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가 가까워지자 하예진도 그녀를 더 똑똑히 볼 수 있었다.서현주는 전보다 훨씬 야위고 혈색도 안 좋아 보였다. 박시한 옷차림이다 보니 예리한 눈썰미가 아니면 그녀가 임신한 걸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형인 씨, 우리 가요.”서현주가 주형인에게 말했다.그녀는 이젠 주형인이 우빈이와 가까이하는 모습을 매우 꺼린다. 부자지간의 감정이 너무 애틋해 나중에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전념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서현주가 아들을 낳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만약 딸이라면 주 씨네 가족들은 틀림없이 우빈을 편애할 것이다.그녀는 나중에 계속 징역을 집행해야 하니 아이 곁에 머무를 수가 없다. 만약 딸아이가 시댁 식구들의 예쁨을 못 받고 엄마인 그녀조차 옆에 없다면 애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당할까?친아빠인 주형인만이 아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주우빈은 그녀의 아이보다 훨씬 행운아였다.우빈이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든든한 버팀목도 많아서 아이가 속상해할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된다.“우빈이 엄마랑 함께 뭐 사러 왔어?”주형인이 아들에게 물었다.“그냥 쇼핑하러 왔어요. 아빠는 뭐 샀어요?”아이는 서현주를 보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아줌마.”서현주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도 이제 막 와서 아무것도 못 샀어. 우빈이 뭐 사고 싶어? 아빠가 사줄게.”주형인은 서현주의 일도 있고 하 영감 부부가 계속 막고 있어서 오랫동안 전처를 만나지 못했고 아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오랜만에 보는 아들이기에 뭐라도 사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서현주는 겨우 짓던 억지 미소마저 사라졌다.다만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이때 하예진이 이리로 걸어왔다.그녀를 본 서현주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마땅히 하예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그녀가 하예진을 죽음의 관문을 넘나들게 한 간접적인 가해자이니까.“예진아.”주형인이 그녀를 불렀다.오랜만에 만난 전 와이프가 딴 사람으로 바뀐 것만 같
“동명 아저씨.”우빈은 노동명과 친아빠인 주형인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았다.노동명을 보자마자 하예진의 손에서 벗어나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이에 주형인의 안색이 더 음침해졌다.부모님과 누나가 항상 그의 앞에서 잔소리를 해댔었다. 지금 하예진에게 구애하는 사람이 있으니 당장 서현주와 이혼하고 하예진과 재결합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의 아빠도 딴사람으로 변할 거라고 했다.노동명은 우빈의 새아빠로 강 유력한 후보이다.주형인은 하예진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서현주에게도 미련과 죄책감이 남아있다.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해 두 여자를 해쳤다.하예진은 이미 그와 이혼하고 새 출발을 하여 제법 잘살고 있다. 주형인은 더는 서현주를 해치고 싶지 않고 특히 그녀가 감방에 있을 동안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서현주가 석방되어 나왔을 때 돌아갈 집조차 없기 때문이다.서현주의 친정집 오빠와 새언니들은 그녀가 체포된 이후로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렸다.부모님은 비록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연세가 있고 아들, 며느리에게 노후를 맡겨야 하니 딱히 어찌할 수가 없다.주형인마저 서현주와 이혼하면 그녀는 정말 갈 곳이 없을 것이다.주서인은 그가 하예진에겐 그토록 매정하면서 서현주에겐 뭘 이렇게 정의롭냐고 질책했다.“우빈아.”노동명은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우빈을 번쩍 안고 몇 바퀴 돌았다. 신난 아이는 깔깔대며 웃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며 부자 사이로 착각할 지경이었다.노동명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다정하게 웃으며 우빈에게 물었다.“우빈이 좋아?”“네, 너무 신나요.”아이는 너무 웃어서 작은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노동명은 아이의 앙증맞은 빨간 볼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아이의 작은 볼에 입맞춤했다.이때 우빈이도 의외로 그에게 뽀뽀했다.노동명은 기뻐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우빈이가 뽀뽀를 해주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오늘 밤엔 세수도 하지
