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가문 몰락 뒤 빚과 파산 위기의 패션 브랜드 ‘루네’를 떠안은 윤채원. 그녀 앞에 8년 전 가난한 장학생이었던 첫사랑 차도현이 성공한 투자사 대표이자 새 집주인으로 나타난다. 도현은 채무 소멸과 투자 심사를 조건으로 30일 계약 동거를 제안한다. 복수라 의심했던 채원은 과거의 거짓말과 사업 위기를 헤쳐 나가며, 계약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도현을 다시 선택한다.
View More윤채원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지 않았다.
화면에는 루네의 지난 분기 재구매율이 떠 있었다. 광고비를 줄였는데도 단골은 남았다. 채원은 그 사실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은편의 투자사 상무가 자료를 덮기 전까지는.
“브랜드 힘은 인정합니다. 윤 대표님 감각도 여전하고요.”
칭찬 뒤에 붙는 말은 늘 같았다.
“다만 지금은 위험 부담이 큽니다. 주거래 유통사 재계약도 확정되지 않았고, 단기 차입금 만기가 이번 주죠?”
“이번 투자금은 생산 일정을 안정시키는 데 우선 쓰겠습니다. 가을 캡슐 컬렉션의 사전 반응도 지난 시즌보다 좋고요.”
“현금이 마르기 전에 옷이 팔린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보장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죠. 이미 오른 값에 사는 사람만 있을 뿐.”
상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원은 웃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려고 준비한 자리가 아니었다. 숫자로 가능성을 증명하러 왔고, 상대는 그 숫자보다 채무자의 이름을 먼저 보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조건부 확약이라도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결정은 보류입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채원은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명함을 돌려받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보류하기 어려운 숫자를 들고 오죠.”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외울 만큼 자주 본 번호였다.
“윤채원입니다.”
―태강채권관리 박 과장입니다. 오늘 오후 4시로 상환 유예 기간이 종료됐습니다.
로비의 시계는 4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일부 상환하겠다고 전달했을 텐데요.”
―기존 채권자가 내부 승인 전에 검토하던 유예안이라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양수인은 새 조건으로만 협의하겠다고 합니다.
“누구로요?”
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통지서는 회사로 보냈습니다. 확인하시는 게 빠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채원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전에 정돈한 화장은 멀쩡했다. 몰락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안쪽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겉은 마지막까지 말끔했다.
택시 안에서 서민지에게 연락했다.
“민지야. 등기 우편 왔어?”
―응. 근데 너 놀라지 말고 와. 변호사님도 부르는 중이야.
민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루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퇴근하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채원이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대표실까지 지나가자 애써 시선을 피했다.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는 배려가 오히려 또렷했다.
민지가 문을 닫고 두꺼운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사무실 건물 소유권 이전 통지. 그리고 네 집 낙찰 이후 인도 협의 안내.”
“직원들한테는 어디까지 말했어?”
“건물주가 바뀐 것만. 이번 달 급여는 사흘 뒤에 나간다고 했고.”
“예정대로 보내. 샘플실 보증금 일부 돌려받으면 가능해.”
“그러면 다음 생산 계약금이 비어.”
“오늘 투자만 됐어도 둘 다 막았겠지.”
채원은 실패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 책상에 놓았다. 좌절을 헤아릴 시간에 무엇을 먼저 지킬지 정해야 했다. 이번에도 사람부터였다.
채원은 첫 장부터 끝까지 빠르게 읽었다. 루네가 세 들어 있는 청담동 건물은 에이원홀딩스가 매수해 소유권이 이전됐다.
자신이 살던 서래마을 빌라는 아버지 회사가 무너질 때 담보로 잡혔다가 결국 경매로 넘어갔다. 소유 법인은 달랐지만 등기상 업무 연락처가 같았다.
아르덴파트너스.
“벤처 투자사가 왜 부동산 두 채를 동시에 사?”
민지가 낮게 물었다.
“투자 목적이면 수익성 좋은 물건부터 샀겠지.”
채원은 다음 서류를 넘겼다. 직원과 거래처 지급을 위해 본인 명의로 진 개인 고금리 차입채무와 루네의 단기 대출 일부를 양수했다는 통지서였다. 그제야 흩어진 조각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누군가 돈을 벌기 위해 산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닿는 길을 골라 산 것이다.
맨 아래 적힌 대표자 이름에서 시선이 멈췄다.
차도현.
