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제가 사모님께 음식 대접을 할게요.”여운별은 입구에 서서 하예정 일행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는 척했지만 곧장 다시 나왔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눈가림에 불과했다.용태호로부터 관성에 중요한 인물이 도착해 몇몇 유력 가문과 접촉했다는 정보를 받은 여운별은 서둘러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하예정과 이경혜가 이곳에서 윤미라를 만난다는 소식을 듣자 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피 가면을 쓰고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급히 출동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차에 오르자 여운별은 곧바로 용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태호 씨, 누가 왔는지 확인하지 못했어요. 제가 도착했을 때 그들이 이미 떠나려 하고 있었어요. 성씨 사모님과 노씨 사모님도 현장에 있어서 더 묻기도 어려웠어요.”사실 윤미라와 이경혜가 없었어도 하예정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번의 ‘우연한 만남'을 연출했지만 ‘용씨 사모님'이라는 신분으로는 하예정의 친구가 되기에 아직 역부족이었다.하예정과 여운초는 여전히 그녀를 여운별과 연관 지으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여운별과 용씨 사모님이 함께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하예정 일행은 계속 그녀를 의심할 것이다.“두 사모님이 함께 모인 이유가 뭐지?”용태호가 뒤얽힌 목적을 달하려는 이상 관성에서 기회를 잡으려면 관성의 주요 가문들에 대한 정확한 정세 판단이 필요했다.하예정이 전태윤과 결혼하기 전까지 노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씨 가문은 전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였던 반면 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노씨 가문과 성씨 가문도 자연스레 갈등을 빚게 되었다.이경혜의 기세도 등등했으나 윤미라 역시 물러설 줄 모르는 여자였다. 연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이라도 하듯 고의로 시선을 피하며 얼음 같은 침묵을 이어갔다.두 가문의 관계가 개선된 시점은 하예정의 어머니가 이경혜의
“결혼 후 전태윤은 하예정을 더욱 세심하게 배려했다. 특히 그녀가 임신한 뒤로는 항상 아내와 배 속 아기가 배고프지 않을까 걱정하며 차 안에 간식이 충분한지 매일 확인했다. 점점 더 꼼꼼해지는 동시에 잔소리도 늘어났다.하예정은 이런 미남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마음마저 달콤해졌다.‘결혼은 역시 태윤 씨와 같은 남자랑 해야 해.'그녀는 진정으로 운 좋게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과자 두 봉지만 포장해 갈까? 시내에서 서원 리조트까지 돌아가는 길도 시간이 제법 걸리는데.”세 어르신은 모두 하예정이 돌아가는 길에 배고플까 봐 걱정했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르신들의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두가 안심할 수 있도록 두 봉지의 과자를 포장해 들고 나왔다.그런데 떠나려는 순간 네 사람은 여운별과 마주쳤다. 그녀는 용씨 가문의 사모님 신분으로 이곳에 왔다. 언제나처럼 용씨 가문의 두 경호원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사모님.”여운별은 하예정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하예정이 발걸음을 멈추자 이경혜 일행도 함께 자리에 멈추었다.이경혜와 윤미라는 여운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비록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관성 상류 사회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온 사실은 알고 있었다.심지어 여운별의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용씨 사모님.”하예정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너무 반갑네요. 여기서 다 만나다니.”여운별도 웃으며 답했다.“네, 반가워요.”그러고는 이경혜와 윤미라를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두 분이 바로 성씨 사모님과 노씨 사모님이세요?”“이분은 우리 이모시고 이분은 우리 노씨 사모님이세요.”하예정이 소개하자 여운별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두 사모님은 단순히 고개만 끄덕일 뿐 미소도 짓지 않았다.그러는 대신 오히려 여운별을 노려볼 때도 있었다.평소 전태윤 앞에서도 당당하던 여운별이었만 젊은 시절 업계를 호령했던 두 사모님의 시선 앞에서는 속으로 떨 수밖에 없었다. 과거 여씨 가문이 멀쩡할 때도 그녀의 어머니
