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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비담
초희옥은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전생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녀는 표정을 굳힌 채 섭정왕을 바라보며 진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의 호랑이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선 제가 직접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지체되면 좋을 것이 없으니 지금 바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섭정왕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초롱초롱한 눈빛, 순진무구한 표정, 마치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따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섭정왕의 도움 없이 그녀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여우 같이 교활한 소녀다.

섭정왕은 천천히 손에 끼고 있던 옥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느긋하니 말했다.

“왕부로 돌아가자.”

그러자 옆에 있던 은월이 눈치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긴 왕야께서 계신 곳인데, 누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무례하게 굴지 말고 썩 물러가라!”

그러자 문 밖에 있던 사람들이 겁먹은 듯 아무 말 못하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섭정왕부는 성경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이었다.

초희옥은 더 꼼꼼히 면사로 얼굴을 가린 다음 은월과 함께 섭정왕 따라 왕부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그저 섭정왕의 총애를 입은 기녀라고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호랑이는 왕부 동북쪽 정원에 살고 있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산과 연못, 탁 트인 시야에 대나무 숲까지, 초희옥이 머물고 있는 후부의 정원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과 가까워지자 몇몇 하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섭정왕의 등장에 황급히 맞이하러 앞으로 나섰다.

그 중 한 하인이 섭정왕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송구합니다, 왕야. 오늘도 보주님께서 식욕이 없으신지 한끼 밖에 못 드셨습니다…”

군야신은 그런 하인들을 나무라지 않고 손짓으로 문을 열라는 표시를 했다.

곧이어 철로 만들어진 큰 문이 열리고, 초희옥은 군야신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얼마 걸었을까, 대나무 숲 아래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가 보였다.

호랑이는 매우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온몸에 화려한 무늬, 반짝이는 호박 빛 눈동자와 커다란 머리에 새겨진 왕(王)자까지, 전설의 명물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때, 기운이 없이 살짝 늘어져 있던 호랑이가 낯선 초희옥을 발견한 건지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돌진해왔다. 호랑이는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고, 큰 이빨을 들어내며 위협하듯 포효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나 긴장된 분위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그녀가 겁 없이 호랑이의 머리를 끌어안더니 쓰다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귤아!”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섭정왕을 포함한 은월, 쓰다듬을 받고 있는 호랑이조차 그녀의 반응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푸하하하!”

결국 은월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섭정왕 호랑이의 이름은 원보(元宝)로 매우 영리했다.

이 호랑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섭정왕에게 훈련을 받아왔다.

그래서 원보는 사람도 잘 따랐고 왕부의 하인들을 단 한 번도 해친 적이 없었다.

물론 사람도 좋아하고 장난기가 넘쳐 가끔 지금처럼 사람을 덮치듯이 누를 때는 있었지만, 절대로 섭정왕의 허락없이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호랑이를 무서워했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전에 어쩌다가 대낮부터 아녀자를 희롱하는 망나니를 발견했는데, 섭정왕의 명령 아래에 그의 다리를 물어 뜯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굉장히 잔인한 장면이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뇌리에 원보에 대한 공포가 각인되었다.

사실 군야신은 장난기 많은 원보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초희옥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아무런 예고를 해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뜻 밖의 반응이라니, 그는 솔직히 꽤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허, 자신이 껴안고 있는 것이 호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나?’

아무리 당당히 호랑이를 직접 진단하겠다고 하지만, 실물을 보게 된다면 겁에 질릴 거라 생각했다.

‘정말 안 무서운가?’

하지만 여기엔 초희옥만의 사정이 있었다. 전생, 집에서 쫓겨나 동생과 함께 거리에서 그림을 팔며 생계를 이어 나가던 때였다.

초희옥은 맞고 있는 동생을 구출하려 했지만, 힘의 차이로 희롱하는 손길조차 뿌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그녀를 희롱하고 있던 불량배를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겁에 질린 불량배 무리는 반박할 생각도 못하고 재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호랑이가 계속 공격할까 두려웠던 초희옥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켰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호랑이는 오히려 위로하듯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에 비볐다.

