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방탕했던 하룻밤의 대가로 그녀에게 딸이 생겨버렸다. 보물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딸인데 정작 연지훈은 제 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첫사랑과 낳은 아들만 끔찍이 아끼며 심지어 그 애가 제 딸을 짓밟고 올라서도록 내버려 두었다. 딸이 죽은 지 7일째 되던 날, 연지훈은 첫사랑 유이영을 위해 성대하고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렀다. 그와 유이영의 아들은 고급진 슈트 차림에 화동이 되어주었는데 그녀의 딸은 제대로 된 묘지조차 살 수 없었다. 그녀는 딸의 유골함을 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고, 그 시각 연지훈은 첫사랑 유이영과 함께 막 신혼 방에 들어섰다. ... 전생을 겪고 다시 태어난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선뜻 연지훈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전생에 그녀는 연지훈과 유이영 사이에서 광대처럼 굴었지만 이 남자의 연민이나 애정 따위 얻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연지훈과 유이영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생에 유이영은 매정하게 그녀의 딸 연하나의 시신을 밟고 올라섰다. 이번 생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이 갚아주고 유이영의 추악한 본모습을 뭇사람들에게 폭로했다. 전생에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연지훈이었고 온 세상이 연지훈으로 물들었다. 이번 생에는 다른 남자들도 만나보고 연지훈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연지훈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다.
View More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병실 안은 죽음과도 같은 가라앉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서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그녀가 막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연지훈의 낮고 서글픈 목소리가 뒤편에서 흘러나왔다. 건드리면 이내 터져버릴 비눗방울처럼 가냘픈 음성이었다.“약속할게.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마침내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서현주가 문을 밀어 열자 병원 특유의 하얗고 차가운 불빛이 그녀의 온몸 위로 쏟아졌다.그것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던 새로운 앞날의 서광이었다.그녀는 찰나의 아득함을 느꼈다.‘정말로 끝이 나는구나. 정말 끝났구나.'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업보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서현주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자신을 향해 있던 연지훈의 마지막 시선을 그렇게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안요한의 병실로 향했다. 한 걸음씩 내딛는 발끝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요한은 이미 깨어나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다만 미간을 찌푸린 채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서현주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안요한은 서현주의 입가에 걸린 홀가분한 미소를 포착하고는 멈칫하더니 이내 더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뭐야? 연지훈 방에서 나오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좋아? 네 남자 친구는 여기 누워 있는데!”서현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옆에 있던 엄진경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난 축복이 보러 다녀올게.”서현주는 침대 곁 의자에 앉아 안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확실하게 정리하고 왔어요.”구체적인 내막까지 일일이 털어놓지는 않았다.하지만 안요한은 그녀의 맑아진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 이내 그 의미를 정확히 짚어냈다.순식간에 안요한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마치 세상의 모든 먹구름을 단숨에 걷어내는 따
서현주의 머릿속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연지훈에게 당장 그 입을 닥치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비명을 질러댔다.그는 자격이 없다. 정말로 그런 자격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다.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예리한 통증으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아팠어?”연지훈이 물었다.“그날 바다로 뛰어내렸을 때, 많이 아팠어?”서현주의 어조는 지독하리만치 덤덤했다.“기억 안 나요.”연지훈은 그녀의 가차 없는 냉담함과 거리감에 입가에 씁쓸한 자조 섞인 미소를 띠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거칠게 긁혀 나왔다.“나한테 다시 만회할 기회 같은 건 없는 걸까?”말을 끝내고 연지훈은 다시 생각했다.‘내가 만회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이번 생에 하나는 태어나지조차 않았는데.’상처는 선명하게 새겨졌지만 정작 만회할 수 있는 통로마저 완벽히 차단된 셈이었다.서현주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이제 와서 만회하겠다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그녀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연지훈이 간신히 숨을 고르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난 내가 이제는 전부 다 갚은 줄로만 알았어...”최근 연성 그룹을 둘러싼 뉴스들과 그로 인해 그룹 주식이 상장 폐지 수준을 밟게 된 일련의 사태를 두고 한 말이었다.이제야 서현주와 온전히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찰나에 과거의 기억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다.그것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진 거대한 천벌과도 같아서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절벽을 만들어버렸다.그는 꿈속에서 보았던 자신의 그 모든 모진 행동들을 변명하고 싶었다.그건 그저 연동욱의 억압 때문에 서현주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어떻게든 연성 그룹을 무사히 손에 넣고 연동욱의 손에서부터 서현주를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멀리하며 세상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펼쳤던 것이라고.그저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서현주와 딸아이를 다시 당당하게 데려오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하지만 그의 거리두기와 방관이
