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주, 내가 형인이랑 이혼하면 너도 곧 결혼할 거야. 두 사람 아직 젊으니까 얼마 못 가 아이가 생기겠지. 그렇게 되면 주형인은 오로지 네 애만 이뻐할 수 없어. 부성애를 우빈이한테도 절반 나눠줘야 하거든. 너 감당할 수 있겠어? 설사 주형인이 우빈이를 부모님 댁에 보낸다 해도 그 집 부모님들이 우빈이가 안쓰러워 더 감싸고 돌 거야. 제 아들더러 우빈이한테 신경 더 쓰라고 다그치겠지. 그럼 네 아이는 차별 대우를 받게 되는 거야. 네 자식이 그런 서운함을 겪는 꼴 지켜볼 수 있겠어?”“만약 우빈의 양육권을 나에게 주면 주형인은 달마다 양육비 60만 원만 내면 돼. 다른 건 그 인간이 일절 간섭 안 해도 돼. 십여 년씩 우빈이 보러 안 와도 나 뭐라 안 해. 그렇게 되면 너랑 네 아이한테 미치는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어. 넌 종일 나랑 주형인의 아이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잖아. 우빈이를 볼 때마다 나랑 주형인의 과거가 떠오르겠지. 난 그 사람과 알고 지낸 지 12년 됐고 연애 7년에 결혼한 지 3년이 됐어. 네가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길어.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 우빈의 양육권 나한테 넘기면 우빈이는 종일 네 눈 밑에서 뛰어다니지 않아. 어쩌면 주형인도 처음엔 애 보러 오다가 네가 임신한 후에는 슬슬 그 아이에게 관심이 쏠릴 거야. 네 아이는 온전한 부성애를 누릴 수 있겠는데 설레지 않아?”“그 인간 돈도 잘 벌어서 앞으로 번 돈은 전부 너랑 네 아이한테 쓸 거야. 얼마나 좋아? 우빈이가 만 18세가 되면 주형인은 더이상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돼. 그럼 너희들도 많은 돈을 아낄 수가 있겠지. 지금 아들 한 번 장가보내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너도 알지? 집도 마련하고 차도 마련하고 예식장도 다 예약해야 하니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야. 우빈이가 주형인을 따라가면 아마 아들 결혼 시키려고 집과 차를 장만해주려고 애쓸걸. 그건 즉 네 아들의 이익을 나눠 가지는 셈이잖아.”서현주는 한참 침묵한 후 하예진에게 물었다.“나한테 바라는 게 뭐
하예진이 웃으며 대답했다.“그 인간 아직 너한테 푹 빠져 있어서 네 말이라면 들을 거야. 지금 가서 얘기해봐. 우빈의 양육권만 포기하겠다면 바로 회사에 반차 내고 우리 오후 시간을 이용해서 이혼 절차 모두 마무리해. 하루라도 빨리 싱글이 돼야 너도 얼른 시집가서 유진 테크 사장님 부인으로 거듭날 거 아니야. 유진 테크는 동종 업계에서 나름대로 잘 나가. 전망도 좋고 규모도 꽤 괜찮거든. 네가 사장 부인이 되면 회사에서 남들보다 한 수 위에 올라서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그 인간 앞으로 네 사람이라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오든 너 마음껏 쓸 수 있어. 둘이서 남 눈치 보며 몰래 피해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함께 있으란 말이야. 이 세상 어느 여자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당당하게 함께 있고 싶어 할 거야.”“주형인은 이제 막 서른 살인데 커리어가 높이 쌓였어. 일적으로 성과도 이루고 사업이 잘되는 편이라 너 그 인간 놓치면 아마 더 나은 사람 못 만날걸. 서현주, 너랑 주형인의 행복을 위해서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서현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럼 넌 가게 사장님께 노트북 잠시 빌려서 이혼 합의서 작성해. 이따가 두 사람 서명하고 지장까지 찍은 후 바로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 밟아. 난 지금 나가서 형인 씨더러 우빈의 양육권 포기하라고 설득할게.”“그래, 그렇게 할 순 있지만 재산분할부터 하고 내 계좌에 입금된 후에야 가정법원에 갈 수 있어. 두 사람 또다시 번복할지 누가 알아?”하예진은 바보가 아니다.주형인에게 단념한 후 그녀는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늘 손해를 입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서현주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는데 어느덧 오후 두 시가 다 되었다.속도를 다그쳐야 두 사람이 오늘 오후에 이혼 절차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여기서 잠깐 기다려. 아니, 일단 가게 사장님한테 노트북 빌려서 이혼 합의서를 프린트해놔. 나 지금 바로 주형인 설득하러 갈게.”서현주는 주형인과 하예진의 이혼이 지긋지긋
주형인은 밖에서 기다리며 줄곧 가게 안을 지켜봤다. 하예진이 갑자기 대노하며 서현주를 때릴까 봐 가슴을 졸였다.그러던 중 서현주가 걸어 나오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주형인은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현주야, 그 여자 너한테 손댔어?”서현주가 얼굴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좀 전에 뺨을 친 것 말곤 형인 씨가 나가고 더 손대지 않았어요.”주형인도 하예진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그는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현주야, 앞으론 그 여자 두 번 다시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게.”그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너랑 무슨 얘기 했어?”서현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둘은 인파가 붐비는 길옆에 서 있었지만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서현주는 관심 어린 주형인의 눈빛을 쳐다보며 되물었다.“형인 씨는 날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죠?”