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화. 사적인 연락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을 때는 밤 아홉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태준이 계산하는 동안 먼저 나온 서진은 창가에 서서 야경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목걸이로 손이 갔다.조금 전 태준이 직접 걸어준 목걸이였다.“그렇게 마음에 들어?”돌아보니 계산을 마친 태준이 다가오고 있었다.“응.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음에 들어.”“내가 당신 취향을 몇 년 봤는데.”“정확히 십오 년이지.”서진이 바로 정정하자 태준이 웃으며 어깨를 감쌌다.“그래. 십오 년.”두 사람은 나란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문이 열리는 순간 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태준은 화면을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지 않고 끊었다. 서진은 별생각 없이 그의 팔에 팔짱을 낀 채 함께 차로 향했다.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태준의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두 번이나 오는데 안 받아도 돼?”“응. 나중에 연락해도 돼.”“회사에서 온 거 아니야?”“맞아. 급한 일은 아니야.”대답이 자연스러워 서진도 더 묻지 않았다.차에 올라타자 태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내년 결혼기념일 이야기를 꺼냈다.“아까 말한 여행 있잖아. 어디 가고 싶어?”“내년 여행을 벌써 생각해?”“미리 알아보려고. 당신은 닥쳐서 물어보면 또 아무 데나 좋다고 할 거잖아.”틀린 말은 아니어서 서진은 웃었다.“그럼 유럽 갈까? 스페인도 가보고 싶고, 이탈리아도 다시 가보고 싶어.”“둘 다 가면 되지.”“휴가를 얼마나 내려고?”“결혼 십 주년인데 그 정도도 못 해?”내년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 전 연달아 걸려왔던 전화도 어느새 머릿속에서 멀어졌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열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태준은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나 먼저 씻을게.”“응. 씻고 나와. 차 끓여놓을게.”“커피 말고?”“이 시간에 커피 마시면 또 새벽까지 못 자잖아.”태준이 웃으며 욕실로 들
Last Updated: 2026-10-02
Chapter: 4화. 아직은 내 남편호텔을 나설 때까지 서진은 이하린에 대해 묻지 않았다.태준도 조금 전 받은 메시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자연스럽게 서진의 손을 잡았고, 차에 올라서는 안전벨트가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한 뒤에야 시동을 걸었다.평소와 다를 게 없는 태준이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태준은 저녁 예약이 일곱 시라며 그전까지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다는 서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뻗어 손등을 쓸었다.“왜 그래, 새삼스럽게?”“그냥 좋아서. 결혼기념일이잖아. 오늘 정도는 연애할 때처럼 굴어도 되지.”서진이 웃으며 손을 빼려 하자 태준은 오히려 손가락을 얽어 잡았다.십오 년을 만났고 부부로 산 지도 여덟 해가 지났지만, 태준은 가끔 이렇게 연애할 때처럼 굴었다.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서진의 머릿속에 조금 전 호텔에서 봤던 이름이 떠올랐다.이하린.하지만 직원에게 메시지가 왔다는 이유만으로 태준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오늘 오전 반차까지 내고 자신과 결혼기념일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서진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태준도 곧바로 손을 단단히 잡아왔다. 손바닥을 타고 익숙한 온기가 전해지면서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불편함도 조금씩 가라앉았다.***저녁 일곱 시가 조금 되기 전, 두 사람은 태준이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서던 서진은 익숙한 풍경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췄다.“여기였어?”결혼 전, 태준이 서진에게 프러포즈했던 곳이었다.그때보다 내부는 많이 달라졌지만 통창 끝에 놓인 둥근 테이블만은 예전과 비슷한 자리에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야경 위로 실내의 은은한 조명이 겹쳐지고, 잔잔한 음악 사이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서진은 잠시 그 자리를 바라봤다.스물여섯의 태준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날도 꼭 이런 분위기였다.그날 태준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몇 번이나 물을 마셨다. 분명 준비한 말이 있었을 텐데 한참 동
Last Updated: 2026-10-02
Chapter: 3화. 결혼기념일다음 날 아침, 서진이 눈을 떴을 때 태준은 이미 일어나고 없었다.비어 있는 침대 옆자리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마침 방문이 열리더니, 태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벌써 일어났어?”서진이 언제 들어왔냐고 묻자 태준은 한 시 조금 넘어서였다며, 너무 잘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다고 했다.태준은 서진이 좋아하는 라테를 협탁 위에 내려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서진이 숙취는 괜찮냐고 묻자 어제는 별로 마시지 않았다며 얼른 씻고 나오라고 재촉했다.“왜 이렇게 서둘러?”“오늘이 무슨 날인데 계속 자려고 해.”커피잔을 들던 서진의 손이 멈췄다.“기억하고 있었어?”“내가 이걸 왜 잊어.”오늘은 두 사람의 여덟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어젯밤까지 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올해는 정말 잊었나 싶었지만, 서진은 굳이 먼저 묻지 않았다. 십오 년을 함께하는 동안 생일이며 기념일을 먼저 기억하고 챙긴 사람은 대부분 태준이었기 때문이다.“나 어제 조금 섭섭할 뻔했잖아.”“오늘 아침에 말하려고 일부러 아무 말 안 한 거야.”태준은 웃으며 서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저녁 식당은 이미 예약해 뒀지만 혹시 다른 게 먹고 싶으면 바꾸겠다는 말에 서진도 웃었다.“예약까지 해놓고?”“오늘은 당신 먹고 싶은 게 더 중요하잖아.”익숙한 말과 손길을 받고 있자 어젯밤부터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불편함도 조금씩 흐려졌다.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니 우유가 조금 많이 들어간 것까지 평소 자신의 취향 그대로였다. 오래 함께 살다 보면 무심해질 만도 한데, 태준은 여전히 이런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자 어젯밤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하린아, 그거 마시지 마. 너 아까 속 안 좋다며.서진은 손에 든 커피잔을 내려다봤다.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기억하는 남자가 함께 일하는 직원의 몸 상태를 기억한 게 뭐가 이상할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젯밤에는 자신이 괜히 예민했던 것 같았다.태준이 왜 갑자기 조용해
Last Updated: 2026-10-02