“우빈아, 우빈아.”주형인은 잠깐 정신이 잘못됐는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우빈아, 아빠가 함께 놀아줄게.”주형인은 빠른 걸음으로 노동명을 따라잡고 그의 앞을 선뜻 가로막았다.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를 뺏어오려고 했다.이 아이는 그의 아들이니까!그와 같은 주 씨니까!노동명과 전혀 연관이 없으니 그가 놀아줄 필요도 없다.우빈에겐 친아빠인 주형인이 있다고!“우빈아, 아빠랑 함께 가서 놀자. 응?”주형인은 우빈에게 물었지만 시선은 노동명에게 꽂힌 채 일부러 ‘아빠’라는 두 글자를 강조하며 말했다.그는 영원히 주우빈의 아빠이다!노동명 따위가 감히 아빠 자리를 차지하려고, 어림도 없지!주형인은 노동명이 그의 전처에게 대시하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도 지금 서현주와 이혼하지 않았고 게다가 서현주는 그의 아이까지 임신했으니 이 시기에 이혼은 말이 안 된다.하예진이 재혼하겠다면 그건 오롯이 그녀의 자유이다.마음속으론 매우 언짢겠지만 진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하지만 우빈은 그의 아들이다. 노동명이 우빈과 가깝게 지내니 주형인은 저도 몰래 가로막고 싶어졌다. 두 사람이 부자처럼 보이는 게 싫으니까.“아빠는 현주 아줌마랑 함께 물건을 사야 하잖아요?”우빈이가 서현주를 가리키며 말했다.서현주의 안색이 한없이 짙어졌다.아빠가 그와 함께 놀아주면 현주 아줌마는 분명 엄청 화낼 텐데.엄마의 설명을 들은 이후로 우빈은 서서히 이해했다. 아빠는 이후에 현주 아줌마와 함께 생활할 것이다.주형인은 고개 돌려 서현주를 보더니 이내 우빈에게 말했다.“괜찮아. 먼저 우빈이랑 함께 놀다가 다 놀거든 그때 다시 현주 아줌마랑 가서 물건 사면 돼. 우빈이는 뭐 사고 싶어? 아빠가 다 사줄게. 우빈의 아빠는 나야. 엄마랑 아빠가 아무리 관계가 변했다고 해도 난 영원히 우빈의 친아빠야!”“아빠는 우빈이 사랑해. 다른 사람한테 속아 넘어가면 안 돼. 딴 사람을 절대 아빠라고 부르면 안 돼. 알겠지? 어떤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품고 가식적으로
하예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덤덤하게 지켜봤다.서현주의 연기를 주형인은 못 알아본 걸까?어쩌면 그는 서현주와 그녀 뱃속의 아이를 더 중히 여기는 거겠지.곧이어 주형인은 서현주를 차에 태우고 자리를 떠났다.하예진 일행과 작별 인사도 못한 채 그냥 가버렸다.하예진과 노동명은 주형인이 일찌감치 가버리길 바랐지만 우빈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가 분명 함께 놀아주겠다고 했는데 현주 아줌마가 불편하다는 한마디에 바로 그를 내팽개치고 아줌마와 함께 떠났으니 말이다.“엄마.”우빈은 하예진의 앞으로 다가와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했다.하예진은 아이를 안고 얼굴에 스친 실망한 표정을 보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주형인 대신 몇 마디 거들어주었다.“우빈아, 현주 아줌마가 몸이 불편해서 아빠가 병원으로 실어갔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거든. 안 그러면 진작 우빈이랑 놀아줬을 거야. 아빠는 우빈이랑 놀기 싫은 것도 아니고 우빈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더더욱 아니야.”노동명은 입을 비죽거리며 속으로 구시렁댔다.‘주형인은 우빈이에 대한 사랑이 확실히 적잖아.’그는 서현주와 그녀 뱃속의 아이를 더 사랑하고 있다.방금 서현주는 틀림없이 아픈 척 연기했을 것이다.주형인은 한때 회사에서 사장질을 하며 사회생활 경력이 풍부할 텐데 그녀의 연기를 못 알아봤을까?결국 서현주를 더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우빈에게 부자의 정은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마음씨 착한 하예진이니까 그런 인간을 위해 몇 마디 편들어주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아이 앞에서 전남편을 처참하게 험담했을 것이다.한편 노동명은 이런 하예진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부부가 감정에 금이 생겨 이혼은 했지만 하예진은 아이 앞에서 정말 단 한 번도 주형인의 험담을 한 적이 없다.왜냐하면 우빈에게 있어 부모란 이혼했든 아니든 주형인이 어떤 일을 저질렀든 결국 아이의 친아빠이니까.주형인이 아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할지 몰라도 양육비는 선뜻 내주니 나름대로 아빠의 책임은 다하고 있다.“그러니까 아빠는 우빈
