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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or: 무명
조민소는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원망만 남기고 싶지는 않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남은 시간만큼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대청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갑자기 눈앞으로 하얀 물체 하나가 날아들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찻잔이 이마에 부딪혔고, 붉게 부어오른 이마를 감싸 쥔 채서야 그것이 깨진 하얀 찻잔임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자 분노로 굳은 부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는 조이진과 임지영이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은 채 조민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홀로 서 있는 조민소의 모습과는 너무나 선명한 대비였다.

이윽고 아버지 조성원이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못난 자식. 집에 돌아온 뒤로 말썽만 일으키는구나. 아우에게 손을 대더니 이제는 부인이 될 지영이까지 때려?”

“전장에서 삼 년을 보내더니 기본적인 예의마저 잊어버린 것이냐?”

조민소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모님께서 평안사(平安寺)에서 한달음에 돌아온 이유도 자신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조이진이 당했다는 말을 듣고 그의 편을 들어 주러 온 것이었다.

김선희도 가슴을 움켜쥐며 나무랐다.

“이진이는 네 아우다. 어찌 그 아이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하는 것이냐?”

“어서 이진이에게 사과하거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조민소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띤 조이진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알고 계셨습니까? 저 아이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위패를 태웠다는 사실을요.”

그러자 조성원과 김선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이진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에 다급히 돌아왔을 뿐, 앞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성원은 이내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을 그 지경으로 때려서는 안 되지. 이진이는 곧 혼례를 앞두고 있는데.”

조민소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조성원은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나 목소리를 높였다.

“사과할 마음이 없다면 이진이에게 보상이라도 하거라.”

“네 재산의 절반을 이진이 몫으로 떼어 줄 생각이다.”

조민소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가슴 한복판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허탈하게 웃던 조민소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가 정녕 두 분의 친아들이 맞습니까?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듣자 조성원과 김선희도 마음속으로 미안함이 스쳤다.

하지만 조민소가 떠나 있던 삼 년 동안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조이진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마음도 그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 있었다.

“어제 지영이에게 손을 댄 것도 그렇고, 네가 전장에서 돌아온 뒤로 성정이 너무 거칠어졌다. 허니 남을 탓하기 전에 네 성정부터 돌아보거라.”

“오늘 밤은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말을 마친 조성원과 김선희은 돌아서서 다정하게 조이진의 손을 잡고, 내일 혼례에 관해 하나하나 일러 주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너와 지영이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명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부모는 다정한 얼굴로 조이진의 손을 잡고 앞으로의 일을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임지영도 조이진의 손을 꼭 잡고 곁에서 듣고 있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네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조민소는 자신만 이 집안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심장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려왔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이제는 아무리 아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은 채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자,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빗줄기가 거세졌다.

비를 맞고 있자 오래된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조민소의 몸이 저도 모르게 휘청였다.

그때 우산을 든 조이진이 조민소에게 다가왔다. 눈빛에는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우쭐함이 어려 있었다.

조이진은 천천히 몸을 낮춰 앉아 질투 어린 눈으로 조민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예전에 저를 구해 주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형님의 아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형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 집에는 진작부터 형님께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굳이 살아 돌아오신 겁니까?”

조민소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조이진은 그런 조민소가 싫었다.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고, 마치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라보는 그 눈빛이 견딜 수 없이 거슬렸다.

그때 멀리서 임지영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이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곧장 한 걸음 물러나더니 일부러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금세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괜히 화나게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산을 씌워 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임지영은 곧장 달려와 비에 흠뻑 젖은 조이진을 일으켜 처마 아래로 데려가며 화를 냈다.

“이진이는 좋은 뜻으로 우산을 씌워 드리려 한 것뿐인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러고는 조이진을 향해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왜 오라버니께 우산을 가져다 주겠다고 나왔느냐. 몸도 약한데 괜히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조민소는 그 말을 듣고도 임지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태도에 임지영은 더욱 화가 났다.

그때 소란을 들은 조성원과 김선희도 급히 달려왔다.

비에 젖은 채 처량하게 서 있는 조이진을 보자 조성원은 다짜고짜 앞으로 나서 조민소를 걷어찼다.

“이 못난 자식! 애초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돌아온 뒤로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구나!”

