지는 량천옥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량천옥을 쳐다보았다.그 눈빛에 량천옥은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왜, 왜 그러는 거야?”“누가 알아봐달라고 했어요?”고은지가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은지야, 그게...”‘내가 알아보는 게 싫은 건가?’량천옥은 겁을 먹고 고은지를 쳐다보았다.량천옥은 그제야 알았다. 아무리 본인이 낳은 아이라고 하지만 량천옥은 고은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고희주의 일만 봐도, 량천옥은 고은지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은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희주는 지금 아빠랑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찾아보는 거예요?”“희주 때문에 나태현한테 협박받는 거 아니었어?”고은지가 차갑게 웃으면서 얘기했다.“누가 그래요? 내가 협박받은 거라고?”“...”량천옥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고은지가 원해서 나태현 곁에 있는 거란 말인가?그럴 수가 없었다.나태현은 이미 지신혜와 약혼했다. 물론 약혼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곧 약혼할 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다.“그러면 얘기해 줘. 네가 원해서 나태현 곁에 남아있는 거야?”량천옥은 겨우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다.고은지는 차가운 눈으로 량천옥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면을 삶았다.고은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량천옥은 긴장되었다.그녀는 고은지와 나태현이 얽히지 않았으면 했다.게다가 그때의 일...그 일이 누구의 잘못인지는 몰라도 나태
아까 주방에서 말을 걸었지만 고은지는 대답 한 번 하지 않았다.고은지는 량천옥을 집으로 들이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량천옥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춘기 아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때 고은지의 핸드폰이 울리며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타파했다.고은지는 걸려 온 전화번호를 보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량천옥은 핸드폰 위에 비치는 글씨를 힐긋 보았다.육 씨인 사람이었다.하지만 량천옥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은지가 방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지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량천옥은 이미 불어버린 면을 보면서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면을 삶아주었다.방에서 나온 고은지는 갓 나온 면을 보고 다시 량천옥을 쳐다보았다.량천옥은 차가운 고은지의 눈을 마주하고 얘기했다.“면이 불었길래 다시 삶았어.”오늘 저녁은 볼품없는 삶은 소면이었다.하지만 량천옥은 불평불만 없이 잘 먹었다.그리고 불어버린 면이 아까운 듯 본인 그릇에 둔 채로 있었다.“나갔다 올게요.”말을 마친 고은지는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량천옥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어디 가려고? 내가 데려다줄게.”“괜찮아요.”말을 마친 고은지는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며 문을 닫았다.량천옥은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은 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고은지를 뒤따라가지 못한 량천옥은 결국 정록담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지를 따라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알겠습니다. 사모님.”전화기 너머의 정록담이 공경하게 얘기했다.량천옥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그래도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잖아.’고은지는 밖으로 나간 후 바로 천락그룹으로 갔다.택시를 잡은 고은지는 천락그룹의 정문이 아닌 뒷문에 도착했다.정록담은 량천옥의 명령대로 고은지를 따라왔다.그리고 량천옥에게 문자를 남겼다. 고은지가 천락그룹에 온 걸 보니 아마 야근을 할 것 같다고 말이다.“이 늦은 시간에 야근을 한다고? 나태현, 정말 뭐 하는
“나태웅이 두려워하는 게 뭐 있어요!”안지영이 화를 내면서 얘기했다.나태웅은 장선명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안지영에게 있어서 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게다가 나태웅이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게 사람 맞나 싶을 정도였다.“나태웅은 극단적인 거지 멍청한 건 아니야.”나태웅은 본인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안지영 앞에 나타난 걸 떠올리면... 장선명은 그런 나태웅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그래도 이 사진들은 다 사실이죠.”“네가 이 사진 때문에 화를 내는 건 기쁜 일이지만 너한테 제대로 얘기해야 할 게 있어.”거기까지 얘기한 장선명이 말을 끊었다.안지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뭐요?”장선명과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안지영은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소문 속의 장선명은 냉철하고 칼같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안지영 앞의 장선명은 항상 웃는 얼굴로 자상하게 안지영을 대해주었다.그래서 안지영은 장선명이 도대체 왜 본인과 결혼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비즈니스 때문에 시작한 부부 연기인데 말이다!사실 처음부터 안지영은 장선명이 왜 본인을 도와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태웅이 가져온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코끝으로 안지영의 코끝을 가볍게 눌렀다.“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그 말을 들은 안지영은 심장이 순간 멎는 것 같았다.“정, 정말이에요?”‘잘못 들은 건가? 그 사람이 선명 씨한테 엄청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현재의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 사람을 이미 다 잊었으니까 너랑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장선명은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안지영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장선명을 쳐다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얘기했다.“그렇게 많은 여자들이랑...”“나랑 그 사람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안열이 전에 얘기해줬을 텐데.”“그래도 남자들
