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은 멍청하지 않았기에 정은에게 사고가 난 후, 바로 남이 일부러 그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장 먼저 CCTV를 확인했다.그러나 아무런 수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상어든 산소통이 고장이 났든 모두 우연이었던 것이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렸다.“내 말 좀 들어봐...”도겸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경고하는데, 정은에게서 좀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난 절대로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현빈은 매정하게 떠나는 도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줄곧 서연희를 언급하지 않다니, 정말 생각한 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로 숨기고 있는 거야?’연희는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도겸이 어두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보자, 즉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자기야, 왜 이제야 왔어요? 우리 같이 아침 먹으러 가요. 지금 배가 너무 고프단 말이에요...”말을 마친 다음, 연희는 또 일부러 깜찍한 척 입을 삐죽 내밀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하고는 자신의 손을 빼지 않았다.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니, 정은은 이미 이곳을 떠났다. 도겸은 초조하게 다른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심현빈 그 여우 같은 자식, 날 찾아서 얘기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섬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정은은 이 섬의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분위기 또한 더없이 개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각국의 관광객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피부색도 언어도 각기 다르지만 여전히 자유롭게 소통하고 있었다.이른 아침, 정은은 레스토랑에서 나오자마자 한 흑인 미인과 부딪쳤다.화끈한 드레드 헤어에 형광 그린 비키니를 입은 그녀는 그야말로 야성미가 넘쳤다.정은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열정적으로 손키스를 보내며 인사했다.정은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화끈한 몸매에 얼굴이 빨개졌고,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수민이 고개를 돌렸다.“괜찮아? 감기 걸렸어?”“아니, 그냥 좀 궁금해서. 오늘 섬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키니를 입은 거야?
그리고 정은으로 하여금 정말 야하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간신히 가슴을 가릴 수 있는 그 ‘천 조각’이었다.‘이렇게 입고 나가기엔 좀...’“이건 아닌 것 같아, 나 다른 옷으로 바꿀래.”“뭐!” 수민은 재빨리 정은을 잡아당겼다.“뭘 바꿔? 이게 얼마나 보기 좋은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넌 뭐가 그렇게 쑥스러워?”“수민아, 이거 좀 놔, 나 진짜 못 입겠어.”“에이, 그러지 말고...” 이때 수민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은은 이 기회를 틈타 필사적으로 벗어났다.“날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서 그 잘생긴 연하남이나 챙겨!”어쩔 수 없었던 수민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도겸 오빠, 저 이거 입을까요?”“음.” 남자는 머리도 들지 않았다.연희는 또 다른 비키니 한 벌을 들었다.“이건요? 색깔이 너무 수수하지 않을까요?”“아니.”“그럼 이건요? 이게 좀 더 섹시한 것 같은데...”전신거울을 보며 비키니를 고르고 있던 연희는 그제야 도겸이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날 보지도 않았어!’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화를 내려는 순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연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도겸 오빠.” 연희는 나비처럼 날아가서 도겸의 품에 안겼다.“이 세 벌에서 하나 골라주실래요?”도겸은 손을 들어 아무나 하나 가리켰다.“그럼 이걸로 해.”“어머! 저도 이게 마음에 들었는데, 우리 정말 마음이 잘 통하나 봐요, 그럼...”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제가 한 번 입어볼까요?”“음.”연희는 일어나더니 도겸의 앞에서 치마를 벗기 시작했다.그녀가 속옷의 단추를 다 풀자, 도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의 광경에 마음이 흔들리긴커녕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연희는 어색하게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도겸은 계속해서 말했다.“안에 드레스 룸이 있잖아?”‘뭐야, 왜 이렇게 싸늘한 건데!’“그럼 지금 들어가
그러나 도겸은 마치 피곤함이 극에 달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잠을 잤는데, 주위의 모든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와우!” 이때, 잘생긴 외국 남자가 엄청난 감탄을 했다.“너무 예쁜데!”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연희는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정은이 한쪽의 비치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목에 두른 흰색 스카프는 바닷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어머 세상에! 샤넬 그 자체야! 너무 예쁘잖아!”연희는 차갑게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예뻐요?”외국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샤넬 브랜드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 여사를 아세요? 검은 치마에 하얀 베일을 두르며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죠. 그리고 바람이 치맛자락을 날리며, 그 베일도 하늘하늘 바람에 흩날렸죠...”연희는 이를 악물었다.“그럼 당신은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히 예쁘죠.” 남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 여자와 비교하면요?“아, 신사로서 이 문제를 대답하기가 많이 어렵네요. 