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미숙은 하마터면 우울증에 시달릴 뻔했다.다행히 남편과 딸이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악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후부터 이미숙은 더 이상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았고 휴대폰조차도 전화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이 10년, 청춘 로맨스 소설 한 권 외에 이미숙에게 더 이상 신작이 없었다.“아이고, 이런 말은 그만하자. 국수 맛있니?”“네, 여전히 그 맛이에요.”정은은 이미숙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국물이 좀 뜨겁네요.”“그래? 그럼 좀 더 식혀.”...새해가 다가오면서 작은 도시의 평온한 분위기도 조금씩 떠들썩해졌다. 큰길 양쪽과 길가의 가로수에는 장식들이 늘어났고, 집 근처 슈퍼마켓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품들도 거의 다 팔려나가서 이미숙은 아예 차를 몰고 도심의 큰 마트로 향했다.차를 주차하고 모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 앞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설맞이 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정말 떠들썩한 분위기였다.집에는 비록 아이가 없었지만, 설을 맞아 친척집을 방문해야 했고, 졸업한 학생들이나 근처 이웃들이 가끔 놀러 올 수도 있었기에 사탕과 과일을 준비해야 했다.간식 코너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비싼 과자들을 골랐다. 그리고 집에 기름, 소금, 간장, 식초도 거의 다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물건을 추가로 샀다.해산물 코너에서 팔딱거리는 새우를 보니 이미숙은 정은에게 새우를 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줄곧 뒤따라오던 정은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이미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카트를 밀고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정은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카트에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콜릿은 좀 쓰지만, 집에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정말 시원하고 편안했다.정은은 몰래 두 개만 사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고, 눈을 깜박이며 불쌍한 표정으로 이미숙을 바라보았다.“두 개
이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까나리액젓 사는 것을 깜박했네. 정은아, 저기 가서 한 통 들고 와.”“네.” 정은은 이미숙이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정은이 가는 것을 본 이미숙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아침에 말했잖아요. 아직 생각 중이라고.”“이 일은 내가 3개월 전에 이미 말한 것 같은데요? 그때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이 작가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준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잖아요.”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함께 일했으니,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장르가 바로 미스터리 스릴러류의 중단편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대략 20~30만 자 정도이죠.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인터넷 소설을 쓰라고 하다니, 이건 아예 상관이 없는 두 장르잖아요!”“모두 소설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문학은 모두 공통된 것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유보영은 좀 엄격해지더니 웃음을 거두었다.이미숙은 애써 설명하려 했다.“우선 인터넷 소설은 기본적으로 장편이라서, 툭하면 백만 자 이상이에요. 둘째, 인기 있는 인터넷 소설은 대부분 로맨스, 대표님과 연애하는 거죠. 이것 모두 내가 잘 모르는 장르이니 지금 어떻게 글을 쓰라는 거예요? 『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에서 받은 교훈이 아직도 부족한 거예요? 애초에도 장르를 바꾸었지만, 그 결과는요?”『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이 바로 이미숙이 비참하게 욕을 먹었던 청춘 로맨스 소설이었다.유보영은 시선을 피하더니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그 소설이 이 작가의 평판을 폭락시켰다는 거, 나도 잘 알아요. 지금까지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인터넷을...”“그래요, 이제 내가 인터넷을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왜 나에게 인터넷 독자들을 영합하는 도시 로맨스를 쓰라고 하는 거죠?”“이 작가, 일단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봐요.”유보영은 좋은 태도로 설득하려 했다.“그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하고, 판매량을 창출하지 못하는 작가가 그래도 작가냐고요?”이미숙도 화가 났다.“나에게 구상이 아주 많았지만, 편집장님이...”유보영은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당신의 그 구상들은 아무런 특색도 없고, 임팩트도 없으니 쓰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동시에 출판사의 노력을 낭비하는 거라고요! 전혀 팔리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은 자신이 여전히 그 잘나가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좀 듣기 거북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아웃되었어요! 이미숙, 당신은 지금 현실을 똑똑히 알아야 하고, 자신을 주제를 똑똑히 파악해야 한다고요!”“엄마...” 정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진열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이미숙은 눈물을 금세 삼키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가져왔어?”정은은 까나리액젓을 흔들었다.“여기요.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아빠가 이미 학교에서 돌아오셨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얼른 계산하고 돌아갈까요?”“그래.”“그럼 아주머니, 우리 먼저 갈게요.” 정은은 이미숙을 대신해서 작별 인사를 했다.