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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Author: 송언희
손상된 영상을 떠올린 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배준우에게 물었다.

“고 비서가 사모님 측근일 가능성은요?”

하필이면 고은영이 CCTV를 조회한 뒤에 그날 밤 영상만 손상되었다는 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

나태웅의 질문에 배준우는 코웃음쳤다.

“겁이 많아서 그런 짓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야.”

나태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고은영은 수상할 정도로 배준우를 두려워했다. 배준우의 계모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저런 허술한 상대를 측근으로 골랐을 리 없었다.

“그럼 고 비서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회사 내부에는 잠시 비밀로 해!”

나태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결혼 자체가 계획의 일부인데 숨기는 게 당연했다.

모든 게 끝나면 배준우야 타격이 없겠지만 고은영의 입장은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

나태웅은 자신의 상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비록 고은영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혼한 뒤의 그녀의 처지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한편, 자리에 돌아온 고은영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태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 사무실로 잠깐 와봐!”

“네, 실장님.”

고은영은 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일부러 분위기 깬 것도 아니고… 누가 신성한 회사에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래?’

그녀는 투덜거리며 나태웅의 사무실로 향했다.

“실장님, 저 왔어요.”

“문 닫아.”

나태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은영은 순순히 문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

나태웅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내일 출근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챙겨서 와. 고은영 씨는 내일 배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할 거야.”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고은영은 너무 당황해서 또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나태웅은 실성한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사의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순간 의심이 갔다.

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었기에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치워버렸다.

고은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휑하니 자리를 떠 버렸다!

예전에는 상사들에게 불려 다니는 자리가 부담스러웠다면 지금은 그냥 충격 그 자체였다.

나태웅은 그녀가 멘탈을 조금 더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휴게실로 달려간 고은영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루에 연속 두 번이나 사레가 들려서 목안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항상 매사에 진중하고 철저하던 나태웅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지 않은가?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휴게실을 나왔다. 나태웅의 비서가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본 비서가 말했다.

“나 실장님은 지금 대표님 사무실에 계십니다. 고 비서님도 자리에 돌아오는 대로 대표님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까 들은 게 진짜라고?

아니, 왜?

매사에 철저하던 사람들이 오늘따라 왜 자꾸 황당한 소리만 늘어놓는 거지?

고은영은 안지영에게 문자해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앞에 사람이 있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배준우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배준우와 나태웅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고은영은 애써 자세를 바로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부르셨어요?”

배준우가 담배를 비벼 끄더니 말했다.

“나 실장한테 얘기 들었지?”

“네? 뭐를요?”

고은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이 제시한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배준우가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쓰자 나태웅이 다급히 말했다.

“내일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하라고!”

“그건 안 돼요!”

고은영은 거의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그녀의 거절로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배준우는 서늘한 표정으로 고은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싫어?”

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게임 룰 정하듯이 결혼을 결정하는 게 어딨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그녀에게 한 말이 있었다. 외모는 보지 말고 꼭 자상한 사람을 만나라고 했던 말.

배준우는 그 요구와 정반대인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원래 출신부터 다른 세상 사람들이었다.

나태웅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고 비서가 미쳤나? 어떻게 대표님 앞에서 저렇게 당차게 거절하지? 설마 이 결혼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점점 굳어가는 배준우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급히 말했다.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했네요!”

“고 비서, 따라와!”

‘역시 눈치가 없는 애들은 피곤해!’

고은영은 나태웅이 일을 가르쳤던 비서들 중에 가장 힘든 상대였다.

그녀는 멀뚱멀뚱 나태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배준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나랑 결혼하든가, 아니면 강성을 떠나든가 알아서 선택해!”

고은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숨이 막혔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나태웅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군.’

비록 허울뿐인 결혼이라고 해도 모든 여자들이 꿈꾸던 자리 아닌가?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한 건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는 고은영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태웅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실 고은영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태웅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 실장님, 이건 아니잖아요….”