하지만 정말 비교하고 싶다면, 저는 그 아가씨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연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하얀 피부, 그리고 곱슬머리를 뒤로 넘겨 매우 섹시해 보였다.반면 정은은 비교적 노출이 적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치맛자락은 절반쯤 허벅지를 가렸고, 색깔도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하얀 피부 덕분에 오히려 검은색이 정은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었다.하얀 스카프 사이로 은근히 드러나는 몸매는 이 외국인조차도 그 함축적이고 우아한 매력에 매료되게 만들었다.흔치 않은 것이 귀한 법이다. 알록달록한 비키니 미녀들 사이에서 정은은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하지만 연희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눈을 감고 잠들어 있던 도겸이 마치 텔레파시라도 받은 듯 벌떡 일어나 앉은 것이다.정은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경악, 놀라움, 찬탄, 괴로움, 후회 등 온갖 감정이 도겸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쳤
그 결과, 장미꽃은 점점 많아졌다.수민은 영문을 몰랐다.“왜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거지?”정은도 마찬가지였다.“나 좀 살려줘! 이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르잖아!”군중 속의 도겸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연희는 손에 들려 있는 몇 송이의 장미를 보며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사람들, 눈이 없는 거야 뭐야?’정은은 지금 심지어 방금 전의 그 검은색 비키니도 입지 않았고, 도중에 전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연희가 보기에 그 모습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그러나 바로 그런 정은의 모습에 도겸은 넋을 잃고 말았다.정은은 넓고 큰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고, 옅은 색의 리본이 모자를 따라 나비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아주 심플한 스타일이었지만, 정은이 쓰니 오히려 대범하고 존귀한 느낌을 자아냈다.정은이 나타나자 모든 남자들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민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미소를 지을 때마다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답답하지?” 현빈은 어느새 도겸의 곁에 나타나더니, 분노로 붉어진 그의 두 눈을 보고 웃으며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정은 씨는 결코 네가 독차지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도겸은 주먹을 꽉 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은 씨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눈부셔서, 넌 그런 정은 씨를 몰래 숨겨둘 수 없어.”현빈은 감탄과 애모의 눈빛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자신의 장미를 잃었으니 지금 후회하는 거야? 그러나 정은 씨는 이미 네 여자가 아니야.”이때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왔다. 현빈은 자신의 코앞에 멈춘 주먹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매번 너에게 만회할 기회가 있는 건 아니잖아.”도겸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네 말이 맞지만, 너 지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은은 내가 정성껏 키운 장미야. 난 정은이 오늘처럼 눈부시게 변한 것을 줄곧 지켜보았다고. 정은의 아
상자를 여는 순간, 뱀 한 마리가 안에서 튀어나왔다.그 뱀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엇갈려 있었고, 꼬리까지 가늘고 길어 딱 봐도 독사였다.정은은 반사적으로 상자를 던져버렸지만, 그 뱀은 이미 날아오르며 독니를 드러내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옆에 있던 사회자는 이미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마이크를 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순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사람들은 즉시 뒤로 물러나며 본능적으로 뱀과 거리를 두려 했다.하지만 정은은 피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도겸이 더 가까웠기에 현빈보다 먼저 정은을 잡아당겼다.그러나 그 순간, 도겸의 뒤통수가 독사 앞에 완전히 노출되었다.“위험해!”“조심해요!”정은과 연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정은은 이미 도겸의 품에 안겼고, 연희는 얼른 앞으로 돌진하더니 자신의 몸으로 뱀의 공격을 막았다.그래서 뱀은 연희의 종아리를 세게 깨물었다.“으악.” 연희는 아파서 천천히 쓰러졌다.도겸은 흠칫 놀라며 정은을 밀어내고 얼른 연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종아리를 살펴보았다.그의 예상대로 그것은 독사였다!“도겸 오빠...” 소녀는 눈물을 글썽였다.“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이를 악물며 연희를 품에 안았다.“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연희는 아파서 땀을 뻘뻘 흘렸지만, 그래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오빠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도겸은 감동을 받으며 연희의 손을 잡았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의사가 곧 올 거야. 너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연희는 이미 초점을 잃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점점 약해졌다.“알아요, 저는 줄곧 도겸 오빠를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저는 무사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희는 기절했다.도겸은 자신의 품에 쓰러진 연희를 보며 당황해지더니 얼른 소리쳤다.“의사, 의사는? 빨리 구급차
