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삼킨 밤의 계약

너를 삼킨 밤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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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6jay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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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몰락 뒤 빚과 파산 위기의 패션 브랜드 ‘루네’를 떠안은 윤채원. 그녀 앞에 8년 전 가난한 장학생이었던 첫사랑 차도현이 성공한 투자사 대표이자 새 집주인으로 나타난다. 도현은 채무 소멸과 투자 심사를 조건으로 30일 계약 동거를 제안한다. 복수라 의심했던 채원은 과거의 거짓말과 사업 위기를 헤쳐 나가며, 계약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도현을 다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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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1화 · 8년 만에 돌아온 집주인

윤채원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지 않았다.

화면에는 루네의 지난 분기 재구매율이 떠 있었다. 광고비를 줄였는데도 단골은 남았다. 채원은 그 사실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은편의 투자사 상무가 자료를 덮기 전까지는.

“브랜드 힘은 인정합니다. 윤 대표님 감각도 여전하고요.”

칭찬 뒤에 붙는 말은 늘 같았다.

“다만 지금은 위험 부담이 큽니다. 주거래 유통사 재계약도 확정되지 않았고, 단기 차입금 만기가 이번 주죠?”

“이번 투자금은 생산 일정을 안정시키는 데 우선 쓰겠습니다. 가을 캡슐 컬렉션의 사전 반응도 지난 시즌보다 좋고요.”

“현금이 마르기 전에 옷이 팔린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보장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죠. 이미 오른 값에 사는 사람만 있을 뿐.”

상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원은 웃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려고 준비한 자리가 아니었다. 숫자로 가능성을 증명하러 왔고, 상대는 그 숫자보다 채무자의 이름을 먼저 보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조건부 확약이라도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결정은 보류입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채원은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명함을 돌려받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보류하기 어려운 숫자를 들고 오죠.”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외울 만큼 자주 본 번호였다.

“윤채원입니다.”

―태강채권관리 박 과장입니다. 오늘 오후 4시로 상환 유예 기간이 종료됐습니다.

로비의 시계는 4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일부 상환하겠다고 전달했을 텐데요.”

―기존 채권자가 내부 승인 전에 검토하던 유예안이라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양수인은 새 조건으로만 협의하겠다고 합니다.

“누구로요?”

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통지서는 회사로 보냈습니다. 확인하시는 게 빠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채원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전에 정돈한 화장은 멀쩡했다. 몰락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안쪽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겉은 마지막까지 말끔했다.

택시 안에서 서민지에게 연락했다.

“민지야. 등기 우편 왔어?”

―응. 근데 너 놀라지 말고 와. 변호사님도 부르는 중이야.

민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루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퇴근하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채원이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대표실까지 지나가자 애써 시선을 피했다.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는 배려가 오히려 또렷했다.

민지가 문을 닫고 두꺼운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사무실 건물 소유권 이전 통지. 그리고 네 집 낙찰 이후 인도 협의 안내.”

“직원들한테는 어디까지 말했어?”

“건물주가 바뀐 것만. 이번 달 급여는 사흘 뒤에 나간다고 했고.”

“예정대로 보내. 샘플실 보증금 일부 돌려받으면 가능해.”

“그러면 다음 생산 계약금이 비어.”

“오늘 투자만 됐어도 둘 다 막았겠지.”

채원은 실패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 책상에 놓았다. 좌절을 헤아릴 시간에 무엇을 먼저 지킬지 정해야 했다. 이번에도 사람부터였다.

채원은 첫 장부터 끝까지 빠르게 읽었다. 루네가 세 들어 있는 청담동 건물은 에이원홀딩스가 매수해 소유권이 이전됐다.

자신이 살던 서래마을 빌라는 아버지 회사가 무너질 때 담보로 잡혔다가 결국 경매로 넘어갔다. 소유 법인은 달랐지만 등기상 업무 연락처가 같았다.

아르덴파트너스.

“벤처 투자사가 왜 부동산 두 채를 동시에 사?”

민지가 낮게 물었다.

“투자 목적이면 수익성 좋은 물건부터 샀겠지.”