고은영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밤 배준우와 거하게 사고를 친 뒤로 그녀는 모든 상황이 버겁고 혼란스러웠다.

나태웅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두를 뗐다.

“일단 결혼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위장 결혼이야. 서류 상으로만 부부라는 뜻이지.”

“위장 결혼이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나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부터 배씨 가문의 누가 와서 그날 밤 일에 대해서 물으면 고 비서는 그날 대표님이랑 같이 있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얘기해야 해.”

고은영은 멍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태웅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날 대표님 방에 누가 들어갔는지 고 비서 정말 몰라?”

“모… 몰라요!”

고은영은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 명에 못살 것 같았다.

왜 이런 상황이 자꾸만 벌어지는 거지?

나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지금부터 그날 밤 여자는 고 비서야.”

“하지만 저는 아닌걸요!”

고은영이 울먹이며 말했다.

물론 맞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나태웅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고 비서 맞아!”

명령이었다.

그는 고은영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누가 와서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야 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이게 고 비서가 해야 할 일이니까?”

‘저기요? 저는 비서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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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어른들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진여옥을 보며 시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게 된 고은영이었다.하지만 배준우와 계약결혼을 하려면 어쨌든 부모님을 만나긴 해야 했다.재벌가 후계자들은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집안 어르신들은 그렇게 재촉한다고 들었다.평소에 회사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배준우도 집에서는 결혼 재촉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조금 놀라웠다.“그렇다고 볼 수 있지.”배준우가 말했다.그렇다고 보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 아닌가?고은영은 말없이 식사에 전념했다. 사실 그녀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어릴 때 계모가 서정우가 먹다 남긴 음식을 준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역겹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배준우가 먹던 걸 먹는데 그다지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계란후라이와 토스트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요리 뭐 할 줄 알아?”거의 식사가 끝날 때쯤 배준우가 물었다.“라면이요.”“더 없어?”“칼국수, 감자조림, 감자튀김, 감자볶음….”배준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평소에 면식이랑 감자만 먹고 살았나?’사실 고은영이 면식이나 감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생활이 어렵다 보니 밀가루 음식이나 감자가 주식이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만 먹고 자라서 할 줄 아는 것도 이게 전부였다.“그럼 내일 아침부터는 국수 먹자.”배준우가 말했다.고은영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비록 어제 같은 지붕 아래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배준우를 대하기 어려운 건 여전했다.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구청으로 갔다.혼인신고서에 사인하기 전 고은영은 배준우를 빤히 쳐다보았다.배준우가 물었다.“왜 그래?”“먼저 계약서라도 써야 하지 않나요?”“내가 사기라도 칠까 봐 그래?”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를 보자 배준우는 기분이 상했다.고은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아침부터 지금까지 배준우는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먼저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쁜 걸까?구청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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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비위가 상한듯한 말투에 고은영은 숨이 막혔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배준우는 신호등을 지나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차에서 내렸다.배준우는 놀란 토끼마냥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내가 잡아먹어? 왜 저렇게 나를 무서워하지?’회사로 돌아온 고은영은 곧장 나태웅의 사무실로 직행했다.계약서를 작성하자는 그녀의 말에 나태웅이 정색하며 그녀에게 말했다.“서면 계약서는 안 돼.”“네? 왜요?”고은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면 계약서를 써야 계약이 유효한 거 아닌가?서면 계약서도 없이 나중에 논란이 생기면 어떻게 해명하려고?나태웅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신의 검은색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계약서를 썼다가 유출이라도 되면 나중에 더 곤란해질 거야.”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계약서 유출로 생길 곤란한 상황을 대비해서 서면 계약서는 써줄 수 없어.”“두 사람 이혼할 때 대표님이 보수로 200억을 챙겨주실 거야.”200억?고은영은 순간 숨이 멎었다. 평생 만져보지 못한 금액이었다.그녀의 현재 월급은 세금 떼고 400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부업으로 벌어들인 돈이 40만원 정도.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해야 저 금액을 벌 수 있을까?고은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냥 계약서 쓰죠? 저 절대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요!”200억이라니!만약 배준우가 마음이 변해서 안 주기라도 하면?게다가 계약결혼이라면 당연히 기한이 있어야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은영도 부자가 되는 것이다.고은영의 눈에 약간 욕망이 번뜩였다.나태웅이 정색하며 말했다.“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건 안 돼.”“정말 안 돼요?”“안 돼!”고은영은 울고 싶어졌다.서면 계약서도 없는 계약결혼이라니! 그것도 200억이 걸린 계약인데.배준우가 변심해서 그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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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7화