기억 속 이름은 낡은 후드 소매와 함께 남아 있었다. 창업 동아리방 구석, 남들 앞에서 말할 때마다 큰 안경을 고쳐 쓰던 마른 남자. 발표 자료를 건네면 고맙다는 말 대신 밤새 수정한 데이터로 답했던 사람.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돈을 택해 사라진 사람.
“설마 네가 아는 그 차도현?”
“동명이인이겠지.”
그렇게 말했지만 채원은 이미 아르덴파트너스 대표의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화면 속 남자는 기억과 닮은 곳이 거의 없었다. 구부정했던 어깨는 반듯했고, 안경 뒤에 숨던 눈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여러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를 수십 배로 키운 투자자. 판단이 빠르고, 손절은 더 빠르다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사진 아래의 이름만 같았다.
“차도현 맞네.”
민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인터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대표님, 아르덴파트너스에서 오셨습니다.
채원은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들어오시라고 해.”
문이 열리고 남자 둘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한지혁 전략실장이 명함을 건넸고, 뒤따른 남자가 대표실 한가운데 멈췄다.
차도현은 기사 사진보다 더 낯설었다. 짙은 회색 슈트에는 흔한 장식 하나 없었다. 큰 체격을 과시하지도, 성공한 사람 특유의 여유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다만 한 번 들어온 시선이 곧장 채원에게 고정됐다.
“오랜만이야, 윤채원.”
낮고 정돈된 목소리였다.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대표님.”
8년이라는 시간을 한 호칭 안에 밀어 넣었다. 도현의 시선이 아주 잠깐 멎었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내 채권을 사셨더군요. 집하고 이 건물까지.”
“그래.”
“취미치고는 돈이 많이 드네요.”
“취미로 한 일 아니야.”
“그럼 복수인가요?”
민지가 채원의 팔을 건드리려다 그만두었다. 도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뜯지 않은 에너지바와 식어 버린 커피를 훑었다.
“오늘도 점심 안 먹었지.”
채원의 손이 멈췄다.
“내 식사 기록까지 채권에 딸려 왔어요?”
“오후 미팅을 앞두면 빈속으로 버티는 버릇은 예전에도 같았어. 긴장하면 카페인부터 찾는 것도.”
“기억력 자랑하러 왔다면 다른 날로 잡죠. 지금은 내 회사가 바빠서.”
“그래 보여.”
그는 비웃지 않았다. 그 사실이 채원을 더 불편하게 했다. 동정이라면 잘라 낼 수 있었고, 조롱이라면 돌려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도현은 직원 수, 미지급 거래 대금, 다음 달 생산에 필요한 최소 현금까지 정확히 짚었다.
“루네의 문제는 옷이 아니야. 3년 평균 재구매율은 동급 브랜드보다 높고 반품률은 낮아. 문제는 네가 아버지 회사 채무를 개인 명의로 떠안으면서 운영 현금까지 계속 빼 쓴 거지.”
“공개된 재무 자료만으로는 거기까지 모를 텐데요.”
“채권을 사기 전에 실사했어. 네가 직원 퇴직금과 거래처 대금을 먼저 갚았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확인했고.”
“그래서요. 기특하다고 유예 기간이라도 주시게요?”
“네가 기특해서 온 게 아니야.”
도현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살릴 가치가 있어서 왔어. 루네도, 너도.”
채원의 펜촉이 서류 위에 작은 점을 남겼다. 루네 뒤에 자신의 이름을 같은 무게로 놓은 도현의 말이 거슬렸다.
그때 민지가 끼어들었다.
“대표님, 채권 상환하고 임대차 문제를 함께 협의하러 오신 거라면 조건부터 말씀해 주세요.”
도현은 한지혁에게 눈짓했다. 검은 가죽 파일이 책상 위에 놓였다.
“개인 고금리 채무는 내가 소멸시킨다. 루네에는 긴급 운영자금 투자 심사를 열고, 결과가 날 때까지 이 건물에서 나갈 필요 없어. 살던 집도 당장 비우지 않아도 되고.”
조건만 들으면 구명줄이었다. 채원은 파일을 열지 않았다.
“대가는요?”
“30일.”
“무슨 뜻이죠?”
“한남동 내 집에서 나하고 살아.”
대표실이 고요해졌다. 민지가 노골적으로 도현을 훑었다. 이 남자가 지금 멀쩡한 정신인지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도현은 검은 파일을 채원 쪽으로 밀었다.
“공식 일정 세 번에 내 연인으로 동행해. 외부에서 도는 정략결혼설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해.”
“세상에 여자는 많을 텐데요.”
“내가 필요한 건 너야.”
도현은 한 치도 돌아가지 않았다.