곧이어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고, 호랑이는 그제야 자리를 떴다. 비록 호랑이 주인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것이 바로 이 섭정왕의 호랑이였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때 이 대귤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정말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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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데는 계기가 더 있었다. 불량배 사건 이후 초희옥은 몇 번 더 호랑이와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관찰 결과 이 대귤이가 오직 죄 짓는 자들만 골라 물어뜯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섭정왕의 명령아래 일어난 일이라는 것까진 알진 못했다. 어느 순간 호랑이는 그녀에게 마냥 고맙고 반가운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전생, 그녀는 종종 그런 마음을 전하기 위해 대귤이가 지나갈만한 자리에 고기를 준비해두곤 했지만, 똑똑했던 호랑이는 절대로 낯선 이의 음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환생을 했더니, 이 대귤이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끌어안을 기회가 생겼다.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 기꺼웠다. ‘항상 고마웠어, 대귤이.’“대귤이, 너 정말 부드럽고 귀엽구나?”초희옥은 눈가를 활짝 접으며 호랑이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긴 했지만, 호랑이 또한 이런 그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볼을 마구마구 그녀의 볼에 비볐다. 요즘 항상 무기력해 보였던 호랑이가 오랜만에 보이는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어린 소녀와 커다란 호랑이가 서로 반기며 서로 껴안고 있는 광경이라니, 섭정왕은 이 놀라운 광경에 할말을 잃었다. ‘어느 집 여식이지? 성경에 이런 특이한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본인이 만지고 있는 것이 그 악명높은 호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긴 한가?’“이제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진찰할 수 있겠지?”섭정왕이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곤 말을 꺼냈다. 초희옥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린 듯 섭정왕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 맞다.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이 아이와 함께 자주 산책 나가 주시면 됩니다.”“뭐라고요? 산책?”은월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지금 농담하는 겁니까?”하지만 초희옥은 절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이 아이는 분명 영물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리 영물이라도 자신의 본능을 모두 억누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최근 왕야께서 강북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7화

    늦가을 밤,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초희옥은 마음이 산뜻하기만 했다. 드디어 다시 오라비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했다.‘정말 다행이야!’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전장에 치여 늘 바빠 자리에 없었다. 그런 부모를 대신해 어릴 적부터 그녀를 달래주고 걸음마부터 말까지 모두 오라비의 몫이었다. 심지어 남자아이 주제에 유모에게 배워 그녀의 머리를 땋아 주기까지 했으니, 대단한 정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그녀는 북쪽 변경을 떠나 성경으로 오늘 길 내내 슬픔으로 울다가 자고, 울다가 자고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의 옆을 늘 오라비가 지켜주었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도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초희옥이 공부를 게을리하며 장난치고 다닐 때문 초연만이 그녀를 꾸짖었다. 요즘 세상에 충용후부 여식이나 돼서 공부도 안 하고, 여학(女学)은 어떻게 들어가겠느냐고, 나중에 혼사 치를 때 상대가 싫어할 거라고 말이다.하지만 이냐 그녀가 눈물을 글썽여 보이면 또 마음이 약해져 결국 한숨만 쉬며 달래 주었다. ‘데려갈 사람이 없으면, 오라버니가 날 데리고 살겠다고까지 했었지?’정말 좋은 오라비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이용당해 그를 죽게 만들었다. 그 사건의 시발점은 그녀였다. 어느 날 초 노부인이 그녀에게 천청관(天清观)에 가서 직접 평안부(平安符)를 받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부적이 효과를 보려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찬바람을 맞은 탓에 감기 걸린 상태였고 침상에서 벗어날 수초자 없었다. 당연히 함정이었다. 하지만 미움 받기 싫었던 그녀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오라비에게 대신 가달라고 부탁했다. 초연은 기꺼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며 천청관으로 떠났다.그리고 모든 것을 바꿔 놓은 그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의 음모로 그는 약에 취해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었다. 그의 옆엔 순결을 잃은 듯한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8화

    관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깨닫자, 유등비는 바로 태세를 바꿨다. 그는 초희옥을 그저 오라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린 여자로 몰고 모든 자백을 뒤집었다. 그렇게 관에서조차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자,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초희옥은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초씨 가문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가로막았다. 10년이라는 세월, 진실은 알게 되었으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물증도, 목격자도… 그 무엇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유등비가 위협당해 강제로 자백했다는 소문까지, 이제 와서 남은 공모자들이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또 뒤집힐 게 뻔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직접 나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녀는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진범들을 수사하고 심문하는 것은 반드시 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강제 수사였다는 등,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죄를 회피하는 일 따위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반년만 기다리면 유등비가 추란에게 했듯이, 동생의 순결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이번엔 반드시 그 추악한 현장을 잡아 추씨 가문의 여식도 구하고 오라비의 누명도 벗길 것이다.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범인들을 잡는다고 해도 실제로 모든 것을 꾸민 진짜 배후, 초씨 가문의 죄까지 무는 건 어려울 터였다. 이들이 잡혔다는 얘기가 들어가는 순간, 초 노부인은 꼬리 자르기를 하며 빠져나가려 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피로 얼룩진 십년의 원한, 그녀는 두고두고 천천히 음미하며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현재 시각 삼경(三更), 성경 남쪽 거리에 있는 야시장 외엔 모두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듬성듬성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들이 등불을 든 채 순찰을 돌고 있었고, 여인이라도 발견될 경우 심문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닌, 기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누구와 봐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9화

