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효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또 한참 쳐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사진에 관한 일은 모두가 약속한 듯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송재이는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주현아나 민효연이나 다들 그녀를 문란하고 천박한 년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한편 그들은 설영준에 대해 이런 편견이 없다.남자는 당연히 풍류가 넘치고 기개가 있지만 여자는 음탕하고 천박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이 사회가 원래 여자에 대한 편견이 많고 많은 법이다.송재이는 이런 불공평함을 바꿀 수 없으니 그저 묵묵히 참고 살아야 했다.그녀는 참 운이 안 따라주는 사람이다.분명 설영준을 피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또다시 이 악순환에 휘말려 들었다.민효연이 제 딸의 약혼자와 불분명한 관계를 이어가는 과외교사를 바로 해고할 줄 알았는데 송재이는 의외로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연우의 생일이 지난 후 송재이는 더 이상 민효연의 집에서 주현아를 보지 못했다.그때 눈치챘다. 민효연과 주현아는 모녀 사이지만 둘은 썩 친해 보이지 않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집에서 3년 동안 설도영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 그녀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고 설영준의 집을 떠난 이후로 이 아이와 따로 더 연락한 적도 없었다.문득 걸려온 설도영의 전화에 송재이는 마냥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래도 결국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저 친구랑 싸워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설도영이 말을 더듬거렸다.전화기 너머로 아이는 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가족들한테 감히 알릴 용기가 없어요. 선생님이 이리로 와주실 수 없나요? 감사의 뜻으로 제가 나중에 밥 한 끼 사드릴게요.”“...”송재이는 말문이 막혔다.거절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병원에 도착해보니 설도영이 말한 ‘싸움’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이건 다툰 게 아니라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설도영에게 맞은 격이다.인상 속 설도영은 점잖은 중학생이라 전
방금 병실에 들어가 아이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깁스를 한 모습이 마냥 처참할 따름이었다.송재이가 설도영을 데리고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음에도 상대방 부모는 대노하며 모진 욕설을 퍼부었다.처음 겪는 광경에 송재이도 당황스러워 얼굴이 빨개졌다.나중에 설도영이 듣다못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반박에 나섰다.“이봐요, 그러게 누가 댁 아드님 할 짓 없이 딴 여자애 나시 끈 잡아당겨서 망가뜨리래요? 본인이 더러운 행패를 부렸으니 얻어맞아도 싸요! 기왕 때리는 김에 확 죽여버릴 걸 그랬어요!!”사춘기 남자애들은 이성의 끈을 놓으면 걷잡을 수 없이 미쳐가는 법이다. 송재이는 설도영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어린놈의 자식이 뭘 이렇게 기고만장해? 우리 아들 털끝 하나 건드린 것까지 싹 다 돌려받을 거야!”상대가 펄쩍 뛰며 쏘아붙였다.“너 딱 기다려. 반드시 고소한다 내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복도의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잘됐네요. 우리도 마침 법적 절차를 밟을 생각이었는데, 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 있는 박 변호사님께 직접 얘기하세요.”순간 송재이는 심장이 철렁거렸다.설도영도 고개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형!”송재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슈트 차림의 설영준은 창밖의 은은한 햇빛이 쏟아지자 조각 같은 얼굴이 유난히 더 빛났다.그의 준수한 외모는 뭇사람들 중에서 확연히 돋보이는 외모이고 송재이가 수년간 봐온 젊은 남자 중에 금욕의 매력을 내뿜는 아찔한 남자였다.고작 며칠을 못 봤을 뿐인데 지금 또다시 한없이 낯선 느낌이 든다.친형이 오자 설도영도 좀 전보다 목소리에 힘이 났다.설영준은 그를 힐긋 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설도영, 넌 돌아가서 얘기해!”이 한마디에 아이는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설영준의 뒤에는 정장 차림의 키 큰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박윤찬은 여기서 송재이를 보니 살짝 의외라는 듯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지금 급선무는 설도영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박윤찬은 마른기침을 두어