채원은 다음 서류를 넘겼다. 직원과 거래처 지급을 위해 본인 명의로 진 개인 고금리 차입채무와 루네의 단기 대출 일부를 양수했다는 통지서였다. 그제야 흩어진 조각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누군가 돈을 벌기 위해 산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닿는 길을 골라 산 것이다.

맨 아래 적힌 대표자 이름에서 시선이 멈췄다.

차도현.

기억 속 이름은 낡은 후드 소매와 함께 남아 있었다. 창업 동아리방 구석, 남들 앞에서 말할 때마다 큰 안경을 고쳐 쓰던 마른 남자. 발표 자료를 건네면 고맙다는 말 대신 밤새 수정한 데이터로 답했던 사람.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돈을 택해 사라진 사람.

“설마 네가 아는 그 차도현?”

“동명이인이겠지.”

그렇게 말했지만 채원은 이미 아르덴파트너스 대표의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화면 속 남자는 기억과 닮은 곳이 거의 없었다. 구부정했던 어깨는 반듯했고, 안경 뒤에 숨던 눈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여러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를 수십 배로 키운 투자자. 판단이 빠르고, 손절은 더 빠르다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사진 아래의 이름만 같았다.

“차도현 맞네.”

민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인터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대표님, 아르덴파트너스에서 오셨습니다.

채원은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들어오시라고 해.”

문이 열리고 남자 둘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한지혁 전략실장이 명함을 건넸고, 뒤따른 남자가 대표실 한가운데 멈췄다.

차도현은 기사 사진보다 더 낯설었다. 짙은 회색 슈트에는 흔한 장식 하나 없었다. 큰 체격을 과시하지도, 성공한 사람 특유의 여유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다만 한 번 들어온 시선이 곧장 채원에게 고정됐다.

“오랜만이야, 윤채원.”

낮고 정돈된 목소리였다.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대표님.”

8년이라는 시간을 한 호칭 안에 밀어 넣었다. 도현의 시선이 아주 잠깐 멎었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내 채권을 사셨더군요. 집하고 이 건물까지.”

“그래.”

“취미치고는 돈이 많이 드네요.”

“취미로 한 일 아니야.”

“그럼 복수인가요?”

민지가 채원의 팔을 건드리려다 그만두었다. 도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뜯지 않은 에너지바와 식어 버린 커피를 훑었다.

“오늘도 점심 안 먹었지.”

채원의 손이 멈췄다.

“내 식사 기록까지 채권에 딸려 왔어요?”

“오후 미팅을 앞두면 빈속으로 버티는 버릇은 예전에도 같았어. 긴장하면 카페인부터 찾는 것도.”

“기억력 자랑하러 왔다면 다른 날로 잡죠. 지금은 내 회사가 바빠서.”

“그래 보여.”

그는 비웃지 않았다. 그 사실이 채원을 더 불편하게 했다. 동정이라면 잘라 낼 수 있었고, 조롱이라면 돌려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도현은 직원 수, 미지급 거래 대금, 다음 달 생산에 필요한 최소 현금까지 정확히 짚었다.

“루네의 문제는 옷이 아니야. 3년 평균 재구매율은 동급 브랜드보다 높고 반품률은 낮아. 문제는 네가 아버지 회사 채무를 개인 명의로 떠안으면서 운영 현금까지 계속 빼 쓴 거지.”

“공개된 재무 자료만으로는 거기까지 모를 텐데요.”

“채권을 사기 전에 실사했어. 네가 직원 퇴직금과 거래처 대금을 먼저 갚았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확인했고.”

“그래서요. 기특하다고 유예 기간이라도 주시게요?”

“네가 기특해서 온 게 아니야.”

도현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살릴 가치가 있어서 왔어. 루네도, 너도.”

채원의 펜촉이 서류 위에 작은 점을 남겼다. 루네 뒤에 자신의 이름을 같은 무게로 놓은 도현의 말이 거슬렸다.

그때 민지가 끼어들었다.

“대표님, 채권 상환하고 임대차 문제를 함께 협의하러 오신 거라면 조건부터 말씀해 주세요.”

도현은 한지혁에게 눈짓했다. 검은 가죽 파일이 책상 위에 놓였다.

“개인 고금리 채무는 내가 소멸시킨다. 루네에는 긴급 운영자금 투자 심사를 열고, 결과가 날 때까지 이 건물에서 나갈 필요 없어. 살던 집도 당장 비우지 않아도 되고.”