    초희옥은 면사를 다시 고쳐 쓴 다음, 그를 따라 조용히 안채로 들어섰다. “오라버니를 구하려고 좀 전에 풍월방에서 섭정왕을 만나고 왔어요.”“뭐라고?”육희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어쩌자고 그랬어! 이 녀석이 겁도 없이…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초희옥는 보기 드물게 허둥지둥 어쩔 바 몰라 하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걱정마세요, 오라버니. 충분히 조심했어요. 면사도 단단히 쓰고 있었고, 아무도 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어요.”“그래도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어.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맞아요. 위험한 일었죠. 하지만 초연 오라버니를 구하는 일이에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걸 각오가 되어 있어요.”결연한 그녀의 말에 육희지는 잠시 한말을 잃었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한숨까진 참지 못했다.초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니, 그도 모르는 심정이 아니었다. 초연은 그가 친형제처럼 아끼는 친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오래 전 의절했던 국공부(国公府)를 찾아갔을까? 그는 아버지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도와달라고 빌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에 개입하길 딱 잡아 거절했다. 그때 느꼈던 아득한 기분은 아직도 생생했다. 초희옥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는 육희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오라버니, 섭정왕이… 재 조사를 허락했어요.”“뭐? 그게 정말이야!”육희지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에 물들었다.“연이가… 연이가 드디어 살길이 생겼구나!”하지만 곧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섭정왕이 그리 쉽게 설득될 분이 아닌데… 설마 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어디 다친데 없어?”초희옥은 침착하게 모든 과정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이 늦은 시각에 집에 돌아가면 분명 의심할 거예요. 풍월방에서 정체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춘도가 입을 열면 전 위험해질 수밖에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10화

    같은 날, 충용후부 안채, 자안당(慈安堂).초희옥의 할아버지는 이미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자연스레 초 노부인이 집안의 가장 연장자 자리에 올랐다. 묘시(卯时), 안채는 어느덧 아녀자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가문의 어르신인 초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것이다. 초씨 가문엔 총 네 가구가 있었다. 장남의 초치원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서출인 넷째는 아직 미혼이라 내당에 올 여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안채는 둘째와 셋째 집안의 아녀자들로 채워졌다. 방 안, 좌측 상석에는 둘째의 부인 진패분(陈佩芬)가 앉았 있었다. 그녀는 현재 초씨 가문의 주모(主母)이자, 동창백(东昌伯)의 적녀로 꽤 높은 가문 출신이었다.그녀는 연이어 자식을 보았지만, 모두 여아로 슬하에 아들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유달리 질투심이 많았고, 덩달아 밑에 첩들도 아이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에겐 친정의 후광 외에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낳은 첫째 딸이 군왕(郡王)의 측비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초 노부인조차 그녀에게 분노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할 정도였다. 이에 교훈을 얻은 초 노부인은 다음 며느리부터는 높은 혼처를 고르지 않고 낮은 집안에서 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혼처가 정해지기도 전에 셋째가 가문의 하녀를 건드려 회임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부인은 손주를 원했다. 그러나 둘째를 압박할 수는 없는 상황,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나 하녀가 손주를 낳길 기대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아들이 나왔다. 서자까지 존재하는 마당에 어느 고위 가문의 적녀가 시집오려 하겠는가? 결국 셋째는 하위 가문 여식 중 한 명과 혼인해 정실 부인으로 앉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녀는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고 하녀 출신인 조씨가 안방을 장악했다. 조씨는 평소 색상이 많이 들어간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항상 우측 상석에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을 맞이했다.방엔 이 두 사람 외에도 이제 갓 성년을 넘긴 세 여인이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11화