서현주는 두 사람이 누워 있는 병실을 차례로 둘러보며 그들의 얼굴을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옆에서 엄진경은 두 손을 모아 쥐며 기도를 올렸다.“천지신명님, 정말 감사합니다. 둘 다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무사하면 됐어, 무사하면 된 거야...”한참 동안 혼잣말처럼 감사를 읊조리던 엄진경은 문득 서현주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엄진경은 덜컥 걱정이 앞서 물었다.“현주야, 왜 그래?”서현주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가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거예요.”자신 때문에 안요한과 황축복까지 위험에 휘말리게 했다.안정수의 우려는 백번 옳았다.지저분한 주변 골칫거리들을 확실하게 정리하겠다고 장담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런 사고가 터졌고 결국 안요한을 응급실 신세까지 지게 만들었다.엄진경이 입을 열었다.“이게 어떻게 네 잘못이니. 나쁜 짓을 저지른 건 그 사람들이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서현주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엄진경이 몇 마디 더 위로를 건넸지만 딸의 완고한 태도에 결국 설득을 포기했다.어떤 일은 결국 스스로 고민하고 털어내야만 해결되는 법이었다.타인의 백 마디 말은 그저 일시적인 처방일 뿐 근본적인 치유가 될 수는 없었다.연지훈은 그로부터 약 30분 뒤에 응급실에서 나왔고 안요한이나 황축복보다 훨씬 빨리 의식을 회복했다.서현주는 담당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을 나온 뒤에야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남자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낯빛이었지만 그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날카롭고 수려했다.오히려 그 창백함이 평소의 서슬 퍼런 냉정함 위에 묘한 유약함을 덧씌워 유독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서현주가 걸어 들어올 때만 해도 연지훈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침대 곁으
백미경은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인간이 절망에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쳤을 때 분출하는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었다.서현주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분노로 이성을 잃은 백미경이 복도 바닥에 누군가 놓아둔 보온병을 냅다 집어 들더니 그대로 서현주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 들었다.옆에 있던 엄진경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현주야!”서현주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그 순간, 시야 앞으로 묵직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끼어들더니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아 돌려세웠다.고개를 든 서현주의 시선이 뜻밖에도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중했다.퍽!백미경이 내두른 묵직한 보온병이 연지훈의 머리통을 그대로 강타했다.보온병이 산산이 부서지며 안에 들어있던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연지훈은 눈썹을 팍 찌푸리며 나지막이 신음했다. 이내 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서현주 쪽으로 무너지듯 쏠렸다.순간 서현주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연지훈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그 이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경찰들이 달려들어 백미경을 제압했다.연지훈의 머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서현주의 가냘픈 힘으로는 성인 남성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지듯 주저앉았다.저 멀리서 의료진이 이동식 침대를 밀며 정신없이 달려왔고 서현주는 밀쳐지듯 뒤로 물러났다.연지훈은 그렇게 또 다른 응급실로 다급하게 이송되었다.백미경은 연행되는 순간까지도 악을 쓰며 발악했지만 장정 같은 경찰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그녀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양손에 은색 수갑이 채워진 채 비참하게 끌려 나갔다.현장에 남은 몇 명의 경찰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현주 일행에게 다가왔다.서현주는 경찰을 바라보았지만 충격 탓인지 그들이 건네는 말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그저 질문이 들어오는
서현주는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대답했다.“우연히 마주쳤어요. 나 야맹증인가 봐요. 정전이 되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길도 잘 안 보이고... 벽을 짚고 가다가 어쩌다 보니 마주쳤어요.”그 말을 들으며 안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야맹증?”서현주는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한 뒤 다시 핸드폰을 껐다.“그런가 봐요. 불이 꺼지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그 말을 하면서 서현주는 어이가 없었다. 눈이 잘 보였더라면 연지훈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그럼 병원에 가봐야지.”서현주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지금은
안요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연지훈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서현주 납치 사건과 김민준의 교통사고를 맡은 경찰은 공우성 사건을 담당하던 그 인원들이었다. 연이어 벌어진 사고들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명백한 의도라는 판단 아래 경찰은 사안을 중대하게 받아들이고 그날 사고를 낸 화물차 운전자까지 다시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했다.동시에 공우성이 제출한 증거들도 이미 정리 단계에 들어갔고 시간상으로 보아 지금쯤이면 유이영을 체포하러 가는 길일 가능성이 컸다. 연지훈이 이렇게 태연하게 앉아 있
서현주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같이 가는 건 괜찮은데 연지훈 씨랑 싸워도 안 되고, 손대도 안 되고, 괜히 기분 상해서 성질내는 것도 금지예요.”안요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분별없는 사람처럼 보여?”서현주는 태연하게 덧붙였다.“어쨌든 이번에는 우리가 부탁하러 가는 입장이잖아요. 최대한 공손해야 해요.”안요한은 억울하다는 듯 강조했다.“나 생각보다 되게 어른스럽거든. 그 정도는 믿어줘야지.”“그러길 바랄게요.”서현주는 일부러 한마디를 얹었다.“그러길 바란다는 건 무슨 뜻이야
서현주가 말했다.“이번 사건에 ‘우연’이 너무 많아요.”경찰이 증거를 다 확보해서 체포하러 가려던 바로 그 타이밍에 일이 터진 것도 말이다.“유이영 씨 정말 사망한 게 맞아요?”그녀가 다시 물었다.서현주는 두 가지 상반되는 마음이 들었다. 한쪽에서는 자신이 괜히 바람만 불어도 놀라는 꼴이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이렇게까지 의심하는 건 지나치고 음덕을 해치는 일이라고 자책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건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다.안요한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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