병원을 나선 송재이는 속이 울렁거려 너무 괴로웠다.그녀는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토하기 시작했다.다 토한 후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 한 병 사서 길옆에 선 채로 한 모금씩 들이켰다.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어깨를 툭 내리쳤고 화들짝 놀란 송재이는 하마터면 생수병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설영준이 재빨리 생수병 밑굽을 받아들었는데 물이 튀기며 그의 옷소매를 다 적셨다.설영준은 눈썹을 찌푸리고 송재이를 쳐다봤다.“귀신 봤어?”송재이는 가슴 찔린 듯 입을 닦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길거리에 설영준과 단독으로 서 있으려니 그녀는 저절로 스트레스가 쌓였다.설영준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뭘 보는 거야?”“여기 카메라 있어? 누가 또 몰래 촬영하는 거 아니지?”“왜 이렇게 경계하는데?”설영준은 그녀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다.송재이는 시선을 올리고 정색하며 그에게 말했다.“당신은 약혼녀 이외의 여자랑 엮이면 풍류가 넘친다는 말을 듣지만 난 아니야. 파렴치하게 내연녀 노릇이나 한다고 손가락질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결백함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영준 씨가 내 생각 좀 해서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송재이는 뭐가 이렇게 급해서 다음 연애 상대를 만나려고 안달인 걸까? 설영준이 그녀의 앞길을 막기라도 할까 봐?설영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고고한 기품은 늘 완벽 그 자체였다.길을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도 저도 몰래 뒤돌아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우와, 너무 잘생겼어. 혹시 연예인 아님?”당장 뛰쳐 가서 포옹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지경이었다.유독 송재이만 그를 멀리 피하고 싶어 한다.이 남자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한없이 짙은 눈빛은 얼른 외면하고 싶었다.“너한테 덤터기 씌운 일은 이미 다 해결했잖아. 뭘 더 걱정하는 거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말을 마친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송재이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액션
계속 비꼬려고 했지만 그녀의 빨개진 눈시울을 본 순간 목이 메었다.설영준은 여자를 다그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설도영의 일로 짜증이 확 밀려온 듯싶다.그는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기분을 한결 가라앉힌 후 담담하게 말했다.“됐다.”곧이어 차에 시동을 걸었다.“바래다줄게.”무슨 남자가 기분 전환이 이렇게 빠르지?그래도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니 한편으론 숨이 트였다.설영준과 함께한 3년 동안 사실 그녀는 이 차에 타본 적이 별로 없다. 둘의 데이트 장소는 설영준의 집이거나 그의 장하 별장 침대 위였다.잠자리를 가졌던 남녀는 그래도 어딘가 다르겠지.설영준에게 자신이 몇 번째 여자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설영준은 첫 남자였다.남자의 생리적 인식과 그런 방면의 체험은 전부 설영준한테서 얻었다.지금 그리 넓지 않은 차 안에 단둘이 있으니 송재이는 썩 편하지만은 않아 창밖으로 머리를 기울였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설도영에게 걸려온 전화였다.송재이는 옆에서 운전하는 설영준을 힐긋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말씀이 딱 맞아요. 우리 형이 모질게 굴 때면 진짜 소름이 끼친다니까요...”설도영은 생각할수록 울분이 차올라 끝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아이는 맨 마지막에 애원 조로 말했다.“쌤이 우리 형한테 사정하면 안 돼요? 나 진짜 사고 안 치고 열심히 학교 다닐게요. 그러니까 여름 방학에 여행 가게 해줘요, 네?”송재이가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설영준은 동생의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그녀가 내뱉었던 ‘모질게 군다’는 그 말까지...“너희 형이 어떤 사람인데 내 말을 들을 리가 있겠어?”송재이는 눈 딱 감고 용기 내어 반박했다.자신이 설영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이 아이에게 알려야 한다. 설영준이 그녀를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건 설도영의 착각일 뿐이니까.또한 송재이는 옆에 있는 설영준에게도 알려야 한다. 자신은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절대 불합리한 망상 따위 하지 않
