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예은은 뒤늦게 들어온 비서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진청아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진청아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잦았다.심지어 본인이 나가서 접대를 하겠다고 몇 번이나 앞다투는 통에 부서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이 가득했다....고은영이 사무실 문을 힘껏 밀어젖히자 사무실 안에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나태현은 분노에 찬 얼굴로 배준우의 옷깃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다.“날 속인 거야? 짜고 쳐서 날 속인 거냐고!”고은영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이거 놓으세요!”배준우가 소리쳤다.“희주가 아직 살아있는 거면 은지도 아직 살아있는 거랑 마찬가지야. 도대체 어디에 숨겨둔 거야?”그 말에 고은영의 표정이 굳어졌고 배준우의 표정도 어두워졌다.그는 나태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놓으세요.”“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제발 말해줘. 어디에 숨겨둔 거냐고!”“놓으라니까요?”“왜 날 속인 거야?”배준우가 다시 한번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나태현의 주먹이 배준우의 얼굴을 강하게 내리쳤다.사방이 한순간 혼란에 휩싸였다.배준우는 균형을 잃고 소파 위에 쓰러졌고 나태현은 다시금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말해!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 건지 말하라고!”분노가 가득 찬 외침이 사무실 가득 울려 퍼졌다. 나태현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희주가 살아 있으면 고은지도 반드시 살아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었다.나태현은 두 사람 다 죽지 않았는데 배준우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방금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나태현의 신경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한 번만 더 말할게요. 이거 놔요!”배준우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배어 나왔다.하지만 곧바로 나태현의 단단한 주먹이 또다시 배준우의 얼굴을 내리쳤고 분노가 극에 달한 배준우도 참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라보던 고은영 역시 분노가 치밀었다.‘역시 나씨 가문 사람들은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는 사람들이야. 지난
배준우는 그 말을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부럽다고?’“원래는 형도 저처럼 될 수 있었잖아요. 량천옥 씨 일에 관해서 은지 씨한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됐다고 얘기하는 거예요.”지난 일을 어떻든 간에 그것은 고은지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었다.“량천옥에게 버림받은 지 오래된 딸인 것뿐인데 그 원한이 은지 씨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나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점점 답답해져 왔다. 눈빛이 흐려지고 말문도 막혔다.배준우는 쓸쓸함과 깊은 슬픔 속에 잠긴 나태현을 바라보며 연민 어린 눈길을 보냈다. 입술만 달싹일 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나태현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휴대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배준우는 고개를 돌려 나태현을 잠시 바라본 뒤 전화를 받았다.“네, 말씀하세요.”“대표님, 저예요. 희주 관련해서 단서가 잡혔습니다.”전화 너머로 기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배준우는 발신자가 누군지조차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배준우는 혹시나 그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무심코 나태현 쪽을 바라봤다.나태현 역시 배준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출렁이는 듯했다.“대표님, 들리시나요?”기성훈은 몇 차례 더 소리쳤지만 배준우는 대답하지 않고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나태현은 숨이 막힐 듯한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았다.그 눈동자 속에서 부서졌던 무언가가 다시금 맞춰지기도 하고 또다시 무너져 내리기도 하는 듯했다....고은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대표 사무실 쪽에서 희미하게 고함이 들려왔다.진청아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서둘러 사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비서들도 깜짝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고은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무나 붙잡아서 물었다.“안에 누가 있나요?”붙잡힌 이는 민초희였다.고은영을 본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 공손히 답했다.“사모님, 나 대표님께서 안에 계십니다.”나태현이 안에 있다는 말에 고은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
그녀들의 눈에 나씨 가문 사람들은 지옥보다도 더 끔찍한 존재였다.안지영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어떻게 해결하려고?”‘어떻게 하냐고?’고은영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경찰에 신고할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젯밤 현장에서 바로 신고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안지영은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그걸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안 될까?”“아마 힘들 거야.”그 말에, 고은영은 더 이상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워졌다.쉽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씨 가문이 강성에서 쥐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면 집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는 거야?”고은영의 가슴속에서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더구나 지금, 고은지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고은지가 돌아왔을 때, 나태현이 고은지를 손에 넣으려 한다면 그녀가 반드시 그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야만 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안지영이 단호히 말했다.“현재로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아니면 차라리 나태현 씨가 제시하는 값을 받고 넘기든가...”전날 밤, 안지영이 장선명과 돌아가는 길에 나눈 결론이었다. 나씨 가문 사람들의 성향과 지금 나태현이 그 집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두 분석해서 얻어낸 결과였지만 고은영은 단칼에 잘랐다.“안 돼. 절대 팔지 않을 거야.”정말 장선명이 말한 그대로였다. 나태현은 무슨 수를 쓰든 그 집에서 살겠다고 버틸 거고 집주인인 고은영은 무슨 말이 오가도 절대 팔지 않겠다고 맞설 것이었으니 앞으로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고은영은 배준우가 나태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신경 쓰지 않았다.안지영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그린빌로 향하라고 지시했다.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정보를 시스템에 등록했다. 