“당연하지. 나 예진이랑 이혼하는 것도 다 널 속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잖아!”주형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현주야, 그 여자가 널 욕했어? 내가 들어가서 따져 물을게.”“아니요.”서현주는 이제 곧 가게로 들어가는 주형인을 잡아당기며 가볍게 말했다.“형인 씨, 난 우빈의 새엄마 안 하고 싶어요.”주형인이 고개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우빈이 귀엽다며? 아이가 엄청 사랑스럽다고 했잖아, 나랑 함께 우빈이 키우기로 했잖아.”주형인은 언성이 살짝 높아져 사람들의 이목을 끌까 봐 곧장 소리를 낮췄다.“현주야, 나도 알아. 결혼도 못 해본 네가 새엄마가 되는 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우빈이는 내 아들이고 우리 가문의 핏줄이라 반드시 주씨 일가에 남아있어야 해. 걱정 마. 이혼하면 우빈이를 본가에 보내서 엄마, 아빠더러 키우라고 할 거야. 우리 부모님들도 다 허락하셨어. 절대 우리 둘에게 영향 끼치지 않아. 우린 여전히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면 돼.”서현주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내가 아이를 못 낳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내 자식이 생길 거예요. 그때 되면 당연히 제 새끼가 더 예쁘고 편애하게 되
여기까지 말한 서현주는 입을 삐죽거렸다.“아무튼 우빈이가 내 아이와 함께 아빠의 사랑을 나눠 가지는 거 싫어요.”그리고 주형인이 앞으로 번 돈의 절반을 우빈에게 쓰는 것도 싫었다.주형인의 수입은 전부 그녀와 그녀의 아이한테만 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우빈이는 하예진의 친아들이에요. 분명 최선을 다해 아이를 교육하고 아이의 성장에도 더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요. 만약 우빈이가 당신 부모님들 밑에서 자란다면 애를 제대로 교육할 것 같아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를 지나치게 예뻐해요. 물론 당신이 만약 아무것도 성사하지 못한 우빈이를 보고 싶다면 내가 했던 말도 없던 거로 해요. 난 단지 우빈이가 하예진과 함께 있으면 당신한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일도 바쁜데 언제 아이를 교육하겠어요? 아이는 낳았다고 해서 다가 아니에요. 애 교육에 엄청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우빈이가 제대로 못 크면 사람들이 당신을 질책하고 내게도 삿대질을 할 거예요. 악독한 새엄마가 있으니 친아빠도 매정하게 변했다고 말이에요.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것도 충분히 서러운데 계속 더 속상하게 만들 셈이에요?”서현주의 말을 들은 주형인은 한참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약속했어. 우빈의 양육권을 반드시 가져오겠다고 말이야.”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고 돌아가면 부모님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우빈이는 당신 아들이지 당신 부모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얼마든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고요.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했다고 해서 우빈이가 두 분 손자가 아닌 것도 아니잖아요? 두 분 여전히 우빈이 만날 수 있고 아이도 계속 두 분을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를 거예요.”주형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확실히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서현주도 하예진처럼 결혼하고 나서 사직하고 가정주부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부모님 댁에 아이를 보내면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우빈의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주형인은 아들을 별로 챙기진 못했지만 어찌 됐든 그의 아들이기에 아빠로서 아
그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바로 이혼하러 가지 못해 살짝 아쉬웠지만 하루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묵념하며 허락했다.그녀는 서명을 다 한 두 부의 이혼 합의서를 주형인에게 건넸다.“문제없는지 확인하고 바로 사인해.”주형인은 그녀의 손에서 이혼 합의서를 건네받았다.방금 그녀가 말한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하고도 이혼 당일에 그녀 수중에 있는 증거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그를 향한 복수도 일절 없을 거라고 담보했다.주형인은 그저 단번에 그녀에게 2억 원 남짓한 위자료를 나눠주는 것과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밖에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 그 대신 직장을 잃지 않고 돈도 계속 벌 수 있으니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사인할게.”주형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내일 봐.”하예진도 알겠다고 했다.그는 하예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서현주를 껴안고 자리를 뜨려 했다.두어 걸음 걸어가더니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하예진에게 물었다.“예진아, 그 증거 자료들 다 누가 너한테 줬어? 나한테 말해줄래?”그가 했던 짓을 모조리 조사하고 증거까지 손에 넣다니, 실로 섬뜩할 따름이었다. 하예진에게 이런 조력자가 있다는 걸 생각하니 그는 저절로 가슴이 움찔거렸다.