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욱이 물었다.“너한테 방법이 있어?”“삭제된 실험 데이터를 직접 복구한 다음, 삭제 기록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데이터가 삭제된 정확한 시간을 찾은 다음, 그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실험실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거죠.”“그건 그렇지만, 누가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을까? 그 컴퓨터의 휴지통은 이미 비워져 있어서 복구하기가 어려울 텐데.”정은이 대답했다.“제가 한 번 해볼 수 있어요.”처음에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데이터를 복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는 것은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이었다.그러나 지금, 이 문제는 이미 감시 카메라로 해결할 수 없었다.정은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려 할 때, 재석이 갑자기 그녀를 제지했다.정은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재석이 설명했다.“현재 정은이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잖아. 기존의 추론이든 의심이든 모두 수아 개인의 주장이고. 이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지갑을 도둑맞은 것과 같아. 가장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의심을 뒤집어씌우고 있잖아.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도둑놈처럼 생겼다, 차림새가 건들건들하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럼 그 사람은 단지 남의 의심 때문에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 아마도 상대방이 정신병자라고 욕을 하겠지.”재석은 정은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아, 넌 사실을 증명할 능력이 있지만, 자칫하면 자신을 증명하려다가 남의 함정에 빠질 거야.”그 순간, 정은은 재석은 선보인 엄청난 이성과 논리사변능력에 충격을 받았다.“그래.” 미진은 이마를 두드렸다.“왜 정은이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건데? 의심을 한 사람이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수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미소가 굳어졌는데, 일이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몰랐다.“저, 저도 단지 의심했을 뿐이에요.”수아는 침을 삼켰다.
재석은 정은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저녁 8시, 재석은 모두에게 야식을 대접했다.“이 가게는 꼬치구이가 정말 싸고 맛있거든. 정은아, 이 간판 메뉴는 꼭 먹어야 해. 내가 소고기구이 더 시켜줄게.”자리에 앉자마자 미진이 열정적으로 말했다.진욱은 정은의 왼쪽에 앉아 먼저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날씨도 더우니 땀이 많이 날 거야. 일단 차부터 좀 마셔. 저쪽에 식욕을 돋우는 반찬도 있는데. 김치를 강력히 추천할게. 좀 먹을래?”정은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열정에 놀랐다.‘수아 선배가 나한테 죄를 뒤집어쓴 일로 미안해서 그런가? 안 그래도 되는데.’수아는 묵묵히 이 장면을 보았고, 입술을 점점 더 세게 깨물었다.‘예전에 다들 에워싸며 챙겨줬는데, 소정은이 온 후부터, 사람들 조금씩 그 사람의 편을 들기 시작했어. 난 빤히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좀 답답해서요,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 좀 마셔야겠어요.”말하면서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태민은 줄곧 수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때 그도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근처의 골목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장소였는데, 골목 양쪽에 화려한 등불이 가득 걸려있었다. 수아는 목적없이 걷고 있었고, 태민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수아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귀찮아서 뒤돌아보았다.“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 귀찮지도 않아요?! 전 나와서 숨 좀 쉬어도 안 되는 거냐고요?”태민은 잠시 침묵을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수아야, 네 데이터 말이야, 정말 잃어버린 거야?”수아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그게 무슨 뜻이죠?”“요 며칠 우리는 퇴근하자마자 바로 실험실을 떠났잖아. 넌 언제 그 실험을 완성할 시간이 있었지? 데이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선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수아는 약간 화가 나서 목소리도 절로 커졌다.“넌 정말 착한 여자아이잖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돼.”수아는 입술을 깨물
“비록 전 교수님과 미진 누나, 그리고 소 교수님은 모두 정은을 관심하고 있지만, 난 아니야. 내 눈에는 너 하나밖에 없거든. 난 영원히 네 편에 서서 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길 거야. 난 네가 정말 너무 좋아. 나에게 널 보호하고, 네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줄래?”태민은 수아가 실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녀는 열정적이고 활발하며 재능이 있었고 또 집안까지 무척 좋았다. 아무튼 자신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태민이 수아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그는 수아를 오랫동안 좋아해왔지만, 수아는 줄곧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태민은 갑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해 보고 싶었다.수아는 남자의 다정한 눈빛을 무시했다. 그녀는 단지 놀라움과 의심이 들 뿐이었다. ‘지금 나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속셈이 도대체 뭐지! 일종의 협박인 건가? 이 틈을 타서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라고?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내가 한 모든 짓을 알려주는 거 아니야?’