“얘기해 봐. 어떻게 해야 화를 풀 거야.”“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정도였다면서요! 내가 화를 안 내고 배겨요?”안지영이 차갑게 얘기했다.“...”장선명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물었다.“내가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거야? 나는 왜 모르겠지.”“이...”안지영은 인정하지 않는 장선명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났다.“정말 화가 난 거야?”“당연하죠. 난 대용품이 되고 싶지 않다고요!”장선명은 화가 난 안지영을 보면서 본인이 왜 안지영에게 빠진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안지영은 느낀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가식적으로 돌려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래서 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이 좋았다.“누가 그래, 네가 대용품이라고. 나태웅이 그래?”장선명이 안지영의 두 볼을 가볍게 꼬집으면서 얘기했다.그 말투는 마치 딸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부드러웠다.안지영은 장선명을 힐긋 보더니 얘기했다.“수많은 사진이 증명하고 있잖아요.”그 사진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그 사진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절대 나태웅을 믿지 마. 응?”“흥.”“아직도 화가 난 거야?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안 들을래요!”안지영은 아예 고개를 홱 돌렸다.안지영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가감 없는, 상대방에게 본인이 왜 화가 났는지 잘 알려주는 사람이었다.장선명은 화가 나 등을 돌린 안지영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원래는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반응을 보니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알았어. 설명할게.”한숨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이 일로 화를 내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요. 됐어요. 설명하지 마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진실이 두려워서 듣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장선명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왜? 내가 널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그 말에 안지영은 또 참지 못하고 장선명을 가볍게 때렸다.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
안지영은 오후 두 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하지만 안열은 사무실에서 안지영을 발견하지 못했다.‘설마 내가 한눈판 사이에 두 분이 나간 건가?’1시 30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안열은 급한 마음에 얼른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받은 건 장선명이었다.“무슨 일이야.”그 말에서 안열은 이미 장선명의 짜증을 읽어냈다.안열은 약간 놀랐다.“선, 선명 도련님? 30분 뒤 안 대표님이 참석하셔야 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습니다. 지금 안 대표님은 어디에...”휴게실에 있는 장선명은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자고 있는 안지영을 쳐다보았다.오전에 너무 과했던 탓일까, 안지영은 계속 쭉 자고 있었다.“그냥 회의를 취소해.”“네? 그건...”“무슨 문제라도 있어?”“아, 아니요. 오늘 회의는 부승호도 참석하는 회의라... 알잖습니까.”부승호는 바로 하늘 그룹을 배신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번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장선명은 바로 알 수 있었다.장선명이 차가운 눈빛으로 얘기했다.“부승호한테 얘기해. 오늘 저녁 날 만나러 오라고.”“직접 나서서 안 대표님을 대신하실 생각입니까?”안열이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안지영이 성장할 수 있게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던가.그래서 안열과 장선명 다 안지영의 뒤에서 묵묵히 안지영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동안 안지영은 많은 일을 혼자서 해결했다.부승호와 마주하는 것도 안지영에게 있어서는 그동안의 실력을 검증할 가장 좋은 기회다.“무슨 문제라도 있어?”그 말에 안열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아닙니다!”안열은 여전히 장선명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장선명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안열은 얼른 눈치껏 전화를 끊었다. 장선명은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하고 바로 폰을 꺼버렸다.안지영은 이미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지금 몇 시예요?”“피곤하면 그냥 자.”장선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안지영은 눈
테이블에는 다른 사진이 더욱 많았다.나태웅은 정말 이를 갈고 해외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이것까지 다 알아내다니...이건 장선명의 가장 어두운 과거이자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하지만 그 일들이 지금은 나태웅 때문에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그동안 장선명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마주할 수 없었던 과거들이었지만, 안지영이 건네준 사진을 보면서 장선명은 어느새 그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내려놓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와서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 여자가 누구인지 얘기하라고요!”안지영이 화가 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장선명의 품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전히 안지영을 꾹 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안지영의 앞에서 사진을 바로 불태워버렸다.“뭐, 뭐 하는 거예요!”안지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장선명은 불에 탄 사진을 그대로 재떨이 속으로 던져버렸다.담배를 피우는 장선명을 위해 안열이 준비해 둔 재떨이였다.안지영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그동안은 쓸모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했다.테이블 위의 사진은 다 재떨이 안으로 들어가 활활 타올랐다.안지영은 멍해서 물었다.“그렇게 변명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변명? 이건 다 지나간 일일 뿐이야.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다 잊었고. 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나네.”“...잊었다고요?”안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안열이 그러지 않았던가.장선명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고.사진 속의 여자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걸 보면 장선명은 정말 그 여자를 아주 사랑한 것 같았다.그런데 그걸 잊다니.안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그런 안지영의 모습을 본 장선명은 환하게 웃으면서 안지영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또 입술을 맞췄다.“읍... 아니, 읍...”‘미남계를 쓰겠다는 거야?’안지영은 약간 화가 났다. 원래 이런 건 그냥 두면 찝찝한 편이다. 사실을 알지 못하면 마음에 걸리니까 말이다.