조건만 들으면 구명줄이었다. 채원은 파일을 열지 않았다.

“대가는요?”

“30일.”

“무슨 뜻이죠?”

“한남동 내 집에서 나하고 살아.”

대표실이 고요해졌다. 민지가 노골적으로 도현을 훑었다. 이 남자가 지금 멀쩡한 정신인지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도현은 검은 파일을 채원 쪽으로 밀었다.

“공식 일정 세 번에 내 연인으로 동행해. 외부에서 도는 정략결혼설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해.”

“세상에 여자는 많을 텐데요.”

“내가 필요한 건 너야.”

도현은 한 치도 돌아가지 않았다.

채원은 그제야 계약서를 펼쳤다. 채무 소멸, 투자 검토, 임대차 유예. 눈앞이 어지러울 만큼 유리한 조항 아래에 동거와 연인 역할이 적혀 있었다. 침실 분리와 접촉에 관한 문장도 보였지만 자세히 읽지 않았다.

“내가 거절하면?”

“법정 유예 기간 이후 절차대로 처리해.”

“결국 쫓아내겠다는 말이네요.”

도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류 위에 얹었던 손이 무릎 위로 내려갔다.

“네가 어떤 대답을 해도 오늘 당장 길에 세우진 않아. 생각할 시간은 내일 오전까지 주지.”

“친절하시네.”

“네가 기억하는 내가 비겁했다면, 그 대가까지 계약서에 넣어.”

8년 전의 마지막 소문이 불쑥 되살아났다. 도현이 이태준의 투자금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는 말. 집안에 일이 터진 날, 교정을 헤매며 찾아도 끝내 만날 수 없었던 남자.

채원은 계약서를 덮었다.

“내가 당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예요?”

처음으로 도현의 눈에 감정이 드러났다. 8년 묵은 상처가 얇은 균열 사이로 비쳤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8년 전에 충분히 배웠어.”

“그런데도 같이 살자고요?”

“그래서 같이 살자는 거야.”

도현은 대답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지 않았다. 재촉도, 설득도 하지 않았다. 그 확신이 채원에게는 어떤 압박보다 무거웠다.

그녀 뒤의 유리벽 너머로 직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달 월급을 걱정하면서도 채원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들. 디자인실 행거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루네의 가을이 걸려 있었다.

채원은 파일을 집어 들었다.

“검토는 하죠.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고.”

“내일 10시. 수정할 게 있으면 직접 가져와.”

