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무심코 말했다. “방금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 차 옆으로 지나간 그 잘생긴 남자 말이에요. 키도 크고 얼굴도 꽤 괜찮던데요?”“그... 그랬어...?” 유미경은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나는 못 봤는데... 조금 전에 잠깐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서...”“그래요?” 릴리가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그런 잘생긴 사람이 지나가면 제일 먼저 알려드릴게요.”“응 알겠어...” 유미경은 얼떨결에 대답했다.그녀의 이런 반응은 오히려 릴리에게 확신을 더 심어주었다. 유미경은 분명 시후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일 것이다.릴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이토 나나코’라는 이름을 입력했다. 그녀는 이미 시후에 대한 모든 자료를 파악한 상태였고, 그의 신분과 이력, 현재의 사업 구조와 영향력을 거의 다 인지하고 있었다. 릴리는 시후가 TS Shipping의 배후에 있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엘에이치 그룹과 이토 그룹에 대한 정보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았다.릴리는 한 때 이토 나나코의 자료도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워낙 기억력이 뛰어난 그녀는 나나코의 얼굴을 이미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방금 전에 나나코를 봤을 때, 단번에 그녀가 이토 나나코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릴리는 곧 이토 나나코에 대한 소개 페이지를 열었고, 그녀의 공개된 사진을 몇 장 클릭해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목격한 여성이 바로 이토 나나코가 맞다는 것을 재확인했다.그 순간 릴리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은시후 씨는 그의 아내와 처가 식구들과 함께 청년재의 저택 구역에 살고 있어. 그런데 왜 이토 나나코와 같이 고층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있었던 거지? 혹시 이곳에 다른 여자를 숨겨놓고 있는 거 아니야?’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은시후란 사람, 정말 여자들을 밝히는 성격인가 보군. 만약 이 사람이 옛날 황제였다면, 아마 후궁이 셋은 기본이고, 비, 빈이 수십은 있어야 만
나나코는 시후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리자 깜짝 놀라 물었다. “시후 군, 무슨 일이에요?”시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는 무심코 주머니에서 그 반지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그 반지는 마치 파킨슨 환자처럼 계속 덜덜 떨고 있었지만, 꺼내자마자 점점 진정되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버렸다.시후는 더더욱 의아했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대체 또 왜 이러는 거야? 배고파서 그런 거냐? 또 내 영기를 속여서 빼먹으려는 거야?’나나코는 시후가 그 단순한 반지를 보며 잔뜩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졌다. “시후 군, 그 반지… 혹시 특별한 물건인가요?”시후는 생각에서 벗어나듯 웃으며 대답했다. “특별한 건 아니고요. 그냥 길에서 주운 고물 같은 건데, 버릴까 말까 고민 중이었어요.”나나코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럼 경찰서에 맡겨보는 건 어때요? 분실물 보관소에 두면, 혹시 원래 주인을 찾을 수도 있잖아요.”그 순간, 시후는 노르웨이에서 우연히 구해준 그 소녀가 떠올랐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주인은 아마 이 물건을 벌써 잊었을 텐데...” 그러곤 다시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이젠 신경 쓰지 말고, 가요. 저기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 홀이 다나카 씨가 알려준 그 건물이에요.”한편, 한숙현이 모는 차량은 이미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햇빛이 앞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자마자, 뒷좌석에 있던 두 여자는 동시에 긴 숨을 내쉬며 속으로 ‘휴, 다행이다!’ 하고 안도했다.방금 두 사람 모두 시후를 마주치며 바짝 긴장했던 그 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릴리는 그제야 완전히 긴장을 풀었지만, 유미경은 마음 한켠이 시큰거렸다. 조금 전 시후와 함께 걷고 있던 그 여자는 누구일까? 마음속에서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바로 시후의 아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나코의 외모와 분위기는, 아시아 여성 중에서도 거의 독보적이라 할
릴리는 원래 유미경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 자청해서 서울대학교에서 계약서에 서명할 때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유미경이 계약을 마치고 갑자기 청년재에 들르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릴리는 이번에 서울로 온 이유가 시후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아직 그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이곳 청년재는 절대로 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 차량의 뒷좌석은 완전히 사적인 공간이었기에, 몸이 좀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유미경이 엘리베이터홀을 나오자, 한숙현이 오른쪽 슬라이딩 도어를 열었다. 유미경은 차에 올라타며 웃으며 말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이제 가자.”릴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었다.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요. 한 5~6분밖에 안 됐는걸요.”유미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까 배가 아프다더니 좀 괜찮아졌어?”“이제는 괜찮아졌어요. 별일 아닌 것 같아요.”유미경은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마 생리 전이라 그런 거일 거야. 너 평소에는 언제쯤 시작하니?”조금 당황한 듯 릴리는 말했다. “그게... 거의 매달 이맘때쯤 시작하는 편이에요...”“그럼 그렇지. 오늘은 따뜻한 물 많이 마시고, 찬 데 가지 말고 무리하지 마.”“네네~ 알겠어요.” 릴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숙현에게 말했다. “집사님, 빨리 집에 가요~ 저 배고파요!”한숙현은 웃으며 말했다. “집까지 10분이면 도착하니까 곧 식사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차량을 지하 주차장에서 출발시켰다.한편, 시후는 장인이 쓰던 BMW 530을 몰고 이토 나나코와 함께 청년재에 도착했다. 시후는 차량을 유미경이 탄 차량 바로 앞 빈 공간에 주차해두었다. 얼마 전 다나카 코이치가 아파트를 살 때 구입한 주차장 사용증을 챙기지 않은 탓에, 시후는 어쩔 수 없이 관리사무소에서 지정한 임시 주차 구역에 주차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임시 주차 구역의 가장 큰 단점은,
