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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or: 무명
그제야 조민소는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선 조민소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이진이 자신을 모욕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때 누구보다 자신을 아껴 주던 친아버지마저 차라리 전장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조민소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말했다.

“그토록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곧 다시 전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조민소의 모습에 조성원은 더욱 화가 났다. 이내 차갑게 코웃음을 친 뒤 소매를 털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김선희는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민소야, 네 아버지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어찌 아버지께 사과 한마디 하지 못하느냐?”

“이진이는 네 아우다. 허니 이제 그만 괴롭히거라.”

멀어지는 부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민소가 크게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민소는 빗속에 무릎을 꿇은 채 부모를 향해 세 번 큰절을 올렸다.

이제 마음에는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첫 번째 절은 저를 낳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 절은 저를 길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불효한 아들이 오늘 두 분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만날 날이 없으니, 부디 평안하십시오.’

쏟아지는 빗속에 무릎을 꿇은 조민소의 눈에는 슬픔도 원망도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성원과 김선희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왠지 이번에 돌아서면 정말 다시는 조민소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선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데 조이진이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날이 춥습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김선희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이내 모두가 조이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조민소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별채였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민소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폐하, 이레의 약조도 내일이면 끝납니다. 소신 또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누구도 조민소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족 중 그 누구도 붙잡지 않았고, 가장 믿었던 친아버지의 입에서는 차라리 전장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조민소는 가슴속에 차갑게 가라앉은 감정을 애써 눌렀다.

어좌에 앉은 황제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조민소를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조성원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토록 훌륭한 아들을 두고도 그 귀함을 모르다니.”

조민소는 말없이 황제에게 깊이 절을 올렸다.

“내일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앞으로는 폐하를 대신해 변방을 지키고, 저희 대우(大虞)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황제는 한동안 조민소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민소는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예를 올린 뒤, 미련 없이 돌아서서 황궁을 나섰다.

...

이튿날 아침, 조민소는 탁자 위에 서신 한 통을 남겨 놓고 갑옷을 갖춰 입었다. 장창까지 챙겨 문을 나서려 했지만, 방문은 밖에서 잠근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도련님, 나리와 마님께서 오늘은 방 안에만 머무시라 분부하셨습니다.”

오늘은 조이진의 혼례 날이었다.

아마도 부모는 조민소가 혼례 자리에 나타나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조민소는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조이진이 신부를 맞으러 나가면 집안사람들도 모두 따라나설 터였다. 그때 조용히 떠나면 그만이었다.

한참 뒤, 마침내 신부를 맞으러 가는 행렬이 장군부를 나섰다. 문밖에서는 풍악 소리가 떠들썩하게 울려 퍼졌다.

문밖을 지키던 몸종이 자리를 뜨자, 조민소는 문을 걷어차 열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뒤 말을 타고 성문으로 향했다.

오늘 도성은 곳곳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수많은 백성이 길가에 나와 혼례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임지영은 꽃가마 안에 앉아 있었다. 화려한 혼례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오늘은 이진이와 혼례를 올리고, 한 달 뒤면 오라버니와도 홀례를 치른다. 드디어 오라버니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임지영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바로 그때, 말을 탄 조민소가 임지영의 꽃가마 곁을 스쳐 지나갔다. 서로 엇갈리는 찰나에도 조민소는 단 한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임지영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가마의 휘장을 살며시 걷어 올렸다. 이미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과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조민소가 성문을 나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임지영은 혼례를 재촉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마음 한구석이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조이진이 다가와 손을 내밀자, 임지영은 문득 어린 시절 조민소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직접 면사포를 제 머리에 쓰고 훗날 반드시 조민소에게 시집가겠노라 약조했다.

그토록 오래된 약조이건만, 오늘 그녀는 조민소가 아닌 다른 사내와 먼저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임지영은 조이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죄책감과 불안도 차츰 기쁨에 묻혀 갔다.

‘한 달 뒤면 오라버니와도 혼례를 올릴 테니, 그때 잘 달래면 괜찮아질 거야.’

임지영은 사람들의 축복을 한몸에 받으며 조이진과 함께 조씨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조민소는 길게 늘어진 붉은 비단길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장군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야.’

‘아버지, 어머니.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평안하게 지내십시오.’

‘임지영,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겠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평생 변함없이 함께하기를.’

조민소는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말채찍을 휘둘렀다.