한참 후 그녀가 생각했던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송재이는 눈을 감고 있어서 설영준이 얼마나 사람을 질식시켜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는지 전혀 모른다.그는 송재이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됐어’라는 말만 내뱉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송재이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송재이는 잠시 뒤에야 눈을 떴다.“얼굴에 속눈썹 묻어서.”설영준이 말했다.“떼어냈어.”그는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좀전의 야릇한 제스처와 그윽한 눈빛은 그녀만의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화나서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다만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다.여기서 발끈하면 본인이 뭘 기대했는지, 얼마나 엉큼한 상상을 했는지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었다.‘우린 이미 헤어졌어. 설영준은 지금 여자가 생겼다고. 한 인간으로서 딴 여자의 약혼자에게 망상을 품을 순 없어! 그건 너무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야!’...송재이의 생각이 점점 더 골로 갔다.잠시 후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설영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음기를 거두었다.방금 그녀를 놀리며 반응을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깨고소할 수가 없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장난은 장난에 불과하다.설영준은 별안간 웃음기를 싹 거두고 아예 차 방향을 틀었다.송재이는 반응이 느려 잠시 넋 놓고 있다가 물었다.“어디 가?”그녀는 지금 일부러 설영준을 피하려고 하지만 설영준은 아예 그런 생각이 없는 듯싶다.송재이는 제발 좀 남자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주현아를 위해서라도 자꾸만 전 애인인 그녀와 엮이는 건 그릇된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어디 가는데? 나 안 가.”송재이의 반항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설영준은 여전히 그녀의 집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송재이는 이렇게 일방적인 설영준이 너무 싫다.이제 막 버럭 화내려 할 때 설영준이 입을 열었다.“나랑 같이 백화점 가서 선물 골라줘. 여자한테 줄 건데
너무 가까이 붙어 가면 몰래 사진 찍히거나 지인에게 들킬 수 있으니까...설영준은 자꾸만 움츠려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함께 있을 땐 단 한 번도 단둘이 나와서 쇼핑한 적이 없었고 그 또한 송재이를 데리고 나올 생각조차 없었다!어느덧 헤어지고 나니 함께 백화점에 오게 될 줄이야.진열대 앞에 서서 송재이는 설영준에게 상대방의 취향이나 품위를 물으며 어떤 스타일의 쥬얼리를 맞춰줄지 고민했다.설영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딱 세 단어만 말했다.“겸손하고 소탈하고 단아한 거로 해.”매장 직원이 열성적으로 다가와 두 사람에게 몇 가지 매우 고급스러운 목걸이와 액세서리를 보여줬다.이탈리아 브랜드인 이 제품들은 디자인이나 퀄리티 모두 일품이었다.송재이가 하나 고르자 매장 직원이 꺼내서 그녀에게 착용해 주었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새하얀 피부가 광택이 나는 진주와 아주 잘 어울렸고 한결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설영준은 거울 앞에 서서 실내의 밝은 조명을 받으며 묵묵히 그녀를 쳐다봤다.3억2천만 원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송재이도 그의 소비 수준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고개 들어 한마디 물었다.“이건 어때?”설영준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더니 매장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매장 직원들은 이렇게 통쾌한 부자 고객들을 제일 좋아한다. 직원은 신나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지금 바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기다리는 동안 설영준의 시선은 여전히 진열대의 액세서리에 꽂혀 있었다.그는 무심코 송재이에게 말했다.“너도 하나 골라봐. 사줄게 내가.”자그마치 그의 곁에 3년이나 있었으니.진열대의 물건은 아무거나 대충 하나 골라도 몇천만 원대부터 몇억 원대에 달한다. 이 금액은 설영준에게 껌값에 불과하지만 송재이에겐 1, 2년 연봉 수준이다.그녀는 잠시 넋 놓고 있다가 웃으며 답했다.“그새 잊었네. 말했잖아, 난 전 남친 물건 같은 건 남기지 않아.”말을 마치니 또다시 가슴이 찔렸다.그에게 있어 송
