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해고되고 수입이 없다면 임대료랑 먹고 살 돈을 어디서 구해…….”“내가 있잖아!”그가 말했다.“내가 돈을 벌어서 누나를 먹여 살릴 테니 누나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임유진은 물끄러미 눈앞의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매일 자질구레한 일만 할 뿐 돈을 전혀 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예전에 느껴본 적 없는 든든함이 생겼다.그녀의 생활은 결코 혼자가 아니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직 혁이에게 의지할 수 있다.“전화해.”그는 직접 그녀의 핸드폰을 그녀의 눈앞에 건네주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환경위생과에서 환경미화원들을 관리하는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휴가를 신청하면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휴가를 일주일이나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팀장은 뜻밖에도 아무렇지 않게 승낙했다. 일주일이 부족하면 2주일을 쉬어도 된다고 했다. 또 최저임금은 여전히 지급될 것이라고 그녀의 급여를 정상적으로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의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팀장님이 내가 휴가 내길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모르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휴가 신청에 동의한 거잖아.”강지혁은 말하면서 계속 발을 씻겨주었다.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발등, 발뒤꿈치, 발가락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어 그녀는 좀 쑥스러웠다.여태껏 남자가 그녀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소민준조차 없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을 받치고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발을 감쌌을 때,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벌겋게 상기되었고, 피가 모두 머리 위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얼굴은 심하게 뜨거웠다.“아…… 됐어, 내가 닦으면 돼!”그녀는 그의 손바닥에서 발을 빼려고 움직였다.그러나 그의 다섯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내가 닦으면 돼. 누나는 움직이지 마.”그가 말했다.그녀는 어색해서 한동안
저녁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낮은 비명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가 불을 켜자 그녀가 편안하게 자지 못하고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다만 이 소리가 너무 희미해서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누나!”그는 그녀를 부르며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는데, 그녀의 이마에 이미 식은땀이 났고,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강지혁은 재빨리 따뜻한 물로 수건을 적셔 유진의 이마를 닦았다.그리고 임유진은 두 눈을 꼭 감고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그가 아무리 그녀를 불러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그는 얇은 입술을 깨물고 초조하고 불안한 느낌이 몸에 가득 차올랐다. 심지어 그순간 어떻게 해야 그녀를 좀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지 몰랐다.한 여자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핸드폰을 꺼낸 그는 비서 고이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하여 새벽 2시에 고 비서는 BOSS의 전화를 받았다.“당장 의사를 데리고 임대주택으로 와. 유진이가 열이 나.”강지혁의 목소리에 은근한 초조함을 띠었다.“지금요?”고이준은 깜짝 놀랐다.“그래, 지금.”강지혁이 말했다.고이준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서둘러 의사에게 연락한 뒤 한밤중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일어나 의사를 임대주택으로 데려다줄 수밖에 없었다.문을 두드릴 때 고이준은 특별히 조심스러웠다. 상사는 진짜 신분을 임유진에게 들키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말이다.문이 열리자 강지혁은 몸을 옆으로 돌려 의사와 고이준을 직접 방으로 들여보냈다.들어가자마자 고이준은 임유진이 침대에 누워있고 두 눈이 감겨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한 번 봐봐요, 그녀가 지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방금 내가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를 깨울 수 없었어요.”강지혁이 말했다.고이준은 상사가 평소의 냉정함을 잃은 것 같다고 느꼈다.고이준이 데려온 그 의사는 경험이 풍부한 가정 의사였다. 비록 상대방은 강지혁의 신분을 모르지만 고이준이
그러나 곧 고이준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추측해서는 안 될 일이다.고이준은 임대주택 문을 살짝 닫았다. 에서 강지혁은 혼수상태에 있는 유진을 보면서 손에 든 약을 입술에 건네주었다.“착하지, 약 먹어.”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더 꽉 닫혀 있어 알약도 넣을 수 없으니 약을 먹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강지혁은 얇은 입술을 거의 일직선으로 오므린 후 알약을 입에 물고 물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유진의 차가운 입술 옆에 다가갔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고, 혀끝이 그녀의 입술을 밀어 약을 그녀의 입으로 넣었다. 사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는 이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약을 먹였다.비록 약이 이미 그녀의 입에 들어갔지만, 그는 그녀의 입술을 그리워하고 있다.일종의 탐욕 같기도 하고, 일종의 중독 같기도 하고, 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했고 심지어…… 놓을 수 없고, 아쉬웠다…….“유진…….”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갑자기 그녀는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희미한 눈동자가 그의 몸에 떨어졌다.