그걸로 나태현의 출입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등록을 마친 뒤에야 관리사무소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고은영은 이만 생각을 거두었다.량의에게도 말했듯 량천옥은 별일 없을 터였고 지금 그녀를 더 옥죄는 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그건 바로 그녀의 집이었다.‘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내 명의로 된 집인데도 정작 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니...’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안지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지영아.”“이제 좀 진정했어?”안지영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고은영은 대답 대신 잠시 숨을 골랐다. 진정이라니, 그게 될 리가 없었지만 통화 중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어젯밤에 내가 너무 놀라게 한 건 아니지?”“깜짝 놀랐어.”“...”고은영은 뭐라 말하려다가 제자리에 굳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웠다고?’“네가 그때 얼마나 무서운 표정이었는지 알아?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늘 온순하던 토끼가 갑자기 사나운 늑대로 변했으니 놀라는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고은영이 입꼬리를 살짝 내리면서 말했다.“그래서 이제 어쩌면 좋지?”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젯밤에 선명 씨가 돌아오는 길에 계속 얘기해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집 되찾기 쉽지 않을 것 같아.”그 말에 고은영의 표정이 굳었다.“거긴 내 집이야.”“그렇긴 하지. 나태현이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당연히 돌려받겠지. 하지만 나태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고은영이 대꾸하지 않자 안지영은 단호하게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나씨 가문 사람 중에 괜찮은 사람은 없어.”그 말에 고은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이미 속이 뒤집혀 있는데 집을 돌려받기 어렵다는 말까지 들으니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사람한테 집을 팔라고? 난 절대 그럴 수 없어.”“이제 와서 자기 마음을 깨닫고 이런 방식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데 그걸 내가 받아줘야 해?”고은영의 목소리가 떨릴 만큼 격해졌다.예전 나태현이 고은지에게 조금이라도 잘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진 않았을 것이다.고은영은 고은지가 당했던 수모들을 떠올리며 숨이 막
고은영이 물에 레몬을 넣어 마시는 모습을 보고 량의의 눈가에 다시금 씁쓸한 기운이 번졌다.“혹시 또 아이를 가진 거야?”“네?”“내가 알기로 물에 레몬 넣어서 마시는 거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임신을 하면 냄새에 예민해져서 물맛조차 거슬릴 때가 많은데 레몬은 그 냄새를 누그러뜨려 주곤 했으니 말이다.고은영은 순간 놀라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량의가 그녀의 음식 취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던 것이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복도 많고 자식도 많아서 다행이네.”량의가 조용히 감탄하듯 말했다.“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고은영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전날 밤 제대로 잠을 못 잔 데다가 나태현이 벌여 놓은 일 때문에 마음이 잔뜩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길게 끌어갈 기분이 아니었다.량의가 입을 열었다.“혹시 천옥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네?”예상치 못한 질문에 고은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량천옥 씨가 어디로 갔냐고? 친어머니인데도 모른다는 건가?’솔직히 말해서 고은영은 원래부터 량천옥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따져 보니 고은영은 사라진 지 벌써 석 달은 지난 셈이었다.“연락이 안 되던가요?”고은영이 미간을 좁히면서 묻자 량의가 고개를 끄덕였다.“해외로 나간 뒤로는 연락이 전혀 안 돼. 무슨 수를 써도 찾을 수가 없더라고...”‘찾을 수가 없다니…’고은영의 미간이 한층 더 깊게 찌푸려졌다.량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혹시 연락 온 적 없어?”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전혀요.”“정말 없다고? 그러면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고은영에게조차 연락이 없다는 사실에 량의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 모습을 보니 량천옥은 량의에게 전혀 연락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생각해 보면 석 달 전 세상에 떠들썩하게 드러난 그 사건 때문에 량천옥은 량의를 원망했을 것이다.사실 고은영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때 량의가
나태범은 제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은 결국 그가 미리 짐작했던 그대로였다.“이 자식들이...”‘그동안 별 탈 없이 지내오던 게 어제 일 같은데 어쩌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나태범은 깊은 후회를 삼켰다.‘나태웅을 괜히 배씨 가문에서 서둘러 불러들인 걸까? 그냥 배준우 곁에 계속 두었더라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지. 그때 안지영 역시 안진섭에게 떠밀리듯 배씨 가문에 맡겨졌으니까.’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태범의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혀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어르신, 그러면 도련님께서 철수하라고 했던 건...”단집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태범은 대꾸하지 않았다.차라리 묻지 않으면 좋았을 터였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나태번의 가슴속 분노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고은지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바다에 떨어진 순간부터 계산해도 겨우 몇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아직 찾지 못했고 수색 범위를 넓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남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고은지는 아직 살아 있고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갔다는 것이다.나태범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찾아.”‘철수하라고? 그럴 수는 없어.’고은지와 나태현은 아무리 사정이 어떻다 한들 함께할 수 없는 사이였다.단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한동안 강성 사교계에서는 량천옥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 놓았다고 수군대고 있었다. 하지만 량천옥이 이미 떠났음에도 강성은 여전히 잠잠해질 줄 몰랐다.한편, 란완 리조트에서.고은영은 전날 밤 집에 돌아온 이후로 단 한숨도 편히 자지 못했다.배준우는 그녀를 데리고 함께 회사로 가려 했지만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을 보고는 깨우지 않았다.오전 10시가 되어서야 고은영은 느지막이 일어났다.혜나는 그녀 곁을 바짝 따라다니며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세심하게 살폈다.“사모님, 죽 좀 드세요. 대표님께서도 죽이 참 잘 끓여졌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