채원은 그제야 계약서를 펼쳤다. 채무 소멸, 투자 검토, 임대차 유예. 눈앞이 어지러울 만큼 유리한 조항 아래에 동거와 연인 역할이 적혀 있었다. 침실 분리와 접촉에 관한 문장도 보였지만 자세히 읽지 않았다.
“내가 거절하면?”
“법정 유예 기간 이후 절차대로 처리해.”
“결국 쫓아내겠다는 말이네요.”
도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류 위에 얹었던 손이 무릎 위로 내려갔다.
“네가 어떤 대답을 해도 오늘 당장 길에 세우진 않아. 생각할 시간은 내일 오전까지 주지.”
“친절하시네.”
“네가 기억하는 내가 비겁했다면, 그 대가까지 계약서에 넣어.”
8년 전의 마지막 소문이 불쑥 되살아났다. 도현이 이태준의 투자금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는 말. 집안에 일이 터진 날, 교정을 헤매며 찾아도 끝내 만날 수 없었던 남자.
채원은 계약서를 덮었다.
“내가 당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예요?”
처음으로 도현의 눈에 감정이 드러났다. 8년 묵은 상처가 얇은 균열 사이로 비쳤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8년 전에 충분히 배웠어.”
“그런데도 같이 살자고요?”
“그래서 같이 살자는 거야.”
도현은 대답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지 않았다. 재촉도, 설득도 하지 않았다. 그 확신이 채원에게는 어떤 압박보다 무거웠다.
그녀 뒤의 유리벽 너머로 직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달 월급을 걱정하면서도 채원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들. 디자인실 행거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루네의 가을이 걸려 있었다.
채원은 파일을 집어 들었다.
“검토는 하죠.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고.”
“내일 10시. 수정할 게 있으면 직접 가져와.”
도현이 돌아서다 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8년 전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윤채원. 네 집을 비울지, 30일 동안 내 집으로 들어올지 선택해.”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유독 넓고 거대한 통유리창은 한강의 잔잔한 밤 풍경과 강변북로를 바쁘게 오가는 차량들의 불빛을 가감 없이 비추고 있었다.반년 전, 윤채원이 이 낯설고 거대한 공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온몸으로 느꼈던 기이하고 서늘한 이질감은 이제 집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당시에는 먼지 한 점 없이 차갑고 미끈하게 빛나기만 하던 백색 대리석 바닥 위에는 채원이 루네의 가을 시즌 컬렉션 작업실에서 직접 고르고 손수 바느질해 만든 차분한 오트밀 색의 두툼하고 포근한 리넨 러그가 넓게 깔려 있었다.자로 잰 듯이 지나치게 단정하기만 하던 소파 위에는 채원이 퇴근길에 들고 온 의류 유통 서적과 도현이 보던 경영 및 투자 분석 자료, 그리고 자유롭게 갈겨쓴 스케치북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채 놓여 있었다.차가운 박제처럼 온기 한 조각 없던 거대한 거실에 마침내 서서히 사람의 손때와 살아가는 아늑한 내음, 그리고 두 남녀의 온전한 체온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채원은 소파 끝에 무릎을 모으고 편안하게 걸터앉아 유리 탁자 위에 놓인 투명한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투명한 그릇 안에는 껍질이 말끔하고 부드럽게 벗겨진 분홍빛 복숭아 조각들이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정갈하게 손질되어 담겨 있었다. 채원은 과즙이 손가락에 조금이라도 끈적하게 묻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대학 시절 동아리방 구석에서 과일 샐러드를 대충 집어먹다 알레르기 소동으로 응급실까지 가야 했던 해프닝 이후로 생긴 나름의 트라우마이자 고질적인 버릇이었다.차도현은 복숭아가 나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언제나 한결같이 부엌에서 과도를 찾아 쥐고 하얀 손가락 끝으로 껍질을 정성스레 깎아 채원의 접시를 가득 채워두곤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또 긴장해서 손가락 아프게 손톱 누르고 있지 말고.”어느새 샤워를 마쳤는지, 가벼운 네이비색 가운 차림으로 다가온 도현이 소파 뒤편에서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여 채원의 가냘픈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서 방
낮, 아르덴파트너스 본사 17층 대회의실.유리창 너머로 눈이 시릴 만큼 정제된 한낮의 햇살이 길쭉한 대리석 테이블 위로 부서져 내렸다. 에어컨이 조용히 돌아가는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차갑고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루네의 서유럽 유통망 확장 및 파리 수선 거점(Atelier) 건립 안건을 두고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였다.“윤 대표님, 제안하신 프랑스 파리 현지 수선 및 물류 통합 센터 건립 계획은 아르덴의 위험 관리 가이드라인을 명백히 초과합니다. 현지 아웃소싱 파트너십 대신 직영 공간을 짓겠다는 고집은, 초기 고정비 투자 대비 예상 회수 기간을 과도하게 늘릴 뿐입니다.”