그는 멍하니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이 순간에 긴장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그녀가 입을 벌리고 그를 향해 멍청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엄마, 착하게 있을게요. 엄마랑 함께 자고 싶어요.”“…….”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마 그녀는 지금 열이 나서 그를 그녀의 어머니로 착각한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앳되고 천진난만하지만 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그녀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는 바로 그녀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따뜻함이었을 것이다.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젖혔다. 그들 중 한 명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한 명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 말하자면 정말 좀 비슷하다.“엄마, 같이 있어 줄래요? 얌전히 있을게요. 얌전히 있을…….”그녀는 눈을 반쯤 뜨고
소민영은 계속 일러바쳤다.소민준의 부모님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0억, 소 씨네 집에 있어서 이 돈은 비록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큰돈이다.“민준아, 너 이게…….”소민준의 어머니는 의아해하며 아들을 바라보았다.“민영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요.”소민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민영이가 임유진에게 마음대로 가게에서 옷 한 벌을 고르라고 하며 그녀에게 선물한다고 했어요. 결국 임유진은 10억짜리를 골랐고 저는 단지 민영이가 저질러놓은 난장판을 수습한 것 뿐이에요.”“그녀가 고르면 다 사줘?”소민영은 씩씩거리며 말했다.“오빠, 왜 말을 안 해, 오빠는 근본적으로 임유진에 대해 감정이 남아 있어!”“나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있어!”소민준은 정말 여동생의 뺨을 한 대 더 때리고 싶었다.소민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임유진 따위가 날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웃겨.”“그래, 민준아, 너도 너무 심했어. 임유진 때문에 네 동생을 때리다니. 그 여자는 원래 재수 없는 여자야.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 때문에 우리 집이 지금 강 씨 가문의 미움을 살까 봐 이렇게 노심초사할 필요가 있겠어?”소민영의 어머니가 딸을 도와 말을 했다.“엄마, 이 일은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그럼 어떻게 해!”소민준의 어머니가 반박했다.“임유진은 정신 차리지 못한 것 같아. 네가 결혼하려고 하는데, 또 너를 건드리는거야, 정말 뻔뻔스러워. 10억도 뻔뻔하게 가져간 거야?”그런 여자에게 10억을 줬다고 생각하니 소민준의 어머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민준은 갑자기 일어섰다.“엄마, 왜 더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아요? 민영이가 나중에 또 임유진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아요? 일부로 임유진의 발을 걸어 유진이가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떨어지게 했어요!”“그럼 뭐 어때?”소민준의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상처를 좀 입었을 테지. 병원비는 얼마든지 우리 소 씨 가문이 내줄 수 있어. 이런 일 때문에 동생을 때릴 필요가
소민준은 강지혁에게 사과하려 했지만 강지혁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임유진이 사는 임대주택 앞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벤틀리 차 한대가 임대주택의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있고, 누군가 임대주택에서 내려왔을 때 급히 차에서 내려 맞이했다.“강 대표님, 그 전의 일은 여동생이 철이 없는 것이니 부디 용서해주세요.”소민준은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소 씨 가문을 봐달라고요?”강지혁은 담담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제시하고 싶은 조건을, 얼마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잘생긴 눈으로 차갑게 쳐다보는 순간, 소민준은 피가 멎는 느낌이 들었다. 강지혁의 눈빛은 마치 맹수처럼 느껴져 숨조차 감히 크게 쉬지 못했다.“그러고 보니 내가 신세를 진 것 같네요?”강지혁이 갑자기 말했다. “신세요?”소민준은 언제 강 대표님에게 신세를 지게 했는지 몰랐다.“이렇게 해요, 이번에 소 씨 가문을 봐줄 수 있어요. 소민영이 그쪽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돼요.”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소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여동생을 약혼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다. 비록 체면에 영향이 가지만 핑계를 대 얼버무릴 수 있으니 이 대가는 정말 아주 작다고 할 수 있다.“강 대표님 감사합니다.”소민준은 얼른 말했다.“나한테 고마워하지 마요, 내가 고마워해야죠.”강지혁은 한 손으로 소민준의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몸을 기울여 소민준의 귓가에 다가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리고 고마운 일이 또 있어. 그때 유진이와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헤어져서 고마워. 네가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좀 더 골치 아팠을 거야.”강지혁은 이 말을 평화롭게 했는데 마치 친구 사이의 잡담처럼 감사를 표시했다.그러나 소민준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만약 애초에 그가 임유진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강지혁이 대적하려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설마 이것이 강지혁이 방금 말한 그 신세를 졌다는 것인가?강지혁이 주택단지를 떠
