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그저 소설 속 어느 인물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조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소우연의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였다. 어릴 때부터 소우희는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으며 소우연이 아무리 노력하고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그들은 소우연에게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결국, 소우연은 쌍둥이 여동생 대신 악명이 자자하고 성격이 난폭한 회남왕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결혼식 당일 도망치다가 잡혀서 손발이 잘린 채 소씨 가문 앞에 버려졌다. 그리고 소우연이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들은 대문을 굳게 닫은 채 혹여라도 소우연과 엮이게 될까 봐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소우연은 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날, 소씨 저택 앞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우연은 이육진과 결혼하여 회남왕 관저로 보내지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생의 기회를 다시 얻은 소우연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이기 위해 힘들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지난 생에 빼앗겼던 모든 걸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되찾겠다고 다짐하였다. 소우연은 이번 생에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뛰어난 의술로 수많은 귀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결국, 십몇 년 동안 소우연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던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빌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소우연은 그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합작을 약속했던 남자는 점점 소우연을 옥죄어 갔다. “이육진 씨, 당신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화가 잔뜩 난 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은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아야지.”
View More“그래야만 용 대감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될 것이고 사는 재미도 생기지 않겠느냐?”이육진은 용강한이 나중에 외롭게 도관에 갇혀 남은 인생을 쓸쓸하게 보내길 원치 않았다.그가 진심으로 도가를 수행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하필 용강한은 이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였기에 수행자로서 기본 자질을 잃게 되었다.그런 용강한은 절대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가를 수행할 수가 없다.한편, 소우연이 어찌 이육진의 의도와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겠는가?이육진이 용강한을 위해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소우연이 나서서 어떻게든 용강한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이 세상에 미련과 기대가 남을 수 있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예를 들면 지금 용강한의 가장 큰 바람과 기대는 소우연이 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고 어린 이영이 얼른 어른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힘이 생기는 것이다.지금의 용강한은 조카를 예뻐하고 걱정하는 평범한 삼촌 같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 용강한에게 많은 추억과 행복한 순간들이 쌓이게 될 것이다.“연이 네가 내 곁에 영원히 함께 있어준다면 그게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이육진이 말했다.그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나중에 소우연이 용강한을 찾아갔을 때에도 이육진은 질투가 나더라도 소우연을 응원하고 지지했다.심지어 이육진은 용강한이 소우연의 손을 꼭 잡고 그의 앞에 나타나 그들이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얘기하는 꿈을 꾸었을 때에도 이육진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결국 두 사람을 허락했다.그 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꿈 속에서 이육진은 위금성이 저지른 고충 사건의 전란으로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고 용강한은 이육진의 부탁으로 이육진 대신 상운국 국사를 도맡게 되었다.하지만 용강한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다. 소우연을 여황제 자리에 앉힌 용강한은 소우연 배후의 남자가 되었다.두 사람은 처음에 이육진을 자주 그리워했다. 그러다가 해가