‘이 순간부터 도겸은 정식으로 아웃되었군.’...연희는 체질이 나쁘지 않았고, 제때에 혈청을 주사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안전을 위해 도겸은 한 의사를 동행시켜 연희를 돌보게 했다.방 안에서 연희는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는 그녀를 위해 검사를 하고 있었다.도겸은 침대 옆에서 연희를 지키고 있었지만, 몇 번이나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연희는 입을 열며 말했다.“오빠, 너무 무서워요...”“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네?”“만약 또 독사가 저를 물면 어떡하죠? 흑흑...”연희가 스스로 다칠지언정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도겸은 마음이 약해졌다.“그래, 가지 않을 테니까 너도 의사 선생님 말 잘 들어.”“네.”연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검사를 마친 다음, 링거를 뽑고 몸을 돌려 떠났다.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는데, 이때 연희는 일어나고 싶었다.도겸이 그녀를 부축하자, 연희는 일부러 힘없이 남자의 가슴에 기대었다.“저 종아리가 너무 아픈데. 흉터 남는 건 아니겠죠?”“그럴 리 없어,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고.”“그런데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금방 약을 발랐으니까 좀 참아.”말하는 사이, 도겸은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그는 대학 시절 운동회에 참가한 정은을 떠올렸다. 그녀는 스타트하자마자 발목을 삐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달렸다.종점에 도착할 때, 정은의 복사뼈는 이미 말이 안 될 정도로 부었다.도겸은 얼른 정은을 병원에 데려다주었고, 의사는 책상을 두드리며 하마터면 뼈를 다칠 뻔했다고 그녀를 나무랐지만,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시울만 약간 붉혔다.도겸도 정은을 바보라고 욕했다. “처음부터 멈췄어야지. 왜 굳이 달린 거야?”“그래도 이건 시합이잖아... 이를 악물고 버티면 돼! 너도 참,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계속 나한
“저는 도겸 오빠가 정은 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오빠는 정은 언니 때문에 애가 타겠지만, 저도 그런 오빠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방금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죠? 저는 단지 도겸 오빠의 곁에 있을 기회만 원할 뿐이에요.”소녀는 목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우며, 진지하면서도 또 비천했다.도겸은 자신의 마음이 은근히 흔들린 것만 같았다.“안심해, 앞으로 난 널 잘 챙겨줄 테니까. 다시는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연희는 웃으며 도겸의 품에 엎드렸고,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꿀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사실 저도 줄곧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도겸은 연희를 더욱 세게 안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답답해졌다.‘왜 이러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행사장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발생하자, 호텔 직원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뒷수습을 했다.이 일은 손님들의 안전과 관련이 되었기에 책임자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그날 밤, 경찰이 와서 모든 관련자들을 찾아가 사건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물론 그들의 예상대로 아무런 수상함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경찰들도 이번 사건을 뜻밖의 사고라고 결정지을 수밖에 없었다.이곳은 열대 지역이었고, 호텔 뒤쪽에 원시림까지 있어 뱀이 나타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그런데 독사는 그렇게 흔하지 않을 텐데요?” 수민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건...”“그리고 해변에 사람도 많았으니, 그런 곳에 나타나는 건 더 흔치 않은 일이겠죠?”경찰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호텔 책임자도 말문이 막혔다.수민은 냉소를 지었다.“이번이 두 번째예요. 제 친구는 이 섬에서 두 번이나 위험에 부딪쳤으니, 딱 기다려요. 이 일은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정은아, 가자!”말이 끝나자, 수민은 정은을 끌고 성큼성큼 떠났다.“됐어, 화 풀어. 그 사람들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간 후, 정
사장님은 단번에 정은이 H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외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자, 그 태도도 무척 열정적이었다.“아가씨 안목이 좋네. 이 조각상은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선물로 줘도 문제가 없다고.”정은은 웃으며 가격을 물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포장해주세요.”“오케이!” 사장님은 포장을 하면서 엽서 한 장을 안에 넣었다.“만약 하고 싶지만 하기가 쑥스러운 말이 있다면, 이 엽서에 쓰면 돼.”정은은 입술을 오므리며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막상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열정적으로 포장을 해준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호텔로 돌아온 정은은 샤워를 하러 갔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책상 위에 놓인 그 선물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가가 엽서를 꺼냈다.엽서에는 몰디브의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정은은 그것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어차피 쓸모가 없잖아.’...이튿날 아침, 심현빈은 시간이 다 됐다 싶어 레스토랑에 갔지만, 한 바퀴 돌아보아도 정은을 보지 못했고, 오직 수민 혼자만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테이블 위에는 컵 하나와 샐러드 하나가 놓여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수민은 먼저 웃으며 인사를 했다.“세 바퀴나 돌면서 줄곧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아침을 먹고 싶은 거예요?”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말 의자를 가져와서 수민의 맞은편에 앉았다.“좋은 아침.”“네.”현빈은 수민의 컵을 힐끗 보았다.“우유가 참 맛있어 보이네.”“이거 두유예요.”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수민은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현빈도 연기를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정은 씨는? 왜 여기에 오지 않은 거지?”“무슨 일로 정은을 찾는 거죠?”“심심해서 찾으면 안 되는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어서 되려 웃었다.“금융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