    “나태웅이 두려워하는 게 뭐 있어요!”안지영이 화를 내면서 얘기했다.나태웅은 장선명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안지영에게 있어서 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게다가 나태웅이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게 사람 맞나 싶을 정도였다.“나태웅은 극단적인 거지 멍청한 건 아니야.”나태웅은 본인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안지영 앞에 나타난 걸 떠올리면... 장선명은 그런 나태웅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그래도 이 사진들은 다 사실이죠.”“네가 이 사진 때문에 화를 내는 건 기쁜 일이지만 너한테 제대로 얘기해야 할 게 있어.”거기까지 얘기한 장선명이 말을 끊었다.안지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뭐요?”장선명과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안지영은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소문 속의 장선명은 냉철하고 칼같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안지영 앞의 장선명은 항상 웃는 얼굴로 자상하게 안지영을 대해주었다.그래서 안지영은 장선명이 도대체 왜 본인과 결혼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비즈니스 때문에 시작한 부부 연기인데 말이다!사실 처음부터 안지영은 장선명이 왜 본인을 도와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나태웅이 가져온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코끝으로 안지영의 코끝을 가볍게 눌렀다.“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그 말을 들은 안지영은 심장이 순간 멎는 것 같았다.“정, 정말이에요?”‘잘못 들은 건가? 그 사람이 선명 씨한테 엄청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현재의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 사람을 이미 다 잊었으니까 너랑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장선명은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안지영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장선명을 쳐다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얘기했다.“그렇게 많은 여자들이랑...”“나랑 그 사람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안열이 전에 얘기해줬을 텐데.”“그래도 남자들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6화

    “얘기해 봐. 어떻게 해야 화를 풀 거야.”“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정도였다면서요! 내가 화를 안 내고 배겨요?”안지영이 차갑게 얘기했다.“...”장선명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면서 물었다.“내가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거야? 나는 왜 모르겠지.”“이...”안지영은 인정하지 않는 장선명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났다.“정말 화가 난 거야?”“당연하죠. 난 대용품이 되고 싶지 않다고요!”장선명은 화가 난 안지영을 보면서 본인이 왜 안지영에게 빠진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안지영은 느낀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가식적으로 돌려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래서 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이 좋았다.“누가 그래, 네가 대용품이라고. 나태웅이 그래?”장선명이 안지영의 두 볼을 가볍게 꼬집으면서 얘기했다.그 말투는 마치 딸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부드러웠다.안지영은 장선명을 힐긋 보더니 얘기했다.“수많은 사진이 증명하고 있잖아요.”그 사진만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그 사진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절대 나태웅을 믿지 마. 응?”“흥.”“아직도 화가 난 거야?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안 들을래요!”안지영은 아예 고개를 홱 돌렸다.안지영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가감 없는, 상대방에게 본인이 왜 화가 났는지 잘 알려주는 사람이었다.장선명은 화가 나 등을 돌린 안지영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원래는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반응을 보니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알았어. 설명할게.”한숨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이 일로 화를 내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요. 됐어요. 설명하지 마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진실이 두려워서 듣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장선명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왜? 내가 널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그 말에 안지영은 또 참지 못하고 장선명을 가볍게 때렸다.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5화