허허 웃던 이육진은 소우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 것 같구나.”한숨을 푹 내쉰 이육진은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무엇을 말입니까?”저 의미심장한 말은 뭐지?“일단 용 대감 신분으로 보면 말이다.”의자에 앉은 이육진은 배가 불룩한 소우연을 살짝 잡아당겨 자신의 곁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어갔다.“용 대감은 흠천감의 감정이다. 이 나라의 존망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는 절대 함부로 인간 세상의 일에 끼어들지 않지. 전생에 난 용 대감과 꽤 인연이 깊은 사이였지만 그가 천벌을 받으면서까지 내 다리와 얼굴을 치료해줄 정도는 아니었겠지.”이육진의 말이 사실이기에 소우연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소우연은 예전에 이육진이 그녀에게 해줬던 얘기가 떠올랐다. 흠천감의 감정들은 욕심도, 욕망도 없는 사람들이라 인간 세상의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다.심지어 황제의 부름에도 흠천감의 감정들은 기분이 언짢으면 응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런데 역대 황제들은 왜 흠천감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고 흠천감의 감정들을 높이 떠받들었을까?그건 그들이 나라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감정들이 나서면 아무리 골치 아픈 일이어도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한편, 용강한은 전생에 선황에게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태자이기도 하면서 장애를 앓고 있는 회남왕 신분의 이육진을 위해 나설 이유가 없었다.자칫 잘못되면 이육진 때문에 용강한이 천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소우연은 용강한이 언제부터 그녀를 찾아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흠천감 안에서 봤던 꿈속에서 백발이 창창한 용강한이 자신을 흠천감에 가두어 종일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만 연구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용강한에 대한 고마움은 예전에 그에게 줬던 장수 목걸이로 대체할 수 없다.그렇게 소우연은 생의 기회를 다시 한번 얻게 되었고 전생의 일들을 전부 알고 있
이육진에게 있어서 소우연과 함께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내가 이번 생에 이 남자의 사랑을 이토록 듬뿍 받을 수 있다니. 이 모든 게 하늘의… 아니지, 오라버니께서 목숨 걸고 날 위해 따낸 행운이고 큰 복이야!’용강한이 생각난 소우연은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용강한에게 필요한 게 없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결국 용강한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용강한은 평생 그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 거냐고, 언제까지 미안하다고 할 거냐고 버럭 화를 냈다.그리고 계속 그렇게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용강한은 그녀에게 환생의 기회를 준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우연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셋째만 얽히고 설킨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받지 않았구나. 이진아, 이 어미는 네가 예쁘고 착한 공주님으로 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살길 바래.’이때, 이영이 어전 안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며 큰소리로 외쳤다.“아바마마, 어마마마! 눈이 너무 예쁘게 내리고 있습니다! 눈송이가 제 얼굴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옷 위에 떨어졌을 때에는 녹지 않고 쌓이기도 했습니다. 눈꽃 모양이 너무 예쁩니다! 전 예쁜 눈꽃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습니다!”이육진과 소우연은 코끝이 빨개진 채 종알종알 자신의 기쁨을 공유하는 영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그래, 그럼 영이 너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목백 스님에게 부탁드려 볼게.”“그럴 필요 없습니다. 숙부께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이영이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자 소우연이 물었다.“네 숙부가 너에게 그림까지 가르친 것이냐?”“네, 숙부께서는 못하시는 게 없습니다! 천문지리는 물론이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심지어 화약 제조도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숙부는 저를 절대 제자로 들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전 숙부를 사부로 삼고 나중에 크면 대단한 감정이 되고 싶은데…”용강한뿐만 아니라 도술을 수행하는 도사라면 누구든 의술과 천문지리 그리고 더욱 대단한 능력까지 지니고 있는 능
“아닙니다! 제 마음속에는 어마마마밖에 없습니다! 전 평생 어마마마만 있으면 됩니다!”이영은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그 모습에 피식 웃던 이육진은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소우연을 발견하게 되었고 바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한편, 이영은 소우연에게 다가가는 이육진을 몸으로 확 밀치고는 빠르게 달려갔다가 소우연 앞에서 멈추더니 소우연의 다리를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어마마마 오셨어요?”고개를 든 채 예쁘게 웃는 이영을 보며 소우연은 심장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이때, 뒤따라온 이육진도 소우연을 품에 끌어안고 싶었지만 소우연의 허벅지를 꼭 안고 있는 이영을 힐끔 쳐다보고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꼭 잡았다.“머리 위에 이건…”“밖에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소우연의 대답에 이영은 잔뜩 들뜬 표정으로 어전 밖으로 뛰어나갔다.“너무 잘됐네.”사실 이육진은 사계절 중에서 바람이 차가운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우연이 겨울을 좋아하고 눈 내리는 날씨를 좋아했기에 눈이 내린다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이제 또 소우연을 위해 눈사람을 만들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육진은 차가운 소우연의 손을 꼭 감싸며 말했다.“연아, 나와 함께 눈 보러 가자.”이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전하께서 언제부터 눈 내리는 날씨를 좋아하시게 된 겁니까?”지금까지 매년 눈이 내릴 때마다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눈을 보러 가고 싶다고 애교를 부렸고 이육진은 결국 소우연과 함께 밖에 서서 눈을 볼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눈이 조금 더 많이 쌓이면 그때 나가요.”말을 하던 소우연은 탁자로 걸어가더니 금주 설해 예방에 관한 상주서를 훑어보았다.“조금 전에 영이와 함께 상주서를 처리하고 계셨습니까?”이육진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영이는 아주 똑똑한 아이야.”소우연도 이영이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육진은 왜 갑자기 이영에게 상주서를 보여주고 심지어 이영에게 이런 지식까지 가르치고 있었던 걸