“3층에 있었어. 1층에 맛있는 음식 많은데 먹고 싶은 거 없어?”우빈은 고개를 내저었다.아이는 지금 차고 넘치는 게 먹는 것과 노는 것이다.이모를 따라다니며 온갖 맛있는 음식을 싹쓸이했으니까.우빈이가 다른 물건을 살 생각이 없어 보이자 노동명은 곧장 아이를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3층 한쪽은 키즈 카페고 다른 한쪽은 신발과 옷을 판매하고 있었다.일부 가장들은 이곳에 신발 사러 오면 아이를 키즈 카페에서 놀게 한다. 키즈 카페는 입장권도 있고 전문적인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아이가 놀다 지치지 않는 한 절대 함부로 도망쳐 나올 일은 없다.설사 도망쳐 나왔는데 가장이 없다고 해도 직원들이 아이 스스로 가버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가장들은 이 점에 대해 무척 안심하고 있다. 아이를 키즈 카페에 넣어두기만 하면 마트를 마음껏 쇼핑해도 된다. 옆에서 시끄럽게 보채는 아이가 없으니까.바로 이 때문에 더 많은 가장들이 이곳에 와서 소비하고 있다.하예진은 우빈의 입장권을 끊은 후 신발을 벗겨주고 안에 들어가서 실컷 뛰어놀게 했다.노동명은 썩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우빈이가 다른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면 어떡해? 애들이 너무 많아.”“평상시엔 내가 늘 지키고 있어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직원들도 지켜보고 있고요.”노동명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우빈의 작은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아이는 들어가자마자 다른 친구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귀여운 얼굴에 꿀 발린 말로 다른 친구들을 살살 녹이며 금세 한데 어우러졌다.노동명은 잠시 지켜본 후에야 안심이 됐다.이 아이는 사회생활 능력이 꽤 훌륭한 편이었다.“예진아, 마트 좀 둘러볼래?”노동명이 그녀에게 물었다.하예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딱히 사고 싶은 건 없어요.”살 물건이 없으면 쇼핑할 의욕도 없다. 돌아다녀봤자 몸만 피곤하니 차라리 여기에 앉아서 아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걸 지켜보는 게 나을 법했다.“우빈의 장난감이랑 옷과 신발을 새로 사는 건 어때? 그리고 네 것도, 너도
윤미라가 산책하다가 우연히 그녀의 월세방 근처까지 왔다고? 하예진은 절대 안 믿었다.일부러 그녀를 찾아온 게 틀림없으니까.하예진은 신나게 뛰놀고 있는 아들을 보다가 노동명도 힐긋 바라봤다.“사모님, 저 지금 밖이에요.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그래요? 혼자 있어요?”윤미라가 상냥하게 물었다.그녀는 하예진의 전화번호를 몰라서 남편과 함께 일부러 하루 토스트까지 찾아가 간판에 적힌 번호대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우빈이랑 함께 한빛 마트 3층에 있어요. 여기 키즈 카페가 있는데 아이가 무척 좋아하거든요. 마트 입구에서 우연히 동명 씨도 만나서 지금 같이 있어요.”윤미라는 아들이 또 한 번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성사해 하예진에게 질척대는 걸 알아채고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다만 그녀는 하예진에게 화내지 않고 차오르는 울화를 꾹 짓누르며 겨우 말을 이었다.“동명이가 거기에 있다니 그럼 동명이더러 우빈이 잘 보고 있으라고 하고 우린 따로 만나서 얘기나 나눌까요?”일부러 하예진을 찾아왔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하예진은 윤미라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노동명에게 말했다.“동명 씨, 저 잠깐 볼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우빈이 잠시만 돌봐주세요.”노동명은 이미 엄마가 전화 온 걸 알아챘다.엄마가 그녀를 만나자고 한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예진아, 나랑 같이 가. 같이 가서 우리 엄마 만나.”“우빈이는요? 이제 막 들어가서 실컷 놀지도 못했어요. 애 아빠가 놀아주겠다고 해놓고선 내팽개치고 가버렸어요. 겨우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고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데 대뜸 데리고 가면 밤새 속상해할 거예요.”하예진은 윤미라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노동명이 따라오겠다고 하니 그녀는 마지못해 아들을 내세웠다.이에 노동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동명 씨, 부탁이에요. 저 금방 돌아와요.”하예진은 더는 그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스쿠터 열쇠를 챙긴 후 자리를 떠났다.“예진
