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무슨! 내 목소리를 흉내 시켜서 녹음이라도 한 거겠지!”공수진은 마음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그래,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다 손을 써놨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냥 해본 소리일 게 분명해!’하지만 공수진의 바람과 달리 임유진은 그저 아무 말이나 뱉은 것이 아니었다.“흉내를 내는 건지 아니면 실제 그쪽 목소리인지는 확인해보면 알게 되겠지. 생각을 좀 해봐.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확신을 가지고 내뱉을 수 있는 건지.”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공수진 씨 대신 복수해주니까 좋아요? 언니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보니까 좋냐고요. 당신이 언니한테 지은 죄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임유진은 발걸음을 돌려 강지혁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그리고 강지혁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이경빈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은 온통 강제로 무릎이 꿇린 채 머리를 바닥에 세게 박고 있던 탁유미의 모습뿐이었다.“너를 증오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증오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경빈, 네가 그걸 해냈어. 나는 널 절대 용서 안 해. 죽는 순간까지 널 증오할 거야!”탁유미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아직도 머리에서 맴돌았다.만약 그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두 번째 목숨을 부여해준 사람이 정말 탁유미라면 그는...이경빈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경빈 씨!”그때 공수진이 눈물을 머금은 채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를 불렀다.“임유진 그 사람은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경빈 씨, 그 여자 말 믿는 거 아니죠?”이경빈은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을 움직여 공수진을 바라보았다.공수진은 여전히 한 떨기 꽃처럼 무척이나 가녀리고 또 가여워 보였다.예전이었으면 그런 그녀를 품에 안아주고 위로를 건넸겠지만 지금은...“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 정말 너 맞아? 탁유미가 아니고?”이경빈은 두 눈을 공수진의 얼굴에 고정한 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공수
만약 임유진이 정말 사실을 얘기한 거라면 그때는 이경빈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이경빈이 떠난 후 병실에 남은 공씨 부부는 진이 다 빠진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어떡하지?”한영애가 두 손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만약 경빈이나 자기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게 탁유미 그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엄마!”그러자 공수진이 큰소리로 그녀에게 외쳤다.“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 해요. 경빈 씨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은 나예요. 병원 기록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고작 통화 녹음으로 경빈 씨가 넘어갈 것 같아요? 녹음 같은 건 얼마든지 다른 사람 목소리로 흉내 낼 수 있다는 걸 경빈 씨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이 말은 한영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함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그래. 병원 기록에 내 이름이 쓰여 있는 한 상황을 뒤집기는 어려워. 누가 그깟 통화 녹음으로 내가 아니라 탁유미가 했다고 확신할 수 있겠어. 불안해하지 마, 공수진!’한영애는 딸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경빈이한테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은 너야. 수진이 너야!”한편 공한철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이경빈이 쉽게 임유진의 말을 믿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말을 백 프로 믿을 거라는 생각 또한 하지 않으니까.아마 이경빈의 성격대로라면 사람을 풀어 조사를 먼저 할 것이 분명했다.“주원호가 해외로 나갈 거라는 건 확실한 얘기야?”“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공수진은 주원호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렸다.그날 주원호의 꼬드김에 넘어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임신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를 가진 일을 덮기 위해 이런 쇼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일단은 주원호가 해외로 뜨기 전까지 계속 주시해. 허튼짓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알겠어?”주원호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기에 하루빨리 해외로 보내야 했다.“네, 알겠어요.”“여보... 우리 수진이랑 경빈
사실 임유진은 내일쯤 증거들을 가지고 이경빈을 찾아가려고 했었다.강지혁 덕에 드디어 탁유미가 이경빈을 살렸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바로 오늘 일이 터져버렸다.몇 시간 전, 임유진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윤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얼른 강지혁에게 연락해 탁유미가 끌려간 곳이 어딘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만약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으면 탁유미는 아마 이경빈과 공씨 일가 사람들에 의해 더 한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혁아, 네가 전에 그랬지. 이경빈은 아마 정말 언니를 사랑했을 거라고. 그런데 사랑했던 여자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냐고...”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너무 속상해하지 마. 탁유미 씨가 더 이상 이경빈과 공씨 일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병실 밖에 경호원을 붙여둘게.”“너무 화가 나.”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어떻게 언니를 벼랑 끝까지 내몰 수가 있어?”이경빈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탁유미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짓은 못 했을 것이다.“골수 기증을 해준 게 탁유미 씨라는 걸 들었으니 아마 지금쯤 조사를 시작했을 거야.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때는 평생 후회 속에서 살게 되겠지.”“후회?”임유진이 코웃음을 쳤다.“고작 후회로 되겠어? 이경빈은 언니 인생을 망치고 언니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는데? 심지어 상처뿐만이 아니라 모멸감까지 줬어! 그런데 평생 후회한다고 그게 없던 일이 돼?!”강지혁은 분노에 찬 임유진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어쩐지 날이 선 그녀의 말이 자신에게 향하는 말인 것 같아 심장에 욱신거렸다.“이경빈이 탁유미 씨한테 간 기증을 해주길 바랐잖아. 후회하게 되면 적어도 간 기증을 해주겠다는 얘기는 들을 수 있겠지.”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생각에 잠겼다.탁유미의 혈액형은 흔치 않은 혈액형이라 매칭되는 사람을 찾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그런데 만약 이경빈이
