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태윤은 아내의 침묵을 순종으로 받아들인 듯 재킷 소매를 정리했다.“사람들 앞에서는 웃어. 어머니와 유진이한테도 예의를 지키고.”그는 문을 열기 전에 마지막으로 덧붙였다.“오늘 또 내 얼굴에 먹칠하면 그때는 당신이 감당해야 할 거야.”재희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그가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다친 이유까지 이용해 협박할 줄은 몰랐다.***서유진은 행사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그녀는 태강 저택에서 가져온 응접실 CCTV 영상을 휴대전화로 확인했다. 영상에는 재희가 보석함 가까이 손을 가져가는 장면이 확대되어 있었다. 반지를 보석함에 넣은 뒤 유진이 혼자 남아 다시 꺼내는 장면은 빠져 있었고, 재희가 응접실을 나간 뒤의 시간도 삭제되어 있었다.유진은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맞은편에 앉은 행사 영상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행사장에서 이 영상을 틀어도 괜찮겠습니까?”유진은 가련한 미소를 지었다.“저도 이런 방법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형수님이 계속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계시잖아요.”그녀는 붕대를 감은 손목을 살짝 들어 보였다.“어머니께서 주신 반지가 사라졌는데, 제가 오히려 의심받고 있어요. 진실을 보여드리는 것뿐이에요.”담당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유진은 작은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밀어놓았다.“오늘 행사 자료에 이 파일을 추가해 주세요. 재단 영상이 끝난 직후면 좋겠어요.”“대표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오빠는 제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어요.”유진은 미소를 거두고 담당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다만 제가 부탁했다는 사실은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담당자는 봉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눈가를 살짝 문질러 붉게 만든 뒤 립스틱을 덧발랐고, 손목의 붕대가 드레스 소매 밖으로 잘 보이도록 정리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윤재희가 퇴원 수속을 마쳤을 때, 병원 정문 앞에는 낯익은 검은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차량 옆에 서 있던 태윤의 비서가 그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재희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코트 자락을 여미며 걸음을 멈췄다. 발목에는 여전히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고, 붕대를 감은 손가락은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올라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지만 차 안에는 남편이 없었다. 재희가 목적지를 묻자 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오늘 저녁 태강호텔에서 열리는 자선연회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설명했다.저온창고에서 의식을 잃은 뒤 태윤은 병원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퇴원하는 날까지 몸이 어떤지 묻는 연락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행사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보내온 것이었다.“제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비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예, 사모님. 하지만 대표님께서 오늘 행사는 반드시 참석하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손에 감으신 붕대는 행사 전에 정리하시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손님들께서 괜한 오해를 하실 수 있다고요.”재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저온창고의 철문을 열기 위해 손톱이 부러지도록 긁었던 흔적이었다. 피부가 찢어지고 손가락 마디가 부어올라 아직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지만, 남편은 그런 상처를 걱정하기보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감추라고 했다.“태윤 씨에게 전해주세요. 붕대는 풀지 않겠다고요.”재희는 열린 차 문 앞에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행사에 참석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 다만 직접 확인할 일이 있으니 호텔까지는 가겠습니다.”비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재희는 천천히 차에 올랐다.***태강호텔의 대연회장은 화려한 조명과 꽃장식으로 가득했다.로비 중앙에는 태강재단의 이름이 새겨진 대형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포토월 앞에서는 취재진이 카메라를 점검하고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후원 기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문 잠금 소리와 구조되기 전까지 겪었던 일도 가능한 한 자세히 적었다.손가락이 아파 글씨가 삐뚤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삼 년의 결혼생활 동안 재희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참는 것이었다.남편이 자신을 무시해도 참았고, 시어머니가 모욕해도 참았다. 다른 여자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모습을 보고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참으려 했다.태윤과 처음 결혼했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그가 바쁜 사람이라는 것도,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는 것도 이해하려고 했다. 늦은 밤 돌아온 남편을 위해 음식을 데우고, 아침마다 넥타이를 골라주면서 언젠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다.그러나 그가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재희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남편의 기분부터 살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먼저 사과하는 데 익숙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어젯밤 폭우 속에서 버림받았을 때도, 오늘 차가운 창고에 갇혔을 때도, 그녀를 살린 것은 남편이 아니었다.저택 직원들이 쓰러진 자신을 발견했고, 경호원이 창고 문을 열어주었으며, 병원 사람들이 치료해 주었다.정작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남자는 끝내 오지 않았다.재희는 펜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삼 년의 결혼생활을 단번에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아직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고, 그가 자신을 한 번쯤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수는 없었다.재희는 적어놓은 종이를 접어 소지품 봉투 안쪽에 넣었다.그리고 남편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태윤 씨, 저는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곧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재희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이번에는 기다리지 않