도현이 돌아서다 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8년 전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윤채원. 네 집을 비울지, 30일 동안 내 집으로 들어올지 선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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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 8년 만에 돌아온 집주인
윤채원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지 않았다.화면에는 루네의 지난 분기 재구매율이 떠 있었다. 광고비를 줄였는데도 단골은 남았다. 채원은 그 사실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은편의 투자사 상무가 자료를 덮기 전까지는.“브랜드 힘은 인정합니다. 윤 대표님 감각도 여전하고요.”칭찬 뒤에 붙는 말은 늘 같았다.“다만 지금은 위험 부담이 큽니다. 주거래 유통사 재계약도 확정되지 않았고, 단기 차입금 만기가 이번 주죠?”“이번 투자금은 생산 일정을 안정시키는 데 우선 쓰겠습니다. 가을 캡슐 컬렉션의 사전 반응도 지난 시즌보다 좋고요.”“현금이 마르기 전에 옷이 팔린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보장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죠. 이미 오른 값에 사는 사람만 있을 뿐.”상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원은 웃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려고 준비한 자리가 아니었다. 숫자로 가능성을 증명하러 왔고, 상대는 그 숫자보다 채무자의 이름을 먼저 보고 있었다.“오늘 안으로 조건부 확약이라도 필요합니다.”“죄송합니다. 저희 결정은 보류입니다.”완곡한 거절이었다.채원은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명함을 돌려받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검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보류하기 어려운 숫자를 들고 오죠.”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외울 만큼 자주 본 번호였다.“윤채원입니다.”―태강채권관리 박 과장입니다. 오늘 오후 4시로 상환 유예 기간이 종료됐습니다.로비의 시계는 4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이번 주 금요일까지 일부 상환하겠다고 전달했을 텐데요.”―기존 채권자가 내부 승인 전에 검토하던 유예안이라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양수인은 새 조건으로만 협의하겠다고 합니다.“누구로요?”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통지서는 회사로 보냈습니다. 확인하시는 게 빠르겠습니다.전화가 끊겼다. 채원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전에 정돈한 화장은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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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 · 30일 계약
“선택해.”그 말은 차도현이 떠난 뒤에도 대표실에 남아 있었다.채원은 밤새 계약서를 읽었다. 채무 양수 계약, 소멸 합의, 투자 검토 부속서까지 조항마다 색색의 메모지가 붙었다. 새벽 2시가 지나자 민지가 편의점 샌드위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먹으면서 해. 네가 쓰러지면 저 남자 집에 입주가 아니라 입원부터 하겠다.”“내가 입주한다고 했어?”“안 할 거야?”채원은 대답 대신 빨간 펜으로 한 문장을 그었다. ‘필요한 범위의 공개적 신체 접촉에 협조한다.’ 필요한 범위를 정하는 주체가 빠져 있었다.“할 거야.”채원은 이 거래가 공정하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가장 궁한 날 내민 조건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서명을 미루면 먼저 다치는 사람은 직원과 거래처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존심을 세울 말이 아니라, 불리한 거래 안에서도 빼앗기지 않을 조항이었다.다만 굴복한 채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대신 차도현이 생각한 계약은 아닐 거야.”오전 10시, 도현은 정확히 대표실에 나타났다. 어제와 다른 검은 슈트였고, 밤을 새운 흔적은 없었다. 채원의 앞에 쌓인 서류와 빈 커피 잔을 본 뒤 그가 말했다.“수정할 게 많나 보네.”“허점이 많더군요.”“들어 보지.”채원은 새로 작성한 부속 합의서를 펼쳤다.“첫째, 방은 층까지 분리합니다. 출입은 각자 허락을 받아야 하고요. 둘째, 연인 역할을 이유로 한 접촉은 매번 사전 동의를 받습니다. ‘필요한 범위’ 같은 편리한 표현은 삭제해요.”“동의해.”망설임 없는 답에 채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현은 반박당해 불쾌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순순히 끌려오지 않는 윤채원을 확인한 듯, 오히려 시선이 또렷해졌다.