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 만년필은 설아가 나한테 선물한 거예요. 갖고 싶으면 나중에 커서 자기 아내한테 사 달라고 하면 되죠."권지헌은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만년필을 아예 쏙 집어넣었다.박희수는 말문이 막혔다.하여간 성깔하고는.친아들과 이런 것까지 따지는 사람은 권지헌밖에 없을 것이다.연우는 아주 순한 아기였다.생후 두 달 무렵 보챌 때조차 허설아 앞에서는 얌전히 참다가 권지헌과 권정우만 만나면 목청이 커졌다.방금 우유를 먹은 연우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투성이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권지헌이 토닥여 주자 다시 잠이 들었다.연희가 엎드려 동생을 들여다보았다."엄마, 나도 어렸을 때 동생처럼 잠을 많이 잤어?"허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너도 잠이 많았지. 이 정도 아기는 하루 대부분을 자거든."연우는 연희보다 훨씬 키우기 수월했다.연희도 천사 같은 아기였지만 몸이 약해 자주 잠을 설쳤고 재우는 데만 매일 적어도 30분은 걸렸다.연우는 졸리면 하품 한 번 하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권씨 집안에서 찾은 산후 도우미도 이렇게 돌보기 쉬운 아기는 처음이라고 했다.권지헌이 수정한 예식 순서지를 건넸다.권정우는 한 번 훑어보더니 허허 웃었다."아예 절차를 다 없애지 그러냐?""그래도 되죠. 나와 설아 결혼식 때도 그런 절차는 안 했어요. 번거롭잖아요."권정우는 할 말이 없었다.요즘 권씨 집안은 거의 권지헌이 좌지우지하다 보니 권정우도 가끔 아들과 이야기할 때면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다.권정우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그럼 그렇게 하자."권서진이 종이를 받아 확인했다.권지헌은 거의 모든 절차를 지우고 딱 하나만 남겨 두었다.신랑, 신부가 본가에서 어른들에게 인사한 뒤 호텔로 출발하면 끝이었다.양현성이 대가족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면 권지헌은 이 식순마저 남기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의논 끝에 복잡한 절차는 거의 다 줄여졌다.권서진은 능숙하게 아이를 돌보는 권지헌을 보며 감탄했다."전에는 오빠가 육아를 도맡을 줄
임신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권씨 집안에는 번거로운 예법도 많았다.지난해 결혼식 때 권지헌이 일부러 절차를 줄인 것도 허설아가 힘들까 봐서였다.권호성이 뒤에서 사람을 시켜 허설아를 해치려 했을 때, 권지헌은 할아버지와의 연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 권지헌이 허설아를 데리고 권호성의 위패에 절하러 간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권서진도 권호성과는 특별한 정이 없었다.진하윤의 위패는 이미 권씨 집안 사당에 없었다.따지고 보면 굳이 절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다만 권정우는 집안 사정을 모르는 양씨 집안 앞에서 겉으로라도 예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집안일을 낱낱이 드러내기보다는 사돈과 좋게 지내는 게 나았다.그래야 나중에 양씨 집안에서 권서진을 못마땅하게 여길 일도 없을 것이다.이제는 권서진이 임신한 덕분에 그런 절차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권호성과 권정열의 영전에서 효녀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권서진도 당연히 기뻤다.양현성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서진이 몸이 우선이지. 나는 권씨 집안 사람이 아니니 이런 일은 자네들이 결정하게."권정우는 원래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민머리를 쓰다듬는데 뒤통수에서 스티커가 만져졌다.스티커를 떼어낸 권정우는 누가 붙였는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집안에서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연희뿐이었다.권정우는 껄껄 웃으며 양현성에게 연희의 걸작을 보여 주었다.화내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연희가 나중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저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예식 순서는 이미 정했으니 형식은 갖춰야겠지요."처음부터 그렇게 신경 쓴 것도 두 사람이 권서진의 친부모가 아니기 때문이었다.양씨 집안도 고리타분하게 격식만 따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부부가 잘 살기만 하면 절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양준우가 잠시 생각하다 진지한 눈으로 권지헌을 바라보았다."형님, 뺄 수 있는 절차는 다 빼면 어떨까요?"형님이라는 말이 입에 착 붙었다.권지헌보다 몇 살 더 많다는 사실은