주형인은 너무 갑작스럽게 협박을 받았다. 단지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예진의 배후에 조력자가 있다는 생각에 바로 그녀의 이혼 조건을 들어준 것이다.“그게 그렇게 중요해? 이혼하고 다 돌려준다고 했잖아. 복사본도 남기지 않겠다고.”주형인은 그녀가 끝까지 말하려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서현주를 껴안고 떠났다.다만 얼마 못 가 상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뭐라고 얘기했는지 서현주를 풀어주며 구시렁대더니 두 사람 모두 차 앞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그리고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하예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형인의 차가 떠나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겨우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내 동생에게 전화했다.“예정아.”하예진은 흐뭇한 기분으로 말했다.“나 주형인과 얘기 다 했어. 내 요구대로 재
하예진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의 엄마는 친언니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찾아 헤맨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그리고 두 자매도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다.“예정아, 소현 씨 어머님 잘 위로해드려. 난 돌아가서 우빈이 봐야 해.”하예진은 아픈 마음을 애써 참으며 동생에게 당부를 남기고 바로 전화를 껐다.그녀는 결국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막은 채 엉엉 울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녀를 힐긋거릴 뿐 아무도 그녈 위해 걸음을 멈추는 이가 없었다.버블티 가게 사장이 그녀가 노트북을 빌려 이혼 합의서를 프린트한 걸 알고 있어 이혼 때문에 속상해하는 줄 알고 티슈를 들고 다가왔다.“이봐요, 아가씨.”사장님은 하예진의 어깨를 톡톡 내리쳤다. 하예진이 머리를 들자 사장님은 티슈를 건네며 위로했다.“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이에요. 그만 놔줘요. 서로를 위해서 놔줘야 해요. 더 멋진 미래가 꼭 다가올 거예요. 너무 힘들면 울어요. 마음속에 담아둔 슬픔 전부 토해내면 조금은 후련해질 거예요.”“고마워요, 사장님.”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건네받고 눈물을 닦으며 울먹거렸다.“가정폭력에 외도까지 저지르고 나한테 돈 쓰는 걸 인색하는 남자는 이혼이 답이에요. 그 인간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생각나서 그랬어요. 우리 엄마는 15년 전의 교통사고로 아빠랑 함께 세상을 떠나셨거든요.”사장님은 동정 어린 눈길로 그녀의 어깨를 다시 두드려주었다.‘참 가여운 사람이야.’누군가는 쉰 살, 예순 살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누군가는 앳된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어른이 된 후 부모님께 보답할 길이 없어진 그런 아쉬움과 고통은 겪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사장님, 저 괜찮아요. 먼저 갈게요,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아가씨, 꼭 강해져야 해요.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에요. 화이팅!”낯선 이의 위로에 하예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이 세상엔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사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스쿠터를
하예진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며칠 휴가 낸 거 맞아요. 우빈이가 크게 놀라서 아이를 돌봐야 하거든요.”“그런데 여기서 뭐 해? 아이는 어디 있어?”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솔직하게 말할까?’노동명은 주변을 쭉 훑어보았지만 씩씩하고 늠름한 꼬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다만 우빈은 늘 노동명이 두려워 마주칠 때마다 하예진의 품에 쏙 안겼다. 마치 그가 악귀인 것처럼 말이다.“우빈이는 집에서 쉬고 있어요. 숙희 아주머니가 돌봐줘요. 저는 볼 일 있어서 잠깐 나왔고요.”노동명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무슨 볼일?”하예진이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노동명이 웃으며 대답했다.“불편하면 얘기 안 해도 돼. 지나가다가 우연히 널 마주쳤을 뿐이야. 휴가 냈다고 해서 뭔 일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만 볼일 보러 가봐. 나도 갈게.”노동명은 스쿠터에 올린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살펴 가세요, 대표님.”하예진의 말을 들은 노동명은 머리를 돌리지 않았지만 손을 들어 안녕이란 제스처를 해 보였다.두 사람은 각자 운전하여 자리를 떠났다.호텔 안에서 하예정은 성소현 모녀와 함께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성문철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성소현 모녀는 집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은 그들 모녀를 호텔 문 앞까지 바래다준 후 차에 올라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제 차로 돌아갔다.다만 이제 막 몸을 돌렸는데 한 무리 사람들이 호텔에서 걸어 나왔다.그중 두 사람은 그녀도 아는 사람인데 다름 아닌 전태윤과 도련님 전이진이었다. 다른 한 분도 어디서 뵌 적은 있으나 얼굴까진 기억이 안 났다. 저번에 소이 카페에서 전태윤과 함께 있는 걸 봤었다.아마도 바이어와 미팅 중인 듯싶었다. 왜냐하면 몇 명은 하예정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그들 뒤에서 따라오는 검은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은 경호원일까 아니면 전씨 그룹의 직원들일까?전태윤은 처음에 아내를 보지 못했다.경호원들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