    노부인이 격분하는 모습에 초약섬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진정하세요, 할머니. 이러다가 온 동네 다 소문 나겠어요. 다들 다섯째가 풍월방에 갔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셋째 언니, 뭐 하러 말려요. 먼저 기생집에 드나든 것은 그 아이가 아닌가요? 어떻게 이 초씨 가문에서 그런 애를 여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그러다 여기 있는 모두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지도 몰라요. 당장 잡아들여서 쫓아내야죠."초약봉이 아주 잘됐다는 듯 옆에서 거들었다. "내가 평소에 옥이를 얼마나 아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문에 먹칠을 한단 말이냐! 이대로 둔다면 난 조상님들을 볼 면목이 없어! 어서 가서 그 아이를 풍월방에서 끌고 오지 않고 뭐하느냐!"초희옥이 실제로 풍월방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그녀를 이 가문에서 쫓아낼 수 있는 명분이 생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초연은 처형당했을 테고, 초희옥의 명예도 이제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말 더듬이 초혁뿐인데, 이제야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후작 작위는 반드시 내 핏줄이 물려받아야 해.'초 노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초희옥을 붙잡아 오기 위한 대대적인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한 하인이 달려오더니, 다급히 전했다."천청관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다섯째 아가씨께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통곡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데려가달라고 말입니다."초약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초희옥이 왜 천청관에 있지?'순간 안 좋은 예감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초 노부인은 칩착하게 진패분에게 말했다. "패분아, 지금 당장 마차를 보내 천청관에 있다는 그 아이를 데려오거라."천청관은 수고 교외에서 가장 유명한 도관(道观)으로, 사시사철 방문객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오늘 같이 이른 아침부터 입구에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모여 있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12화

    "안타까워? 네가 뭔데 우리 언니를 안타까워해! 당장 여기서 꺼져!"추명이 화로를 뒤엎기 위해 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초희옥이 한발 빨리 앞을 가로막아 향과 저승돈을 지키는 것에 성공했다. 뒤늦게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추명을 붙잡았다. 이러다가 혹시라도 초희옥을 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추명은 사람들의 손에 붙잡힌 채 몇차례 분풀이하듯 발길질을 했다. 그리고 마침 이때, 멀리서 진패분과 초약란도 도착해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다섯째야, 너 대체 왜 이리 말썽을 부리는 것이냐!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진패분이 체면에 간신이 짜증을 참으며 꾸짖었다. 아들을 보지 못해 시어머니인 초 노부인과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첫째 집 핏줄들을 모두 충용후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이 셋만 없으면 후작 자리는 그녀의 지아비의 것이 될 테니 말이다."숙모, 전 돌아가지 않아요. 전 지금 추란 아가씨께 오라버니를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에요."초희옥이 고집스러움과 순진무구함이 썪인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그러자 추명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째려보았다. 진패분는 이 난감한 상황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초의옥을 달래었다. "너의 남매가 각별한 사이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옳지 않아. 이미 다 판결난 사건 아니더냐? 이러는 건 형부의 관리들을 욕보이는 일이다."초약란도 옆에서 거들었다."희옥아, 이만하고 돌아가자. 우리도 오라버니의 죽음은 안타까워. 하지만 죄를 지었으니, 법의 심판을 피할 순 없잖니? 가문의 체면도 생각해야지."모르는 사람이 보면 외모만큼이나 참으로 마음이 좋은 언니의 행세였다. "자자, 오라버니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만 소란 피우자. 그만 언니랑 집으로 돌아가자."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초희옥은 환생 후 처음으로 초약란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천상유수, 사람들을 홀리는 저 말솜씨는 여전했다. 가문에서 쫓겨나기 전엔 초희옥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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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섭정왕부.호원, 커다란 바위 위, 그르릉거리며 엎드린 채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는 원보, 그리고 그 옆에서 정성스레 빗질을 해주고 있는 섭정왕이 있었다. 정말 한 폭의 그림같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이들의 평화를 깨며 왕부 장사(长史) 소청풍(萧清风)이 다가왔다."왕야, 형부 상서(尚书) 진종덕(甄从德)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왕야께서 바쁘셔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알렸는데도 문앞에서 계속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꽤나 준수한 외를 가진 청의의 남자 소청풍은 군야신의 오랜 심복이자 이번 과거에서 탐화(探花)에 뽑힌 인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고 스스로 자처해 왕부의 총관리가 되었다. 너도나도 바라는 꽃길을 마다하고 겨우 왕부의 총관리가 되다니, 어떤 이들은 그를 미쳤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들여보내."군야신이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망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고, 진종덕이 호원에 들어섰다. 하지만 원보를 보자마자 뒷걸음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소, 소신... 소신 형부 상서 진종덕, 왕야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전에 한 관리가 여기서 호랑이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했고, 섭정왕이 약값을 물어줬다는 얘기는 꽤나 알려진 일화였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진 대인, 왕야께서 지금 바쁘시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얼른 하시지요."소청풍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바쁘다더니, 이 일 때문이었구나...'진종덕이 섭정왕과 원보를 힐끔거리며 속으로 중얼 거렸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허리를 공손히 굽히며 입을 열었다. "왕야, 무슨 연유로 초연의 사건을 재조사하라고 명령하신 겁니까? 이미 명백한 증거가 나온 사건입니다. 사형집행 날짜까지 나온 사건을 이리 갑자기 개입하시면... 백성의 민심도 안 좋아지지 않겠습니까...."그는 차마 지나치다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군야신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원보의 털을 빗기며 말했다. "진 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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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40화