누가 누구를 괴롭히는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양씨 집안 식구들은 가진 걸 전부 걸치고 온 듯 하나같이 예의를 차려입어서 이 결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권정우는 양현성과 함께 식사를 했다."서진이 외조부모님은 내일 오셔서 먼저 예식에 참석하시고 그다음 호텔로 이동하실 겁니다.""서경시에서도 답례 잔치를 한 번 더 열고 싶었는데 준우가 번거롭다고 반대하더라니까!"양현성은 이 얘기를 꺼내며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양준우가 설명을 덧붙였다."할아버지 몸이 안 좋으시잖아요. 서경시에서 오실 분들은 다 할아버지 친구분이나 옛 전우분들인데 일일이 인사 나누시다 보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양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내저었다.이어서 한 말이 더 놀라웠다."내 전우들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래! 응대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네가 말해 보거라? 됐다 됐어. 너희 젊은 사람들 일이니 번거로우면 그만두자."양준우가 차분하게 말했다."서진 씨가 임신했어요. 너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마침 사과를 먹고 있던 권서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에 든 사과를 떨어뜨렸다.작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준우 씨,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임신 사실도 며칠 전에야 알았다.권서진은 임신 소식이 알려지면 결혼식에서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아서 아예 피로연이 끝난 뒤에 말할 생각이었다.박희수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왜 진작 말 안 했어? 내일 절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는지 알아? 얼마나 힘들겠어! 내 생각에는 이런 낡은 풍습부터 고쳐야 해!"권정우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그래도 낡은 풍습이라고만 할 순 없지.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예법이잖아. 하지만 서진이가 임신했으니 형식적으로 인사만 올리고 넘어가. 절대 무리하지 마."양현성은 입이 귀에 걸렸다."정말이냐? 그거 잘됐구나! 절차에서 더 줄일 수 있는 게 없는지 다시 보거라. 서진이가 힘들면 안 되지!"박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에 연락
그 생각을 하며 서은석은 청첩장에 답장을 보냈다.그동안 송원영을 만나러 회사에 간 적은 없었다.지금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그날 일은 메시지로 사과했다.송원영에게서는 차가운 답장 하나만 돌아왔다.'네, 알겠어요.'그 뒤로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다.송원영에게서는 답장이 한 통도 오지 않았다.서은석은 이토록 절박한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예전에도 자주 다퉜고 그때마다 송원영은 서은석을 차단하곤 했다.송원영이 정말 화가 나면 어떤 모습인지도 서은석은 알고 있었다.그건 실망이었다.게다가 서은석은 이번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2년 동안 쌓아 온 마음을 이런 일로 전부 소모할 수는 없었다.그때가 되면 정말 끝이었다.서은석은 웨딩 사진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보았다.권서진은 아주 예쁘게 나왔고 신랑도 훤칠하고 잘생겼지만 사진 찍는 데는 서툰지 어느 사진에서나 꼿꼿하게 서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비 근무라도 서는 줄 알 것 같았다.그래도 사진만 봐도 두 사람의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서은석도 진심으로 축하하며 축의금을 보냈다."서진아, 결혼 축하해."-결혼식 전날 양현성이 온 가족을 이끌고 건영시를 찾았다.양현성은 젊었을 때 이곳에 자주 온 적 있었다.권씨 본가도 이미 단장을 마친 뒤였다.권서진의 부모는 둘 다 세상에 없었기에 권정우와 박희수가 정장을 갖춰 입고 문 앞에서 맞이했다.양지현이 휠체어를 밀며 웃는 얼굴로 다가왔고 두 집안이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양현성의 가슴에 달린 훈장을 보고 조금 긴장하던 권정우가 나서서 휠체어를 넘겨받았다."어르신, 대접이 변변치 못해 죄송합니다! 집안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서진이 부모마저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서 지금은 저와 제 아내가 서진이 부모와 다름없습니다."양현성은 좋은 일을 앞두고 한껏 기운이 나 있었다."서진이를 돌봐 준다니 나도 마