하지만 그 진실을 믿을 용기가 없었다.믿어버리면 그때는 모든 게 다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만약 탁유미가 정말 기증자가 맞다면 그는 그간 정말 못 할 짓을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탁유미에게 일부러 접근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또 그녀에게 복수하겠다고 증인을 자처해 그녀를 감방에 보내버렸고 심지어는 그녀가 힘들게 낳은 윤이도 빼앗겠다며 난리를 피웠으니까.이경빈은 그간의 행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날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이경빈은 그 뒤로 몇 시간을 내리 호텔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때 벨이 울리고 그 소리에 이경빈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윽!”같은 자세를 계속 유지했더니 머리가 띵한 것이 조금 어지러웠다.계속해서 울리는 벨 소리에 이경빈은 마른세수를 한번 하더니 터벅터벅 호텔 방 문으로 향했다.문을 열어보니 웬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이경빈 대표님 맞으시죠? 강 대표님 아내분께서 이걸 대신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남자의 말에 이경빈이 되물었다.“강 대표 아내가 누구죠?”“임유진 씨요.”이경빈은 남자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 대표와 결혼을 한 건가? 언제?’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제일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이경빈은 남자의 손에 들린 USB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그 USB 안에 뭐가 들었다고 하던가요?”“음성 파일 두 개가 들어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대표님께서 궁금해하실 만할 내용이 들어있다고도 하셨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가 궁금해할 만할 내용이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이경빈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USB를 건네받은 다음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불을 켜 방을 밝게 하더니 조금 허겁지겁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전원을 켤 때는 몇 초간 머뭇거렸다.그리고 전원을 켜고 USB를 노트북에 연결할 때는 손을 덜덜 떨며 USB를 바닥에 떨구기까지 했다.이경빈은 카펫 위에 떨어진 검은색 US
의사는 공수진에게 전화를 건 목적을 얘기했다.의사의 말이 끝이 난 후 곧바로 너무나도 익숙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한데 나는 기증할 생각 없어요. 그때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한번 등록해본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알아봐요.”이건 공수진의 목소리였다.“네...? 저...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간절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환자입니다. 골수를 기증해준 후 얼마간 휴식을 취하고 몸조리를 잘하게 되면 몸도 금방 회복됩니다. 공수진 씨한테 절대 큰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의사는 재밌을 것 같아서 등록해봤다는 그녀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공수진은 그런 간절한 부탁에도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기증하기 싫다고요. 애초에 내가 등록을 안 했으면 어차피 그 환자는 죽을 목숨 아니었어요? 그럼 그냥 그게 팔자겠거니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하세요. 그리고 내 몸에 부담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후유증이 있을지 없을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요. 그 사람한테 기증했다가 내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쪽이 책임질 수 있어요? 기가 막혀서 진짜!”공수진의 단호한 말에 이경빈은 표정을 굳혔다.그녀의 말에는 일말의 정도 없었고 심지어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환자에게 어차피 죽을 목숨 아니었냐는 막말까지 해댔다.공수진은 그의 생사 같은 건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물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안전한 수술이고 수술 후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 측에서 어떻게든...”“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됐고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만약 또다시 나한테 전화하면 그때는 확 경찰에 신고해버릴 거니까!”공수진은 짜증을 내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경빈은 뚜뚜뚜 소리와 함께 재생이 끝난 파일을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정말 그때의 통화녹음 파일이 여태 남아있다고 해도 공수진의