왜냐하면 정은은 이미숙이 지금 무척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슬프게 만든 사람을 전혀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유보영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래, 나도 물건을 사야해서.”말이 끝나자 그녀는 이미숙을 쳐다보았다.“내가 방금 말한 거 잘 생각해 봐요. 아이고, 다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인데다, 줄곧 함께 일해왔잖아요.”이미숙은 눈을 반쯤 드리우며 말을 하지 않았다. 정은은 카트를 받고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엄마, 그 유보영 아주머니와 10년이란 계약을 한 거예요?”“음.”“만약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올해가 마지막 해죠?”이미숙은 계산을 해봤다. “정말이네.”“엄마는 그 사람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이미숙은 잠시 침묵하며 억지로 대답했다.“그래도 프로긴 하지.”정은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계약서 아직 있죠?”“응
게다가 방금 이미숙과 대화할 때, 정은은 작가에 대한 편집장의 관심을 보지 못했고, 오직 압박밖에 느끼지 못했다.“보여주세요!”“그래, 이따가 돌아가서 보내줄게. 너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봐야 한다!”정은은 맹세했다.“그럼요!”...집에 도착하자, 소진헌은 문에 복조리를 걸고 있었다. 그는 복조리가 비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히려 정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아빠, 좀 비뚤어진 것 같아요. 왼쪽으로 좀 옮겨보세요.”이미숙은 차에서 내리더니 쯧쯧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보기엔 너무 위로 걸어놓은 것 같은데요? 좀 아래로 걸어요.”소진헌은 또 복조리를 아래로 당겼지만, 이때 이미숙이 계속해서 말했다.“아니다, 너무 낮으니까 좀 높게 걸어요.”정은이 말했다.“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아요.”소진헌은 다 걸은 다음,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양쪽을 비교해보니, 또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왼쪽이 좀 높은 것 같은데?”이미숙은 그제야 문제점을 알아차렸다.“당신 설마 다른 복조리와 헷갈린 거 아니에요?”소진헌은 헛기침을 했다.“확실히 그런 것 같아.”그는 며칠 전에 복조리를 샀는데, 하나는 너무 작고, 다른 하나는 또 너무 커서 어제 또 새로 몇 개 샀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방에 새것을 걸고 나니, 문 앞에 걸어야 하는 복조리는 대칭이 되지 않은 것만 남았던 것이다.이미숙은 유유히 입을 열었다.“망했네요. 겨울방학 하자마자 머리가 돌아가지 않다니.”정은은 피식 하며 참지 못하고 웃었다....새해 아침, 이미숙은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며 정은이 좋아하는 시래기 만두를 빚었는데, 껍질이 얇고 속이 꽉 차서 식초와 간장을 조금 묻혀 먹으니 그야말로 식욕을 돋우었다.풍습에 따라, 소진헌은 요리를 한 상 가득 준비했고, 꼭 필요한 떡국, 생선 외에 또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나물 무침까지 있었다.정은은 식탁에 가득한 음식을 보며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세 식구는 함께 앉아서 푸짐한 설날 음식을 먹었다.식사 후
평소에 만날 일도 없었으니, 서로 건드리지 않고 지내면 그만이었다.중간에 낀 도겸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늘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먼저 묻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며 모른 척해버렸다. 그는 여자친구와 어머니 사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은도 그런 도겸을 이해하고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설날을 어디서 보낼지, 자신과 함께할지 아니면 서영숙을 찾아갈지에 대해서도 정은은 한 번도 도겸을 괴롭히지 않았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자신의 양보와 이해, 그리고 인내심은 결국 자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남자는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그저 습관처럼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었다.정은이 대답해다.“응,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그녀는 비록 간단하게 말했지만, 수민은 정은이 용기를 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건강하셔? 오랜만에 뵙지 못했으니 안부 전해줘.]“아주 건강하셔. 방금 밥 먹을 때 네 얘기까지 했는데.”대학 시절, 소진헌 부부는 수민이 정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여름방학에 정은이 돌아올 때마다 늘 특산물을 가지고 가서 수민에게 주라고 했다.수민은 지금까지도 소진헌이 만든 소고기 양념을 생각하면 배가 고팠다.[그럼 언제 돌아올 거야? 고향에 얼마나 있을 건데?]정은은 잠시 생각했다.“좀 오래 있을 거야.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두 분과 같이 있어주고 싶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동안 줄곧 돌아가지 않았으니 두 분도 네가 많이 그리웠을 거야.]수화기 너머에서 수민은 아이패드에서 무엇을 봤는지 눈빛이 밝아졌다.[웃겨 죽겠네. 나 방금 재밌는 거 하나 봤는데.]“뭔데?”[너 못 봤어?]“아니.”수민은 그제야 생각났다. 정은은 이미 도겸의 번호를 차단했던 것이다.[에헴! 그럼 내가 알려줄게! 방금 서SNS를 올렸는데, 아마도 강도겸이 에르메스 켈리백을
정은은 담담하게 입술을 구부렸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침묵에 잠겼다.이때 수민 쪽이 무척 시끄러워졌다.[정은아, 먼저 끊을게. 집안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우리 엄마가 지금 여기저기서 날 찾고 있어.]“그래.”전화를 끊은 후, 정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는데, 또 연이어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왔다.심현빈이었다.다국적 기소장, 접수 영수증이 있었는데, 그는 또 현재의 진도에 관한 설명을 했고, 나머지는 정은 본인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이었다.다국적 기소는 일반기소 수속보다 더 복잡하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기에, 이렇게 빨리 추진될 수 있다니, 솔직히 정은도 많이 놀랐다.그녀는 파일을 받아 온라인으로 사인을 한 뒤, 다시 현빈에게 보냈다.그쪽은 바로 문자를 읽더니 곧이어 또 농담을 하며 답장했다.[날 그렇게 믿는 거야? 