    “소공야, 저희 왕야께서는 지금 차를 음미 중이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은월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무천보는 은월을 보자마자 괜히 기분이 상했다.자신이 데려온 여인도 기예공이긴 했지만, 은월만큼 이름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괜히 불쾌했다.같은 한량이건만, 군야신은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고 풍류 방면에서도 자타공인 실력자였다!열일곱에 이미 경성 제일의 한량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니, 무천보는 이를 질투해 죽을 지경이었다.그 후로도 수년간 먹고 마시고 유흥에 매달렸건만, 여전히 군야신을 뛰어넘지 못했다.그래서 그를 보면 꼭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씨 집안의 권세 덕분에 아직까지 군야신에게 다리를 꺾이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차는 무슨 차야! 빨리 내가 가져온 명필이나 봐라! 이 소공야 작품이 일등이 아닐 수가 없다!”무천보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군야신은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가볍게 넘기지 않으면 일이 커질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집 지붕이라도 들썩이게 만들 놈이었다.군야신의 시선이 무천보가 가져온 명필 위에 멈췄고, 가볍게 한 장을 넘겨보았다.그 명필은 서성 왕희지의 가서였다.이는 진품 서예 중에서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드물기에 귀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듣자 하니 무 노공는 젊은 시절 우연한 인연으로 이 한 점을 손에 넣었고, 곧장 보물함에 넣어 가보처럼 간직했다고 한다.글씨며 인장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하지만...군야신은 그중 한 글자를 보고 눈빛이 번뜩였다.마치 무언가가 떠오른 듯했다.바로 그때,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이 갑자기 쨍 하고 터졌다. 깨진 잔 조각과 뜨거운 차가 고스란히 명필 위로 쏟아졌다.…초희옥은 하나하나 진열된 보물들을 살펴보다가 물었다.“무 소공야가 왕희지의 진본을 들고 왔다고 들었는데, 왜 안 보이죠?”장회는 즉시 대답했다.“아씨, 소식이 참 빠르시네요. 지금 그 명필은 각 방마다 돌며 감정 중입니다. 곧 이곳에도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9화

    ‘이번에는 무씨 집안이 다시는 섭정왕부를 포위하게 두지 않겠어!’...불음관 2층, 가장 크고 화려한 누각 안.군야신은 눈처럼 하얀 담비 가죽이 깔린 나전으로 장식된 단단한 나무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마치 신이 정성 들여 조각한 듯 냉철하고 아름다웠다.그 앞엔 줄무늬가 선명한 호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졸고 있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코끝을 꿈틀이며 킁킁 냄새를 맡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군야신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문밖을 연신 향해 고개를 들썩였다.밖에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다.“가거라.”군야신은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사람을 보내 몰래 따라붙게 하라. 또 주방 가서 음식을 훔쳐 먹으면 돈을 제대로 치르라고 해라.”“예.”시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대귤이가 쏜살같이 나가자, 누각 안에는 차를 끓이던 은월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조황대선에서 왕야께서 몸소 주관을 맡으신다 하여, 밖에서는 왕야께서 미색에 눈이 멀어 여인 하나를 어찌하려는 거란 말이 돌고 있습니다.”“그들은 모르겠지. 이번 대선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이번이 바로 새 황제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치러지는 조황대선이다. 그간 황정은 줄곧 태후가 틀어쥐고 있었고, 고위직에 있는 여관들은 중립이거나 태후 쪽 인물들뿐이니, 새로운 인물이 들어오지 않는 한 판도는 절대 바뀌지 않겠지.”“하지만 이 무리의 규수들이 서원을 졸업하려면 아직도 일년은 더 남았는데, 왕야께서 이렇게 미리 대비하시고 지금부터 수를 놓기 시작하신 것을 보니… 은월은 감탄할 따름입니다.”군야신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타인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았다.과거, 그는 성경 제일의 망나니로 이름 높았다.누구도 그가 뭘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섭정왕 자리를 얻은 것조차 황후가 된 여동생 덕분이라 믿었을 뿐.하지만 바로 그가 선황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흔들어, 영왕 대신 지금의 황제가 황좌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다.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8화