“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루네의 투자 심사는 이 계약과 완전히 분리합니다. 계약을 끝내거나 공개 일정에서 실수했다는 이유로 심사를 중단할 수 없어요. 경영권, 인사권, 디자인 권리에 아르덴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넣죠.”“투자 계약이 체결된다면 일반적인 주주 권한은 필요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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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 그의 연인으로 선 밤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계약 3일째가 되도록 그 문장은 채원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채원은 생각을 떨치듯 귀걸이를 채웠다. 오늘 동행할 갈라는 벤처 투자 업계와 패션계가 공동으로 여는 자선 행사였다. 도현이 말한 세 번의 공식 일정 가운데 첫 번째였다.드레스룸 문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준비됐어?”“잠깐만요.”채원은 거울 앞에서 옷자락을 한 번 정리했다. 협찬 목록에서 고르지 않고 루네의 미출시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검은 새틴 위로 비대칭 재단이 어깨선을 드러냈고, 움직일 때마다 안쪽의 짙은 청색이 가늘게 보였다. 위기를 감추려고 화려하게 장식한 옷이 아니라, 남길 선만 정확히 남긴 디자인이었다.문을 열자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던 손을 내렸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계약 연인에게 미흡한 점이라도?”도현의 시선이 채원의 어깨에서 허리로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없어.”“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는데.”“미흡해서 보는 게 아니야.”짧은 대답이 이상할 만큼 직접적이었다. 채원은 클러치를 집어 들며 시선을 피했다.“오늘 드레스는 협찬이 아니라 루네 제품이에요. 누가 물으면 다음 시즌 프리뷰라고 해요.”“샘플 번호 L-27.”채원이 돌아봤다.“그것까지 외웠어요?”“투자 검토 자료에 있었어.”도현은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검은 턱시도 위로 반듯하게 놓인 등을 보며 채원은 입술을 다물었다. 계약 상대의 옷을 확인하는 투자자는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샘플 번호까지 외우는 투자자는 드물었다.차 안에서 도현은 일정만 설명했다. 포토월, 주최 측 인사, 만찬. 필요한 순간에만 연인처럼 보이면 된다고 했다.“허리에 손을 대거나 팔을 잡아야 할 때는 먼저 신호할게.”“어떻게요?”“차에서 내리면 손을 내밀 거야. 로비까지는 사진이 따라붙을 테니까.”“통보예요?”“예고야. 놀라서 내 손을 쳐 내면 그것도 기사거리가 될 테고.”“그건 조금 보고 싶네요.”“나는 별로.”도현은 창밖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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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 너무 오래 기억한 남자
8년 전에도 네 편이었다.채원은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도현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먼저 차에 내려 뒷문만 열어 두었다.채원은 결국 묻지 않았다.그 말을 받아들일 자리가 자신 안에 아직 없었다.계약 4일째 아침, 채원이 주방에 내려왔을 때 도현은 재킷을 걸친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식탁에는 2인분의 아침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의 앞에는 물잔만 놓였다.“안 먹어요?”“8시 회의가 있어.”“씹는 데 회의 자료보다 오래 걸리는 음식은 없어 보이는데요.”도현이 시계를 보았다.“아침은 원래 안 먹어.”“남한테는 밤에 커피 마시지 말라더니, 본인은 공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채원은 토스트 한 장을 냅킨에 싸서 그의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투자자가 먼저 쓰러지면 심사는 누가 합니까.”도현의 시선이 토스트에서 채원에게 옮겨 왔다.“걱정해?”“이해관계 관리예요.”“그렇군.”말은 무심했지만 그는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채 자료를 넘기는 모습이 생각보다 순순해서 채원은 괜히 커피 머신으로 몸을 돌렸다.높은 선반에 놓인 텀블러를 꺼내려 손을 뻗는 순간 등 뒤에서 팔이 올라왔다. 도현이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둔 채 텀블러만 내려 주었다. 셔츠 소매에서 희미한 우디 향이 스쳤다.“말하면 꺼내 줄 텐데.”“내 키로도 충분해요.”채원이 돌아서자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그의 가슴이 있었다. 한 걸음 물러나려 했지만 뒤에는 조리대가 닿았다. 도현은 곧장 팔을 거두고 옆으로 비켜났다.“차 대표님, 이제 좀 비켜 주시겠어요?”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긴장하면 말이 더 정중해지는 것도 그대로네.”채원은 턱을 들었다.“사람 말투 분석이 취미예요?”“다른 사람 건 몰라.”도현은 재킷 단추를 잠갔다.“네 것만 기억나.”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채원은 한동안 커피를 내리지 못했다.그날 밤, 두 번째 공식 일정의 의상안을 확인하던 채원은 공용 드레스룸 안쪽에서 도현과 마주쳤다. 둘이 비키려 할 때마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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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 투자할 가치
