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와 절친한 벗은 경성의 귀한 집안 아가씨들 사이에서도 성정이 정반대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혼례복을 세 번이나 찢어 버릴 만큼 혼인을 거부했고, 명문가들 사이에서는 혼인할 뜻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불문에 귀의해 평생을 보내겠다고 맹세했다. 반면 나는 몰락한 후작 가문의 세자와 팔 년째 혼약을 이어 오며, 어른들 눈에는 더없이 얌전하고 반듯한 예비 신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궁중 국화 연회에서 그녀가 술기운을 빌려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내가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구나.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수 음식을 지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이런 성정까지 이해해 주니 참으로 기쁘구나." 나는 웃으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축복했다. "네가 원한다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빌어 주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꽃가지를 마음에 둔 사내에게 건네게 했다. 그때 병풍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런 자리를 싫어하는 줄 알고, 곁채에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따로 준비해 두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은 내가 팔 년을 기다렸고 다음 달이면 나를 부인으로 맞이할 세자였다. 늘 자유만을 바라던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줄 사람을 찾은 뒤였다. 모든 일이 지나고 나니, 결국 홀로 남은 것은 나였다. 돌이켜 보니, 지난 팔 년은 한낱 헛된 꿈에 불과했다.
View More삼 년 뒤, 박씨 가문의 수운은 열세 성을 잇게 되었다.북방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박씨 가문의 상선은 군수 물자를 무상으로 운송한 공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이례적으로 황실 상단의 금인을 하사받았다.서원에서는 시집에서 내쳐진 여인과 의지할 곳 없는 과부는 물론, 평생 깊은 규방에 갇혀 살기를 원하지 않는 아가씨들도 받아들였다.그곳에서 여인들은 글을 익히고 주판으로 셈하고 계약서를 살피는 법을 배웠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법도 배웠다.첫 제자들이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 누군가는 상점에 들어가 장부를 맡았다.누군가는 뜻을 모아 포목점을 열었고, 또 누군가는 돈을 모아 시집간 딸을 데려왔다.나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장부를 품에 안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봄날 상점들을 둘러보던 중, 내 마차가 옛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길모퉁이에 다리가 불편한 거지가 앉아 있었다. 옷은 낡아 해졌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다.바람에 마차 휘장이 들린 순간,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김연우였다.삼 년의 세월은 과거의 모습을 거의 모두 지워 놓았지만, 두 눈만큼은 여전히 예전과 닮아 있었다.그는 내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벽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다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고 손바닥이 쓸려 피가 맺혔다.지나가던 누군가가 그의 앞에 동전 두 닢을 던졌다.김연우는 동전을 줍지 않았다.대신 품속에서 오래된 옥 장식을 꺼내 오가는 사람들 너머로 내게 들어 보였다.그의 입술이 움직였다.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마차는 멈추지 않았다.오후가 되어 나는 성 밖에 새로 세운 서원에 도착했다.수십 명의 아가씨들이 뜰에서 주판 놓는 법을 익히고 있었고 주판알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친 듯했다.수업을 맡은 여선생이 새로 들어온 제자들의 명부를 내게 건넸다.가장 어린 제자는 열여섯이었다. 살림을 제
후작 가문이 압류되었다는 소식이 강남에 전해졌을 때, 김연우는 이제 막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작위는 박탈되었고 선대부터 내려온 저택은 관아에 몰수되었다.김연우는 세자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했다.임지헌을 대신해 서명했던 담보 문서 역시 그가 끝내 갚지 못한 마지막 빚으로 남았다.김연우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매일 받는 품삯을 전부 회계에게 건넸다.임지헌은 자취를 감췄다.그녀는 김연우가 약값으로 남겨 둔 삼백 냥을 챙겨 강남을 지나던 한 권세가에게 의탁했다.보름 뒤, 나는 술집 밖에서 그녀를 보았다.임지헌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녀들 뒤에 서 있었다.그 권세가의 정실부인이 마차에 오를 때, 그녀는 허리를 숙여 치맛자락을 들어 주었다. 예전의 거침없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마차 곁에 있던 집사가 짜증스럽게 재촉했다."명분도 없이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시녀 주제에 감히 안주인을 기다리게 하느냐?"임지헌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마차에 올랐다.김연우는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그는 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몸은 몹시 야위었고 상처도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임지헌을 발견한 김연우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 마차를 막아섰다."