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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作者: 다섯

제1장

作者: 다섯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은 비록 옷차림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은연중에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게다가 미간에는 서리처럼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어, 마치 이 속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열흘 뒤, 이곳으로 와 형을 받거라."

부윤(府尹)은 손을 저어 그녀를 물러가게 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문서현입니다."

그녀가 굳게 닫혔던 입술을 뗐다.

바람처럼 가벼운 목소리였으나, 한 글자 한 글자가 귓전에 또렷하게 꽂혔다.

"지아비의 성은 배씨입니다."

부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릴 뻔했다.

'배씨?'

도성 내에 성이 배씨인 권세가는 오직 그 후작 나리뿐이었다.

배도진!

뛰어난 외모에 막강한 권력까지 지닌 사내. 도성 내 수많은 여인들이 꿈에 그리던 서방님이 아니던가.

'명색이 후작 나리의 부인이 기꺼이 그 참혹한 숯불형을 감수하면서까지 휴서를 요구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억울한 일을 당한 걸까?'

문서현은 부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발걸음에는 티끌만 한 망설임도 없었다.

길가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펄럭이는 수레 발을 넘어 문서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마차 안,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떠올랐다.

그녀는 부윤이 왜 그리 놀랐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도성에는 배도진을 흠모하는 여인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문서현 역시 그 수많은 여인들 중 하나였으니까.

아주 오래전, 그는 사실 문서현의 형부였다.

배도진은 그녀의 언니인 문희주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문희주가 계례를 올리던 해, 그는 문씨 가문으로 허겁지겁 달려와 청혼을 했었다. 평생토록 문희주 단 한 사람만 바라보겠다면서 말이다.

이듬해에는 그녀와 아이까지 낳았고, 그 아이는 즉각 세자로 책봉되었다.

다만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혼인한 지 불과 삼 년 만에, 문희주는 앓아눕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문씨 어르신은 어린 외손자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가슴 아파하면서도 배도진이라는 귀한 사위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서녀인 문서현을 다시 그곳으로 시집보낸 것이었다.

엇갈린 운명 속에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소원이 이루어졌기에, 문서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혼인 후 오 년 동안 그녀는 매일같이 배도진 부자를 보살폈으나, 끝내 그들의 환심을 사지는 못했다.

배도진은 워낙 성정이 차가운 사람이었다.

오직 깊은 밤 침상에서 문희주와 약간 닮은 문서현의 얼굴을 볼 때만 조금 애틋한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매번 정사가 끝난 후면 그는 사람을 시켜 피임탕 한 사발을 문서현에게 보내왔다. 마치 그녀의 몸이 그저 욕구를 배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듯이.

문서현은 그 피임탕을 꼬박 오 년이나 마셨다.

한 번 그녀가 실수로 약그릇을 엎질렀을 때 약을 먹기 싫어 일부러 그랬다고 오해한 배도진이 싸늘한 태도로 사람을 시켜 강제로 약을 들이붓게 하기 전까지는.

문서현은 고통에 겨워 바닥에 웅크렸다. 그런데 그녀가 애지중지하며 수년 동안 아껴왔던 배은우는 그저 곁에서 웃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양.

문서현은 마음도 아팠고 상실감도 느꼈지만, 늘 자신을 위로하곤 했다.

'괜찮아. 사람 마음은 돌덩이가 아니니까. 하루하루 따뜻하게 품어주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고 보살피다 보면, 저들의 마음속에도 언젠가 내 자리가 생길 거야.'

문희주가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순간에서야 문서현은 알게 되었다.

그해 언니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뒷방을 관리해야 하는 안주인의 삶에 진절머리가 났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문희주는 선평후부(宣平侯府)와 배은우를 자유를 향한 길을 가로막는 족쇄로 여겼다. 대담하게도 죽음을 위장하고 도망쳤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 년 뒤, 천하의 반을 돌아다니며 놀다 지쳐 잠시 쉬고 싶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도진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배도진 부자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문희주가 지아비와 자식을 버렸다는 사실도, 그들을 수년 동안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선평후부에 안주인이 버젓이 있다는 사실조차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온 마음과 두 눈이 문희주로 가득 차 그녀를 버젓이 선평후부로 모셔 들였을 뿐.

문서현은 마침내 지쳐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대역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남자와 은혜를 모르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휴서를 청했다.

이윽고 마차는 금세 후부에 도착했다.

문서현이 마차에서 내려 대청에 채 이르기도 전이었다.

배은우가 아프다며 울부짖는 소리와 문희주가 아이를 달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녀가 다가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서현에게로 쏠렸다.

이윽고 배도진의 차가운 질책이 이어졌다.

"은우가 너랑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배탈이 났다! 안주인 노릇을 한 지가 몇 년인데, 아이 하나 제대로 못 돌본단 말이냐?!"