    그때 마침 지나가던 한 여인이 이 말을 듣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초희옥을 비스듬히 쏘아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가소롭기도 하지. 네가 뭐 황실 공주라도 되기라도 해? 운진이 초대장을 줬다고? 네깟 게 감히?”그 여인은 겨우 열넷이나 열다섯쯤 되어 보였고, 금빛 긴 치마를 입었으며 얼굴은 눈에 띄게 고왔다. 머리 위에는 화려한 비녀와 장신구가 반짝이며 넘실거렸다.눈빛부터 몸짓까지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이었다.“태안공주전하를 뵙습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이 소녀가 바로 태안공주 무용현이다.태후의 적녀이자 영왕의 친아우.또한 지금 황제의 이복 여동생.그리고...무천보의 약혼녀였다.무천보는 그녀를 보자 즉시 얼굴이 굳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고, 흥미 따위 접고 곧장 돌아서서 자리를 피했다.초희옥은 비록 전생에서 태안공주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수없이 들은 바 있었다.그녀의 혼사는 선황이 생전에 영왕이 무씨 집안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해둔 약속이었다.하지만 무천보는 매일같이 주색에 빠져 살고, 무용현은 한결같이 운진을 연모했다.그들은 서로를 보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혼인을 질질 끌다, 결국 억지로 혼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천보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공주 전하께서 운진과 함께하기 위해 지아비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그때 무용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너 누구냐! 당장 면사 벗어라! 어느 집 요망한 계집이 이토록 뻔뻔하게 운진을 사칭하느냐,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다!”이때, 장회가 부리나케 달려와 중재에 나섰다.“공주 전하! 이곳에 어찌… 운진께서 직접 차를 우리고 계십니다. 지금 가시면 막 우린 한 잔을 드실 수 있을 겁니다.”무용현은 초희옥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이 계집년이 운진에게 초대장을 받았다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당장 붙잡아라!”장회는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얼버무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7화

    정자와 누각이 정원을 따라 줄지어 있고, 꽃을 마주하며 물을 비추는 자리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있었다.마치 산속의 맑은 샘물처럼, 속세와는 다른 고즈넉함이 느껴졌다.하지만 동가 일대는 땅 한 평이 금 한 냥이라 할 만큼 땅값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었다.겉보기엔 담백하고 소박한 이 불음관도, 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액이 들여진 호화 찻집이었다.그 시각, 불음관 입구에는 이미 온갖 권귀 세가의 마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각기 다른 집안의 성씨들이 화려하게 적힌 패가 마차마다 높이 걸려 있었다. 초희옥은 눈썰미 좋게도 그중 가장 화려한 마차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 마차에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글자 하나가 걸려있었다.군.섭정왕이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그가 아니었다면, 초희옥은 애초에 이런 권세가들이 모여 심심풀이로 부와 체면을 과시하는 자리에 올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그녀는 말없이 초대장 한 장을 내밀었다.입구에 서 있던 시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서 오다니? 이 아가씨는 도대체…’‘초대장이 가짜는 아닐까?’의심의 눈초리가 번졌다.예전에도 작은 가문 출신의 규수들이 권귀가에 엮이려 무리하게 감보회에 숨어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어느 귀한 분의 눈에 들기만 하면 단번에 신분이 뛰어오르리라 기대하며 몰래 들어오는 것이다.지난번에도 한 명이 그렇게 들키고 쫓겨났다. “실례지만 어느 댁 규수신지요?”수석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초희옥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감보회는 초대장으로 입장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터 출신까지 심문하게 됐죠?”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그러나 여전히 초대장을 뒤집었다가 폈다가 하며 한참을 살폈다. 쉽게 들여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안으로 사람을 보내 알릴 수밖에 없었다.그때, 뒤에서 성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이, 거기 앞에. 비켜! 길을 막고 있잖아!”진한 솔잎빛에 복숭아꽃 문양이 수놓인 촉주 비단 예복을 입은 남자가 화려한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6화