Chapter: 2화. 스물넷의 여자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처마 끝에서 굵어진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호출한 택시가 도착하려면 아직 칠 분이나 남았고, 전화기 너머에서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네, 맞는데요. 그런데 누구시죠?”상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때 멀리서 누군가 여자를 불렀다.― 하린아, 이거 네 거 아니야?“아, 네. 잠시만요.”하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서진은 얼마 전 태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새 프로젝트에 들어온 직원 중에 꽤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감각이 좋고 배우는 것도 빠르다며, 평소 직원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태준이 드물게 칭찬했던 여자였다.이하린, 스물넷.그때는 능력 있는 후배가 들어왔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그 여자가 태준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혹시 이하린 씨예요?”― 네? 아…… 네, 맞아요.“강태준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 부장님이요?“네. 제 남편이요. 지금 어디 있어요?”잠시 대답이 없었다.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하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장님은 지금…… 제 옆에 계세요.서진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봤다.태준은 분명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회사가 아닌 곳에 있었고, 그의 휴대전화는 스물넷의 여직원이 가지고 있었다.이상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팀원들과 함께 있을 수도 있었고, 회의가 길어져 근처에서 저녁을 먹는 중일 수도 있었다.십오 년을 함께한 남편이었다.전화 한 통으로 의심하기에는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린아, 누구 전화야?태준이었다.― 이리 줘. 네가 왜 내 전화를 받고 있어.나무라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그다지 날카롭지 않았다.― 죄송해요. 계속 울리는데 부장님이 안 계셔서 급한 전화인 줄 알고…….― 됐어. 줘 봐.잠시 뒤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늘 듣던 목소리가 들리자
Last Updated: 2026-10-02
Chapter: 1화. 남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아직도 둘이 그렇게 좋아?”성재의 말에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대학을 졸업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사이 아이가 둘인 친구도 생겼고, 이혼한 친구도 있었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연애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그런데 서진과 태준은 여전히 함께였다.대학교 1학년 때 만나 스물여섯에 결혼했으니, 친구들에게는 이제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모습 자체가 익숙한 풍경이었다.“연애한 것까지 합치면 몇 년이지?”누군가 묻자 서진이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올해로 십오 년 됐어.”“한 사람을 십오 년이나 보고 어떻게 안 지겨워?”“태준이도 나 십오 년 봤거든. 왜 나만 지겨울 거라고 생각해?”다시 웃음이 터졌다.서진도 따라 웃다가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바라봤다.태준은 십오 분쯤 전 전화를 받으러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마시다 만 맥주잔이 놓여 있었고, 의자 등받이에는 벗어둔 재킷도 그대로 걸려 있었다.생각보다 통화가 긴 모양이었다.그 정도만 생각했을 뿐 누구와 통화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서진에게 태준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그래도 대단하다. 나는 한 사람이랑 십오 년은 자신 없다.”친구의 말에 서진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살다 보면 지겨울 때도 있지. 그래도 강태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사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빈말이 아니었다.태준은 서진이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고, 결혼한 뒤에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강태준이 옛날부터 윤서진한테는 끔찍했지. 기억나냐? 비 오는 날 학생회관 앞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던 거.”성재가 옛날이야기를 꺼내자 서진이 바로 정정했다.“두 시간 반이었어.”“그걸 아직도 기억해?”“내가 기다리게 했는데 당연히 기억하지.”스무 살의 태준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 서진을 기다렸다.군대에 갔을 때는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고, 서진이 취업 면접에서 연달아 떨어졌을 때는 새벽 두 시에도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결혼
Last Updated: 2026-10-02
Chapter: 8화이무진의 얼굴이 굳었다.서린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백소화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너도…… 황후가 되지 못할 것이다.”“백서린!”처음으로 백소화의 얼굴에서 요염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그 모습을 본 서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다시 산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거친 숨을 몰아쉰 서린이 다시 이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오늘 죽는 것은 황후 백서린이 아닙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센 기침과 함께 피가 쏟아졌다. 서린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가쁜 숨을 고른 뒤 힘겹게 말을 이었다.“열여덟부터 당신 하나만 바라보았던 여자, 아버지의 반대도 무릅쓰고 당신을 선택했던 여자, 당신이 황제가 되는 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던 그 어리석은 여자가 오늘 죽는 것입니다.”눈물이 피 묻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내가 죽어 황천에 가면 가장 먼저 내 아이를 찾을 것입니다. 왜 그날 붙잡지 않았느냐고, 왜 혼자 보냈느냐고 빌고 또 빌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겠습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 안에서 피가 끓어올랐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원수를 황제로 만들었다고.”“서린.”이무진이 한 걸음 다가오자 서린은 남은 힘을 짜내 뒤로 물러섰다.“그러니 폐하께서도 기억하십시오.”핏물이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면 이 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앉으신 용상 아래에도, 잠드시는 침상 곁에도 있을 것입니다.”그 순간 바깥에서 천둥이 울렸다.어두운 밤하늘을 가른 번개가 중궁전 안을 환하게 비췄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잔을 드실 때마다 오늘 내가 마신 독을 떠올리게 하고, 눈을 감을 때마다 내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얼굴을 보게 할 것입니다.”이번에는 백소화를 향했다.“그리고 언젠가 두 사람이 자식을 품에 안는 날이 오면…… 그때마다 죽어가며 어미를 찾았던 내 아이를 떠올리게 할 것입니다.”“서린, 그만하라.”이무진의 목소