그의 쇼는 계속할 수 있었다.“소정남, 전이진, 다들 먼저 회장님들 모시고 회사로 돌아가. 난 너희들 형수님한테 가봐야겠어.”전태윤은 두 사람에게 나지막이 분부한 후 성큼성큼 하예정에게 걸어갔다.경호원들도 당연히 뒤따라갈 엄두가 안 났다.“전 대표님 아는 분 만나셨나 봐요?”몇몇 회장님들은 낯선 여자에게 다가가는 전태윤을 의아하게 쳐다봤다.그는 가족 의외의 젊은 여자가 3미터 이내에 나타나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래요, 아는 분이에요.”소정남이 웃으며 몇몇 회장님들을 차에 모셨다.그가 말을 아끼자 회장님들도 더 따져 묻지 않았다.“예정아.”전태윤은 그녀 앞에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외투를 다듬어주며 관심 조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야? 내가 바이어랑 미팅 있는 걸 알고 일부러 기다린 거야?”점심에 비가 끊겼지만 여전히 쌀쌀했다.하예정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고급 외제 차를 타고 떠나가는 걸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저분들도 다 태윤 씨 동료분들이에요? 난 소현 씨랑 소현 씨 어머님 모시고 이리로 밥 먹으러 왔는데 당신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은 멀어져가는 고급 외제 차 몇 대를 바라보며 말했다.“회사 동료들 맞아. 오늘 미팅한 바이어가 전부 회장급이라 우리 회사에서도 각별히 중시하며 동료들을 많이 불러왔거든. 소현 씨 어머님은?”“남편분이 전화가 와서 먼저 가셨어요. 태윤 씨, 나 소현 씨 어머님과 함께 유전자확인 검사를 했어요. 며칠 뒤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전태윤은 두 눈이 반짝였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상하게 말했다.“결과 나오고 다시 얘기해. 지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하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는 건 어려워요. 애초엔 소현 씨가 괜히 나를 돈을 노린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젠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어요. 엄마가... 아직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어요.”전태윤이 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비록
도아영은 전이혁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아직 확정된 건 없어요. 왜요? 밥이라도 대접해 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돌아가는 게 아쉬워요?”전이혁이 회답했다.[음식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영 씨랑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도아영은 물었다.[무슨 이야기를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요? 아니면 이혁 씨가 이미 그녀를 선택하셨다는 걸 확정하신 건가요? 만약 정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저에게 그분을 소개해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이혁 씨의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그녀는 노력해보기도 전에 희망이 없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전씨 가문과 같은 좋은 집안은 흔치 않았지만 전이혁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전이혁은 몇 분 동안 답장이 없다가 이렇게 보내왔다.[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라서 아영 씨에게 소개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따가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없어요.][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제가 음식 대접하고 싶은데.]도아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제가 관성에 온 건 이혁 씨에게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이제 대충 알 것 같으니 이틀 후면 돌아갈 거예요.]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도아영은 며칠 동안 관성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해주시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업무에 파묻히면서 쉴 틈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돌아가기 전에 식사 한번 하죠.]부부는 못 되더라도 원수지간이 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에 원수 사이로 지낼만한 일도 없지 않은가.전이혁은 이미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접근했는지, 왜 그렇게 잘해줬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말이다.그리고 도아영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주었다.두어 달밖에 알지 못한 사이, 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한들 깊은 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는가.전이혁이 도아영을