    초희옥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조 부인이 언니를 좋은 데 시집보내고 싶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달라. 할머니가 그 혼처를 허락한 건 그 남자가 형부 주사이기 때문이야. 할머니에게는 그 사람의 나이도 생김새도 인품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집안이 앞으로 초씨 집안과 혼맥으로 엮인다는 것이지.”초희옥이 훨훨 날아오르면 초 노부인은 반드시 끌어내릴 것이었다.하지만 초약섬은 다르다. 그녀는 초 노부인의 친손녀였다.쓸모가 커질수록 초 노부인은 쉽게 그녀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초희옥은 초약섬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언니에게 더 나은 혼처도 가능하다는 걸 할머니가 알게 되면, 결코 언니를 그렇게 쉽게 내버리진 않을 거야.”“내가 이미 할머니께 말씀드렸어. 초씨 집안 규수들 전부 나와 함께 조황대선에 응시하기로 말이야. 언니가 시집을 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유일해.”초약섬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섯째야… 너가 아니었으면, 나 정말… 정말 이렇게 죽는 줄만 알았어… 네가 날 살렸어!”초희옥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붙는다면 그건 언니의 실력이야. 나는 그저 언니가 걸을 수 있는 길을 하나 보여줬을 뿐이야.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언니한테 달린 거고.”초약섬은 고개를 떨구고 이를 악물었다.“이제야 깨달았어. 내가 아무리 물러서고 참고 지내도 조 부인에게는 끝이 없다는 걸... 그렇다면 차라리 이 한 몸 부딪혀볼래. 어차피 이 열다섯 해 동안 난 단 하루도 평온하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그녀는 굳게 주먹을 쥐고, 초희옥을 향해 다시 한 번 깊이 허리 숙여 말했다.“다섯째야,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초희옥은 그녀를 잡아끌며 말한다.“같이 점심이나 먹자. 하늘이 무너져도 밥은 먹고 생각해야지. 크고 어려운 일일수록 배부터 든든히 채우고, 한 걸음씩 천천히 가는 거야.”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5화

    하지만…이것만으로도 이미 경성 전체에 얼굴을 못 들 일이 아닌가?초희옥의 명예는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지고, 오히려 초씨 집안은 너그러이 품은 집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전생의 초희옥이었다면 이런 덫에 걸려도 오히려 조모가 자신을 위해 준 자비라 여겼겠지.같은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초 노부인의 수단은 초약봉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무려 열여덟 골목은 앞서 있었다.노련함이란, 역시 세월이 쌓여야 나오는 법인가 보다.초약봉은 그 속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할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건 그냥 말장난일 뿐이지요. 하지만 제가 시험을 보겠다고 말을 해 놓았으니, 저는 응시할 것입니다. 다만… 두 언니랑 같이 시험을 본다고요…”초희옥은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무언가 좋은 꾀라도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초연아도 시험 봐야죠! 아, 맞다. 셋째 언니도요! 우리 초씨 집안 규수들은 전부 응시 해야죠?”초약봉은 눈을 홱 굴리며 비꼬듯 말했다.“너 지금 우리 셋이 같이 시험 보면 너만 떨어져서 망신당할까 봐 그런 거지? 그래서 사람들 끌어모아서 같이 치게 만들면, 나중에 떨어져도 혼자만 욕먹는 게 아니라서 덜 창피하겠다는 그런 생각이지?” “봉아,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조 부인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초 노부인은 여전히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예전에도 네가 글 배우겠다 하여 내가 규학을 세운 것 아니더냐. 그 아이들도 다 너를 따라 함께 공부한 셈이지. 이번엔 대선도 같이 보는 거다. 좋아, 아주 좋아.”그녀에게는 초희옥이 떨어지는 것, 그 하나면 충분했다.다른 애들이야 숫자나 채우는 것이고, 시험에 통과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강간범으로 몰린 오라비에, 민적에 바보 소리까지 듣는 규수. 이 두 낙인이 함께 찍힌다면 초희옥의 인생은 그 순간으로 완전히 끝장날 터였다. 초 노부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이렇게만 흘러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자안당을 나선 초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4화

    초 노부인은 집안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황대선 시험을 두고 내기까지 벌어졌다는 소식은, 첫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녀 귀에 들어갔다.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사람을 보내 초희옥과 초약봉을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게 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유모는 한쪽에 있던 초약섬을 힐끔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셋째 소저, 초노부인께서 주신 상이 이미 아가씨의 뜰에 도착해 있습니다. 나중에 잊지 말고 인사 드리십시오.”“무슨 상이요?”초희옥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초 노부인은 평소에 초약섬을 곱게 보지 않았다.“조 부인께서 셋째 소저를 위해 좋은 혼처를 하나 알아오셨답니다. 노부인께서도 오늘 아침에 승낙하셨고요. 벌써 혼수도 다 준비됐어요. 새해가 지나면 바로 출가하게 될 거예요.”혼처? 출가?초약섬의 얼굴이 눈처럼 하얗게 질렸다.바로 그때, 조씨의 유모가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며 그녀를 불렀다.초약섬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졌다.초희옥은 그녀의 처연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서히 눈빛을 가라앉혔다.조씨는 초 노부인의 총애를 등에 업고, 평소 초씨 집안의 셋째 도련님 자식들을 천대했다. 특히 정실부인의 소생인 초약섬을 자주 괴롭혔다.그런 이가 데려온 혼처가, 과연 좋을 리가 있을까?‘아, 맞다...’초희옥은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약섬은 오품 형부 주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 주사는 재혼이었다.또한 그 주사의 나이는 초약섬의 할아버지뻘이었다.당시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위’보다 오히려 더 젊었을 것이다.혼인한 지 채 2년도 안 되어 그 노인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뒤, 두 아들이 유산을 두고 서로를 탓하고 헐뜯으며 다투었다.그중 한 명은 계모와 부적절한 사이였다고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다.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고, 온 경성이 들끓었다.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했던가.모든 손가락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결국 초약섬은 그 모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3화

