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 임유진의 얼굴에 다가가더니 볼로 유진의 한쪽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마치 끝없는 애틋함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혁의 입에서는 섬찟한 말을 가볍게 내뱉었다.“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내가 답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알 수 있을 거야. 그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하면 그 자식이 누나 마음속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유진은 몸을 떨었고 지혁을 노려보며 말했다.“뭘 하려는 거야, 나와 그는 단지 동료 관계일 뿐,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런데 그 자식이 누나를 좋아하잖아, 아니야?”지혁은 중얼거리며 엄지손가락으로 유진의 부드러운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너……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마.”유진은 입술이 바르르 떨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누나 그 자식에게 호감이 있다는 말이야?”지혁은 흉악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모든 방어를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혁의 눈빛은 오히려 은은한 예리함을 띠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니…… 그건 아니야…….”유진은 지혁의 숨결을 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온몸이 지혁의 숨결에 휩싸인 것 같다.“그래? 누나는 그 자식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거야?”지혁의 입술은 마치 불안해하는 작은 동물을 놀리는 것처럼 유진의 코끝을 가볍게 스쳤다.유진은 몸이 뻣뻣해졌다.“아니야.”지혁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눈가와 눈썹에 모두 웃음이 물들어 있는 것처럼 맑고 순수하며 사랑스러웠다. 이런 모순된 단어는 동시에 지혁에게서 표현되고 있었다.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좀 멍해졌다. 지금 지혁이 웃는 모습은 마치 또 지난날의 혁이로 변한 것 같았다.“그럼 누나, 방금 한 말을 기억해.”지혁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울려서야 유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는 혁이가 아니다. 그는 강지혁이다!‘꼬르륵!’유진의 위는 지금 때아닌 비명을 질렀다.지혁은 잠시 멍해진 후에 유진의 배를 바라보았다.유진은 갑자기 난처해졌다.“잊
“알겠습니다.”고이준은 대답하고 나서 백미러로 조심스럽게 차 뒷좌석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힐끗 보았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강 대표님은 기분이 들어갈 때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음, 이것도 좋은 일이겠지.’이준은 몰래 생각했다.황정 레스토랑은 S시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으로서 황실의 궁중요리를 주로 하는데, 물론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곳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부유층이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고, 일반인들은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차가 황정의 문 앞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린 후, 강지혁은 자연스럽게 다시 유진의 손을 잡았다.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지혁은 다섯 손가락에 힘을 꽉 줬다.“누나, 움직이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누나를 어떤 방식으로 데리고 들어갈지 장담할 수 없어.”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유진은 흠칫하다가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았다.지혁이 유진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와 지혁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가끔 곁눈질로 이상하게 유진을 힐끗 쳐다보았다.유진은 자신이 입고 있는 이 싸구려 낡은 옷이 이 레스토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강 대표님, 오셨군요.”레스토랑 지배인이 친절하게 맞이했다.“예전대로 룸으로 할까요?”“그래.”지혁이 대답했다.레스토랑 지배인이 길을 안내하려 할 때 유진은 시선을 돌리다가 무심결에 누군가를 발견하고 조금 멍해졌다.그건…… 조민혜였다!유진의 인상 속에서 조민혜는 집이 공장을 차렸기에 교만한 공주 같았다. 얼마 전에 민혜를 만났을 때 민혜는 빈정거렸으며 심지어 일부러 동창회에 나오도록 하기도 했다.다만 지금 유진이 좀 놀란 건 민혜가 작고 뚱뚱한 중년 남자 옆에 기대어 매우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연인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그러나 유진은 알고 있다. 민혜는 줄곧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예전에 학교에 다닐 때도 민혜는 잘생긴 남자만 남자친구로 삼으려
그러나 이 메스꺼운 느낌보다 조민혜가 더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부터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반인처럼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야 하고,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서는 심지어 오랫동안 아껴 먹고 아껴 써야 하는데,이런 생활을 생각하면 민혜는 무서웠다.민혜의 상상 속에서, 자기는 마땅히 높은 곳에 있어야 하고, 임유진을 능멸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유진에게 자신이 뚱뚱하고 속된 사람에게 아부하는 꼴을 보였으니 마음속으로 분노가 들끓었다.“민혜야, 아는 사람이야?”민혜 옆에 서 있던 그 땅딸막한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그럼요,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지금은 도로를 청소하고 있어요!”민혜는 악랄하게 유진의 밑바닥을 들추어내고 옆에 있는 지배인을 바라보며 말했다.