“이혁 도련님을 네 가이드로 삼아서 관성 구경을 시켜줄게. 교외에도 괜찮은 관광지 몇 군데가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도아영은 고개를 저었다.“이혁 씨는 저랑 말 한마디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여행은 기분 좋게 다녀야지 제가 왜 그의 차가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야 하죠? 오히려 기분만 망치겠어요. 언니 시간 있으세요? 같이 쇼핑 좀 하고 싶은데. 내일은 서원 리조트에 들러 전씨 할머니를 뵙고 싶어요.”전씨 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유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전씨 가문의 유명한 어르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지. 근데 나는 낮잠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안 자면 오후에 힘이 없어. 푹 쉬지 못하면 두통도 오고 눈도 아파.”“그럼 언니가 낮잠에서 깬 후에 같이 가요.”“그래, 내가 일어나면 우리 서점에도 데려갈게. 효진이가 거기 있을 거야. 내 가장 친한 친구는 효진이와 소현 언니뿐이거든.”하예정은 새로운 동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두 친구를 소개하곤 했다.“좋아요.”도아영은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터라 하예정이 어디로든 데려가 주기만 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너는 낮잠을 안 자?”“30분 정도는 자요.”“내 사무실이 크진 않아서 별도의 휴게실은 없어. 평소에는 긴 소파를 펴서 침대처럼 쓰고 낮잠에서 깨면 다시 접어서 소파로 써. 우리 둘이 자면 좀 비좁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도아영은 하예정을 도와 소파를 칩대로 펴주었다.“이런 접이식 소파 침대가 괜찮네요. 언니는 좀 주무세요. 저는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지금은 일도 안 하기에 밤에 일찍 자면 돼요.”하예정은 하품하며 말했다.“그럼 난 좀 잘게.”“네.”도아영은 자신이 하예정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뒤 누웠다. 그녀는 도아영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도아영은
“언니, 그때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니가 마음에 들어서 전 대표님이 언니에게 구애하신 건가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나와 태윤 씨는 깜짝 결혼했어. 누가 누구에게 구애하는 그런 것도 없이. 결혼 후에 서로 정을 키워나간 케이스지. 하지만 우리 할머니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하예정과 전태윤의 깜짝 결혼 이야기를 도아영도 조금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간단히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태윤은 완전히 전씨 할머니의 강요로 하예정과 결혼했던 것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전씨 할머니가 이미 일찍이 하예정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더욱 황당했는데 어떤 점쟁이가 하예정과 전태윤이 한평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점쳤을뿐더러 전태윤이 하예정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전태윤을 가장 아끼는 전씨 할머니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있겠는가! 할머니는 전태윤의 효심을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했고 덕분에 지금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했다.도아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전씨 할머니는 왜 저를 선택하신 걸까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씨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사주를 알아내서 점을 쳐보시고 이혁 씨와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판단하신 건가요?”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전씨 할머니께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그 점쟁이는 이제 전씨 할머니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셨어. 서로 인연이 끝났다면서. 내 생각에는 점쟁이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께서 여행 다니시며 여러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시고 손자들에게 맞는 여성이라고 판단하셔야만 손자들에게 추천하시는 것 같아. 할머니는 늘 태윤 씨 형제들을 걱정하고 계시거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키웠는데 정작 연애만큼은 어리숙하다고 말이야. 결혼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안 한다고 잔소리하셔. 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알맞은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할머니 손자들의 인생 대사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하여 전이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도아영은 어제 하예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녀의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난 점심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아.”