문서현은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배은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와 그 뒤에 선 문희주의 눈빛에 찰나의 찔림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곧장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은우를 데리고 나간 건 제가 아닙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배은우가 문서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어찌 거짓말을 해! 아버지, 저 사람이 제게 사탕을 먹으라고 줬어요! 제가 아버지가 이런 거 못 먹게 하셨다고 했는데도, 저 사람이 조금만 먹으면 괜찮다고 했단 말이에요!"

단호한 목소리로 아주 그럴싸하게 꾸며대고 있었다.

구 할이 진실이었고, 일 할이 거짓이었다.

그 일 할의 거짓이란 바로 문희주를 문서현으로 바꿔치기한 것이었다.

배은우는 오늘 분명 문희주와 함께 나들이를 다녀왔었다.

하지만 배도진은 아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문서현의 해명은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은우는 이제 겨우 여섯 살이다. 애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냐? 네 입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고 떠들어대는데, 그럼 넌 오늘 어딜 가서 무얼 했느냐?"

분노에 찬 질책이 귓가에 꽂혔지만, 그녀는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할 뿐.

"자기 친자식이 아니니, 역시나 마음을 쓰지 않는군."

하필 그때, 배은우를 끌어안은 문희주가 가볍게 내뱉은 불평 한마디가 배도진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순간, 배도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여봐라! 이 자를 사당으로 끌고 가 반성하게 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몇 줄기 그림자가 번쩍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문서현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호위무사들의 움직임에는 여인을 가엾게 여기는 기색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문서현을 그대로 질질 끌어가 사당에 내동댕이쳤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 거지런히 놓인 위패들...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음에도 문서현의 마음속에는 그다지 큰 슬픔이 일지 않았다.

'앞으로는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난 곧 이곳을 떠날 테니까. 배도진과 배은우는, 그들이 더 사랑해 마지않는 문희주에게 온전히 넘겨주면 그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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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4장

    "새로 부임한 호부시랑 서재희입니다."서재희가 배은우의 어깨를 툭 밀쳐 배도진의 곁으로 돌려보냈다.이윽고 문서현의 앞을 완벽히 가로막으며 덧붙였다."그리고, 두 분이 오늘 내내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이 여인의 서방이기도 하죠."'서방'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며 무겁게 떨어졌다.아니나 다를까.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앞에 선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극도로 분노한 기색이었다."무슨 헛소리야! 서현이가 어찌 네놈의..."배은우 역시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마치 가장 아끼는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았다."어머니는 내 어머니야! 당신 같은 놈한테 시집갈 리가 없어!"그 순간, 문서현은 잠시 멍해졌다.너무나도 소름 끼치게 익숙한 풍경.예전에도 수없이 보아왔던 광경이었다.다만, 그때 저런 서슬 퍼런 눈빛을 견뎌야 했던 것은 늘 자신이었고.그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문희주였다.하지만 지금.그녀는 도리어 그들이 어떻게든 차지하려 안달 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그때, 문서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재희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맞닿은 손바닥에서 훅 끼쳐오는 온기가 그녀의 차갑던 손끝을 녹여냈다.그녀는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한때 꿈속에서조차 수없이 그리며 마음에 새겼던 얼굴들.하지만 지금 그 얼굴은 더없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그럼에도 문서현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마치 애초에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사람처럼."어찌 아니라고 확신하지? 배도진, 네가 과거에 날 어떻게 짓밟았는지 평생 똑똑히 기억해야 할 거야. 그리고 배은우.""난 널 키우며 내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어. 단 한 번도 모자람 없이 대했지.""그 소중함을 진흙탕에 처박은 건 너야. 허구한 날 날 모함하고, 네 아비의 등에 업혀 내 숨통을 조였잖아.""배도진, 배은우. 내가 평생 그 자리에 서서, 너희의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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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2장

    배도진은 귀를 의심했다. 배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눈물이 배은우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마치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혹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어머니께서 어떻게 혼인을 하신단 말이에요? 우리를 버리신 거예요? 저 아저씨가 거짓말하는 거죠!"그때, 객주 천씨가 두 눈을 부라렸다.탁!그는 쥐고 있던 주판을 계산대 위로 거칠게 내리쳤다."예끼, 이 녀석아, 말조심해! 우리 장사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신용이야. 생면부지인 너희들한테 내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해!""우리 점주님은 혼인하신 지 벌써 일 년이나 지났어. 은남현 바닥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다고!""게다가 우리 점주님은 슬하에 자식도 없으셔. 어디서 굴러먹던 것들이 우리 점주님과 핏줄인 척 수작을 부려!"배은우는 무의식적으로 가게 안의 다른 손님들을 쳐다보았다.여전히 이 끔찍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객주 천씨의 말을 들은 손님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그날의 성대한 혼례를 떠올리는 듯했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납폐 행렬.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바닥에 흩뿌려지던 동전들.무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거대한 잔치.평소 관아에서 나누어 주는 죽으로 연명하던 거지들조차, 그 사흘 동안은 배가 터지도록 포식을 했을 정도였다.그뿐만이 아니었다.얼음장 같던 평주 자사는 혼인 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과거의 그 범접할 수 없던 서늘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만 만나면 제 집에 있는 꽃처럼 어여쁜 아내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장장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두 사람은 여전히 어제 갓 혼인한 신혼부부처럼 꿀이 뚝뚝 떨어졌다.은남현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평주 자사가 사랑하는 아내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 그 산더미 같은 관아의 공무마저 죄다 은남현으로 끌고 와 처리한다는 유난스러운 애처가 행보를.순간, 그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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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20장