두려움을 느끼자, 수아는 몸서리를 쳤다. 만약 그녀가 실험실을 떠난다면, 재석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수아야? 날 거절해도 괜찮아.”태민은 머리를 긁적였다.“이 두 가지 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나도 갑자기 용기가 생겨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참, 난 네가 왜 정은을 좋아하지 않는지 이해해. 하지만 앞으로 정말 그런 짓 하지 마. 만약 소 교수님에게 알려지면, 넌 정말 엄중한 처벌을 받을 거야.”비록 태민은 진심으로 수아가 걱정돼서 이런 말을 했지만, 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눈빛이 약간 차가워졌다.‘흥, 정말 날 협박하고 있었어.’“좋아요, 그럼 사귀어요.”“뭐, 뭐라고?” 태민은 이미 거절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수아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수아는 또박또박 말했다.“우리, 사귀자고요.”“우와! 수아야,
강변을 따라 앞으로 걷자, 양쪽의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도시가 갑자기 조용해져 정은은 시간과 함께 천천히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침묵이 흘렀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척 화기애애했다.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 사람 곁에 있으면 가장 편한 것 같았다.“다리에 가서 바람 좀 쐴래요?”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잔머리를 뒤로 넘겼다.재석은 정은의 눈빛을 따라 멀리 바라보았다.“그래. 하지만 좀 먼 것 같은데.”정은은 농담을 했다.“벌써 힘이 든 거예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그럼 시합해볼래?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말을 마치자, 재석은 자신의 말이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나이를 합치면 이미 50살이 넘었는데,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제안을 하다니.정은은 오히려 도전해보고 싶었다.“좋아요, 그럼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는지 봐요. 진 사람은 아이스크림 사기!”만약 수민이 있었다면 진작에 눈을 부라리며 야유했을 것이다.“야, 넌 머릿속엔 아이스크림밖에 없냐?”“달랑 아이스크림만 달라고 하다니. 우리 오빠 돈 엄청 많아. 비싼 걸 사달라고 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걸?”그러나 재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럼 내가 셋 세면 바로 시작하는 거예요. 셋, 둘, 하나...”정은은 발을 빼며 달렸고, 재석은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뒤쫓았다.달리는 과정에서 재석은 정은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다.단숨에 다리로 뛰어간 정은은 힘들어서 숨을 헐떡였지만 눈빛은 무척 밝았다.잠시 후, 그녀는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고, 작은 여우처럼 득의양양했다.“선배님, 내가 이겼어요!”재석은 이미 편의점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냉동고를 가리켰다.“어느 거 먹고 싶어?”“딸기 맛이면 돼요, 고마워요.”재석도 자신을 위해 아무 하나를 골랐다.그렇게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길가에 나른하게 앉아 운
“매번 엄마가 찾아내시면, 나와 아빠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 돈을 더 은밀한 곳으로 숨겼거든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마치 우리 몸에 카메라라도 장착한 것처럼 아무리 찾기 어려운 곳이라도 바로 찾을 수 있었...”말하면서 정은은 재석이 이미 오랫동안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선배님, 듣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리자, 재석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정은은 멍해졌다.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어깨까지 자랐는데, 방금 밥을 먹을 때 머리띠가 이미 느슨해졌다. 이때 밤바람이 스치자, 정은의 머리카락은 흩날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그 순간, 뜻밖에도 매혹적이었다.“응, 듣고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잠겼다.“아주머니는 아주 똑똑하시고, 더욱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계셔.”정은은 시선을 돌렸다. 목이 좀 말라서 그녀는 침을 삼켰고, 한참 후에야 계속 말했다.“물론이죠, 우리 엄마는 미스터리 소설을 쓰시는 작가잖아요!”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추리하는 능력이었다.만약 소진헌이 정은에게 예의염치를 알게 하고,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이미숙은 정은 자신이 가장 되고 싶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그럼 선배님은요? 선배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책을 보고, 공부하고, 시험을 봤지.”“그게 다예요?”“다른 것도 있겠지만, 이미 기억이 잘 나지 않네.”오늘의 가로등 불빛이 너무 부드러워서인지, 아니면 정은의 눈빛이 너무 밝아서인지, 재석은 강 건너편의 네온등판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하소연하고 싶어졌다.“다섯 살 때였나, 난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물리에 관한 책을 하나 보았어. 이름은 이었고.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물리와 관련된 책을 접했던 거였어. 심지어 난 '물리'라는 두 글자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무척 재밌다는 것을 발견했어.”남자는 담담하게 웃으며 눈빛은 간절하고 뜨거웠다.“‘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려면 만물의 이치를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 우주의 가장