“용기까지 내면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요.”채원이 서재 책상 위에 놓인 루네의 분석 자료를 덮었다. 표지에 찍힌 날짜는 3년 전이었다. 브랜드가 첫 쇼룸을 열기도 전, 채원이 직원 셋과 밤을 새워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던 무렵이었다.도현의 손끝이 닫힌 표지 위에 잠깐 머물렀다.“투자할 가치가 있었으니까.”“회사 얘기 말고요.”“그 답이 내일 네 숫자를 더럽히게 하고 싶지 않아.”“아주 편리하게 미루네요.”도현이 자료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내일 심사에는 네가 낸 자료만 올라가. 나는 질문도, 표결도 하지 않아.”“대표가 빠져도 돼요?”“내가 들어간 순간, 심사는 네 숫자보다 우리 관계부터 봤을 테니까.”계약 8일째 밤이었다.다음 날 오전, 아르덴파트너스의 투자심의실에는 일곱 명이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 맨 끝에 도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채원은 준비해 온 샘플 행어를 세우고도 한동안 그 빈 의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결에서 빠질 거라는 통보는 회의 시작 10분 전에 한지혁이 전했다.특혜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도현이 아예 나타나지 않자, 매끈하게 정리한 숫자 어딘가가 느슨해진 것처럼 기분이 거슬렸다.심사위원 한 명이 물었다.“윤 대표님 개인 채무와 거주 문제가 당사 대표와 얽혀 있습니다. 루네 투자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채원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스크린에 지분 구조와 자금 사용처가 떴다. 채원은 아르덴이 가져갈 수 있는 지분의 한도와 자신이 지킬 의결권, 디자인과 상표를 넘기지 않는 조건을 차례로 짚었다.“제 개인 사정은 투자 근거가 될 수도, 투자 철회 사유가 될 수도 없습니다. 아르덴이 사는 건 제 곤란이 아니라 루네가 앞으로 만들 현금 흐름이어야 하니까요.”다른 위원이 팔짱을 풀었다.“그 현금 흐름을 설명해 보시죠. 기존 백화점 매출이 빠지면 3개월 뒤 운전자금이 바닥납니다.”채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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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화 · 계약서에 없는 키스
계약 15일째 아침, 채원은 식탁 위 달력을 뒤집었다.검은 펜으로 그어진 날짜가 정확히 절반에 닿아 있었다. 남은 15칸을 세는 동안 등 뒤에서 토스터가 튀어 올랐다.도현은 평소처럼 커피만 들고 나갈 차림이었다. 그런데 채원의 자리에는 버터를 바르지 않은 토스트와 블루베리 잼, 껍질을 벗긴 복숭아가 놓여 있었다.“복숭아 껍질까지 벗겼네요.”채원이 괜히 말했다.“손에 과즙 묻는 걸 싫어하잖아.”“먹는 데 지장 없는데.”“알아.”도현은 어젯밤 일을 꺼내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말려 주던 손도, 거울 속에서 입술로 떨어졌던 시선도 없었던 일처럼 셔츠 단추를 잠갔다.채원은 잼을 바른 칼을 접시 끝에 반듯하게 놓았다.“차 대표님은 아침 안 먹잖아요.”“오늘은 먹어.”그가 맞은편에 앉아 토스트를 집었다. 무슨 일이든 결정한 뒤에야 행동하는 남자였다. 채원이 밤마다 식탁에 남겨 둔 샌드위치의 포장이 다음 날 비어 있던 것도, 주방 한쪽에 그녀가 마시는 원두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식탁의 폭이 전보다 좁아 보였다.“오늘 투자 조건 협상은 11시야.”도현이 말했다.“대표님은 또 빠지시고요?”“응. 협상 끝날 때까지 밖에 있을게.”“그게 맞겠죠.”“그럴 줄 알았어.”도현이 컵을 들자 채원은 복숭아 조각을 필요 이상으로 잘게 나눴다.“협상보다 복숭아가 더 긴장되나?”채원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아는 척하지 마요.”“이미 아는데 어떻게 그래.”그가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단정한 뒷모습이 사라진 뒤, 채원은 입도 대지 않은 복숭아를 포크로 오래 눌렀다.***조건 협상은 예상보다 거칠었다.아르덴 측은 30억 원을 제시하면서 매출 목표를 두 번 연속 놓치면 다음 투자자를 들일 때 먼저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채원은 그 문장을 세 번 고쳐 돌려보냈다.“목표를 못 맞췄다고 다음 자금줄까지 아르덴이 고르면, 루네는 한 번 흔들린 뒤 영원히 묶입니다. 시장 전체가 얼어붙어도 똑같고요.”담당 심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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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화 · 버린 사람과 버려진 사람