    안지영은 오후 두 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하지만 안열은 사무실에서 안지영을 발견하지 못했다.‘설마 내가 한눈판 사이에 두 분이 나간 건가?’1시 30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안열은 급한 마음에 얼른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받은 건 장선명이었다.“무슨 일이야.”그 말에서 안열은 이미 장선명의 짜증을 읽어냈다.안열은 약간 놀랐다.“선, 선명 도련님? 30분 뒤 안 대표님이 참석하셔야 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습니다. 지금 안 대표님은 어디에...”휴게실에 있는 장선명은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자고 있는 안지영을 쳐다보았다.오전에 너무 과했던 탓일까, 안지영은 계속 쭉 자고 있었다.“그냥 회의를 취소해.”“네? 그건...”“무슨 문제라도 있어?”“아, 아니요. 오늘 회의는 부승호도 참석하는 회의라... 알잖습니까.”부승호는 바로 하늘 그룹을 배신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번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장선명은 바로 알 수 있었다.장선명이 차가운 눈빛으로 얘기했다.“부승호한테 얘기해. 오늘 저녁 날 만나러 오라고.”“직접 나서서 안 대표님을 대신하실 생각입니까?”안열이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안지영이 성장할 수 있게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던가.그래서 안열과 장선명 다 안지영의 뒤에서 묵묵히 안지영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동안 안지영은 많은 일을 혼자서 해결했다.부승호와 마주하는 것도 안지영에게 있어서는 그동안의 실력을 검증할 가장 좋은 기회다.“무슨 문제라도 있어?”그 말에 안열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아닙니다!”안열은 여전히 장선명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장선명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안열은 얼른 눈치껏 전화를 끊었다. 장선명은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하고 바로 폰을 꺼버렸다.안지영은 이미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장선명은 안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지금 몇 시예요?”“피곤하면 그냥 자.”장선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안지영은 눈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4화

    테이블에는 다른 사진이 더욱 많았다.나태웅은 정말 이를 갈고 해외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이것까지 다 알아내다니...이건 장선명의 가장 어두운 과거이자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하지만 그 일들이 지금은 나태웅 때문에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그동안 장선명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마주할 수 없었던 과거들이었지만, 안지영이 건네준 사진을 보면서 장선명은 어느새 그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내려놓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와서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 여자가 누구인지 얘기하라고요!”안지영이 화가 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장선명의 품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전히 안지영을 꾹 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안지영의 앞에서 사진을 바로 불태워버렸다.“뭐, 뭐 하는 거예요!”안지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장선명은 불에 탄 사진을 그대로 재떨이 속으로 던져버렸다.담배를 피우는 장선명을 위해 안열이 준비해 둔 재떨이였다.안지영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그동안은 쓸모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했다.테이블 위의 사진은 다 재떨이 안으로 들어가 활활 타올랐다.안지영은 멍해서 물었다.“그렇게 변명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변명? 이건 다 지나간 일일 뿐이야.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다 잊었고. 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나네.”“...잊었다고요?”안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안열이 그러지 않았던가.장선명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고.사진 속의 여자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걸 보면 장선명은 정말 그 여자를 아주 사랑한 것 같았다.그런데 그걸 잊다니.안지영은 믿을 수 없었다.그런 안지영의 모습을 본 장선명은 환하게 웃으면서 안지영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또 입술을 맞췄다.“읍... 아니, 읍...”‘미남계를 쓰겠다는 거야?’안지영은 약간 화가 났다. 원래 이런 건 그냥 두면 찝찝한 편이다. 사실을 알지 못하면 마음에 걸리니까 말이다.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3화