정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미진 언니, 전 교수님, 왜 저를 이렇게 보고 계시는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미진과 진욱은 바로 이 말을 기다렸다!“정은아, 너와 상의할 일이 하나 있는데.”“무슨 일이죠?”미진이 말했다.“지금 내 손에 두 조의 데이터가 있거든. 양이 엄청 많아. 계산은커녕 정리하기도 어려워. 정은이 넌 프로그래밍을 잘하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생각해 줄 수 있어?”진욱은 얼른 보충했다.“우리는 프로그래밍을 할 줄 몰라서 기껏해야 전통적인 속산법을 사용하고 있거든. 그러나 이번에 데이터 양이 정말 너무 많아서 그래. 인간은 결국 컴퓨터와 비교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에헴... 네가 우리를 도와 프로그래밍 같은 것을 써줬으면 좋겠어. 이 데이터를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더 좋고.”30분 후.“미진 언니, 이 계산 링크와 운행 속도는 어떤가요? 조정해야 할 부분이 있나요?”정은이 자리를 비켜주자, 미진은 앉아서 마우스로 확인했다.원래 5일 넘게 걸려야 계산을 마칠 수 있었지만, 이런 속도라면 하루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정말 대단해! 고마워, 정은아. 정말 사랑한다! 어쩜 이렇게 대단한 거니!” 미진도 원래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정은은 그녀에게 엄청난 서프라이즈를 가져다주었다!정은은 손을 흔들었다.“천만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진욱은 얼른 다가왔다.“내가 한 번 해볼게...”재석은 수업이 끝난 후 평소대로 실험실에 들어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정은이 불편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억지로 의자에 앉아있었다.그리고 미진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고, 진욱은 방금 뛰어나가서 산 밀크티를 건네고 있었다.“정은아 수고했어. 내가 어깨 두드려 줄게. 우리 남편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정은아, 밀크티 좀 마셔.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았으니 혈당에 아무 부담도 없을 거야!”재석은 영문을 몰랐다. 그의 ‘수하’들이
선생님은 바로 연희를 깨워 질문을 했다.연희는 수업을 아예 듣지 않아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수업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곁눈질로 연희를 바라보더니 은근히 그녀를 비웃었다.연희도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확실히 비싼 옷과 가방을 매우 좋아하지만, 소유하기만 하면 이미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매치해야 더 잘 어울릴 수 있는지, 색깔의 조합, 쿨톤과 웜톤은 어떤 색깔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연희는 전혀 들을 마음이 없었다.가까스로 수업이 끝나자, 연희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교실을 나섰다.마침 나가면 백화점이었다. 연희는 전에 복수를 하려고 도겸의 가족카드를 긁은 적이 있었는데, 후에 도겸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자신의 돈을 썼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마침 이때 연희는 또 간절히 쇼핑을 통해 마음속의 초조함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브랜드 가게에 들어가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도겸은 정례적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신용카드 문자 알림을 받았다. 진동은 거의 끊어지지 않았다.그는 힐끗 보더니 차갑게 전원을 껐다.서영숙은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맞추며 연희를 데리러 갔다. 그녀는 기사에게 차를 백화점으로 몰고 가라고 한 다음, 차에서 내려 교실로 가려고 했다.사실 그녀도 오고 싶지 않았다.예전처럼 사모님들과 모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차나 마시는 게 더 편하지 않겠는가?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내일 어디로 쇼핑을 갈지, 외국으로 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건 아닐지, 먼저 어느 명품 브랜드의 기성복을 입어보는 것이 좋을지 뿐이었다...지금처럼 연희와 뱃속의 아이를 에워싸고 돌아다녀야 하다니. 매일 제때에 연희에게 수업을 하라고 일깨워줘야 할 뿐만 아니라, 정시에 사람을 데리러 와야 하다니. 마치 사춘기 아이의 엄마처럼 고생해야 했다!그러나 감시하지 않으면 또 안 됐다. 연희가 또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뱃속의 아이도 못된 것만 배울지도 모르니까.그때마
연희는 그동안 서영숙의 비위를 맞추고 싶었지만, 자신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연희도 꾹 참지 않고 직접 서영숙의 말을 받아쳤다.“가방 몇 개 좀 샀다고 뭔 호들갑을 떠시는 거예요? 제가 수업하느라 고생한 자신을 위해서 사면 안 되는 거냐고요? 그 수업들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저 정말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다 제가 꾹 참았기 때문이에요.”“가방 몇 개일 뿐인데, 저 더 살 거예요. 이건 아주머니 아들이 저에게 준 가족 카드예요. 도겸 씨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아주머니가 대신해서 난리를 부리시는 거죠?”서영숙은 화가 나서 혈압이 치솟았다. ‘소정은이 우리 도겸 곁에 있을 때, 종래로 비싼 옷을 사거나 명품 가방 같은 것을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만날 때마다 소박하게 입었지만, 취향도 좋고 코디도 잘해서 아무리 입기 어려운 아이템도 정은이 입으면 무척 예뻤다.설령 정말 명품 가방을 메더라도, 모두 중요한 장소에 출석하기 위해서, 또는 도겸이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은에 비하면 연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서영숙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지 못하고 전부 말했다.연희는 듣자마자 냉소를 하며 비꼬았다.“소정은이 그렇게 좋으신 이상, 왜 돌아오라는 말조차 하시지 못하는 거죠? 아주머니와 도겸 씨도 정말 우습네요. 예전에 함께 지낼 때는 소정은이 싫다고 투덜대셨으면서. 지금 그 여자가 정작 도겸 씨와 헤어지고 멀리 숨어 있으니 오히려 그리운 거예요? 이러는 자신이 창피하지도 않나 봐요! 저는 소정은이 아니니 절대로 참고 살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의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요. 기껏해야 다 같이 죽는 거죠! 지금부터 저는 더 이상 아주머니의 안배를 듣지 않을 거예요. 태교 수업이며 의상 코디 수업이며 다 때려치울 거예요. 아주머니가 원하시면 혼자를 수업을 들으시러 가든가 마음대로 하세요!”말이 끝나자 연희는 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