“대체 언제까지 말썽을 부릴 셈이냐!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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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21화

    조민소는 별다른 기색 없이 단오의 앞에 서서 그녀를 감싸듯 막아섰다. “이쪽은 호연단오라고 한다. 북적의 여왕이기도 하지.”임지영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단오를 보호하는 조민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 깊은 곳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이어 조민소가 담담히 말했다.“네가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삼 년이구나.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임지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조민소가 자신에게 돌아가라 이른 것도 어느덧 아흔일곱 번째였다. 그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버티지 않기로 했다.지난 몇 년 동안 곁에 머물며 임지영도 이제는 자신과 조민소 사이에 다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지금 그의 곁에는 강인하면서도 오직 조민소만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런 단오를 보고 있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가슴 한구석의 씁쓸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한때 오라버니의 곁에 서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결국 내 손으로 그 인연을 놓쳐 버렸구나.’임지영이 마차에 올라 경성으로 떠나려던 날, 조민소는 오래 간직했던 옥패를 돌려주었다. “이 옥패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너와 나의 지난 인연은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서로 뒤돌아보지 말고 각자의 길을 가자꾸나.”잠시 말을 멈췄던 조민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임지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람을 보내 두 분을 잘 보살피겠습니다.”그제야 조민소는 마음을 놓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마차에 오른 임지영은 창가의 발을 살며시 걷어 올리고 마지막으로 조민소를 바라보았다.어쩌면 이번이 평생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일지도 몰랐다.그때 단오는 옥패 하나를 손에 든 채 조민소를 바라보며 맹세하고 있었다. “저는 북적의 신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생에서 오직 조민소 한 사람만을 연모하겠습니다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20화

    조민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단오니?”그러자 단오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면사를 천천히 걷어 냈다.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앳된 소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느새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맑고 예리한 눈빛은 차가운 별처럼 빛났지만, 조민소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전히 한없이 부드러웠다.숨김없이 자신을 향하는 뜨거운 시선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마주하자, 조민소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단오는 조민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제가 예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조민소는 고개를 저었다.단오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제가 떠나기 전에 서신을 한 통 남기지 않았습니까. 저와 오라버니는 절대로 적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제 그 약조를 지켰습니다.”“저는 지금 북적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북적과 대우는 영원히 우호를 이어 갈 것입니다.”지난 삼 년 동안 단오는 단 한순간도 조민소를 잊은 적이 없었다.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마다 조민소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차갑고 고결한 얼굴과 늠름한 뒷모습,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까지.그는 단오가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조민소는 눈앞의 단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삼 년 전 앳된 소녀였던 단오는 어느새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여왕이 되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조민소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단오야, 참 잘해 냈구나.”그 한마디에 단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모두가 총애받지 못하는 구공주라며 그녀를 업신여겼지만, 조민소만은 아무런 편견 없이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그와 함께 지냈던 두 달은 단오에게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9화

    조민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예전에 깨졌던 것과 똑같이 생긴 옥패 두 개가 들어 있었다.임지영은 그 옥패를 줄곧 소중히 간직해 왔다. 모진 매질을 당하는 와중에도 옥패만큼은 깨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 냈다.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라버니, 지난 일은 모두 제 잘못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오라버니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의 용서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이제 임지영은 더 이상 조민소의 용서를 바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한때는 백성들이 어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지조차 모르던 철없는 규수였지만, 지금의 임지영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자신이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조민소와 같은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 준 덕분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임지영 역시 과거에 품었던 집착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이때 조민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똑같이 만든 옥패라 해도, 예전의 그 옥패가 될 수는 없다.”“너를 원망하는 마음은 이미 내려놓았다. 허나 우리 사이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느니라.”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지만 임지영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어 경성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자 조민소 역시 한동안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조이진이 기방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조민소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사람은 누구나 제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법이었다.조이진에게 처음부터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토록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이제 조이진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렀으니, 조민소 역시 지난날의 원망을 더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조민소는 임지영에게 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과 의원을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8화

    조민소의 복잡한 눈빛을 마주한 단오는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들키고 말았네요.”조민소가 싸늘하게 물었다. “네 몸놀림은 평범한 유목민이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신분을 밝혀라.”단오는 가볍게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본명은 호연단오입니다. 북적(北狄)의 구공주이자, 그중에서도 가장 총애받지 못하는 공주이기도 합니다.”“제 어머니는 평범한 궁녀였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 오라버니들이 황위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저는 황위를 둘러싼 다툼에 끼어들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허나 오라버니들은 끝내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도망치다 등에 칼을 맞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에는 늑대 떼에게까지 쫓기게 되었습니다.”“오라버니께서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를 해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이 목숨을 다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단오의 눈을 바라보던 조민소는 천천히 칼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 사람을 보내 단오의 신분을 남몰래 조사하게 했다.그 사이에는 단오를 제 곁에 두고 직접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감시였지만, 실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 때까지 보살피려는 마음도 있었다.사흘 뒤 비밀리에 알아본 결과가 도착했다. 단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북적의 구공주였다.조민소는 복잡한 눈빛으로 단오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상처가 다 나으면 돌아가거라. 너와 나는 결국 가야 할 길이 다르다.”단오의 눈에 금세 서운한 기색이 어렸다. “저희 북적은 지금껏 대우와 서로 국경을 넘보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헌데 오라버니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떠나보내려 하십니까?”조민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 믿었던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한 뒤로는 좀처럼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사람의 마음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섣불리 믿었다가 또다시 상처받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7화