이내 장병들을 이끌고 성문을 빠져나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변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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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21화

    조민소는 별다른 기색 없이 단오의 앞에 서서 그녀를 감싸듯 막아섰다. “이쪽은 호연단오라고 한다. 북적의 여왕이기도 하지.”임지영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단오를 보호하는 조민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 깊은 곳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이어 조민소가 담담히 말했다.“네가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삼 년이구나.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임지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조민소가 자신에게 돌아가라 이른 것도 어느덧 아흔일곱 번째였다. 그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버티지 않기로 했다.지난 몇 년 동안 곁에 머물며 임지영도 이제는 자신과 조민소 사이에 다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지금 그의 곁에는 강인하면서도 오직 조민소만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런 단오를 보고 있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가슴 한구석의 씁쓸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한때 오라버니의 곁에 서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결국 내 손으로 그 인연을 놓쳐 버렸구나.’임지영이 마차에 올라 경성으로 떠나려던 날, 조민소는 오래 간직했던 옥패를 돌려주었다. “이 옥패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너와 나의 지난 인연은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서로 뒤돌아보지 말고 각자의 길을 가자꾸나.”잠시 말을 멈췄던 조민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임지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람을 보내 두 분을 잘 보살피겠습니다.”그제야 조민소는 마음을 놓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마차에 오른 임지영은 창가의 발을 살며시 걷어 올리고 마지막으로 조민소를 바라보았다.어쩌면 이번이 평생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일지도 몰랐다.그때 단오는 옥패 하나를 손에 든 채 조민소를 바라보며 맹세하고 있었다. “저는 북적의 신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생에서 오직 조민소 한 사람만을 연모하겠습니다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20화

    조민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단오니?”그러자 단오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면사를 천천히 걷어 냈다.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앳된 소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느새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맑고 예리한 눈빛은 차가운 별처럼 빛났지만, 조민소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전히 한없이 부드러웠다.숨김없이 자신을 향하는 뜨거운 시선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마주하자, 조민소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단오는 조민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제가 예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조민소는 고개를 저었다.단오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제가 떠나기 전에 서신을 한 통 남기지 않았습니까. 저와 오라버니는 절대로 적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제 그 약조를 지켰습니다.”“저는 지금 북적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북적과 대우는 영원히 우호를 이어 갈 것입니다.”지난 삼 년 동안 단오는 단 한순간도 조민소를 잊은 적이 없었다.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마다 조민소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차갑고 고결한 얼굴과 늠름한 뒷모습,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까지.그는 단오가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조민소는 눈앞의 단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삼 년 전 앳된 소녀였던 단오는 어느새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여왕이 되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조민소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단오야, 참 잘해 냈구나.”그 한마디에 단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모두가 총애받지 못하는 구공주라며 그녀를 업신여겼지만, 조민소만은 아무런 편견 없이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그와 함께 지냈던 두 달은 단오에게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9화

    조민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예전에 깨졌던 것과 똑같이 생긴 옥패 두 개가 들어 있었다.임지영은 그 옥패를 줄곧 소중히 간직해 왔다. 모진 매질을 당하는 와중에도 옥패만큼은 깨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 냈다.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라버니, 지난 일은 모두 제 잘못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오라버니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의 용서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이제 임지영은 더 이상 조민소의 용서를 바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한때는 백성들이 어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지조차 모르던 철없는 규수였지만, 지금의 임지영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자신이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조민소와 같은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 준 덕분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임지영 역시 과거에 품었던 집착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이때 조민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똑같이 만든 옥패라 해도, 예전의 그 옥패가 될 수는 없다.”“너를 원망하는 마음은 이미 내려놓았다. 허나 우리 사이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느니라.”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지만 임지영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어 경성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자 조민소 역시 한동안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조이진이 기방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조민소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사람은 누구나 제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법이었다.조이진에게 처음부터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토록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이제 조이진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렀으니, 조민소 역시 지난날의 원망을 더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조민소는 임지영에게 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과 의원을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8화

    조민소의 복잡한 눈빛을 마주한 단오는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들키고 말았네요.”조민소가 싸늘하게 물었다. “네 몸놀림은 평범한 유목민이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신분을 밝혀라.”단오는 가볍게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본명은 호연단오입니다. 북적(北狄)의 구공주이자, 그중에서도 가장 총애받지 못하는 공주이기도 합니다.”“제 어머니는 평범한 궁녀였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 오라버니들이 황위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저는 황위를 둘러싼 다툼에 끼어들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허나 오라버니들은 끝내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도망치다 등에 칼을 맞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에는 늑대 떼에게까지 쫓기게 되었습니다.”“오라버니께서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를 해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이 목숨을 다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단오의 눈을 바라보던 조민소는 천천히 칼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 사람을 보내 단오의 신분을 남몰래 조사하게 했다.그 사이에는 단오를 제 곁에 두고 직접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감시였지만, 실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 때까지 보살피려는 마음도 있었다.사흘 뒤 비밀리에 알아본 결과가 도착했다. 단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북적의 구공주였다.조민소는 복잡한 눈빛으로 단오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상처가 다 나으면 돌아가거라. 너와 나는 결국 가야 할 길이 다르다.”단오의 눈에 금세 서운한 기색이 어렸다. “저희 북적은 지금껏 대우와 서로 국경을 넘보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헌데 오라버니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떠나보내려 하십니까?”조민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 믿었던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한 뒤로는 좀처럼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사람의 마음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섣불리 믿었다가 또다시 상처받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7화

