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클럽 내부.쿵- 쿵-샌드백을 때리는 묵직한 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이 뒤섞여 울렸다.땀이 이마에서 턱으로, 턱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온몸이 이미 기진맥진했지만, 주먹이 멈추지 않았다.한 번, 또 한 번...끝내 힘이 빠져 링 바닥에 드러누워서야 복싱클럽 안은 고요를 되찾았다.“오, 괜찮네요?”코치가 다가와 헐떡이는 재석을 내려다보며 웃었다.“딱 봐선 책상 앞에 앉아 연구만 할 것 같은 타입인데, 체력이 은근히 좋아요. 다만 힘을 너무 세게 줘서 관절 나가기 딱 좋아요. 다음부턴 조금 조심해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천장을 똑바로 올려다본 채, 텅 빈 눈빛으로 숨만 고를 뿐이었다.코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남자라면 누구나 막히는 순간이 있죠. 뭐,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계속 와서 두들겨요. 땀으로 풀면 생각보다 금방 가벼워져요.”...복싱클럽을 나왔을 땐,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재석은 차를 몰아 나왔지만, 방향도 의식하지 못한 채 운전대를 잡았다.‘어디 가는 거지?’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어느새 정은의 실험실 앞에 서 있었다.재석은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차창 너머 어슴푸레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여보, 다 정리했어? 얼른 가자!”서준이 실험실 안에서 손을 내밀었다.“잠깐만! 금방!”민지가 흰 가운을 허겁지겁 옷장에 밀어 넣고 가방을 들더니, 폴짝폴짝 뛰듯 달려가 서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듯, 서로 맞잡은 손은 자연스럽게 깍지로 바뀌었다.“오늘 뭐 먹을까? 요즘 계속 야근이라 제대로 된 밥을 못 먹었잖아.”민지가 입술을 내밀었다.배달 음식 아니면, 실험실에서 대충 끓인 라면뿐이었다.“에휴, 정은 언니가 해놓고 간 만두랑 만둣국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근데 말이야, 진일 선배 왜 자꾸 나랑 만두 뺏어 먹는 거 같지 않아?”“전엔 맨날 라면만 끓여 먹더니, 요즘은 꼭 만두만 찾는단 말이야. 분명 일부러 그러는 거 같아!”서준
“누구요?”태민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우리 실험실에 새로 사람 들어온대요?”“아니 아니.”진욱이 고개를 저으며 일부러 말을 흘렸다.“새 사람보다 무서운 건 옛사람이지.”“옛사람...? 누구 말이에요?”진욱은 재석이 사라진 문 쪽을 흘깃 보고, 의미심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사람 마음 딱 끊어낸 남자, 진짜 무섭다니까.”짧디짧은 한 달 사이, 재석은 벌써 세 개 과제를 밀어붙였다.태민과 미진을 빨리 독립시키려는 듯한 무서운 속도였다.하지만 더 놀라운 건... 정작 재석 본인이 감당하는 일의 양이 예전보다 두세 배는 늘었다는 사실이었다.진욱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보스가 연애할 때가 그립네. 그땐 우리도 한결 여유로웠지... 어휴, 아쉽다.”좋았던 시절은 고작 몇 년에 불과했다.그마저도 눈 깜짝할 새에 끝나버렸다.‘지금은 뭐, 해방 전도 아니고, 아예 원시 사회로 돌아간 기분이네.’“갑자기 정은이가 보고 싶어...”태민이 고개를 푹 떨군 채 툭 내뱉었다.“맞아요...”진욱이 툭 쏘듯 말하다가, 태민의 뒤통수를 툭 치며 웃었다.“조 교수님이 너와 미진 선생님 제대로 키우고 싶어 하는 거잖아. 꽃을 피울지 말지는 결국 네 선택이지. 잘해. 괜히 실망시키지 말고.”태민은 깊게 숨을 들이켠 뒤,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전 교수님. 저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고요. 그냥... 요놈의 입이 문제죠. 습관처럼 푸념이 먼저 나와서 그렇습니다.”“좋아. 그럼 이번엔 진짜 입 다물고 과제에만 몰두해. 괜한 연애 타령은 나중으로 미뤄도 돼. 남자는 말이야, 일부터 챙기는 거야.”태민은 허탈하게 웃었다.“차라리 연구에 치여 죽는 게 낫죠. 사랑 때문에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입니다.”“허허, 이거 완전 경험에서 우러난 소리네?”진욱이 키득거렸다.“그리고 제가 아는 분의 현재 상황을 보면...”태민이 대꾸하는 순간, 이미 실험대에 돌아가 묵묵히 데이터를 정리하던 재석이 갑자기 ‘에취’ 크게 재채기했다.‘누가 내 얘기하나?’ 싶
