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임서아는 전 태부(太傅)의 하나뿐인 적손녀이자, 경성에서 으뜸가는 영애였다. 하지만 그녀는 하필 세자 차도진을 위해 스스로를 세상 최고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차도진이 절벽 아래로 추락해 의식을 잃었을 때였다. 임서아는 홀로 천 리 길을 달려가 은거 중인 신의의 거처를 찾아내 그 문앞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꼬박 닷새 밤낮을 무릎 꿇었다. 겨우 신의를 모셔온 후에는 규수로서의 세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일 차도진의 침상 곁을 지키며 약을 달이고 몸을 닦아주기를 이어간지 꼬박 삼 년. 그러나 삼 년 뒤, 의식을 되찾은 차도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따로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임서아의 몸종, 연희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이겠노라 선언한 것. 소문이 퍼지자 온 경성이 발칵 뒤집혔다.
View More얼마 지나지 않아, 여종이 고개를 살짝 밀어 넣으며 아뢰었다."아가씨! 꽃가마가 대문 앞에 도착했습니다!"송씨가 손수 임서아의 머리 위에 붉은 너울을 씌워 주었다.순간, 임서아의 눈앞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시녀의 조심스러운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선 그녀는, 제 손을 심태건의 손 위에 가만히 얹었다.붉은 너울 너머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손바닥에 배어난 옅은 땀기운만큼은 또렷하게 전해졌다.늘 대범하고 침착하던 심태건이, 오늘만큼은 마치 풋풋한 소년처럼 긴장하고 있었다.임서아는 그의 세심한 호위를 받으며 꽃가마에 몸을 실었다.강남의 혼례 풍습에 따라, 꽃가마는 온 성안의 백성들에게 경사를 알리기 위해 도심을 한 바퀴 빙 돌았다.한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한적한 모퉁이.마차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차도진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마차에 기대고 있었다.그는 아득히 멀리 보이는, 눈이 부시다 못해 쓰라린 붉은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홀한 환각처럼, 눈앞의 광경이 얼마 전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과 천천히 겹쳐 들었다.꿈속의 임서아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자신과 맞절을 올리며 혼례를 치렀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이가 준비한 혼례복을 입고 기쁨에 가득 찬 채 다른 사람의 곁에 서 있었다.심장 깊은 곳에서 통증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그는 문틀을 부서뜨릴 듯 움켜쥐었다. 하얗게 질린 마디마디가 사정없이 떨렸다.지난 며칠간, 그는 그녀를 위해 중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헤매었건만, 임서아는 단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다.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된 그에게, 대체 무슨 자격이 있어 달려가 그녀를 빼앗아 올 수 있단 말인가.한참 뒤, 차도진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눈동자에는 깊고 어두운 쓸쓸함만이 남아 있었다.이윽고 그가 쉰 목소리로 하인에게 나지막이 명령했다."가자."성을 한 바퀴 돌아온 꽃가마가 심씨
절체절명의 순간, 수풀을 헤치고 나온 차도진의 눈에 위태로운 광경이 들어왔다.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임서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어 양팔을 벌려 그녀를 제 품 아래 단단히 감싸 안았다.바로 그때, 살점이 찢겨 나가는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차도진의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목구멍 너머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를 굳건히 지켜 내는 그의 두 팔만큼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잠시 후, 머리 위에서 지독한 통증을 머금은 차도진의 목소리가 흘러내렸다."두려워 마라... 내가 있으니..."그의 품 아래 꼼짝없이 갇힌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 처참함에 마음이 거세게 요동쳐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어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타격을 입은 늑대 무리가 낮게 울부짖으며 경고를 보내더니, 결국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사방으로 흩어져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차도진의 몸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그는 임서아의 위로 털썩 쓰러지며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온몸을 파르르 떨던 임서아가 황급히 손을 올려 차도진을 받쳐 들었다. "저하? 정신 차리십시오! 사람 겁주지 마시고요!"조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그의 숨결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 임서아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차도진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그때,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심태건이 수많은 호위를 이끌고 달려왔다.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심태건이 초조하게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어 보았으나 차마 어디 곳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피가 이렇게나 많이... 어디 다치신 겁니까?"임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목이 턱 막혀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그녀는 제 위에 엎드려 있는 차도진을 떨리는 손끝으로 가리킬 뿐이었다.차도진의 몸에는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옷은 갈가리 찢겨 나갔고,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피범벅 상처가 곳곳