이경혜와 하예정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이경혜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모두 반대하지 않는다니 안심이 되네요. 예진이랑 동명 씨가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우리는 무조건 응원할 거예요.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해야죠. 예진이 말로는 연말이나 새해 초에 동명 씨랑 혼인신고 하겠다더군요. 너무 바빠서 섣달 그믐이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거라던데. 너무 바빠서 우빈이도 강성에 가지 않고 예진 리조트로 가서 논다고 하던데요.”윤미라도 웃으며 말했다.“알고 있어요. 우빈이가 방학하면 제가 돌보려고 했는데 아이가 예진 리조트에서 놀겠다고 하더라고요.”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사업이 너무 바빠서... 거의 시장 수요를 따라잡기 힘들 정도예요.”“그건 잘 된 거죠! 태윤이도 있으니 우리 어른들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하예진이 최근에 투자하려는 프로젝트는 전태윤이 곁에서 도울 예정이다. 전태윤이 도울 수 없는 경우에는 전씨 가문의 어르신들과도 상의하면 될 일이었다.윤미라는 하예정이 전씨 가문에서 잘 될수록 하예진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예진은 그녀의 작은 며느리였기에 누구보다도 하예진 자매가 잘되기를 바랐다.갑자기 윤미라가 목소리를 낮추었다.“경혜 씨, 혹시 결정적 증거를 찾기라도 한 거예요?”윤미라는 이경혜가 갑자기 노동명과 하예진의 앞날에 대해 꺼낼 리 없다고 생각했다.분명히 일이 진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아마도 곧 진실이 밝혀지고 하예진과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결판을 내야 할 때가 온 모양이라고 추측했다.사실 이경혜 부부와 하예진이 노씨 가문의 태도를 미리 물어보러 온 이유도 노동명이 데릴사위로 이씨 가문에 장가가는 것을 반대할까 봐 걱정되어서 였다.이경혜가 웃으며 대답했다.“뭐든 미라 씨를 속일 수 없군요. 우리 어머니의 특별 비서님을 찾았어요. 그분이 증거도 가지고 계시고... 몇 분의 세외고수님들도 증언해 주실 거예요. 비서 아저씨가 이틀간 쉬시다가 증거를 가져오시면 우리 모두 강성으로 갈 거예요
“동명의 말로는 내년에 혼인신고를 하고 예진이가 좀 한가해지면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요즘 저와 저의 남편이 예진에게 줄 혼수 준비도 하고 있어요. 날짜도 골라보고 있다니까요.”혼수품도 하예진이 시간이 나서 관성에 돌아와야 좋은 날을 잡아 알려 주어야 했다. 그녀는 지금 너무 바빠서 아들 우빈도 하예정에게 맡길 정도라 강성에 간 후로 한 번도 관성에 돌아오지 못했고 항상 노동명이 우빈을 데리고 강성까지 찾아가야 했다.하여 결혼식을 서둘러 치르기는 어려웠다.“예진이는 재혼이라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 그건 안 된다고 봐요. 우리 예진을 억울하게 하면 안 되죠. 결혼식은 커야 하고 성대하게 치르게 해주고 싶어요.”윤미라가 하예진을 배려하는 건 결국 자기 아들 노동명을 위한 마음이기도 했다.네 아들 중 앞서 결혼한 세 아들은 모두 화려한 결혼식을 치렀는데 막내에게만 생략할 수는 없었다. 유일한 미혼인 아들이기도 하고 설령 노동명이 양보한다 해도 어머니로서 노씨 가문 전체 가족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노동명도 혼인신고만으로 끝내려 하지 않고 모두에게 하예진이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주씨 집안 사람들에게도 예전에 하예진을 업신여기고 버린 것이 그들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와서 땅을 치며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느끼도록 말이다.이경혜가 말을 이었다.“결혼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예진이가 강성에 간 목적을 알고 계시죠? 예진이가 이씨 그룹과 이씨 가문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되면 동명 씨도 처가살이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이씨를 이어야 한다는 점...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약 이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윤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경혜 씨, 그런 생각을 하지도 마세요. 그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도 없어요. 우리 동명은 예진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아이거든요. 두 사람을 갈라놓는 건 동명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30분 후.