항상 그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기에 마지못해 종일 우빈을 핑계 삼아 간신히 그녀 곁에 남아있다. 우빈이를 앞세우면 하예진도 어쩔 수 없으니까.“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그게 바로 자업자득인 거야. 저 좋다고 잘 만나보려는 은경이는 내버려 두고 굳이 예진 씨를 좋아해? 예진 씨는 너한테 마음도 없다는데 뻔뻔스럽게 계속 들이대는 거야? 신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예진 씨한테만 질척대면 다야?”윤미라는 아들이 하예진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게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하예진이 끝까지 버텨서 아들이 모진 괴로움 끝에 단념하기를 바랐다.“엄마, 난 손은경 씨한테 호감이 전혀 없어요. 예진이만 좋다고요.”“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예진이 어디가 은경이보다 나아?”윤미라가 시큰둥하게 아들에게 질문했다.‘이 죽일 놈의 녀석이, 제 어미를 울화통이 터져 죽일 작정이지.’“손은경 씨는 손은경 씨만의 장점이 있고 예진이도 예진이만의 장점이 있어요. 사람마다 장점이 다 달라요.”노동명은 손은경이 싫은 게 아니다. 그저 본인 스타일이 아닐 뿐이다.손은경은 여강자 스타일이다.만약 그녀와 함께한다면 행복할 것 같지 못하다.물론 하예진도 지금 사업을 꾸준히 잘해나가고 있고 그 언젠가 여강자가 되겠지만 이 모든 과정을 그가 지켜봐 왔고 심지어 옆에서 함께 성장해왔기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예진의 성격과 손은경은 완전히 다르다.노동명은 하예진 같은 여자가 좋다.이유 따윈 필요 없다. 하예진이 손은경보다 잘난 점이 뭐가 있는지 굳이 찾아낼 필요가 없다.“엄마가 꼭 이유를 들으시겠다고 하면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처음엔 우빈이라는 아이가 귀여워서 아이의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새아빠라도 상관없고요. 이 점만으로 은경 씨는 예진이한테 안 돼요.”윤미라는 아들의 말에 기가 차서 표정이 다 굳었다.“노동명, 이 자식이 감히. 너 지금 날 화나게 해서 죽이려는 작정이지?”손은경은 미혼의 처녀인데 어딜 감히 애 딸린 여자와 비교하는 거지?윤
하예진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윤미라는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예진은 스쿠터를 세우고 헬멧을 벗은 후 윤미라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사모님.”윤미라는 아들과 대판 싸우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지만 하예진의 앞에서는 여전히 교양있게 온화한 미소를 선보였다.“그래요, 우리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윤미라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하예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윤미라가 먼저 걸음을 옮긴 후에야 뒤따라갔다.노진규는 함께 나오지 않았다. 아내가 잠자코 차에 있으라고, 절대 내리지 말라고 명령했으니 말이다.윤미라는 구석진 테이블에 착석했다. 이곳은 다른 손님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라 한적하게 하예진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딴사람들이 엿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하예진이 자리에 앉은 후 그녀는 종업원을 불러와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야심한 밤이라 커피는 삼갔다.“예진 씨 뭐 마실래요?”윤미라가 물었다.“온수 한 잔이면 돼요.”다이어트를 위해 하예진은 이미 오랫동안 저녁 6시 이후에 음식섭취를 하지 않는다. 이젠 다이어트에 성공했지만 몸에 밴 습관이라 쉽게 고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요요가 오면 안 되니까.윤미라는 종업원에게 말했다.“온수 한 잔 주세요.”종업원이 떠난 후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 돈 아껴주시는 거예요? 음료수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고작 온수를 시켰네요.”“사모님, 그게 실은 애초에 다이어트하면서 저녁에 온수만 마셨어요. 그것도 아주 목마를 때만 마시고 다른 건 일절 입에도 안 댔어요. 살 빠지지 않을까 봐서요. 이제 힘겹게 살을 다 뺐으니 요요가 오지 않게 입단속 잘해야죠.”하예진은 무려 반년이란 시간을 공들여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실로 대단한 일이다.다이어트도 결국 견지가 답이다.윤미라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칭찬을 남발했다.“예진 씨 지금 가서 다이어트 광고 찍어도 되겠어요. 처음 볼 때랑 아예 딴 사람 같아요.”하예진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무려 100킬로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