    같은 시각, 조민소는 몸에 꼭 맞는 겉옷 위로 두툼한 여우 털 망토를 걸친 채 성벽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조성원이 보내온 서신을 손에 꼭 쥔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붉어진 눈가에는 뒤늦게 전해진 아버지의 관심에 대한 씁쓸함만이 남아 있었다.조민소는 이미 황제 앞에서 변방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몸이었다. 이제는 제 뜻대로 경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이곳의 백성을 지키는 것, 그것이 앞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하염없이 흩날리는 눈송이가 조민소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녹은 눈인지 눈물인지, 이제는 조민소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그때 머리 위로 우산 하나가 드리워지며 쏟아지는 눈발을 막아 주었다.조민소가 뒤돌아보자,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단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밖은 너무 춥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조민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단오는 그가 변방으로 향하던 길에서 우연히 구해 준 여인이었다.당시 단오는 얇은 옷차림으로 굶주린 늑대에게 쫓기고 있었고, 등에는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기력이 다해 곧 늑대에게 덮칠 위기에 처한 순간, 조민소가 나타나 칼 한 번에 늑대의 목을 베어 버렸다.정신을 차린 뒤, 그녀는 자신을 단오라고 밝히며 인근 유목민 출신이라고 했다.부모를 모두 여의어 이제는 의지할 가족도 없다고 했다.그날 이후 그녀는 줄곧 조민소의 곁을 따랐다.하지만 조민소는 좀처럼 경계를 풀지 못했다.조이진의 일을 겪은 뒤로는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곁에 두는 것이 두려웠다.하지만 단오는 그런 조민소의 경계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처가 다 낫자 제 거처로 돌아갔지만, 그 뒤로도 날마다 사냥한 짐승을 가져다 놓고는 곧장 돌아가곤 했다.그렇게 보름이 흘렀다.어느 날 조민소는 또다시 얇은 옷차림으로 사냥감을 내려놓고 떠나려는 단오를 보게 되었다.그는 단오를 불러 세워 겨울옷 한 벌과 털신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6화

    임지영의 눈빛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조이진은 본래 강남의 기방 출신으로, 사 년 전 그곳에서 도망쳐 경성으로 올라왔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임지영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속이 뒤집히는 듯 구역질까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토록 능숙했던 것이다.지난 몇 년 동안 그와 몰래 만나며 가까이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자, 역겨움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장례비를 마련하려 몸을 팔겠다고 했던 것부터가 거짓이었습니다. 나리와 마님의 마차에 손을 써 사고를 일으킨 것도 조이진이었고, 아씨와 처음 관계를 맺었을 때도 몰래 약을 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조이진이 저지른 짓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임지영의 안색은 더욱 차갑게 굳어 갔다. ‘고작 이런 사내 때문에 오라버니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주었다니...’조민소는 그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 위해, 평생 변방을 지키는 길까지 스스로 택했다.그때 몸종이 찾아와 의복점 주인장이 혼례복을 장군부로 보내왔다고 알렸다.임지영은 붉은 혼례복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그것을 입은 조민소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러자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오라버니를 저버렸습니다. 이곳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반드시 오라버니를 찾아가겠습니다.”임지영은 몸종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이른 뒤 곧장 장군부로 향했다.조성원과 김선희는 홀로 찾아온 임지영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지영아, 어찌 혼자 왔느냐? 이진이는 어디 있느냐?”이 와중에도 여전히 조이진부터 찾는 두 사람을 보자 임지영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그때의 마차 사고는 모두 조이진이 꾸민 일이었습니다!”임지영은 충격으로 굳어 버린 두 사람 앞에서 조이진이 저지른 악행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조성원과 김선희는 하루아침에 열 살은 늙어 버린 사람처럼 초췌해졌다.조성원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내가 눈이 멀었구나. 고작 그런 자 하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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