이경빈은 노트북 화면을 미동도 없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하지만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세게 흔들리고 있었고 얼굴은 후회와 두려움, 그리고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이경빈은 지금 마치 거대한 해일에 몸이 잠식된 듯 머리가 울렁거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증거라고는 고작 두 개의 음성파일뿐이지만 그는 이미 그를 구한 사람이 누군지 확실히 깨달았다.왜... 왜 이제야 이 녹음 파일을 듣게 된 걸까.왜 공수진이 골수를 기증한 게 자신이라고 했을 때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믿어버렸던 걸까.어떻게 그 말의 진위를 조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그때 이경빈의 머릿속으로 탁유미가 차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널 구한 사람이 공수진이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그 말에 그는 뭐라고 대답했지?이경빈은 그때 자신과 공수진 사이를 이간질 말라고 하며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은 공수진이고 탁유미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다.심지어 그 뒤에는 억지로 탁유미를 병실까지 끌고 가 공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하지만 아무리 세게 내리쳐도 얼굴에서는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심장 쪽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하하하... 하하...!”이경빈은 갑자기 소리 내 웃어버리더니 이내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대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왜 한 번도 탁유미를 믿어보려고 하지 않았지?탁유미는 아마 당시 차 안에서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공수진이 구한 게 아니라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그런데 그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을 짓밟고 그녀의 발버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만약 그때 그녀의 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믿어줬으면 탁유미는 공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이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모멸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탁유미의 말대로 그는 정말 등신이 맞았다.“하하하하...”이경빈은 세
탁유미는 김수영의 말에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이 떠올랐다.억지로 바닥에 머리가 조아려진 채 수모를 당하던 그때 임유진이 병실로 뛰어 들어와 그녀를 구했다.만약 임유진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아마 더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그런데 유진 씨는 어떻게 병실로 찾아올 수 있었던 거지?”탁유미의 혼잣말에 김수영이 대답해주었다.“윤이가 유진 씨한테 전화를 걸었어. 웬 남자들에게 안겨 집으로 온 뒤에 윤이가 눈물을 흘리며 나한테 유진 이모한테 전화를 걸어 달라고 애원했거든.”탁유미는 그 말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고작 4살밖에 안 된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우리 윤이 많이 놀랐지? 엄마 이제 괜찮아. 봐봐. 멀쩡하잖아.”탁유미의 말에 윤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윤이가 엄마를 지켰어야 했는데...”아이는 만약 자신이 어른이었다면 절대 엄마가 그렇게 끌려가게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윤이는 아직 어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를 지키지조차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왜 아빠는 엄마를 괴롭히는 거지?왜 아빠는 엄마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는 거지?“아니, 엄마는 오늘 윤이 덕에 무사할 수 있었어. 윤이가 이모한테 전화를 걸어줘서 엄마가 이렇게 멀쩡할 수 있었던 거야. 윤이는 정말 최고야.”탁유미의 칭찬에도 윤이의 표정은 여전히 시무룩한 채로 전혀 풀리지 않았다.아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엄마, 나는 아빠 싫어요. 엄마만 있으면 돼요. 앞으로는 아빠 보고 싶다고 안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윤이가 엄마 지켜줄게요! 빨리 커서 엄마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눈물을 글썽였다.할 수만 있다면 아이가 크는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지켜봐 주고 싶었다.“응. 우리 윤이만 있으면 엄마는 무서울 게 없어.”윤이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하품을
“네, 그럴게요.”탁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공수진의 유산 소식은 기사를 타고 빠르게 인터넷에 전파되었고 어느새 인기검색어에도 올라갔다.그리고 그녀의 유산 기사와 함께 누군가가 올린 동영상도 인기검색어에 올랐다.영상 속 공수진은 탁유미의 손에 의해 밀쳐진 후 테이블에 부딪혔고 그 뒤로 곧바로 배를 끌어안으며 고통을 호소했다.동영상을 올린 사람은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올리는 거라며 이 사건으로 영상 속 여자는 3개월 된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그러자 몇 분 후 누군가가 영상 속 여자는 공씨 가문의 딸인 공수진이라며 그녀가 이경빈의 약혼녀라는 댓글을 달았다.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수진을 밀친 사람이 탁유미라는 것을 알아냈고 탁유미가 전과자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여론은 순식간에 공수진 쪽으로 기울었고 네티즌들은 탁유미에게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아이를 죽인 악독한 살인마라며 갖은 욕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누군가는 탁유미를 죽여버릴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공수진은 병상 위에 누운 채 사람들의 댓글을 지켜보며 비릿하게 웃었다.그녀는 지금 완벽한 피해자였다.가십거리라면 환장을 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경빈과 엮인 여자로 인해 공수진이 두 번이나 유산했으니 그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훈수를 뒀다.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강 그룹 회사 홈페이지로 들어가 얼른 공수진과 결혼하고 탁유미를 감옥에 보내버리라는 댓글까지 달았다.“여론이 우리 편인 이상 골수 기증자가 네가 아니어도 이경빈은 너랑 결혼할 수밖에 없을 거다.”공한철이 확신하며 말했다.“이경빈이 싫다고 해도 그 집 어른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게다가 탁유미가 널 두 번이나 해하려고 했던 건 모두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중 한번은 이경빈이 직접 증언까지 해줬고 말이야.”“그런데 여보... 정말 이대로 결혼을 시켜도 괜찮을까요? 수진이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한영애가 조금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그럼 이대로 물러서자고?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돼. 당신은 탁유미가 걸리는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