    사무실에 들어간 장선명은 안지영이 그를 등지고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미 뒷모습에서부터 안지영의 화난 모습이 보였다.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돌린 장선명이 두 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잡았다.그리고 웃는 눈으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안지영이 화가 나서 씩씩 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더욱 환하게 웃었다.하지만 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났다.“웃겨요?”“질투하는 거야?”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안지영은 장선명의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화 안 났어요. 난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에요.”“그래?”“...”질투냐고?안지영은 질투가 뭔지 몰랐다.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속이 좋지 않았다.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안지영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장선명이 안지영을 번쩍 안아 들고 의자에 앉은 것이었다.장선명은 웃음기 가득한 시선으로 안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지영은 놀라서 허둥대면서 얘기했다.“이거 놔요!”하지만 장선명은 움직이는 안지영을 놔주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가져갔다.안지영이 버둥댈수록 장선명은 더욱 깊게 안지영의 입술을 머금었다.안지영은 그런 장선명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결국 안지영이 숨을 쉬지 못하자 장선명이 안지영을 풀어주었다.안지영이 손을 들어 장선명의 뺨을 치려고 할 때, 장선명이 안지영의 손목을 잡고 웃으면서 물었다.“화났어?”“흥.”안지영은 화가 났다.그것도 단단히 화가 났다.안지영은 장선명이 점심 전에 도착한 것이 분명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안열이 알려줬을 테니까 말이다.그런데 와서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입술부터 들이미니, 너무 미웠다.장선명은 그런 안지영을 보면서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오히려 속 편히 웃으면서 안지영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지막에는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그렇게 화가 난 거야?”말을 마치고는 안지영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안지영은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오자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2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안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열을 바라봤다. 안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어휴, 됐어요. 더 얘기해 봤자 짜증만 나요.”더 말했다간 정말 참지 못하고 화를 낼 것 같았다.나태웅에 대해 할 욕은 이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안지영은 뾰로통해진 채로 안열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안열은 휙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지금 안열의 머릿속에는 나태웅에 대한 욕뿐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감히 또 안지영을 찾아오다니.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온 건지......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안지영은 아까 안열이 한 말을 떠올렸다.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평소에는 똑 부러지고 영리한 안지영이지만, 이번만큼은 안열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뻔뻔하다는 뜻이라면... 나태웅은 원래부터 그렇게 뻔뻔했다.하지만 이번은...안열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휙 털었다.그리고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장선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는 장선면은 점심쯤에 안지영을 데리러 올 예정이었지만, 안지영의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왔다.안지영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장선명은 안열이 자리에 앉아 아이스팩을 발 위에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다리는 왜 그래?”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안열은 깜짝 놀라 손에 쥔 아이스팩을 떨어뜨릴 뻔했다.장선명을 보자, 안열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읏...!”하지만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는 장선명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안열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안열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나태웅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해 그저 둘러댔다.“그냥...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 “어떻게 넘어졌길래 거기만 그렇게 다치는 거야?” 장선명의 시선은 예리했다.보통 넘어진다면 무릎이 먼저 다치기 마련인데 안열은 무릎은 멀쩡하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1화

    나태웅은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태웅이 가져온 정보 때문에 안지영은 더욱 속이 복잡해졌다.안열은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약 좀 바르고 올게요.”그 말에 안지영은 생각이 끊겨버렸다.정신을 차린 안지영은 안열의 발등이 부어올랐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선명이 사랑하는 사람...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안열은 본 안지영은 결국 또 나태웅에게 화가 났다.“왜 이렇게 된 거예요. 정말 나태웅을 못 이기는 거예요?”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맞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밖에서 싸우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안열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제가 만약 나태웅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겁니다.”“...”진작 죽여버린다니.그 ‘진작’은 과연 언제일까?다시 생각해도 나태웅은 정말 독설만 퍼붓는 사람이었다. 안열을 볼 때마다 개라고 욕하니까 말이다.그래도 전에 동영 그룹에서 출근할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안지영은 우물쭈물하면서 안열에게 물었다.“두 사람, 전에도 안 좋은 사이였어요?”안열과 나태웅이 만날 때마다 안열은 대수롭지 않아 했고 나태웅은 화를 냈었다.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렇게 물으면서 안지영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안열이 거의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했다.“앗... 아파요... 아파...”“...”안열은 평소에 고통에도 끄떡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니 나태웅이 얼마나 아프게 때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제가 무슨 원한이 있겠어요! 한 것도 없는데...”“...”“굳이 꼽자면... 안 대표님 일로 원한이 있는 거죠.”“나요?”“네. 저는 안 대표님이 선명 도련님과 결혼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요?”안열을 말을 들은 안지영은 약간 마음이 복잡했지만 또 본인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안열은 장선명의 부하로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50화