임서아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눈을 떴다.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손목과 발목은 부드러운 면끈으로 촘촘히 묶여 있었다.맞은편에는 차도진이 앉아 있었다.금방이라도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며칠 사이 그의 눈가에는 붉은 핏발이 짙게 서 있었다. 거칠게 자란 수염이 턱밑을 덮고 있어, 특유의 고귀함과 기품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몰락과 집착만이 남아 있었다.임서아가 눈을 뜨자, 차도진의 죽어 있던 눈동자에 찰나의 희열이 번졌다.이윽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정신이 드느냐? 지금 경성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도착하면 바로 혼례를 올리자. 지난일은 다 내 잘못이었어. 내가 다 보상하마. 앞으로는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 것이다. 그러면 너도 언젠가 날 다시 받아줄 테지."임서아는 마차 벽에 기댄 채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요? 이렇게 억지로 데려가 제 몸을 가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자 저하, 저는 오래전에 저하를 향한 마음을 접었습니다. 저하의 잘못도, 보상도, 이제 제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그 한마디는 차도진의 희열을 단숨에 짓밟아 버렸다.그가 주먹을 꽉 쥐며 조급하게 말을 내뱉었다."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날 위해 그 많은 걸 바쳤던 네가 어찌 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저 홧김에 이러는 거잖아, 맞지? 날 원망하니까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냐."자아도취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이 실로 가소로웠다.더 이상 말조차 섞기 싫었던 임서아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아버렸다. 단 한 순간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차도진은 그렇게 단호히 외면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조여드는 듯했다.한참 뒤 그가 탁한 숨을 내뱉으며 광기 어린 눈빛을 띠었다."상관없다. 경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테니까."마차는 덜컹거리며 경성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얼
"이대로 못 간다! 서아야..."차도진이 가솔들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임서아의 옷자락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옆에서 뻗어 나온 손 하나가 그의 손목을 억세게 잡아챘다.임서아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돌아온 심태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차도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심태건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 서슬 퍼런 분노가 넘실거렸다.이윽고, 심태건은 조용히 손을 놓으며 반 걸음 물러섰다. 그 움직임 하나로, 임서아의 몸이 어느새 그의 등 뒤에 자연스레 가려져 있었다."세자 저하, 경성에 머물지 않으시고 강남에는 어찌 오셨습니까? 이곳은 저하께서 계실 곳이 아닌 듯합니다만. 서아 낭자께서도 방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더 이상 찾아와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요. 이만 돌아가시지요."차도진이 이를 악물었다."이건 저 아이와 나 사이의 일이다. 외인 따위가 참견할 바 아니니 비키거라!"그러나 심태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서아 낭자는 제 정혼자입니다. 아가씨의 일은 곧 제 일이지요.""너희는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다!"차도진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졌다."다음 달 초아흐렛날, 저희는 혼례를 치를 것입니다."심태건이 담담히 그의 말을 끊었다."세자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오셔서 축하주 한 잔 드셔도 좋습니다."잠시 후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곁에 서 있던 가솔들이 즉시 달려들어 차도진을 바짝 붙잡았다."하지만 지금은 이만 나가주셔야겠습니다."차도진이 거칠게 몸부림쳤지만, 단단히 붙들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붉게 충혈된 눈으로 심태건을 노려보며 그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네놈이 감히 내게 손을 대느냐? 내가 너를 처벌하지 못할 줄 알고!"그러나 심태건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저는 그저 저하께 나가달라 청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저희 심씨 가문은 먼저 나서서 일을 벌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일을 두려워하지도 않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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