“내가 연장해 달라고 할 줄 알았어요?”채원의 목소리는 매끄러웠다. 손에 쥔 담요만 구겨져 있었다.“아니.”도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내가 그러고 싶어질 것 같아서.”채원은 대꾸하지 않고 담요를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돌아서는 등 뒤로 어떤 말도 따라오지 않았다.그날부터 사흘 동안 두 사람은 지나치게 예의 바르게 지냈다. 아침 식사는 각자 했고, 이동할 때는 한지혁이 보낸 일정만 확인했다. 도현은 늦게 돌아와도 채원의 방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키스 이전보다 정확한 거리였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계약 18일째, 루네의 신제품 사전 공개 행사가 열렸다.계약서에 적힌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개 동행이었다. 이번에는 도현의 행사가 아니라 채원의 무대였다. 그가 연인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투자자 자격으로 참석할 자리이기도 했다.세림리테일의 이탈을 뒤집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채원은 완제품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대신 12개 핵심 디자인의 제작 과정을 전시장 벽에 걸었다. 고객 투표로 소매와 단추 조합을 정하고, 현장에서 받은 주문 수치가 생산 순서에 반영되도록 했다.“옷을 파는 행사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 고객을 초대하겠다는 겁니다.”리허설 중 채원이 스태프들에게 말했다.“투표 결과는 20분마다 화면에 올려 주세요. 수치가 낮은 디자인도 숨기지 말고요. 우리가 재고를 줄일 수 있다는 근거가 될 테니까.”서민지가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편집숍 바이어 열세 명 참석 확인. 아르덴 쪽은 전략실장까지 왔고, 차 대표는 10분 뒤.”“초대한 사람이니 오겠죠.”“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채원이 차갑게 바라보자 민지가 어깨를 으쓱했다.“알았어. 입술 얘기는 안 할게.”“서민지.”“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민지는 웃음을 거두고 목소리를 낮췄다.“이태준도 왔어. 태강이 투자한 편집숍 대표 자격으로.”채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태준은 초대장을 보여 주며 여유롭게 들어오고 있었다. 내보내면 오히려 루네가 감추는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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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 8년 늦은 진실
도현은 화면을 오래 내려다봤다.행사가 끝난 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8년 동안 어긋나 있던 사실 하나가 작은 화면 안에서 뒤늦게 제자리를 찾았다.“원장 진위는 확인했습니까?”도현이 물었다.“서버 업체 세무 대리인과 은행 보관 자료를 대조했습니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박정우 교수도 입금 경위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오전에 뵙기로 했습니다.”한지혁의 대답이 끝나자 도현은 태블릿을 채원에게 건넸다. 태블릿을 놓는 동작이 평소보다 느렸다.“왜 말하지 않았어.”“말할 시간이 있었나요? 당신은 이미 떠났고, 나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는데.”“그전에는.”“당신이 알면 돈을 돌려줄 방법부터 찾을 것 같았어요.”채원은 화면을 껐다.“그리고 그건 적선이 아니었어요. 당신 알고리즘을 내 기획에 쓰고 싶었으니까 먼저 투자한 거였죠.”“망하면 네가 손해 보는 투자였어.”“투자는 원래 그래요.”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태블릿 모서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돈을 돌려줄 방법부터 찾았을 거라는 채원의 짐작을 그는 부정하지 못했다.“내일 같이 가요.”채원이 말했다.“나도 확인할 게 있으니까.”***박정우 교수는 대학 연구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두 사람을 맞았다.오래된 서류 상자에는 서버 견적서와 지원 신청서, 채원이 보낸 이메일이 회계 증빙으로 남아 있었다. 메일에는 팔찌 위탁 판매 영수증이 붙어 있었다. 판매 대금 2,100만 원 가운데 1,800만 원이 서버 비용으로 들어간 내역이었다.“외부 지원금으로 처리하려면 출처를 남겨야 했지. 채원 학생은 차도현 학생에게 주는 돈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가격을 매기지 않은 기술을 먼저 사는 돈이라고 했어.”도현은 영수증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었다.교수는 노트북을 돌려 화상 통화를 연결했다. 화면에는 당시 동아리 총무였던 김혜진이 앉아 있었다.“한 실장님이 제 연락처만 찾아 주셨어요. 기록은 제가 직접 보관한 겁니다.”혜진은 오래된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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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화 · 네가 없는 방식으로 널 지키는 법