이경혜는 하예정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윤미라 부부도 이미 도착해 있었고 몇 분간 기다리고 있었다.“경혜 씨!”윤미라는 웃으며 일어나 맞이하며 말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하예정도 정중히 인사했다.“안녕하세요.”“우리도 방금 도착했어요. 물 한 잔 마시지도 못했잖아요.”윤미라는 하예정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는 계속해서 물었다.“옷이 두꺼워서 배가 잘 안 보이네요. 임신 티가 별로 안 나는데요.”“아직 배가 많이 불러오지 않아서 그래요.”하예정은 배를 어루만지다가 윤미라의 팔을 잡고 이경혜와 함께 노진규의 잎으로 갔다. 노진규도 일어나서 모두에게 웃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모두가 자리에 앉은 뒤 윤미라는 마실 것을 주문하며 이경혜를 칭찬했다.“정말 피부관리도 잘하시네요. 어쩌면 점점 더 어려 보이세요!”이경혜는 기분 좋게 답했다.“이제 아무 걱정 없이 조카들이나 돌보며 지내니 마음이 편해요. 가끔 미용실도 다니긴 하는데 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무슨 소리예요! 저도 제가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는데... 경혜 씨는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시는걸요.”윤미라가 웃으며 하예정에게 물었다.“네가 보기에도 우리가 같은 세대로 보이지?”윤미라도 예전에는 관리를 잘했었다. 그런데 노동명이 사고를 당한 후 그녀는 후회와 자책감에 빠졌고 아들 걱정에 스스로를 돌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10살은 더 늙어 보이게 되었다.이제 노동명과 하예진의 관계도 안정적이지만 윤미라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있었다.하예정이 재치 있게 답했다.“마음만 젊으면 다 18세죠.”“맞아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법이죠.”한바탕 웃음이 오간 후 그들은 본론으로 들어갔다.이경혜가 진지하게 말했다.“오늘 뵙자고 한 건 동명 씨와 예진의 미래 얘기 때문이에요.”윤미라도 하예진이 강성에 간 목적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은화가 이은숙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없어 하예진이
성소현과 예준하가 저택을 떠나는 길에 하예정의 차와 마주치자 양측은 서로 차를 세우고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예준하는 예의 바르게 하예정의 차량이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한 뒤 자신의 차를 출발시켰다.예준하가 차를 몰면서 물었다.“전씨 집안에 유명한 분들이 몇 분 오셨다고 들었어. 예정 씨가 아침 일찍부터 왔는데 노씨 사모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더군. 혹시 예진 씨와 동명 씨의 결혼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성소현이 대답했다.“그게 아니고 이씨 가문의 후계자 문제 때문일 거야. 비서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시고 몇 분의 시외고수님께서 직접 증언해 주시면 외할머니가 이 대표님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거든. 진실이 알려지면 이씨 가문의 일족도 이 대표님이 계속 가주가 되는 걸 반대할 거야. 수십 년 동안 가문의 일족을 돌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해 많은 사람이 이미 불만을 품고 있었거든. 예진 언니가 강성에 간 뒤로 가까운 혈족들이 몰래 언니와 손을 잡았대. 그 사람들이 이씨 가문의 내부 정보를 예진 언니에게 흘리면서 언니가 이씨 가문을 더 잘 알 수 있게 도와주고 있거든. 윤미 씨가 전에 우리 집을 찾아와서 외할머니가 이 대표님에게 실제로 해를 입으셨다면 가주 자리를 외할머니 후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었어.”“게다가 이 대표님 가정 사정도 요즘 완전히 뒤죽박죽이야. 남편과 양녀가 불륜 관계였다가 남편은 자신의 그 부분을 스스로 잘랐다고 하고...양녀는 이미 죽었대. 세 아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여자 문제까지 많아서 각자 가정이 엉망이래. 진실이 공개되면 이 대표님도 고립될 거야. 그러면 예진 언니가 가주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커. 하지만 이씨 가문의 규정에 따르면 역대 가주 들은 시집가지 않고 사위를 들여야 한대. 아들은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고 딸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다음 후계자가 되어야 하고.”예준하는 그제야 이경혜와 하예정이 윤미라를 만나려는 이유를 이해했다. 노동명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노씨 가문의 넷째 아들이자 노씨 그룹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