    “훌륭하구나, 훌륭해. 넷째 아가씨는 박학다식하니 이번 조황대선에서도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두겠구나.”노부자는 황급히 칭찬을 늘어놓으며 슬쩍 초희옥 쪽으로 곁눈질을 보내고는 혐오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어느 누구와 같지 않으니 다행이지. 쯧쯧…”예전 같았으면 초희옥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못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초희옥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초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부자님 말씀 맞아. 어느 누구라는 게 누구겠어? 너는 균전령 내용도 못 외우고 있잖아. 조황대선 같은 데는 끼지도 마. 어차피 떨어질 텐데.”초연아는 창피하고 분해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초약봉은 초희옥이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다섯째야, 너는 균전령을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여섯째를 흉보냐? 마치 네가 시험에 붙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가 조황대선 나간다 한들, 거기서도 그냥 숫자나 채우겠지!”초희옥은 그 말에 마치 급소를 찔린 듯,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뭐라고? 숫자 채우는 건 네 쪽이거든!”“하하하, 내가 숫자 채우러 간다고? 웃기시네!”초약봉은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고, 눈동자를 스윽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 둘 다 같이 시험 보자. 떨어지는 사람이 성문 앞에 나가서 ‘나는 머저리다!’ 라고 세 번 외치는 거야. 어때? 감당이 되겠어? 누가 숫자를 채우는 건지 두고 보자고.”됐다!이 말만 기다리고 있었지.초약봉은 정말이지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착한 사람이다.“한 집안의 자매끼리 왜 이렇게 싸우니? 그럴 필요 없잖아.”초약란은 눈빛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겉으로는 착한 사람인 척하며 가식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넷째야, 넌 다섯째가 너만 못하다는 거 알잖니. 배운 거 많다고 그걸 내세워서 다섯째를 괴롭히면 안 되지.”초약란이 그럴싸하게 타일렀다.“나도 이런 머저리랑 일일이 따지고 싶진 않아요. 지가 괜히 시비 걸었을

  •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제32화

    초씨 집안의 규학은 뒷뜰의 푸르게 자란 대나무 숲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정원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름은 문진당이라고 불렸다.이때는 아침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초희옥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교실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학당 안에는 열댓 명쯤 되는 열네 다섯 살 무렵의 규수들이 앉아 있었다.직계 자매들 뿐 아니라, 본가의 먼 친척들까지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초희옥은 자리를 대강 둘러보다가 초약섬 옆자리에 빈자리가 있는 걸 보고 조용히 앉았다.“셋째 언니, 병은 좀 나았어요?” 초희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초약섬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응. 보내준 인삼 고마워.”주변에서는 벌써 수군대고 있었다.“수업을 빠진지 반 년은 넘었잖아? 갑자기 왜 나왔대…”“오라버니 사건이 연기돼서 여기저기 쫓아다닐 일 없으니까 수업 들으러 온 거라던데…”“흥, 그건 뻔한 핑계지! 조정 형사 건인데, 쟤가 뭘 어떻게 관여한단 거야?”강단 위에 있던 노부자가 책상을 툭 치며 소리쳤다.“조용!”그는 학식 깊고 이름 높은 유학자였고, 초씨 집안에서 직접 모셔온 인물이었다.초씨 집안 주모와 조씨가 몰래 은전을 많이 쥐어준 탓에, 그는 초약란과 초약봉에게는 유난히 열심히 가르쳤다.다른 규수들에게는......그저 적당히 가르쳤다.몇 마디라도 알아듣는다면, 그건 그들의 실력이었다.그리고 초희옥에 대해서는......어디선가 암묵적 지시를 받았는지, 딱히 가르칠 필요 없다는 듯 대충 가르쳤다.명문가의 속사정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지위를 믿고 초희옥을 억누르고 조롱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그녀가 몇 달간 수업에 나타나지 않아 속이 후련했는데, 오늘 다시 나타나자마자 눈엣가시처럼 느껴진 것이다.그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사건은 요즘 시끄럽게 회자되는 선천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성국 법전 중 한 조항과 관련이 깊지. 대성율은 조황대선 문과 필수 과목이다. 올해는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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