태윤은 잠시 침묵했다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며. 내가 가면 뭐가 달라지는데?”재희는 숨을 들이마셨다.“당신은 제가 얼마나 오래 거기 갇혀 있었는지 알아요? 문을 열어달라고 계속 소리쳤어요.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두드렸고, 너무 추워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요.”그녀는 붕대를 감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마디마다 상처가 남아 있었다.“그런데 당신은 제가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직원이 위험하다고 설명까지 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바로 꺼내주라고 하지 않았어요?”그제야 태윤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누가 그런 말을 했어?”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내가 묻잖아. 누가 당신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냐고.”“그게 지금 중요해요?”“중요하지. 집안 직원들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재희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남편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보다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알고 싶어 했다.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태윤 씨, 당신은 제가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살아 있잖아.”그 말에 재희는 숨이 멎는 듯했다.태윤은 그녀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있고, 내가 비용도 전부 처리했어.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 일을 붙잡고 있을 생각이야?”재희는 입술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이제 그만해. 몸 괜찮아지면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께 사과드리고.”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사과해야 한다고요?”“당신 때문에 어머니 생신이 엉망이 됐잖아. 유진이도 반지를 잃어버려서 많이 속상해하고 있고.”재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햇빛이 병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자신은 죽을 뻔했다.그런데 남편이 걱정하는 것은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체온과 혈압을 확인했다.“많이 놀라셨죠? 저체온 상태로 오셨고 탈수도 있었어요. 지금은 안정되고 있지만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재희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제가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아세요?”간호사는 잠시 망설였다.“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발견 당시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간호사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작은 소지품 봉투를 가리켰다.“저택에서 보내온 물건들이에요. 휴대전화와 지갑도 확인해 보세요.”재희는 봉투를 열었다. 응접실에 남겨두었던 가방에서 꺼낸 휴대전화와 지갑,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켜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태윤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대신 비서가 보낸 문자가 있었다.*사모님, 대표님 지시로 병원비는 모두 처리했습니다.*재희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남편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은 병원비를 처리하라고 지시한 것뿐이었다.그녀는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제 남편이 다녀갔나요?”간호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아직 보호자분은 방문하지 않으셨어요.”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고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남편이 자신을 구하러 와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가장 먼저 태윤의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그런데 그는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오지 않았다.재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눈물이 흘렀지만 닦지 않았다.***오전이 되자 병원 행정 직원이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보호자 측에서 사고 경위에 관한 확인서를 전달하셨습니다. 내용이 맞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재희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그곳에는 자신이 연회 도중 몸이 좋지 않아 휴식을 취하다가 쓰러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온창고에 갇혔다는 사실도, 누군가 문을 잠갔다는 내용도 빠져 있었다.재희는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이건 누가 작성한 거예요?”“보호자 측에서 전달한 내용입니다.”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
태윤은 불쾌한 생각을 밀어내며 짧게 명령했다.“열어서 확인해.”“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대신 손님들한테 알려지지 않도록 해. 재희가 밖으로 나오더라도 연회장에는 들이지 말고.”경호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대표님, 사모님 상태가 좋지 않으시면 바로 병원으로 이송하겠습니다.”“상태부터 확인하라고 했잖아.”태윤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끊었다.그때 유진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오빠, 나 손목이 너무 아파.”태윤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많이 아파?”“아까부터 계속 욱신거려. 오늘 너무 무리했나 봐.”유진은 붕대를 감은 손목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다.태윤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붕대 위로 손끝을 가져가던 그는 유진이 작게 얼굴을 찡그리자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병원에 가자.”유진은 망설이는 듯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형수님도 안 보이시는데 오빠까지 나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태윤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네가 아픈 게 더 중요해.”그는 비서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재희가 갇혀 있는 창고에서는 경호원들이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태윤은 아내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유진의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걸쳐주고 함께 저택을 나섰다.***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태윤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경호팀장이었다.“대표님, 사모님을 발견했습니다.”태윤은 창밖을 바라본 채 물었다.“상태는?”“의식이 없으십니다. 현재 구급차를 요청했고,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있습니다.”그제야 태윤의 시선이 창밖에서 떨어졌다.“의식이 없다고?”“예. 체온이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보이고, 손가락에도 상처가 심합니다. 창고 안쪽 문에는 계속 탈출을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태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손가락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문을 두드렸다는 말이 머릿속에 걸렸다. 자신이 구조를 미루라고 지시했던 순간도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