"너 엄마하고 왜 싸웠어? 아빠 말로는 엄마가 밤새 우셨다던데. 집에 안 간 지도 일주일이나 됐다며? 이제 가서 좀 달래 드리지 그래?""달래라고? 그럼 나는 누가 달래 주는데? 엄마가 내 여자친구한테 모진 말을 그렇게 했는데 그걸 다 참아야 해?"전화기 너머 서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래도 엄마잖아. 원영 씨는 네가 좀 달래 보면 안 되겠어?""달래? 어떻게 달래? 형은 전에 집에 데려왔던 형수 될 사람 달래서 다시 데려왔어?"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서현석도 이번에는 문정은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한 말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그때는 나도 사정이 있었어."서현석의 여자친구는 서씨 집안과 집안 형편이 맞지 않았고 차이가 컸다.그때 문정은이 모진 말을 해도 서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다 자신을 위한 말이라고만 여겼다.나중에 서씨 집안 둘째 딸 서현주가 데려온 상대도 문정은이 온갖 트집을 잡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헤어지고 말았다.서현석과 서현주는 문정은이 이런 일에만 유독 까다로운 줄 알았다.문정은은 그 뒤로도 서현주에게 자신은 겪어 볼 만큼 겪어 본 사람이라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본다고 했다.5~6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진 서현주는 한참이나 괴로워했다.하지만 다 문정은이 좋은 뜻에서 한 거라고 여겼다.다만 그 뒤로는 마음의 문을 닫고 더는 누굴 만나려 하지 않았다.이제는 서은석까지 똑같은 문제를 겪게 될 줄은 몰랐다.서현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내 전 여자친구는 벌써 엄마가 돼서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아. 원영 씨 일은 나도 들었어. 이번에는 엄마가 좀 지나치셨지만 그래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러신 거야."서은석이 차분하게 말했다."아무리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모욕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원영이는 내가 죽기 살기로 쫓아다녀서 겨우 만나게 된 사람이야.""형, 엄마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집에 안 들어가."서현석이 간곡하게 타일렀다."지금까지 엄마가 자기 잘못
박희수는 이런 일에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이제 손녀에 손자까지 다 생겼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그러다 허설아가 연우의 장난감을 쥔 채 멍하니 있는 걸 보니 몇 마디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나중에 자신이 없으면 권씨 집안의 사교 활동은 허설아가 맡아야 했다.박희수는 연우를 품에 안고 차근차근 설명했다."아버님과 서씨 집안 할머니가 친남매 사이라 윗세대끼리 가깝게 지냈어.""나와 지헌이 아버지 대에 와서는 왕래가 많지 않았어. 은석이와 지헌이 사이가 친하지 않았으면 아버님 돌아가신 뒤로는 아마 끊겼을 거야."박희수는 참을성 있게 두 집안의 관계를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정은이는 성격이 별나. 친정이 예전엔 자본가 집안이었는데 풍비박산이 나고 나서 은석이 아버지한테 시집갔거든. 그때 은석이 아버지는 재혼이었고 정은이는 어렸는데 자존심도 세고 콧대도 높았지.""그래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고 시집간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 나중에 문씨 집안 어르신이 쥐고 있던 세력은 전부 은석이한테 넘어갔어."허설아가 물었다."그게 은석 씨 형제들 결혼을 막는 것과 무슨 관계예요?""누가 알아? 그 집 맏아들이 벌써 서른둘인데 아직도 혼자잖아. 정은이가 아무 상관 없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박희수는 은근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자식들이 집에 데려오는 상대마다 욕을 안 한 적이 없어. 전에는 우리 서진이를 시집보내 달라더라. 기가 막히는 소리 아니니?"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권서진과 서씨 집안 자식들은 피가 섞인 친척이었다.그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꺼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게 문정은이었다."전에 나한테 원영이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길래 사람이 달라졌나 했지."그런데 문정은은 이야기를 다 듣더니 박희수에게 권지헌이 왜 송원영을 마다했느냐며 비아냥거렸다.박희수는 그 말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겉으로는 예의를 지키며 좋게 넘겼다.박희수가 허설아를 달랬다."너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 어차피 앞으로는 어울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