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도아영은 하예정의 배를 살펴보며 말했다.“지금은 커피나 진한 차는 피하는 게 좋아요. 임신 중에는 조심해야죠.”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알아. 커피나 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끊었어.”하예정이 오랫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아영이 직접 커피를 내려야 했던 것이다.“성소현 씨는 오늘 안 오시나요?”도아영이 무심코 물었다.도아영이 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성소현이 회사에 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소현 언니는 오늘 채소 시장에 갔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걸.”하예정과 심효진은 둘 다 임신부였다. 그녀들 스스로 자신이 아직 힘이 넘친다고 생각했지만 성소현의 눈에는 둘 다 국보급 보물로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아...”식당에 들어가 두 사람은 각자 음식을 담아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도아영은 생선과 고기, 그리고 새우가 가득 담긴 요리들을 보며 물었다.“회사 식사는 모두 똑같나요? 등급별로 나누지 않으시는군요.”“응, 등급 같은 건 안 나누어.”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관리직이었기에 등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지만 하예정은 그들을 위해 삼시 세끼를 제공했고 요리들도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노동자들의 식사에 고기와 국물이 반드시 놓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장에서 힘든 일을 이겨내려면 고기와 기름진 음식이 없으면 쉽게 배고프기 일쑤였다.하예정은 시골 출신이었다. 열 살 이후로는 마을을 떠났지만 그전까지는 집안일을 많이 도왔기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도아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희 회사 식당은 등급별로 나누어?”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요. 직급에 따라 다른 식당에서 식사해요. 물론 메뉴도 다르지만 보통 직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
명해은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이 녀석이 혼자 올 줄은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이혁이가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시길래 아영 씨도 따라서 온줄 알았거든요. 어제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데려올 줄 알았는데.”명해은은 전이혁이 준 선물도 이제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미래의 며느리인 도아영이 와야 기쁠 것 같았다.전이혁이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나갈게요. 회사로 돌아갈게요.”그는 일어서서 떠나는 척했다.전현민이 다시 말했다.“네 엄마가 이미 반찬을 더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리 집의 강아지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네가 도와서 다 먹고 가.”즉,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밥을 다 먹을 수만 있다면 전이혁에게 밥을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여자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집안이란 말인가.“밥 드세요.”명해은은 남편과 아들을 식탁으로 불렀다.전이혁은 일어나 명해은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정말 밥 안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우리 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네요.”“이번은 봐줄게. 다음에 도아영 씨가 오면 꼭 데리고 와서 식사해. 네 아빠와 나도 한번 보게. 길에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를 텐데 우리도 한 번 좀 만나보자고.”“엄마, 저는 아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명해은이 눈을 부릅떴다.“할머니께서 골라주셨는데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형은 두세 달 만에 운초의 마음을 움직였는데.”여운초는 당시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전이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전이혁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저랑 형은 달라요. 형도 3개월 만에 형수님을 꼬시지는 못했거든요.”명해은도 앉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가 안 좋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사람인데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너무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지는 마. 너도 거울 좀 봐. 넌 너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아