돈을 갚거라."임지헌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네가 자진해서 나한테 남겨 준 것이다. 게다가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데, 설마 나더러 널 따라 고생하라는 것이냐?""너는 후작 가문도,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그때 네가 세자셨으니까."김연우는 더 이상 마차를 막지 않았다.마차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튀긴 흙탕물이 빛바랜 옷자락에 묻었다.김연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고, 그제야 내 마차를 발견했다.나는 휘장을 내리려 했지만 그가 비틀거리며 뒤쫓아 왔다.호위가 마차 앞을 막아섰다."서윤아."삼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나는 그를 쫓아내지 않고, 반쯤 내려온 휘장 너머로 김연우를 바라
김연우는 두 달 동안 상단에서 일했다.예전에는 궂은일에 손 한번 대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배를 따라다니고 물건을 검수하고 화물을 호위하는 일까지 무엇 하나 마다하지 않았다.사람들이 그를 회계라 불러도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물품 목록을 대조할 뿐이었다.한번은 나루터를 지나다 그가 갑판에 쪼그려 앉아 밧줄을 다시 묶는 모습을 보았다.손가락 끝이 까져 피가 삼베 밧줄에 스며들고 있었다.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감췄다.나는 잠시 멈춰 섰다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바를 약을 보내 주었다.그런데 그날 밤, 김연우는 빈 약병을 깨끗이 씻어 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봄이 시작된 뒤, 상단에서 북쪽 강안으로 물건을 보내야 했다.김연우는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겠다며 자청해 배를 호위하겠다고 나섰고, 황제가 후작 가문에 하사한 문서까지 꺼내 거래의 담보로 삼았다.황제가 하사한 물건은 본래 사사로이 담보를 잡을 수 없었다.나는 그 사실을 일러 주었지만, 그는 끝내 계약서에 서명했다."이번 거래만 성사되면 빚의 절반 이상을 갚을 수 있다. 후작 가문에 남은 것도 이제 이것뿐이니, 마지막으로 한번 걸어 보겠다."도중에 도적을 만났을 때 김연우는 화물선을 지키려다 칼을 맞았다.소식을 듣고 객잔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의원이 그의 상처를 꿰매는 동안 나는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약을 두 번이나 다시 데웠다.김연우는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나를 보았다."물건은 어찌 되었느냐?""지켜 냈습니다."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손을 들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놓지는 않았다."서윤아, 예전의 나는 네가 다른 사람보다 강인하니 서러운 일을 조금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칼을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아무리 잘 참는 사람이라 해도 아픔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더구나."눈물이 소리 없이 그의 눈가에서 흘러내렸
임지헌이 상단에 들이닥쳤을 때 입고 있던 옷은 바로 그 화려한 붉은 옷이었다.그녀는 경성에서 강남까지 나를 쫓아왔고, 곁에는 시녀 한 명만 데리고 있었다.옷자락은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금실로 수놓은 문양은 여전히 눈부셔 상단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지헌은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대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난 한 번도 너와 다툴 생각이 없었어다. 너한테는 가업도 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도 있고, 경성에서 누리는 명망도 있지 않느냐. 그런데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은 나를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이냐?"뒤이어 김연우가 달려왔다.그가 임지헌을 데리고 나가려 하자 그녀는 손을 뿌리치고 사람들 앞에서 겉옷을 풀어 붉은 옷을 드러냈다."봐. 이제는 이 옷마저 내 잘못이 된 것이냐? 내가 죽어야만 세자를 놓아줄 것이냐?"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나는 그녀와 김연우를 두고 다투지 않았다. 그저 장부를 맡은 이에게 지난 팔 년간의 거래 장부를 가져오게 했다.과거 우리는 절친한 벗이었다.임지헌이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이며 나들이에 쓴 마차와 말, 절에 올린 공양까지 대부분 내가 대신 값을 치렀다.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그녀는 나의 상단 패로 마흔일곱 차례나 외상 거래를 했다.그중 스물한 건에는 김연우의 서명과 인장이 찍혀 있었고, 나머지는 예전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쓰라고 내가 그녀에게 맡겨 둔 개인 인장을 사용했다.옷과 장신구, 별원 수리 비용까지 모두 일만 육천삼백 냥이었다.장부를 맡은 이가 사람들 앞에서 모든 내역을 읽고 나자 시끄럽던 대청이 점차 조용해졌다.나는 장부를 그 붉은 옷이 기록된 장까지 넘겼다."예전에 선물한 것들은 따지지 않겠다. 허나 상단 패가 이미 회수된 것을 알면서도 계속 후작 가문 세자빈의 명의로 외상을 달아 두었더군."임지헌이 옷깃을 세게 움켜쥐었다."이건 세자께서 내게 준 것이다.""하지만 내 돈으로 산 것이다!"나는 여집사에게 수수한 옷 한 벌을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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