“황정은 언제부터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조차도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강지혁은 이때 민혜를 등지고 있었기에 민혜는 지혁의 정면을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배인의 눈에는 보였다!그 순간 지배인은 간담이 서늘하여 조민혜라는 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 버리고 싶었다.감옥에서 나오면 뭐, 길을 쓸면 뭐, 강 대표님이 데리고 들어와 밥을 먹으려는 사람이라면 길가의 거지라도 다 괜찮다.“누가 여기서 식사할 수 있는지는 그쪽이 가르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당장, 이 아가씨에게 사과해요!”지배인은 민혜에게 말했다.민혜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유진에게 사과하리니, 미친 거 아닌가?“일하기 싫어요?”민혜는 노발대발하다가 또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는 중년 남자에게 기대어 말했다.“정 사장님, 이 사람이 나더러 길을 청소하는 사람에게 사과하라고 하다니, 너무 했어요!”정 대표가 조민혜를 위해 몇 마디 하려던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사과가 왜,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꿇어야지.”정 사장이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고 몸을 돌려 말하는 이 사람을 본 후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다.이 사람은…… 강지혁이었다! 강 씨
조민혜가 아무리 바보라도 자신이 큰일 쳤다는 걸 알아차렸다.임유진은 도대체 언제 이렇게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알게 된 걸까? 민혜의 마음속에는 질투가 피어올랐고, 곧이어 민혜는 이 남자의 얼굴이 보면 볼수록 낯익다는 것을 느꼈다.민혜는 어렴풋이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순간, 민혜의 눈빛이 밝아지더니 소리 질렀다.“당신은…… 임유진의 그 기생오라비?”이 말이 나오자 옆에 있던 지배인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했고, 정 사장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자신이 민혜와 함께 있다는 것이 한스러웠다.S 시 전체에서 누가 감히 강지혁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살고 싶지 않은 일이다!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 민혜를 바라보았지만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민혜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분은 강 씨 그룹의 강지혁 대표님이셔!”정 사장이 황급히 말했다.민혜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 남자가…… 강지혁이라니?!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강지혁이 어떻게 유진과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유진이 차로 치어 죽인 사람은 지혁의 약혼녀인데 말이다.민혜는 갑자기 본인의 집에 큰 변고가 생기기 전에 신정민이 업소에서 유진을 괴롭혔을 때 유진을 구했던 사람이 바로 지혁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그때 모든 사람은 정민이 지혁을 시끄럽게 해서 그런 줄 알았다. 사람들은 유진이 운이 좋아서 지혁에게 구조 되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민혜의 혈관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하지만…… 하지만 임유진은…….”민혜는 말을 반쯤 하다가 지혁의 그 쌀쌀한 눈빛을 마주하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공포가 민혜의 마음속에서 솟아올랐고, 계속 말한다면, 민혜는 안 좋은 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 싶었다.“민혜야, 빨리 강 대표님과 곁에 있는 이 아가씨에게 사과하지 않고 뭐해!”정 사장이 재촉했다.민혜는 굴욕적인 얼굴로 아무 말이 없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애매한 포즈에 옆에 있던 지배인과 정 사장은 마음속으로 살짝 놀랐다.모두 강지혁이 여색과 멀리한다고 했다. 지난날 약혼녀 진애령과도 서로 손님 대하듯 존경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이렇게 한 여자와 친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한 여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서다니?조민혜는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며 사과했다.“유진아, 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 앞으로 안 그럴게. 나를 용서해 줘!”임유진은 이런 민혜를 보면서 아무런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민혜도 유진을 동정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유진은 아직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을 동정할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하지만 유진은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혜가 이렇게 무릎을 꿇는다고 하더라도 유진의 마음속에는 조금의 통쾌함도 없었다.“누나, 용서해 준다고 했어?”지혁은 마치 유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중얼거렸다.“이건 너의 결정이야.”유진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나 배고파, 밥 먹고 싶어.”“그래, 그럼 가자.”지혁은 말을 하고 나서 다시 유진의 손을 잡고 옆에 있는 지배인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했다.지배인은 얼른 길을 안내하고 있었고, 민혜는 여전히 멍하니 제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미처 정신 차리지 못했다.방금…… 지혁이 유진을 ‘누나’라고 불렀나?이게 무슨 뜻일까? 유진은 언제 지혁의 누나가 된 걸까? 하지만 문제는…… 방금 지혁이 유진을 대하는 태도가 아무리 봐도 남매 같지 않고 오히려…… 연인 같았다!정 사장은 지혁이 떠나는 것을 보고 한스러워하며 민혜를 향해 말했다.“너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잘 기억해, 내가 너희 가문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강지혁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이젠 도울 수 없어.”정 사장은 말을 마치고 나서 곧장 레스토랑 입구로 걸어갔다.민혜는 그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레스토랑 입구에서 정 사장을 따라잡았다.