    “난 대체 누구의 대용품이었어요?”안지영이 바로 물었다.안열은 장선명과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사진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러니 장선명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건...”“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거예요?”안지영이 또 물었다.“...”안열을 그 어느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안열은 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안지영이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지, 안열은 잘 알았다.물론 안지영과 장성명의 사이가 안지영 때문에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장선명에게 설레지 않았다면 안지영은 장선명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안열은 결국 또 속으로 나태웅을 욕했다.“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선명 도련님이 안 대표님과 결혼하려는 건 안 대표님을 사랑해서지,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니까요.”“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직도 연락해요?”“절대 아닙니다. 제가 맹세할게요!”안열이 진지하게 얘기했다. 안지영이 괜히 장선명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열을 쳐다보았다. 안열은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약간 긴장했다.“진짜예요. 사진 속의 여자들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선명 도련님이 얼마나 칼 같은 분인지 잘 알잖아요.”“하긴, 안열 씨는 선명 씨 사람이니까 그편을 들겠죠.”“아니요, 전 안 대표님 편입니다. 같은 여자로서요.”“나도 그 어떤 여자의 대용품이었겠죠.”“그건 다른 거죠!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나태웅이 왜 갑자기 이 일을 들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어요!”안열은 정말 나태웅을 죽여버리고 싶었다.요즘 나씨 가문에 생긴 일을 보면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쓰레기였다.“죽었다고요?”안지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다들 모르는 일이잖아요!”안지영이 놀라서 얘기했다.장씨 가문 남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냉정하다는 소문을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449화

    안지영은 약간 생각하더니 얘기했다.“그런데 그렇게 욕한 게 오늘이 처음인 건 아니지 않아요?”“...”안지영이 그렇게 얘기하자 안열은 더욱 화가 났다.“저를 볼 때마다 저한테 개라고 욕해요. 개자식... 개같은 건 본인이면서! 나씨 가문 전체가 그냥 다 개예요!”안지영은 이마를 짚으면서 그 말을 들었다.“안열 씨를 그렇게 욕하고서도 잘 살아있다니... 신기할 정도네요.”안열이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지, 이제는 안지영도 잘 알았다.하지만 나태웅은 번마다 안열을 욕하면서 멀쩡히 살아있으니, 안지영은 약간 놀라웠다.“못 이긴다니까요!”“...”도대체 나태웅의 실력이 얼마나 좋기에 안열도 상대할 수 없는 걸까.“됐어요. 나태웅 얘기하면 기분이 잡치니까 그만 해요.”나태웅은 그런 존재다.언급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사람이다.“그건 맞아요. 짜증 나는 사람이죠.”안지영은 나태웅이 정말 너무 싫었다.“그러니까 무조건 승소해요!”너무 화가 나니 아무리 나태웅 얘기를 꺼내지 말자고 해도 결국 나태웅 얘기를 꺼내게 된다.안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분명 승소할 겁니다!”안지영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안열뿐만이 아니라 안지영도 화가 난 상태다.안지영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너무 화가 나서 이 화를 전부 나태웅에게 쏟아버리고 싶었다.안열은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꼭 이기게 해줄게요!”나태웅을 고소하려던 건 안지영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그 뜻인즉슨 나태웅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건드렸다는 것이다.안열은 안지영 앞에 있는 사진을 슬쩍 보았다. 안에는 장선명도 있는 것 같았다.“뭘 보는 거예요?”그렇게 물으면서 사진을 확인하려던 때, 안지영이 빠르게 사진을 가져가려고 했다.하지만 안열이 그 중 한 장을 손에 넣었다.사진을 본 안열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지영의 표정도 그대로 굳어버렸다.안 그래도 아까 일 때문에 화가 났는데, 나태웅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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