‘이게 뭐람... 줄이 이렇게 길다니.’조그만 가게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밖에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정은은 문 앞에 서서 안을 대충 훑어봤다. 아시아인 얼굴도 많았지만, 금발의 외국인 손님들도 적지 않았다.“식사하러 왔어요, 아가씨?”통통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A국말로 물었다.정은이 대답을 못 하자, 아주머니는 잠깐 멈추더니 영어로 다시 물었다.혀 굴리는 발음이 영락없는 현지식 억양이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먹으러 왔어요.”“아, 우리나라에서 온 사람이구나? 어디서 왔어요?”아주머니의 미소가 한결 따뜻해졌다.“저는 L시에서 왔어요.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뭘 몰라요! 나는 N시 사람이에요.”“장사가 아주 잘 되는 식당이네요.”정은이 웃자 아주머니도 흐뭇하게 맞장구쳤다.“단골이 많아서 그래요. 여기 온 지 벌써 수십 년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아가씨 혼자 왔어요?”“아니요, 일행을 만나기로 했어요. 곧 올 거예요.”“잘됐네요! 내가 특별히 방으로 안내해 줄게요.”“어... 줄 안 서도 돼요?”정은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그럼 그럼, 같은 고향 사람인데, 당연히 혜택 줘야죠.”정은이 안내받은 건 작은 별실이었다.조금 전 아주머니가 바로 이 식당의 사장이란 걸 그제야 알았다.엄밀히 말하면 사장이 아니고, 사장의 아내였다.20여 분 뒤, 현빈이 도착했다.정은은 곧장 메뉴판을 건넸다.“오빠, 먹고 싶은 거 골라봐요.”현빈은 사양하지 않고 능숙하게 몇 가지를 주문했다.나온 음식들은 놀랍게도 대부분이 정은이 즐겨 먹는 것들이었다.식사를 마치고 정은이 계산대 앞으로 가자, 현빈이 먼저 지갑을 꺼냈다.“내가 낼게.”“안 돼요. 오늘은 내가 대접하는 거잖아요.”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현빈은 결국 웃으며 지갑을 접어 넣었다.“알았어.”가게 문을 나서자, 현빈이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호텔
스티븐이 난감한 표정으로 정은에게 대답했다.“미안합니다.”정은의 심장이 순간 툭 내려앉았지만, 얼굴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동료의 부주의로 여기서 화재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많은 차트가 불에 타 없어졌어요.”“전자 기록은 없었습니까?”“원래는 있었죠. 하지만 그 화재로 서버가 손상돼서...”스티븐은 어깨를 무겁게 으쓱였다.“그 동료 이름이 뭔가요?”정은이 묻자, 곁에서 듣고 있던 캐서린이 곧장 말을 보탰다.“안나예요. 같은 A국 출신인데, 침술을 잘해서 유명한 한의사였죠.”‘주안나 간호사?’정은의 눈빛이 순간 깊게 가라앉았다.‘역시... 주안나.’잠시 후, 스티븐이 서랍을 열어 작은 노트를 꺼내 건넸다.“차트는 사라졌지만... 제가 평소에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특히 오미선 교수님은 심현빈 대표님의 귀한 손님이셨으니까요. 자연스레 더 세심히 챙겼죠.”그가 내민 노트에는 진료 중 간단히 적어둔 메모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여기에 제 근무 시간 동안 관찰한 오미선 교수님의 상태가 간간이 적혀 있습니다. 완전하진 않지만... 도움이 될 겁니다.”정은은 노트를 받아들고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엔 오미선 교수의 혈압, 혈당, 심폐음 같은 기본 지표들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었다.스티븐이 설명을 덧붙였다.“처음에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셨어요. 수치도 정상 범위였고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면역력이 서서히 떨어지더군요.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기에 약물은 쓰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언제였는지는 노트 안에 기록해 두었습니다.”“감사합니다. 이 노트,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물론이죠. 교수님을 정말 많이 아끼는 것 같군요.”스티븐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입니까? 이름은 Selena?”정은의 눈이 번쩍였다.“저를 아세요?”“아, 정말 당신이군요! 교수님께서 가끔 검진 도중에 제 얘기를 하셨거든요. 아주 뛰어난 제자가 있다고. 젊고, 똑똑하고, 예
