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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5화

작가: 송언희
다음 날.

량천옥은 곧장 천락 그룹으로 찾아왔다.

나태현은 밖에서 따로 만나고 싶었지만 량천옥은 여러 이유로 거절하다가 결국 직접 회사를 찾았다.

그녀를 본 순간, 나태현의 표정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그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고은지를 데리고 가세요. 조건이 뭐죠?”

구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량천옥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이거야?”

“당연하죠.”

나태현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그 눈빛엔 일말의 온기조차 없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을 철저한 원수로 보는 듯했다.

그런 시선을 마주한 량천옥은 속이 뒤틀릴 만큼 비웃음이 치밀었다.

‘역시, 이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집안이라니까.’

그녀는 손끝으로 잘 정돈된 네일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그 애가 네 아이까지 낳아줬는데 너는 정말 그 애한테 조금의 정조차 없는 거야?”

‘비록 그 아이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돌이켜보면, 이번 일에서 먼저 잘못한 쪽은 나태현이었다. 고은지는 단 한 번도 결혼 관계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아이를 품게 된 것이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절대 고은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이라는 단어가 량천옥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태현은 그 말이 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래서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말했다.

“없어요.”

그의 대답은 너무나 냉정하고 단호했다.

그 말을 듣자 량천옥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은지가 내 딸이 아니었다면?”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나태현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봤고 량천옥의 눈빛도 차가웠다.

“나 때문에 네가 끝까지 은지한테 정을 주지 못한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만약 내가 없었다면?”

량천옥도 나름의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태현이 고은영의 집 근처에 아파트를 한 채 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고은지가 이사 가고 바로 고은지 위층에 있는 집을 말이다.

그 아파트는 원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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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량천옥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이쯤 되니까 너랑 은지의 사이는 내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은지를 천락 그룹에서 내쫓으라고? 너희 아버지가 그걸 허락할까?”나태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 이름이 등장한 순간, 그의 눈빛은 한층 더 무겁고 어두워졌다.나태현은 원래부터 량천옥을 증오했다. 그녀가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위세를 부리자 그는 분노와 증오가 뒤엉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당신은 정말 뻔뻔하하시군요.”“뻔뻔하다고?”량천옥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뻔뻔하다고? 나태현, 너희 아버지가 아직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체 나랑 너희 나씨 가문 중에 누가 더 뻔뻔한지 비교해 볼래?”그녀의 말투는 날카롭고 조롱에 가득 차 있었다.‘내가 뻔뻔하다니... 그 늙은이는 끝까지 입을 다물 작정인가 보네.’량천옥은 나태현을 똑바로 마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직접 가서 너희 아버지한테 물어봐. 너 진짜 내가 네 어머니를 죽였다고 믿고 있는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단호했다.“미리 말해두지만 너희 아버지 같은 인간은 내 취향에 안 맞아.”나태현은 항상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량천옥을 바라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증오가 그대로 고은지에게까지 향했으니 문제였다. 그게 바로 량천옥이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이기도 했다.이렇게 된 이상 예전에 했던 약속 따위 더는 지킬 이유도 없다. 량천옥은 결연하게 말하고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잠깐.”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그녀가 멈춰 서자, 나태현이 다시 물었다.“방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우리 아버지 같은 인간한테는 눈길도 주기 싫다고? 그럼 왜 우리 아버지랑 같이 있으려고 우리 어머니를 죽음으로 몬 거지?’나태현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다.량천옥은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대답했다.“별 뜻 없어. 그저 너희 아버지한테 한번 물어봐. 네 할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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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여자를 천락 그룹에 둬서는 안 돼. 절대 안 돼!’“량천옥이랑 약속을 잡아줘. 내일 직접 만나야겠어.”“네.”이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나태현은 오늘 하루 종일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몇 개의 대형 프로젝트는 누군가가 손을 댄 것 같은 흔적도 있었다.그래도 나태현이 제때에 복귀한 게 다행이었다.하지만 고은지는 지금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병원부터 들르자.”나태현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전화로 모든 감정이 다 전해지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량천옥이든 고은지든, 나태범은 둘 중 그 누구와도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 말이다.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나태범은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은지를 천락 그룹에 남겨두면 안 됩니다.”나태현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나도 알아.”나태범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아신다고요? 그런데도 왜?”“나도 원래는 네가 돌아오기 전에 그녀를 정리하려 했었어. 고은지 씨가 눈치챌 줄은 몰랐지.”“어떻게 처리하려 하셨습니까?”고은지가 눈치챘다는 말에 나태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아버지의 처리 방식이 과격했을 것이란 짐작이 들었다.나태범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으나 결국 말을 삼켜버렸다.“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전부 다 알아야겠습니다.”더는 ‘이건 안 된다’, ‘그건 하지 마라’ 따위의 제약은 원치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구속당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오늘도 나태범이 전화로 그렇게까지 간곡히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고은지를 당장 회사에서 내쫓았을 것이다.나태범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량천옥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고은지를 데려갈 건지 물어봐. 그리고 그녀가 무슨 조건을 걸든 다 들어줘.”“뭐라고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태현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593화