    문서현이 눈을 내리깔며 낮게 웃었다.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지 오래였건만.그녀는 일부러 그 대답을 맨 마지막으로 미뤄두고는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정말 안 갈 거예요?"서재희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부의 연을 맺은 지 일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밖으로 겉돌게 하는 그녀를 향해 억울함을 토로하는 듯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참 아쉽네요. 그럼 저 혼자 도성에 다녀와야겠어요."그 한마디에 서재희의 두 눈이 번쩍였다.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했던 빛이 순식간에 차올랐다.벌떡!그가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였다."나랑 같이 도성에 가겠다고요? 하지만 당신, 예전엔 분명..."과거의 일을 떠올린 서재희는 말끝을 흐렸다.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문서현이 곧바로 그의 말을 자연스레 이어받으며 미소 지었다."다시는 도성에 돌아가기 싫다, 은남현에 정착하고 싶다고 했던 말이요?""하지만 당신도 알잖아요.""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지금 내 곁에는 당신이 있는데, 내가 마주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그녀의 대답은 지극히 숨김이 없고 담담했다.마치 예전에 서재희가 수없이 그녀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말이다.서재희의 두 눈에 벅찬 기쁨이 차올랐다.이윽고 그가 다급하게 몸을 돌리며 내뱉었다."지금 당장 가서 짐을 챙겨야겠소."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멀어지는 뒷모습에서조차 벅찬 희열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서현의 가슴 한구석에 옅은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과거에는 늘 서재희가 자신을 배려하고 맞춰주기만 했다.그러니 이번만큼은 스스로 마주할 차례였다.어떤 과거는, 영원히 등 돌리고 살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사흘 뒤.둥근 달이 높이 뜬 밤, 마차가 흔들리며 도성으로 향하는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수레 안의 문서현은 서재희의 어깨에

  • 긴 밤을 건너 비로소 빛나다   제19장

    선평후부를 떠나던 날, 문서현의 온몸은 끔찍한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그 지옥 같은 곳에서 겪은 핍박과 고통은 그녀의 영혼마저 갉아먹었다.'내 인생에 두 번째 혼인은 없다.'그것은 뼈에 새긴 다짐이었다.게다가 남편을 버리고 휴서를 청한 여인을 정실로 맞아들일 가문은 거의 없었다.그렇다고 남의 소실로 들어가 평생 고개를 숙이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다행히 문씨 가문은 비록 뼈대 있는 명문가는 아니었으나, 재력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풍족했다.바로 그 덕분이었다.문서현이 선평후부로 시집갈 때 비록 남편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문씨 어르신은 가문의 체면을 세우려 그녀에게 아주 두둑한 혼수를 챙겨주었다.그 재물만으로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그녀는 그것이 흠집 난 삶의 마지막 결말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남쪽으로 향해, 평주 은남현에 닿기 전까지는.아름다운 강남의 풍경은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였고, 기어이 그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했다.그리고 운명처럼 평주 자사(刺史) 서재희와 얽혔다.시작은 찰나의 우연이었다.문서현이 갓 사들인 저택에, 자객의 추격을 받던 그가 숨어들었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서재희를 숨겨 목숨을 살렸다.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말했다.그 후로도 기막힌 인연이 거듭되었다.그녀가 지몽각을 세우려 할 때, 서재희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어떤 물건을 팔지부터 터를 고르고 값을 흥정하는 일, 내부 단장과 일꾼을 부리는 궂은일까지.순탄하고 활기찬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그가 돌연 입을 열었다.생명의 은인이니, 평생을 바쳐 은혜를 갚겠노라고.처음엔 그저 실없는 소리인 줄 알았다.사람 하나 살려주었다고 이리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을 줄 뉘 알았겠는가.하지만 서재희는 훤칠한 외모만큼이나 속내가 올곧고 단단한 사내였다.그럼에도 문서현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 흠집으로 그를 떼어낼 속셈이었다.하지만 서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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