그때부터 사실 강지혁은 이미 임유진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유진은 지혁을 따라 룸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후 지혁은 지배인에게 먼저 과자 몇 접시를 올리라고 했다.“자, 우선 요기부터 해. 여기 과자는 그런대로 먹을 만 해.”지혁은 말하면서 과자 한 조각을 들고 유진 앞에 건네주었다.유진은 눈앞의 과자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받아서 한 입씩 먹었다.지혁은 또 직접 메뉴를 유진 앞에 놓았다.“누나 봐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아니야, 네가 주문해, 난 먹고 싶은 게 없어.”유진이 말했다. 지금 이 고급 과자를 먹고 있더라도, 유진은 마치 돌을 씹는 것 같아서,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지혁은 눈을 찌푸리고 유진을 바라보았다.갑자기 주위의 공기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것 같았다.룸에 있던 지배인도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졸이며 강 대표님이 여기서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다.다행히 지혁의 얼굴에는 곧 또 웃음기가 나타났다.“그럼 내가 누나를 도와 주문할게.”지혁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요리를 시켰고 지배인은 일일이 받아적은 후 룸에서 물러났다.룸에서 나온 지배인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S시의 이 황제가 한 여자를 이렇게 극진히 보살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 여자가 하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지배인님, 그 강 대표님이 정말 한 여자를 데리고 식사를 하러 왔어요?”평소 가십을 좋아하던 한 웨이터가 지배인의 곁으로 다가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그 여자랑 무슨 관계래요?”지배인은 웨이터를 노려보며 경고했다.“묻지 말아야 할 일은 묻지 마. 방금 가게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 그 여자가 장난친 줄 알아? 그 여자는 앞으로 S시에서 살아가기 힘들 거야!”웨이터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지만, 여전히 호기심에 지혁이 있는 룸을 힐끗 보았다.그리고 지금, 룸에서 지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는 이 과자가 별로야? 그럼 내가 과자를 바꾸라고 할게
임유진의 몸은 더욱 굳어졌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강지혁에게 유진의 지금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내가 강지혁이기 때문에 방금 누나의 그 동창이 그렇게 누나를 모욕했을 때, 내가 그 여자를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수 있고, 누나가 앞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할 수 있어. 내가 강지혁이기 때문에 누나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누나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다는 걸 누나 생각해 본 적 있어?”지혁은 시큰둥하게 말했다.“그럼 뭐해? 그저 위세를 부리는 것뿐이잖아.”유진이 말했다.“그럼 안 좋아? 내가 내 기세를 누나에게 줄게, 어때?”지혁은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어 유진을 바라보며, 마치 유진과 아주 평범한 일을 상의하는 것 같았다.유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그날 지혁을 찾아가 부탁했을 때 지혁이 그렇게 거절했다. 그래서 유진은 두 사람이 앞으로 서로 각자 자기가 갈 길을 가며 다시는 아무런 교집합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강지혁처럼 교만한 남자가 어떻게 여자에게 거절당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유진은 그가 오늘 밤 그렇게 갑자기 오피스텔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유진을 여기로 데려오기도 했다.그리고 지혁이 방금 일부러 조민혜더러 유진에게 무릎을 꿇게 한 건 유진에게 강지혁이라는 세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기고만장한 조민혜도 지혁의 앞에서는 굴욕적인 얼굴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너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야?”유진은 의심스럽게 지혁을 바라보았다.지혁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했다. 뭘 하려는 걸까……, 사실 지혁은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지혁은 그저 유진을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유진이 지혁에게 한 번 거절당한 후에 다시 지혁을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유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설령 지금 지혁이 유진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유진은 지혁에게 두 번 부탁하지 않았다.“저기, 누나는 이제
이때 누군가 갑자기 노크했다.강지혁은 자연스럽게 말했다.“들어와.”문이 열리자 지배인과 웨이터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임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지혁은 손으로 유진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움직이지 마, 아직 추워.”순간 지배인과 웨이터들의 시선이 두 사람의 포개진 손을 바라보았고 유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지혁은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유진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었다.이 사람이…… 진짜 강 대표님이라고? 일부러 지혁을 유혹한 여자의 옷을 벗겨 길거리에 버린 그 전설의 강 대표님이라고?다들 강 대표님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평범해 보이는 여자에게…… 이토록 자상하다니!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다행히 지배인이 가장 먼저 반응하여 기침하고 얼른 웨이터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놓으라고 한 후 룸에서 물러나 조심스럽게 룸 문을 닫았다.“지배인님, 방금 잘못 본 거 아니죠?”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지배인의 귀에 다가가 말했다.“이 여자, 도대체 누구죠?”지배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여자가 나중에 S시의 주인이 될 수도 있겠어.”그랬다. 한 여자가, 만약 정말 지혁의 마음에 든다면 앞으로 S시에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룸이 또 조용해졌다. 지혁이 유진의 손이 마침내 따뜻해졌다고 생각할 때 유진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자, 밥 먹자. 이 반찬들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해.”지혁은 말하면서 유진의 곁에 앉아 자연스럽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유진은 여전히 건성으로 먹으면서 곁눈질로 지혁을 훑어보았다. 한참이 지나자 유진은 다시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그 일을 언급했다.“저…… 경찰서에 우리 그 친척들을 풀어주라고 얘기해줄 수 있어?”“누나는 내가 그 친척들을 풀어주기를 정말 바라는구나?”지혁이 말했다.유진은 단지 외할머니를 위해서일 뿐이다! 유진은 눈을 똑바로 뜨고 지혁을 응시했다.“그래줄래?”지혁은 칠흑 같은 눈동자로 눈앞의 사람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