    ‘언니를 설득하라고? 말도 안 돼.’나태현은 고은영 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지만 애초에 통하지도 않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고은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고은영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고희주 사건에 있어서 고은지가 나태현을 증오하는 건 물론이고 고은영 또한 마찬가지였다.“됐어, 안 설득하면 안 하면 되잖아. 근데 왜 이렇게 화를 내?”배준우가 달래듯 말하자 고은영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화가 안 나겠어요? 그 인간이 깨어났다는데? 하나님은 나태현도 안 데려가고 뭐 한대요?”배준우는 멈칫하더니 생각에 잠겼다.‘역시 여자를 적으로 두는 건 제일 어리석은 일이야.한편, 나태현은 지금 고은지를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배준우였다. 하지만 돌아온 건 단 한 줄의 문자뿐이었다.[고은지 씨한테 너무 안 좋게 굴지 마요.]그 문자를 보는 순간, 나태현의 안색은 완전히 어두워졌다.‘무슨 뜻이지? 고은영 쪽 설득에 실패한 건가? 아니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고 있는 건가?’배준우의 답장을 받은 나태현은 퇴근할 때까지도 시종일관 싸늘한 얼굴로 있었다. 이지훈은 온몸이 굳은 채 그 뒤를 따라나섰다.둘이 엘리베이터 홀을 나서던 그때, 고은지가 애스턴 마틴 한 대에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좋지 않던 나태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저 차, 누구 거야?”먄약 량천옥이 차를 사주었고 저 차가 고은지 소유라고 하면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방금 고은지는 탄 건 조수석이었다.나태현의 물음에, 이지훈은 나태현의 시선을 따라 차를 보다가 차 번호판을 확인했다. 번호판을 똑똑히 알아본 순간, 이지훈의 얼굴도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르겠습니다!”사실 그는 저 차가 육명호의 차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지훈이 모른다고 답하자 나태현의 얼굴은 더없이 음산해졌다.“그럼 조사해. 누구 차인지.”저런 고급 차의 차 주인이 평범한 사람일 리 없었다.이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592화

    고은지는 나태현의 그런 모습을 보며 드디어 속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녀는 코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천락 그룹 직원들은 하루 종일 차가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모든 직원이 전전긍긍하며 온 신경을 일에 집중하는 데 쓰고 한 치의 느슨함도 없었다.저녁이 되자 고은영은 오후 내내 쇼핑을 하다 배준우를 데리러 회사로 왔다.배준우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고은영은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나태현인 것 같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그녀가 온 걸 본 배준우는 그저 몇 마디 덧붙이더니 전화를 끊었다.고은영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나태현 씨 전화였어요?”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그 사람 깨어났어요?”“응. 오늘 천락 그룹으로 복귀했어.”그가 천락 그룹으로 복귀했다는 말에 고은영의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그럼 지금 언니는?’나태현과 량천옥 사이의 복잡한 원한을 떠올리자 고은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쳤다.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원한이 가시지 않았다는 건 그 당시에 일어난 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하지만 고은지가 어떤 이유로든 량천옥과 얽혀 있다 한들 고희주에 대해서는 나태현의 설명이 필요했다.고은영은 중얼거렸다.“오늘 막 퇴원하자마자 당신한테 전화했단 말이에요? 무슨 일로요?”“당신더러 언니를 설득해달라고?”“뭐라고요?”‘언니를 설득하라고? 잘못 들은 건가? 도대체 무슨 속셈을 하고 있는 거지?’배준우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툭 던지더니 곧장 고은영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무릎에 앉혔다.고은영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사람이... 저보고 언니를 설득하래요?”지금 상황을 조금씩 이해한 고은영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그 나씨 가문 사람들은 원래 뻔뻔한 짓거리 잘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이제 와서 언니를 설득하라고?’“말로는 네 언니가 천락 그룹에서 떠났으면 한대.”‘우리 언니더러 떠나라고? 그 큰 사건 터뜨려 놓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데다가 그냥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591화

    나태현은 나태범의 전화를 받고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고은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기라도 할 듯 분노에 찬 표정이었다. 방금 고은지의 말투는 분명 협박하는 듯한 말투였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넘어서 아버지까지 협박한 셈이었다.왜 그런 건지 나태범에게 물어도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당분간은 고은지 문제에 관여하지도 말고, 그녀를 건드리지도 말고 천락 그룹에서 내쫓는 일도 절대 하지 말라고만 할 뿐이었다.하지만 나태현은 도저히 이 화를 삼킬 수 없었다. 최근 해외에서 량천옥 사이에 벌어진 일들로 억눌린 감정은 고은지에게 쏠려 있었기에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게다가 고작 반 시간 만에, 그녀는 그와 아버의 사이까지 헝클어놨다.“지금 당장 고은지보고 들어오라 해.”나태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서류를 건네자마자 이 말을 들은 이지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네.”‘아까 금방 봤는데 또 부르다니... 은지 씨, 이번엔 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인 걸까?’사실 이지훈은 알고 있었다. 고은지가 천락 그룹에 돌아온 건 단순히 일 때문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나태현이 돌아온 지 한 시간만에 그를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내가 그녀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게 틀림없어.’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지가 다시 호출되었다. 나태현은 손에 든 담배를 세게 빨아들이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널 얕봤어. 괜히 량천옥의 딸이 아니네.”‘사람을 뒤흔들 줄 아는 수단이며 눈치가 보통이 아니야.’고은지는 차갑게 그를 응시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말해. 우리 아버지를 협박할 만한 게 대체 뭐지?”“그건 그쪽이 알 필요 없죠. 당신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면 꽤 괜찮은 물건인 건 확실하니까요.”“너, 선 넘지 마!”“우리 사이에 선을 넘는다는 말이 어울리나요?”“그럼 뭘로 표현해야 하지?”“원망이나 증오죠.”고은지는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태현의 눈빛이 위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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