“몇 개월이 더 걸린다고?” 소민지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럼 하루에 최소 3km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는 거잖아?!”소지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는 기본이야. 컨디션 좋고 날씨도 좋을 땐 더 많이 걸어야 해. 그래야 중간에 멋진 풍경들 만나면 잠시 머물 시간도 생기니까.”소민지는 안쓰러운 표정이었고, 옆에 있던 박혜정은 조용히 딸에게 말했다. “민지야, 오빠는 이제 목욕 좀 하게 놔두자. 우리 방해하지 말고 나가자.”소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지빈에게 말했다. “오빠, 그럼 푹 씻어. 우리 밖에서 기다릴게.”소지빈은 가볍게 대답하고, 소민지가 욕실 문을 닫은 뒤 낡은 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목욕을 준비했다. 하지만 욕조 앞에 선 그는 맑고 따뜻한 물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민 끝에 옆에 있는 샤워부스로 옮겨갔다.그는 더러운 옷을 바닥에 놓고 먼저 물로 옷을 헹궜다. 그 다음에야 자신 몸의 때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씻기 시작했다.한편, 박혜정과 소민지는 식탁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없이 느끼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소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오빠, 진짜 너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방금 들은 얘기들, 오빠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진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마치 다른 영혼이 들어온 것처럼요...”박혜정은 미소를 지으며,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예전에 너한테 말했었잖니… 세상사에는 다 때가 있다고. 네 오빠가 20년 넘게 한량처럼 살았지만, 결국엔 그 아이도 변할 팔자인 거야.” 그러면서 덧붙였다. “지금부터 몇 달 뒤, 그 애가 해남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아마 삶의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어 있을 거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분명 그 아이에게 더 좋은 방향일 거야.”소민지는 감탄하며 말했다. “오빠가 이렇게 변하게 된 건 진짜... 은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 단호한 방식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예요.”박혜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
예로부터, 그리고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왕족이든 재벌가든 피붙이끼리 서로 등을 돌리고 해치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서 박혜정은 아들이 한때 자신과 딸을 외면했던 일을 결코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하지만 이 순간, 소지빈은 여전히 무릎 꿇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와 민지의 생사를 외면하고, 오직 제가 살길만을 쫓았던 저는 인간으로서도 자식으로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박혜정은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말한 거, 엄마는 다 이해해. 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엄마는 네가 밉지 않아.”그러나 소지빈은 고개를 들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에요,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다 핑계일 뿐이에요! 그때 나는 엄마와 민지 편에 설 수도 있었고, 그들 편에서 맞서 싸울 수도 있었는데, 결국 내 이익을 택했어요. 그게 바로 제가 잘못한 것이었어요!”박혜정은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래, 잘못은 했지. 하지만 네가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알고 반성하고 있으니 엄마는 그걸로도 충분히 기뻐.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는 것만으로, 넌 이미 이름값은 한 거야.” 그러고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지빈아, 이제 겨우 돌아왔고, 시간도 얼마 없는데 계속 이렇게 무릎 꿇고 있을 순 없잖아. 엄마가 목욕물도 받아 놨어. 얼른 씻고 나와서, 민지랑 나랑 같이 따뜻한 집밥 먹자. 우리 셋이 오랜만에 도란도란 이야기 좀 하자.”옆에 있던 소민지도 다가와 설득했다. “맞아 오빠, 이번에 이렇게 잠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기적 같은 일이야. 엄마랑 시간 많이 보내는 게 무릎 꿇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그제야 소지빈은 눈물을 훔치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어머니 뒤를 따라 시후가 어릴 적 살던 고택 안으로 들어섰다.박혜정은 그를 바로 욕실로 데려갔다. 그곳엔 이미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가 준비돼 있었고, 세면도구와 새 옷도 가지런히
서울 세종 성당 근처.시후가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고택은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소민지와 소지빈 남매의 어머니, 박혜정은 오랜 시간 정성과 노력을 들여 이 낡은 집을 하나하나 고쳐왔다. 겉모습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인 듯했지만, 내부는 마치 시간을 20년 전으로 되돌린 것처럼 생기 넘쳤다.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박혜정은 하루하루를 평온하고 충만하게 보냈다. 독서, 다도, 서예를 하며 여유를 즐겼고, 시간이 나면 정원을 돌보며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상을 이어갔다. 자식들이 자주 곁에 있진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이 오히려 더 큰 만족이었다.소지빈은 수개월 동안 순례길에 있었고, 소민지는 일 때문에 이곳저곳을 오가며 늘 바빴기에, 그녀를 자주 찾아올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박혜정은 아들의 순례에 대해 별다른 불안이나 원망 없이, 오히려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후의 징벌이었고, 시후는 냉철하기는 하지만 절대 무의미한 벌을 주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 판단은 단순히 시후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은서준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은서준. 그는 대단한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단 한 번도 무고한 자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잘못한 자라도 죄가 죽을 만큼은 아니라면 반드시 살 길은 열어주는 사람이었다.박혜정은 그런 부친의 성정이 시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후가 아들을 벌을 줘 삼보일배를 하도록 순례길로 보냈을 때도, 그가 분명히 생명의 안전만큼은 지켜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딸인 소민지가 시후에게 아버지의 결혼식 참석을 위한 아들의 임시 복귀를 요청하겠다고 말했을 때, 박혜정은 망설임 없이 “시후는 반드시 허락해줄 거야.”라고 말했다.지금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갈아입을 옷, 세면도구,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그리고 정성껏 차려낸 식탁.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