사무실에 들어간 장선명은 안지영이 그를 등지고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미 뒷모습에서부터 안지영의 화난 모습이 보였다.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돌린 장선명이 두 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잡았다.그리고 웃는 눈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이 화가 나서 씩씩 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더욱 환하게 웃었다.하지만 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났다.“웃겨요?”“질투하는 거야?”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화 안 났어요. 난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에요.”“그래?”“...”질투냐고?안지영은 질투가 뭔지 몰랐다.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속이 좋지 않았다.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안지영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번쩍 안아 들고 의자에 앉은 것이었다.장선명은 웃음기 가득한 시선으로 안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지영은 놀라서 허둥대면서 얘기했다.“이거 놔요!”하지만 장선명은 움직이는 안지영을 놔주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가져갔다.안지영이 버둥댈수록 장선명은 더욱 깊게 안지영의 입술을 머금었다.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결국 안지영이 숨을 쉬지 못하자 장선명이 안지영을 풀어주었다.안지영이 손을 들어 장선명의 뺨을 치려고 할 때, 장선명이 안지영의 손목을 잡고 웃으면서 물었다.“화났어?”“흥.”안지영은 화가 났다.그것도 단단히 화가 났다.안지영은 장선명이 점심 전에 도착한 것이 분명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안열이 알려줬을 테니까 말이다.그런데 와서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입술부터 들이미니, 너무 미웠다.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을 보면서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오히려 속 편히 웃으면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지막에는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그렇게 화가 난 거야?”말을 마치고는 안지영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안지영은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오자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안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열을 바라봤다. 안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어휴, 됐어요. 더 얘기해 봤자 짜증만 나요.”더 말했다간 정말 참지 못하고 화를 낼 것 같았다.나태웅에 대해 할 욕은 이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안지영은 뾰로통해진 채로 안열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안열은 휙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지금 안열의 머릿속에는 나태웅에 대한 욕뿐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감히 또 안지영을 찾아오다니.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온 건지......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안지영은 아까 안열이 한 말을 떠올렸다.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평소에는 똑 부러지고 영리한 안지영이지만, 이번만큼은 안열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뻔뻔하다는 뜻이라면... 나태웅은 원래부터 그렇게 뻔뻔했다.하지만 이번은...안열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휙 털었다.그리고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장선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는 장선면은 점심쯤에 안지영을 데리러 올 예정이었지만, 안지영의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왔다.안지영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장선명은 안열이 자리에 앉아 아이스팩을 발 위에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다리는 왜 그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안열은 깜짝 놀라 손에 쥔 아이스팩을 떨어뜨릴 뻔했다.장선명을 보자, 안열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읏...!”하지만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는 장선명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안열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안열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나태웅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해 그저 둘러댔다.“그냥...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 “어떻게 넘어졌길래 거기만 그렇게 다치는 거야?” 장선명의 시선은 예리했다.보통 넘어진다면 무릎이 먼저 다치기 마련인데 안열은 무릎은 멀쩡하