널 배신할 수도 있는데?][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현빈은 마음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웃었다.정은의 말에 설렜기에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재빨리 타자를 했다.[단지 사인해야 할 서류일 뿐이야. 기소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까 안심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현변의 설명에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서명해야 할 서류들도 모두 자세히 보고 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사인한 것이다.게다가 현빈이 정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다면, 이렇게 복잡하고 저질한 수단을 쓰지 않을 것이다.2초 후,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내년에 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정은은 핸드폰을 침대에 엎었다. 그녀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으니, 현빈의 소원은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정은아, 네 아빠가 만두를 만들었으니 빨리 와서 먹어.”아래층에서 이미숙의 함성이 들려오자, 정은 즉시 일어나 경쾌하게 대답했다.“가요.”저녁, 정은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따끈따끈한 만두를 먹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재밌는 예능을 보니, 그야말로 천국이
맞은편에서도 역시 축복을 보냈고, 소녀의 부드럽고 고요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섞인 것 같았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기원하는 정은의 모습이 떠올랐다.‘불꽃놀이가 피어난 순간, 정은의 모습을 비추는 그 장면은 정말 예쁠 텐데.’...이튿날 아침, 정은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11시까지 일어나면 된다.태양이 중천에 뜨자,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졸린 두 눈을 떴고.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며 커튼에 그림자를 남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해가 벌써 떴어?!’정은은 얼른 하품을 하고 일어서며 커튼을 쫙 열었다.햇빛이 먼 산에 쌓인 하얀 눈을 비추더니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소진헌과 이미숙은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햇볕을 쬐고 있었다.소진헌은 귀가 밝았는데, 창문을 여는 소리를 듣자 바로 정은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선생님이라 줄곧 시간관념이 있어서 정은이 늦잠을 자는 습관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그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네 엄마가 나쁜 습관만 길들였어. 이 시간까지 자고,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위에 병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몸을 하나도 중시하지 않아. 늙으면 다...”이미숙은 귤 한 조각을 소진헌의 입에 쑤셔 넣었다.“늦잠 자는 거 가지고 언제까지 잔소리할 거예요? 정은이는 이미 졸업했으니 더 이상 당신의 학생이 아니라고요. 새해에 늦잠 자면 뭐가 어때서요?”말하면서 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네 아빠는 융통성이 없으니까 그런 잔소리 듣지 마. 식탁 위에 아침밥 있으니 좀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어.”정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아침을 다 먹은 정은도 정원에 가서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었다.“아빠, 이게 무슨 차예요? 냄새가 구수하네요.”정은은 찻잔 냄새를 맡았다. 담백하고 그윽한 차는 싱겁지도 느끼하지도 않았다. 입을 다시니 또 은근히
지금은 겨울방학 기간이라 대부분 학생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는 무척 한산했다.경비원은 정은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아가씨, 지금 방학이라 선생님을 보러 돌아온 거야?”고3은 과외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는 여전히 수업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은 뒤로 한 손을 흔들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얼른 들어가라. 소란 피우지 말고. 그리고 3학년 학생들의 수업을 절대로 방해하면 안 돼.”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침묵하길 다행이야.’그녀는 선생님을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의동으로 가지 않고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아다녔다. 막 떠나려고 할 때, 학교의 전시대를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보았다.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된 소개가 있었다.[소정은: 20XX년, L시 이과수석으로 서비대학교 생물학부에 입학.]바람이 불자, 정은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땅 위의 낙엽은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었고, 원래 밝고 화창한 날씨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졌다.정은이 팔을 들어 바람을 막고 떠나려던 참에 갑자기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소 선생님!”눈을 들어 보니 정말 소진헌이었다.어제 텔레비전을 볼 때, 소진헌은 오늘 학교에 와서 고3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이렇게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쳤다.“소 선생님,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집에 볼일이 많이 않나요?”인사하는 사람은 소진헌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 선생님이었다.정은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도 그들과 같은 주택 단지에서 살지만, 다른 건물에 있었다.그리고 그 여자 선생님도 물리를 가르쳤는데, 소진헌과 같은 학년을 맡았다. 당시 소진헌은 우수학생을 책임졌고, 그녀는 일반 학생을 가르쳤다.그래서 정은은 그녀의 수업을 들은 적이 없지만, 그녀의 딸 장소연과 같은 반 친구였다.“주 선생님.” 소진헌은 웃으며 인사했다.“다행히 별로 바쁘지 않네요.”“왜요? 정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