Last Updated: 2026-10-05
Chapter: 7화발밑에 고인 피가 치맛자락을 붉게 적셨지만 서린은 멈추지 않았다.“폐하께서 형제들에게 쫓겨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내 아버지가 군사를 보내 길을 열었습니다. 내 오라비들은 폐하를 위해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고, 외가의 재물로 군사를 먹였습니다.”한 걸음 더 다가서자 이무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한때는 저 얼굴 하나만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사람들이 폐하를 믿지 않을 때 내가 믿었고, 모두가 폐하께서 황제가 될 수 없다 했을 때 나만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침내 그의 앞까지 다가간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린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나는 폐하를 사랑했습니다.”원망보다 더 깊고 오래된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났다.이무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예전이었다면 그 작은 변화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애써 헤아렸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황제로 만들었는데…….”서린의 입가를 타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당신은 황제가 되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죽였군요.”이무진이 손을 뻗었다.서린은 그 손이 닿기 전에 몸을 뒤로 물렸다.“내게 손대지 마십시오.”허공에서 멈춘 손을 잠시 내려다본 서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그 손으로 내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죽이고, 내 아이를 죽인 여자를 감싸셨으니…… 죽어서도 그 손길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서린, 나는…….”“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서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백가가 너무 강해져 어쩔 수 없었다 하시렵니까? 내 아버지가 황권을 위협했다고 하시렵니까? 아니면 내 어린아이까지 죽어야 폐하께서 편히 용상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하시렵니까?”이무진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서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됐습니다. 이제 알고 싶지도
Last Updated: 2026-10-05
Chapter: 6화“태어날 때부터 백가의 적녀였고,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전부 언니만 바라봤지. 좋은 옷도, 좋은 혼처도, 모두의 사랑도 언제나 언니 차지였어.”백소화는 천천히 옷자락을 정리하며 서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황후 자리까지 언니 것이었고.”하지만 이무진에게 시선이 향하는 순간, 독기로 서늘하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백소화가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팔에 손을 얹자, 이무진은 밀어내기는커녕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서린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멈췄다.백소화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익숙하게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이무진 역시 그런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서린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자신이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이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황후인 자신 앞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백소화가 그의 품에 기댄 채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폐하의 마음만큼은 달랐어.”서린은 대답하지 않고 이무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여전히 백소화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서린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팔을 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확인한 백소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언니가 아직도 모르나 봐.”그녀가 이무진의 어깨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폐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가 아니야.”잠시 뜸을 들인 뒤, 백소화가 속삭이듯 덧붙였다.“나야.”그 한마디가 서린의 가슴을 칼날처럼 파고들었다.그런데도 서린은 백소화를 보지 않았다. 오직 이무진의 얼굴만 똑바로 바라보았다.아직은 그가 부정해주기를 기다렸다.백소화가 미쳐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자신이 사랑한 지난 십 년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만 하면 됐다.하지만 이무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오히려 백소화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제 곁으로 더욱 끌어당겼다.그 행동 하나로 충분했다.서린의 얼굴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감정이 서서히 사라졌다.“그러셨군요.”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백
Last Updated: 2026-10-05
Chapter: 5화백소화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많이 아파?”걱정하는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서린이 대답하지 않자 백소화는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후후…….”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적막한 중궁전에 번졌다.사람이 죽어가는 방에서 나올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백소화는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서린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린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천천히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서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이상했다.자신이 죽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저토록 즐거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소화는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했다.