나태웅은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태웅이 가져온 정보 때문에 안지영은 더욱 속이 복잡해졌다.안열은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약 좀 바르고 올게요.”그 말에 안지영은 생각이 끊겨버렸다.정신을 차린 안지영은 안열의 발등이 부어올랐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선명이 사랑하는 사람...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안열은 본 안지영은 결국 또 나태웅에게 화가 났다.“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정말 나태웅을 못 이기는 거예요?”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맞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밖에서 싸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안열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제가 만약 나태웅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겁니다.”“...”진작 죽여버린다니.그 ‘진작’은 과연 언제일까?다시 생각해도 나태웅은 정말 독설만 퍼붓는 사람이었다. 안열을 볼 때마다 개라고 욕하니까 말이다.그래도 전에 동영 그룹에서 출근할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안지영은 우물쭈물하면서 안열에게 물었다.“두 사람, 전에도 안 좋은 사이였어요?”안열과 나태웅이 만날 때마다 안열은 대수롭지 않아 했고 나태웅은 화를 냈었다.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렇게 물으면서 안지영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안열이 거의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했다.“앗... 아파요... 아파...”“...”안열은 평소에 고통에도 끄떡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니 나태웅이 얼마나 아프게 때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제가 무슨 원한이 있겠어요! 한 것도 없는데...”“...”“굳이 꼽자면... 안 대표님 일로 원한이 있는 거죠.”“나요?”“네. 저는 안 대표님이 선명 도련님과 결혼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요?”안열을 말을 들은 안지영은 약간 마음이 복잡했지만 또 본인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안열은 장선명의 부하로
“난 대체 누구의 대용품이었어요?”안지영이 바로 물었다.안열은 장선명과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사진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러니 장선명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건...”“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거예요?”안지영이 또 물었다.“...”안열을 그 어느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안열은 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안지영이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지, 안열은 잘 알았다.물론 안지영과 장성명의 사이가 안지영 때문에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장선명에게 설레지 않았다면 안지영은 장선명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안열은 결국 또 속으로 나태웅을 욕했다.“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선명 도련님이 안 대표님과 결혼하려는 건 안 대표님을 사랑해서지,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니까요.”“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직도 연락해요?”“절대 아닙니다. 제가 맹세할게요!”안열이 진지하게 얘기했다. 안지영이 괜히 장선명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열을 쳐다보았다. 안열은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약간 긴장했다.“진짜예요. 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선명 도련님이 얼마나 칼 같은 분인지 잘 알잖아요.”“하긴, 안열 씨는 선명 씨 사람이니까 그편을 들겠죠.”“아니요, 전 안 대표님 편입니다. 같은 여자로서요.”“나도 그 어떤 여자의 대용품이었겠죠.”“그건 다른 거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태웅이 왜 갑자기 이 일을 들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어요!”안열은 정말 나태웅을 죽여버리고 싶었다.요즘 나씨 가문에 생긴 일을 보면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쓰레기였다.“죽었다고요?”안지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다들 모르는 일이잖아요!”안지영이 놀라서 얘기했다.장씨 가문 남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냉정하다는 소문을
안지영은 약간 생각하더니 얘기했다.“그런데 그렇게 욕한 게 오늘이 처음인 건 아니지 않아요?”“...”안지영이 그렇게 얘기하자 안열은 더욱 화가 났다.“저를 볼 때마다 저한테 개라고 욕해요. 개자식... 개같은 건 본인이면서! 나씨 가문 전체가 그냥 다 개예요!”안지영은 이마를 짚으면서 그 말을 들었다.“안열 씨를 그렇게 욕하고서도 잘 살아있다니... 신기할 정도네요.”안열이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지, 이제는 안지영도 잘 알았다.하지만 나태웅은 번마다 안열을 욕하면서 멀쩡히 살아있으니, 안지영은 약간 놀라웠다.“못 이긴다니까요!”“...”도대체 나태웅의 실력이 얼마나 좋기에 안열도 상대할 수 없는 걸까.“됐어요. 나태웅 얘기하면 기분이 잡치니까 그만 해요.”나태웅은 그런 존재다.언급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사람이다.“그건 맞아요. 짜증 나는 사람이죠.”안지영은 나태웅이 정말 너무 싫었다.“그러니까 무조건 승소해요!”너무 화가 나니 아무리 나태웅 얘기를 꺼내지 말자고 해도 결국 나태웅 얘기를 꺼내게 된다.안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분명 승소할 겁니다!”안지영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안열뿐만이 아니라 안지영도 화가 난 상태다.안지영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너무 화가 나서 이 화를 전부 나태웅에게 쏟아버리고 싶었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꼭 이기게 해줄게요!”나태웅을 고소하려던 건 안지영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그 뜻인즉슨 나태웅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건드렸다는 것이다.안열은 안지영 앞에 있는 사진을 슬쩍 보았다. 안에는 장선명도 있는 것 같았다.“뭘 보는 거예요?”그렇게 물으면서 사진을 확인하려던 때, 안지영이 빠르게 사진을 가져가려고 했다.하지만 안열이 그 중 한 장을 손에 넣었다.사진을 본 안열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지영의 표정도 그대로 굳어버렸다.안 그래도 아까 일 때문에 화가 났는데, 나태웅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