이날, 점심에 낮잠을 잠깐 자다 깬 소우연은 이영을 찾으러 금융궁으로 향했다. 오늘은 정태부가 쉬는 날이기에 심초운도 집으로 돌아갔다.소우연은 이영 혼자서 심심할까 봐 그녀와 놀아주려고 금융궁에 찾아온 것이다.하지만 금융궁에는 당안과 송이 그리고 이영도 보이지 않았다.이에 소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나가던 한 궁녀에게 물었다.“이영 공주는 어디로 간 것이냐?”“마마, 전하께서 공주님을 불러 가셨습니다.”‘전하께서? 이 시간은 전하께서 상주서를 처리하고 계실 시간인데?’소우연은 돌아서서 함향에게 물었다.“전하가 어전에 계시느냐?”함향은 고개를 저었다.“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요즘 따라 가끔 어전에서 상주서를 처리하시곤 하셨습니다.”소우연은 회임을 한 뒤로부터 자극적인 맛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육진은 그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심하게 났기에 두 사람은 거의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없었다.그리고 그때부터 이육진은 침전에서 상주서를 처리하는 일이 드물었다.소우연이 돌아서서 떠나자 금융궁 궁녀와 내시들이 바로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배웅했다.몇 걸음 걷던 그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덩이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펑펑 내렸다.이에 함향은 예전처럼 그리 긴장하지 않았으며 되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마마, 또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곱게 내리는 눈 속을 걸으며 소우연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하얀 눈 속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차갑게 내리는 눈을 보면 소우연은 왠지 의지가 더욱 강인해지는 것 같았기에 그녀는 매년 눈 내리는 날씨가 가장 기대되었다.눈이 많이 쌓이면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하지만 지금은 회임한 탓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소우연은 이영을 함향에게 맡기고 자신은 눈을 감상할 생각이었다.이때, 한 궁녀가 우산을 가지고 나타났고 함향은 그 우산을 소우연에게 건넸다.“마마, 우산으로 몸을 가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임하신 몸으로 고뿔이라도 나면 큰일입니
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정연 때문에 놀란 겁니다.”아이를 출산한다는 게… 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일인 것 같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우연은 손으로 아직 분명하게 커지지 않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뱃속의 아이가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아이만 생각하면 소우연은 출산의 고통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이육진 품에 안긴 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이육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 남자를 너무 많이 사랑하기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고개를 살짝 숙인 이육진은 소우연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조금 괜찮아졌느냐?”소우연이 대답을 하려던 그때, 이육진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전…”입을 열기도 전에 또 한번 입을 맞추자 소우연은 이육진의 목을 꼭 감싸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많이 나아졌습니다.”시간은 어느덧 9월이 되었다.우옥명도 예쁜 딸아이를 출산했고 아이의 이름을 심연희라고 지었다.그리고 소우연의 배는 현저하게 커졌다.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피식 웃었다.“혹시 이번에도 쌍둥이 아닌가?”소우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그럴 리 없습니다.”소우연뿐만 아니라 이 원사도 몇 번이나 찾아와 그녀를 위해 진맥을 했는데 뱃속에는 태아가 한 명밖에 없다고 했다.일부러 진맥한 건 아니지만 소우연은 뱃속의 태아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그녀는 아이의 물건을 전부 연분홍색으로 준비했다.이육진은 연분홍색으로 물든 속적삼과 이불 그리고 작은 모자들을 보며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기 급급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이 대답했다. “셋째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고민하고 있었다.”이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연이 출산하던 날, 아이에게 아명을 지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둔 이름이 있었습니다.”“그래? 그 이름이 무엇이냐?”“이진이요.”“이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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