“그래.”도현은 현관에서 비켜섰다.채원은 여행 가방을 끌고 그 앞을 지나갔다. 붙잡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수개월 동안 채권과 건물을 사들인 사람이 이렇게 순순히 길을 열어 줄 줄도 몰랐다.“차는 준비해 뒀어. 네가 원하는 곳까지만 데려다줄 거야. 기사도 싫으면 택시를 부르고.”“마지막까지 선택지를 주는 척하네요.”“그렇게 들려도 할 말 없어.”도현은 해명하지 않았다. 그 태도가 채원의 분노를 덜어 주지는 않았다.가방 안에서 전화가 울렸다. 서민지였다.―채원아, 브리에가 우리 캡슐 라인하고 똑같은 걸 풀었어. 룩북 엠바고가 방금 깨졌는데 실루엣만 비슷한 수준이 아니야. 봉제선이랑 안감 배색까지 같아.채원은 현관문을 연 채 물었다.“샘플은?”―3번실에 잠가 놨어. 공장하고 외주업체 메일도 보존 중이야. 저쪽 선주문은 사흘 뒤고.“아무한테도 원본 보내지 마. 지금 갈게.”전화를 끊자 도현이 말했다.“브리에는 태강이 지난달 인수한 회사야.”“인수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그것만. 디자인 유출은 지금 들었어.”“그럼 아르덴 쪽에 브리에가 태강 회사라는 것부터 공식으로 알리세요. 이번 판단에서 차 대표는 빠져야 하고요. 루네가 직접 메일 보낼 겁니다.”채원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벽에 세웠던 가방을 끌어 현관을 넘었다. 계약이 끝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루네 사무실은 새벽이 지나도록 환했다.서민지는 벽 한 면을 출력물로 채웠다. 왼쪽에는 루네의 개발 단계별 도식, 오른쪽에는 브리에가 배포한 룩북이 붙었다. 재킷의 비대칭 여밈, 손목 안쪽의 초승달 자수, 옷이 움직일 때만 드러나는 회청색 안감까지 일치했다.“외주 패턴실 두 곳, 원단사 한 곳, 촬영 대행사까지 자료 접근 권한이 있었어.”민지가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그중 패턴실 실장이 사흘 전에 퇴사했고. 새 직장은 브리에 협력사야.”채원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벽 앞을 오가며 날짜와 수정 흔적을 맞췄다.최초 스케치는 4개월 전이었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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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사랑으로 살 수 없는 것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열흘째 되는 아침, 채원은 오래 살던 집의 창문을 열었다.집주인은 여전히 도현의 개인 법인이었다. 그러나 채원이 돌아온 날 받은 것은 퇴거 통지가 아니라 주변 집들과 비슷한 보증금과 월세가 적힌 계약서였다. 1년 안에 직접 되살 수 있다는 문장도 한쪽에 붙어 있었다.채원은 계약서를 법무사에게 검토받은 뒤 서명했다. 월세 첫 회분도 자신의 계좌에서 보냈다.집 안에는 예전 가구가 그대로였지만 생활은 달라져 있었다. 새벽마다 울리던 채권자의 전화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이 고르지 않은 무가당 요구르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아무도 아침을 거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채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 한 조각을 끝까지 먹었다. 굳이 그 남자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후의 론칭을 버티려면 필요한 일이었다.“대표님, 베스타리테일 최종 계약서 왔습니다.”전화기 너머로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수료는?”“우리가 제시한 수수료로 받았어. 대신 첫 달 목표 수량은 조금 올렸고.”“받아. 해외몰은 반품 물류비 상한 조항 넣었는지 확인하고.”“넣었지. 그리고 아르덴 투자위원회 결과도 왔는데, 내가 읽어 줄까?”채원의 손이 컵 손잡이에서 멈췄다.“사무실에서 볼게.”민지가 짧게 웃었다.“사람하고 계약은 끝났어도 투자 심사는 끝까지 공적으로 보시겠다?”“공적인 걸 공적으로 보는 게 왜 흠이야.”“그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단정한 것도 흠은 아니지.”채원은 전화를 끊었지만 토스트가 전처럼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루네 사무실에 도착하자 책상 절반이 계약서로 덮여 있었다.베스타리테일은 온라인과 편집숍 유통을 맡고, 소형 공장 연합은 생산 물량을 보장했다. 외부 투자사인 서클벤처스는 공개 프레젠테이션 이후 먼저 연락해 왔다.서클벤처스에는 투자금을 먼저 회수할 권리와 약속한 지분을 내줬다. 대신 루네의 경영권과 디자인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 선을 그었다.아르덴의 투자도 승인됐다. 심사 의견서에는 루네의 강점뿐 아니라 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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