소민영의 협박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소민영 씨라고 하니 됐어요.”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그럼 오른발을 부러뜨려. 동영상에서 뻗은 발이 오른발이야.”‘뭐…… 무슨 뜻이지?!’소민영은 매우 놀랐다. 설마 이 사람들은 협박하러 온 것이 아닌가?잠시 후,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룸에서 울렸다…….————임유진은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열이 마침내 내렸다.강지혁이 입을 열었다.“열이 내려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누나를 업고 다시 병원에 갔을 거야”.“나…… 어젯밤에 열이 났어?”임유진은 중얼거렸다.“응, 열이 나고, 열 때문에 헛소리도 많이 했어.”그가 말했다.그녀는 깜짝 놀랐다.“내…… 내가 무슨 말을 했어?”그녀가 설마 하면 안 될 말을 하지 않았겠지?“누나가 얌전히 착한 아이가 될 거랬어. 그분이 누나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그가 말했다. 눈빛에는 오히려 보기 드문 장난기가 담겼다.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누나 걱정하지 마. 누나가 착한 아이가 되지 않아도 내가 누나와 함께 있을 거야.”강지혁은 유유히 말을 뱉었다.임유진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지만 의외라는 듯 강지혁을 보고 있었다.“왜?”그가 말했다.“왠지 네가 예전과 좀 다른 것 같아. 농담도 할 줄 알고.”그녀가 생각했다.그는 마치 자신도 그 변화를 의식한 것처럼 멍해졌다.그리고 그의 변화는 그녀 때문인가?그는 눈앞의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붙을 뻔했다.“아!”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지금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그의 한 손은 제때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지만, 오히려 그녀를 더욱 품속으로 끌어당겼다.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극도로 아름다운 눈썹, 긴 속눈썹, 그리고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한 거지.’“너무 가까워서 이상하게 느껴져.”임유진이 말했다.“그래.”그가 손을 놓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볼을 만졌는데, 매우 뜨거웠다.“참, 누나, 아까 가까웠을 때 키스하고 싶었어?”그가 갑자기 질문하자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새까만 눈동자가 깜박거리자 그녀는 손바닥 아래로 볼이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나…… 나는 당연히…….”“누나라면 난 좋아.”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나는 다른 여자가 나에게 키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나 만약 누나라면 나는 괜찮아.”햇빛이 그 좁은 유리창을 통해 방안으로 쏟아져 그의 몸에 떨어졌다.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에게 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지했다.한순간, 그 뒷부분의 ‘너를 동생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마치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오후에 임유진은 아주 한가했다. 휴대전화를 닦을 때 소민영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 소민영이 어젯밤에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사서 한쪽 발이 골절이 되었다고 하는데 치료 후에 또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이 때문에 며칠 뒤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두 집안의 약혼식에 소민영은 참석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기사를 내보낸 파파라치 기자는 소민영이 도대체 누구에게 미움을 샀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소 씨 가문의 태도는 지금 모호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일을 추궁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기자는 소민영이 미움을 산 사람은 아마도 배경이 소 씨 가문 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 씨 가문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임유진은 이 뉴스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쳤을 때, 그는 소민영이 대가를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못해. 오직 자신에게 의지해야만 아무런 실망도 없을 거야.”그렇지 않으면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커진다.“그런데, 나는 누나의 배후가 되고 싶은데, 어떡하지?”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한가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만약 혁이라면…….”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좋아, 나는 앞으로 혁이가 내 배후가 돼주기를 기다릴게.”“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어?”그가 물었다.“혁이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왜냐하면…….”그녀는 잠시 주춤했다.“너는 어쨌든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그렇지?”그는 그 말을 듣고 낮게 웃었다.“맞아, 나는 누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밤, 강지혁은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본 후에야 임대주택을 나와 임유진이 사는 임대주택에서 멀지 않은 한 집으로 왔다.다만 임유진의 그 좁은 임대주택과 달리 이 스위트룸은 넓고 밝으며 훨씬 크고 인테리어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그리고 이때 고이준은 방에서 강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BOSS를 맞이했다.고이준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이 BOSS 는 평소에 아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신분을 낮춰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임유진을 돌보기 위해 뜻밖에도 직접 이 동네의 집 한 채를 샀다. 그리고…… 그것은 임유진이 잠든 틈을 타서 편리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고이준은 낮에 회사의 일을 보고하고 있다. 보스는 낮에 임유진을 돌보느라 바쁘니 말이다.강지혁은 한들으면서 신속하게 지시를 내린 뒤 고이준에게 직접 해외지사의 임원들과 연락해 영상회의를 진행하라고 분부했다.그러자 잠시 후 해외 지사 임원들이 스크린에 등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그러나 어떤 임원들은 강지혁이 지금 처한 배경에 대해 비교적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이 방의 인테리어는 비교적 정교한 편이지만, 그것은 단지 평범한 소시민에 비할 뿐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