그것도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들려주고 싶은 말이.“무엇이 그리 우습더냐.”“그냥.”백소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언니가 이렇게 되는 날을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서린의 손가락이 요람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늘 궁금했어. 그 잘난 백서린이 모든 걸 잃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소화.”“가문도 없어지고 황후 자리도 빼앗기고…….”말끝을 길게 늘이던 백소화의 시선이 빈 요람으로 향했다.그리고 웃었다.“아이까지 없어지면.”순간 서린의 눈빛이 달라졌다.“무슨 뜻이냐.”백소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찬찬히 바라보았다.“정말 모르겠어?”“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서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제야 백소화가 다시 웃었다.“후후후…… 황자 말이야.”서린의 숨이 멎었다.백소화는 그 반응을 잠시 지켜보다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죽였어.”순간 방 안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빗물도, 바람에 흔들리는 창호도, 촛불 타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서린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뭐?”백소화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언니 아이.”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내가 죽였
Last Updated: 2026-10-05
Chapter: 4화주전자를 내려놓은 서린은 아이의 버선을 품 안에 넣고 다시 요람 곁으로 돌아갔다.손바닥으로 나무 난간을 쓸자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만져졌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장난감을 들고 두드려 생긴 흔적이었다.창가에는 아이가 좋아하던 나무 말이 있었고, 벽 한쪽에는 키를 재며 먹으로 표시해둔 자국도 남아 있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방 안의 모든 것이 유품이 되어 있었다.서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때 목 안쪽에서 이상한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독한 술 때문이라 생각할 만큼 미약했지만, 곧 뜨거운 쇠붙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타들어 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을 날카로운 칼날이 긁어내리는 듯한 통증까지 번졌다.독이 퍼지고 있었다.서린은 요람을 짚었지만 손끝에서 빠르게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기울고 뒤틀리는 속에서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쿨럭!”반사적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튀면서 흰 손바닥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서린은 피 묻은 손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이것이 황제 이무진이 자신에게 내린 마지막 것이었다.십 년 동안 그를 사랑한 대가이자 그를 황제로 만든 대가였으며,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목숨까지 바친 끝에 백가의 딸이 받아든 마지막 하사품이었다.서린의 입가가 천천히 비틀렸다.“참으로…… 후한 상을 내리시는구나.”다시 기침이 터지면서 이번에는 피가 손바닥을 넘어 바닥까지 튀었다.무릎이 꺾였지만 서린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요람 기둥을 붙잡았다. 목구멍에서는 계속 피가 올라왔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독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시야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흐려지자 서린은 요람에 이마를 기대었다.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이무진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되니까.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밤바람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서린은 천천히 고개
Last Updated: 2026-10-05
Chapter: 3화‘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 돼요?’그때 왜 한 번 더 안아주지 않았을까.왜 싫다는 아이를 굳이 보내버렸을까.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오늘 하루쯤은 어미와 함께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하지만 그날의 서린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유모가 다시 재촉하자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 직접 품에서 내려주었다.‘아바마마께 다녀오너라.’아이는 마지못해 유모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그러고도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서린을 바라보던 다섯 살 아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명했다. 정말 가야 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한참 동안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서린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곧 돌아올 줄 알았다.그것이 서린이 살아 있는 아이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보내지 않을 텐데.황제가 직접 와서 내놓으라고 해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황후의 자리를 빼앗는다 해도, 백가를 역적으로 몰겠다 협박한다 해도 아이만큼은 내주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아이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오지 않는 문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그 생각에 서린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작은 버선 위로 스며들었다.그래도 울음은 터뜨리지 않았다.한참 동안 버선을 움켜쥐고 있던 서린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나가거라.”“마마.”“혼자 있고 싶구나.”상궁은 그대로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서린은 재촉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황후를 모셨던 여인은 끝내 무언가 말하려다 입술만 떨었고, 세 번 절한 뒤 흐느낌을 삼키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다시 서린 혼자만 남았다.황후의 자리도, 십 년의 혼인도, 사랑했던 남편도, 자신이 낳은 아이도, 친정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 하나뿐이었고, 그것마저 이무진이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그런데
Last Updated: 2026-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