게다가 이름과 전화번호 외의 다른 정보는 전혀 없었다.“이 사람이 누구예요?”“내가 심어둔 사람이야. 곤란한 일이 생기면 두리를 찾아.”정은의 눈매가 살짝 흔들렸다.“어제 오빠가 주안나 간호사 소식 확인할 때, 그 전화도 두리한테 건 거죠?”“응.”아침 식사를 마친 뒤, 현빈은 회사로 갔다.정은은 다시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오미선 교수가 머물렀던 방을 마지막으로 한번 들르고 싶었다.방 안.정은의 시선이 천천히 실내를 훑다 결국 책장에 머물렀다.곧 작은 가방을 꺼내, 그 위에 놓여 있던 몇 권 안 되는 책들을 모조리 담아 넣었다.그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정원을 지나 철제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정면에서 금발의 여성이 걸어왔다.여성의 목적지는 분명 이 빌라였다.순간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당신은 누구죠?”“헬로, 전엔 본 적이 없는데요?”말이 겹쳤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먼저 영어로 답했다.“절 셀레나라고 불러도 돼요. A국에서 왔어요.”“아!”여성의 눈이 반짝 빛났다.“혹시 심현빈 대표님의 손님 맞으시죠?”정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대답했다.“그런 셈이죠.”“오, 반가워요!”여성은 활짝 웃으며 다가와 포옹하려 했다.정은은 그녀의 손을 먼저 잡아 올리며, 매끄럽게 인사를 악수로 바꿨다.여성은 개의치 않고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전 캐서린이라고 해요. 여기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간호사?’정은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캐서린 씨는 여기서 얼마나 일하셨어요?”“심 대표님이 이 요양 빌라를 구매하시고 바로 지원했거든요. 그러니까... 거의 1년 정도 됐네요.”“그럼 그동안 줄곧 여기 계셨다는 거군요?”“네, 그렇죠.”“혹시... 오미선 교수님 알고 계세요?”“오미...?”캐서린은 발음을 조금 버거워하며 되물었다.“혹시 Orla 말씀하시는 건가요? 친절한 A국 출신의 교수님이요? 과학자셨던 것 같아요. 책 읽으면서 논문 쓰는 데
밤이 깊었다.달빛은 또렷했고, 바람은 파도를 몰아와 바위에 부딪혔다.철썩- 철썩-바람 소리, 파도 소리, 부딪히는 소리가 한데 섞여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실내는 달랐다.창문과 커튼이 그 모든 소리를 눌러, 남은 건 가볍게 스치는 듯한 바람결뿐.그래서인지 밤은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머리맡 스탠드에서 번지는 은은한 불빛 아래, 정은은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교수님...”말끝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이 눈꼬리에서 흘러내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빈 역시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했다.머릿속은 정은의 모습으로 가득했다.렌즈 너머로 미소 짓던 얼굴, 햇살을 받아 바닷가를 걷던 뒷모습, 노을을 올려다보던 옆모습...‘정은아...’그녀의 웃음 하나, 눈짓 하나가 마치 마법처럼 현빈의 가슴을 옭아맸다.정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현빈은 이미 알고 있었다....아침.햇살이 땅 위로 흘러내리며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커튼의 좁은 틈 사이로 새어든 빛줄기가 카펫 위에 황금빛 기둥을 그렸다.빛은 사선으로 뻗어 침대 끝에 닿더니, 발치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정은은 가볍게 눈꺼풀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낯설지 않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방 안 풍경.그제야 자신이 교수님의 방에 와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정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확 젖혔다. 순간 쏟아지는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아래층 거실.정은이 내려왔을 땐 현빈이 이미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잘 잤어?”“네. 잘 잤어요.”정은이 자리에 앉자 가정부가 곧바로 음식을 내왔다.따끈한 조기죽 한 그릇, 오이무침 한 접시, 그리고 계란프라이 하나.이틀 내리 서양식만 먹었던 정은의 눈이 단번에 밝아졌다.그 반응에 현빈이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맞췄네. 우리나라 음식이 그리웠던 거지?”정은은 고개를 숙인 채 죽을 한 숟가락 뜨며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