명해은의 친정집도 재벌 가문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석 액세서리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전씨 가문에 시집올 때 그녀의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보석들은 보석 가게를 열어도 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혼수품이었다. 지금도 그 보석들은 그녀의 보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전이진이 여운초와 결혼한 뒤로 명해은은 수많은 소장품 보석들을 며느리에게 선물했다.전이혁이 대답했다.“저는 아직 아내가 없잖아요. 새로 나온 보석 액세서리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세트 사 왔어요.”“전씨 할머니께도 사드렸지?”전이혁은 빨간색 선물 상자를 명해은에게 건네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액세서리들을 선물하지 말라고 하셔서 꽃다발만 사드렸어요. 근데 또 산 아래 꽃밭에 꽃이 많은데 왜 돈을 쓰냐면서 꾸지람 하신 거 있죠.”명해은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겉으로는 싫다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쁘셨을 거야. 꽃다발을 네게 돌려주지 않으신 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일 거고. 오늘 산 아래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수십 년 동안 전씨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명해은은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명해은은 다시 아들 뒤를 살피다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차에 아무도 없니? 너 혼자 왔어? 할머니께서 네가 식사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네가 귀한 손님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제가 혼자 왔어요.”전이혁은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씨 할머니가 이미 도아영이 관성에 온 일을 명해은에게 알려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명해은 부부가 아들들의 인생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조바심을 내도 소용없었을 뿐이다. 하여 전씨 할머니께서 나서서 형제들의 인생사를 걱정해주실 수밖에 없었다.명해은은 아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도아영 씨가 온 거 아니었어? 너희들 어제저녁 함께 식사도 하고 밤도 같이 보냈잖아. 근데 데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는 할머니께서 너에게 골
도아영은 그 선물이 전이혁이 선물인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잠시 생각하던 전이혁은 결국 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만약 도아영에게 선물이 자신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아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집착할 수도 있을 테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 안 하실 거예요?”전이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조금 있다가 가서 흰죽 한 그릇 먹을 거야.”고기 요리를 많이 먹으면 간단한 죽에 김치를 곁들이는 게 좋았다.“넌 집에 가서 네 부모님과 식사하렴.”“네.”전씨 할머니가 집에 가길 원하지 않자 전이혁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굶을 염려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꽃 구경하자고 전화해서 친구들을 불러야겠다.”전씨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르신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을 확인한 전이혁은 그제야 정자에서 나왔다.곧 차 앞에 도착한 전이혁은 차에 올라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로 전씨 할머니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속삭이는 것을.“이 자식아! 너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나중에 네가 할머니에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이렇게 해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노년의 삶에 약간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손자들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전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놀려먹으며 즐기면 그만이었다.명해은은 별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이혁의 차가 보였고 그가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명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아들이 다 큰 뒤로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자 명해은 부부는 아들들이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걸 간절히 바랐다. 며칠이라도 집에서 머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하지만 아들들이 모두 바쁜 사람들인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