    같은 시각, 조민소는 몸에 꼭 맞는 겉옷 위로 두툼한 여우 털 망토를 걸친 채 성벽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조성원이 보내온 서신을 손에 꼭 쥔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붉어진 눈가에는 뒤늦게 전해진 아버지의 관심에 대한 씁쓸함만이 남아 있었다.조민소는 이미 황제 앞에서 변방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몸이었다. 이제는 제 뜻대로 경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이곳의 백성을 지키는 것, 그것이 앞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하염없이 흩날리는 눈송이가 조민소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녹은 눈인지 눈물인지, 이제는 조민소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그때 머리 위로 우산 하나가 드리워지며 쏟아지는 눈발을 막아 주었다.조민소가 뒤돌아보자,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단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밖은 너무 춥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조민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단오는 그가 변방으로 향하던 길에서 우연히 구해 준 여인이었다.당시 단오는 얇은 옷차림으로 굶주린 늑대에게 쫓기고 있었고, 등에는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기력이 다해 곧 늑대에게 덮칠 위기에 처한 순간, 조민소가 나타나 칼 한 번에 늑대의 목을 베어 버렸다.정신을 차린 뒤, 그녀는 자신을 단오라고 밝히며 인근 유목민 출신이라고 했다.부모를 모두 여의어 이제는 의지할 가족도 없다고 했다.그날 이후 그녀는 줄곧 조민소의 곁을 따랐다.하지만 조민소는 좀처럼 경계를 풀지 못했다.조이진의 일을 겪은 뒤로는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곁에 두는 것이 두려웠다.하지만 단오는 그런 조민소의 경계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처가 다 낫자 제 거처로 돌아갔지만, 그 뒤로도 날마다 사냥한 짐승을 가져다 놓고는 곧장 돌아가곤 했다.그렇게 보름이 흘렀다.어느 날 조민소는 또다시 얇은 옷차림으로 사냥감을 내려놓고 떠나려는 단오를 보게 되었다.그는 단오를 불러 세워 겨울옷 한 벌과 털신

  • 끝내 닿지 못한 마음   제16화

    임지영의 눈빛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조이진은 본래 강남의 기방 출신으로, 사 년 전 그곳에서 도망쳐 경성으로 올라왔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임지영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속이 뒤집히는 듯 구역질까지 치밀어 올랐다.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토록 능숙했던 것이다.지난 몇 년 동안 그와 몰래 만나며 가까이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자, 역겨움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장례비를 마련하려 몸을 팔겠다고 했던 것부터가 거짓이었습니다. 나리와 마님의 마차에 손을 써 사고를 일으킨 것도 조이진이었고, 아씨와 처음 관계를 맺었을 때도 몰래 약을 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조이진이 저지른 짓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임지영의 안색은 더욱 차갑게 굳어 갔다. ‘고작 이런 사내 때문에 오라버니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주었다니...’조민소는 그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 위해, 평생 변방을 지키는 길까지 스스로 택했다.그때 몸종이 찾아와 의복점 주인장이 혼례복을 장군부로 보내왔다고 알렸다.임지영은 붉은 혼례복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그것을 입은 조민소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러자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오라버니를 저버렸습니다. 이곳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반드시 오라버니를 찾아가겠습니다.”임지영은 몸종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이른 뒤 곧장 장군부로 향했다.조성원과 김선희는 홀로 찾아온 임지영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지영아, 어찌 혼자 왔느냐? 이진이는 어디 있느냐?”이 와중에도 여전히 조이진부터 찾는 두 사람을 보자 임지영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그때의 마차 사고는 모두 조이진이 꾸민 일이었습니다!”임지영은 충격으로 굳어 버린 두 사람 앞에서 조이진이 저지른 악행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조성원과 김선희는 하루아침에 열 살은 늙어 버린 사람처럼 초췌해졌다.조성원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내가 눈이 멀었구나. 고작 그런 자 하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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