식사를 이어가던 중 송재이가 아침에 설영준이 택배로 보내온 선물을 식탁에 올려놨다.“도영아, 이거 대신 너희 형한테 전해줘.”“이게 뭔데요?”“상관 말고 넌 그냥 전해주면 돼.”설도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송재이는 의리 넘치게 바로 가주었다.지금 이건 고작 물건 하나 전해주라는 부탁이니 설도영도 흔쾌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수저를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거 혹시 쌤이 우리 형한테 돌려주는 이별 선물이에요? 그런 거라면 나 못 줘요. 괜히 나중에 나한테만 화풀이할 거라고요...”송재이는 가슴이 꽉 막혔다.요 녀석의 말투를 들으니 그녀와 설영준 사이를 진작 알아챈 듯싶다!어쩌면 사진 스캔들보다 더 빨리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송재이는 더 껄끄러워졌다!“너희 형 그렇게까지 시비 못 가리는 사람 아니야. 이 일로 너랑 화내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또...”송재이는 설영준과 좋게 끝낸 사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만약 좋게 끝낸 사이라면 설영준이 그녀를 차단할 필요가 있을까.차단당한 일만 떠올리면 울화가 저절로 치밀었다.“쌤은 우리 형에 대해 제법 잘 아시네요. 형이 어떤 성품인지도 잘 알고요.”설도영은 그녀의 말에서 흠을 잡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송재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역시 그 형에 그 동생이라니까. 아주 쌍으로 그녀를 속 썩이는 재주가 있다!“난 잘 몰라. 그 사람은 한때 나의 고용주였을 뿐이야.”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고용주면 쌤이 직접 주시지 뭣 하러 나보고 전해주래요? 거짓말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마음 찔려서 감히 우리 형 못 만나는 거예요?”설도영이 맑은 두 눈을 깜빡이며 더없이 순수한 척했다.“...”송재이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인제 보니 설영준만 잘 알지 못한 게 아니라 설도영을 가르친 보람도 없었다.결국 그녀 스스로 마주해야 한다.헤어질 때 설도영이 문득
이 남자가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도 육체적인 욕구겠지.섹스는 할 수 있어도 미래는 줄 수 없는, 늘 그래왔던 남자니까.다만 송재이는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작별한 후 설도영도 차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서 설도영은 방금 편의점에서 산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설영준에게 전화했다.“형, 나 금방이면 집 도착해요.”전화기 너머로 설영준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걸 얘기해?”“방금 재이 쌤이랑 같이 저녁 먹었어요. 내가 지금 돈 없는 걸 알고 쌤이 사주셨어요.”설도영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잠시 후 설영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늘 밤에 송재이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었다고?”“네.”설도영은 일부러 3초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재이 쌤 혹시 형 짝사랑해요?”순간 설영준은 미간을 구겼지만 동생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설도영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름이 아니라 쌤 화장실 갈 때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휴대폰이 식탁 위에 있길래 우연히 봤거든요. 휴대폰 잠금 화면이 글쎄 형 사진이더라고요. 뭐 물론 형이 워낙 잘생겼으니까 쌤이 짝사랑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죠...”“나중에 돌아오고 나서 왜 형 사진을 잠금 화면으로 해두었냐고 물었더니 쌤이 엄청 수줍어하면서 절대 형한테 말하지 말랬어요. 역시 짝사랑하는 여자들은 수줍음이 많다니까요. 형도 쌤 좋아하면 좀 먼저 나서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영준이 전화를 툭 꺼버렸다.송재이는 설도영을 잘 몰라도 설영준은 제 동생을 너무 잘 안다.이 아이가 했던 말이 헛소리일 가능성이 매우 클지 몰라도 일단 그 점을 제쳐두고 동생의 말이 의외라고 느껴지진 않았다.3년 동안 송재이는 티 날 정도로 설영준을 줄곧 좋아했으니까.하지만 그녀처럼 어리고 단순한 여자는 설영준에게 육체적인 이끌림 이외에 다른 방면으론 딱히 매력이 없다.목걸이를 선물한 것도 그날 진열대에서 착용해봤을 때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대뜸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