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대전 안, 조민소는 눈가에 차오른 물기를 애써 눌러 삼켰다. 이윽고 한 자 한 자 황제를 향해 또렷이 힘주어 아뢰었다. “폐하, 신이 지금껏 세운 군공을 대가로 군주(郡主) 임지영과의 혼약을 파하고자 하옵니다.” “아울러 변방 수비를 자청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레 뒤 경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나이다.” 황제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민소야. 오늘 막 전장에서 돌아온 네가 어찌 벌써 다시 떠날 생각부터 한단 말이냐?” “너와 지영이는 짐이 어려서부터 지켜본 아이들이다. 네가 지난 삼 년간 변방에 나가 있는 동안 그 아이와 네 부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짐은 어느 정도 전해 들었다.” 황제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들이 네 마음을 저버렸구나.” 잠시 말을 멈췄던 황제가 이내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은 기회를 주어 보자꾸나. 짐과 내기를 하나 하자. 이레 안에 그들이 네 결심을 눈치채고 너를 붙잡는다면 경성에 남거라. 허나 끝내 아무도 네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그때는 짐도 네가 떠나는 것을 막지 않으마.” 조민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따위는 이미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주 희미한 기대 하나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나를 붙잡을까?’
Ver mais조민소는 별다른 기색 없이 단오의 앞에 서서 그녀를 감싸듯 막아섰다. “이쪽은 호연단오라고 한다. 북적의 여왕이기도 하지.”임지영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단오를 보호하는 조민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 깊은 곳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이어 조민소가 담담히 말했다.“네가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삼 년이구나.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임지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조민소가 자신에게 돌아가라 이른 것도 어느덧 아흔일곱 번째였다. 그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버티지 않기로 했다.지난 몇 년 동안 곁에 머물며 임지영도 이제는 자신과 조민소 사이에 다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지금 그의 곁에는 강인하면서도 오직 조민소만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런 단오를 보고 있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가슴 한구석의 씁쓸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한때 오라버니의 곁에 서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결국 내 손으로 그 인연을 놓쳐 버렸구나.’임지영이 마차에 올라 경성으로 떠나려던 날, 조민소는 오래 간직했던 옥패를 돌려주었다. “이 옥패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너와 나의 지난 인연은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서로 뒤돌아보지 말고 각자의 길을 가자꾸나.”잠시 말을 멈췄던 조민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임지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람을 보내 두 분을 잘 보살피겠습니다.”그제야 조민소는 마음을 놓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마차에 오른 임지영은 창가의 발을 살며시 걷어 올리고 마지막으로 조민소를 바라보았다.어쩌면 이번이 평생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일지도 몰랐다.그때 단오는 옥패 하나를 손에 든 채 조민소를 바라보며 맹세하고 있었다. “저는 북적의 신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생에서 오직 조민소 한 사람만을 연모하겠습니다
조민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단오니?”그러자 단오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면사를 천천히 걷어 냈다.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앳된 소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느새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맑고 예리한 눈빛은 차가운 별처럼 빛났지만, 조민소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전히 한없이 부드러웠다.숨김없이 자신을 향하는 뜨거운 시선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마주하자, 조민소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단오는 조민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제가 예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조민소는 고개를 저었다.단오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제가 떠나기 전에 서신을 한 통 남기지 않았습니까. 저와 오라버니는 절대로 적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제 그 약조를 지켰습니다.”“저는 지금 북적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북적과 대우는 영원히 우호를 이어 갈 것입니다.”지난 삼 년 동안 단오는 단 한순간도 조민소를 잊은 적이 없었다.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마다 조민소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차갑고 고결한 얼굴과 늠름한 뒷모습,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까지.그는 단오가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조민소는 눈앞의 단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삼 년 전 앳된 소녀였던 단오는 어느새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라 있었다.여왕이 되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조민소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단오야, 참 잘해 냈구나.”그 한마디에 단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그토록 듣고 싶었던 칭찬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모두가 총애받지 못하는 구공주라며 그녀를 업신여겼지만, 조민소만은 아무런 편견 없이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그와 함께 지냈던 두 달은 단오에게
조민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예전에 깨졌던 것과 똑같이 생긴 옥패 두 개가 들어 있었다.임지영은 그 옥패를 줄곧 소중히 간직해 왔다. 모진 매질을 당하는 와중에도 옥패만큼은 깨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 냈다.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라버니, 지난 일은 모두 제 잘못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오라버니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의 용서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이제 임지영은 더 이상 조민소의 용서를 바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한때는 백성들이 어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지조차 모르던 철없는 규수였지만, 지금의 임지영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자신이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조민소와 같은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 준 덕분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임지영 역시 과거에 품었던 집착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이때 조민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똑같이 만든 옥패라 해도, 예전의 그 옥패가 될 수는 없다.”“너를 원망하는 마음은 이미 내려놓았다. 허나 우리 사이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느니라.”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지만 임지영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어 경성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자 조민소 역시 한동안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조이진이 기방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조민소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사람은 누구나 제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법이었다.조이진에게 처음부터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토록 잘못된 길로 빠지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이제 조이진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렀으니, 조민소 역시 지난날의 원망을 더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조민소는 임지영에게 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과 의원을
조민소의 복잡한 눈빛을 마주한 단오는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들키고 말았네요.”조민소가 싸늘하게 물었다. “네 몸놀림은 평범한 유목민이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신분을 밝혀라.”단오는 가볍게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본명은 호연단오입니다. 북적(北狄)의 구공주이자, 그중에서도 가장 총애받지 못하는 공주이기도 합니다.”“제 어머니는 평범한 궁녀였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 오라버니들이 황위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저는 황위를 둘러싼 다툼에 끼어들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허나 오라버니들은 끝내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도망치다 등에 칼을 맞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에는 늑대 떼에게까지 쫓기게 되었습니다.”“오라버니께서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를 해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이 목숨을 다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단오의 눈을 바라보던 조민소는 천천히 칼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 사람을 보내 단오의 신분을 남몰래 조사하게 했다.그 사이에는 단오를 제 곁에 두고 직접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감시였지만, 실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 때까지 보살피려는 마음도 있었다.사흘 뒤 비밀리에 알아본 결과가 도착했다. 단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북적의 구공주였다.조민소는 복잡한 눈빛으로 단오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상처가 다 나으면 돌아가거라. 너와 나는 결국 가야 할 길이 다르다.”단오의 눈에 금세 서운한 기색이 어렸다. “저희 북적은 지금껏 대우와 서로 국경을 넘보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헌데 오라버니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떠나보내려 하십니까?”조민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 믿었던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한 뒤로는 좀처럼 경계를 풀 수가 없었다.사람의 마음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섣불리 믿었다가 또다시 상처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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