테이블 상석에 앉은 차도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루네의 제안서를 넘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적인 온기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각 잡힌 다크 네이비 슈트, 그리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매듭지어진 타이가 완벽한 투자사 대표로서의 냉철함을 대변했다.맞은편에 앉은 윤채원은 턱을 약간 든 채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녀 역시 루네의 미출시 라인인 차분한 차콜 그레이 린넨 재킷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채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한 번 돌려 로고가 아래로 향하게 놓았다. 예전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적인 버릇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전히 분석하고 다음 수를 놓기 전의 프로페셔널한 호흡이었다.“차 대표님, 단순한 물류비 산출 공식으로만 접근하면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서유럽 바이어들이 루네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속 가능한 수선 보장’이라는 신뢰에 있습니다. 현지 파트너십에 위탁할 경우, 당사 특유의 초승달 자수 복원과 비대칭 패턴의 정밀 수선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어 발생하는 장기적 반품률 상승과 고객 이탈 비용은 아르덴의 그 똑똑한 수식에 반영되어 있습니까?”양보 없는 공방에 회의실 배석자들은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루네의 운영총괄 서민
서래마을의 고요한 밤은 깊었다. 윤채원이 마침내 제 손으로 다시 사들인 옛집은 한남동의 모델하우스처럼 매끄러운 펜트하우스와 달리, 벽지 틈새마다 어릴 적 살던 체온과 옛 가구의 눅눅한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도망치듯 이 문을 나섰던 그 새벽으로부터 정확히 8년이 흐른 날이었다. 감정평가사와 대출 심사 서류에 스스로 서명하고 매매 대금을 모두 송금한 날, 채원은 퇴근하자마자 텅 빈 거실 마룻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제 이름 석 자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등기부등본 원본을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었다. 돌려받은 구원이 아니었다. 온전히 제 실력과 땀으로 버티며 직접 사들인 온전한 제 집이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빛바랜 노란 상자들이 성벽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채원은 얇은 실크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아직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 피로가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이상할 만큼 잠은 오지 않았다. 손끝에 가볍게 닿는 물건마다 해묵은 기억들이 쏟아져 나와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상자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수납함 하나가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대학 시절의 전공 책 몇 권과 모서리가 헤진 낡은 크로키북,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손때가 아주 깊게 묻은 파란색 클리어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의 숨결이 짧게 멎었다. 그것은 루네(LUNE)의 최초 구상안이 담겨 있던 원본 파일이었다. 파일 첫 페이지에는 8년 전, 대학 도서관 뒤뜰의 어둑한 벤치에 앉아 그녀가 정갈한 검은색 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기술은 단순히 미래의 숫자를 맞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제때, 가장 알맞은 온도로 만들게 해야 한다. 차도현의 수요 예측 모델은 그 아름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그리고 그 아래에는 도현의 단정하면서도 묵직한
채원이 계약 없이 도현에게 돌아간 지 6개월 뒤, 루네의 새 시즌 프레젠테이션은 한남동의 오래된 미술관에서 열렸다.반년 전 긴급 공개회에서는 작업대와 실패한 샘플을 내놓았다. 이번 무대에는 그때 선주문한 고객들이 실제로 입고 돌아온 옷도 함께 걸렸다. 소매 끝을 수선한 재킷, 단추를 바꿔 다시 입은 코트, 남은 원단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가 새 컬렉션 사이에 놓였다.마지막 모델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채원은 검은 팬츠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화면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고객이 보낸 수선 전후 사진이 떴다.“루네는 새 옷을 더 빨리 사게 만드는 대신, 이미 산 옷을 다시 선택할 이유를 만들겠습니다. 수선에서 모인 기록은 다음 패턴에 반영하고, 회수한 원단은 소량 주문에 씁니다.”채원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지난달 첫 원금을 갚고 받은 확인서가 접혀 있었다. 무대에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 보여 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다음 계절의 옷이었다.무대에 오르기 전 민지가 건넨 등기 봉투에는 태강 측과의 손해배상 조정 성립서가 들어 있었다.메일 무단 열람 기록과 패턴실 실장의 진술, 자문료 지급 내역이 함께 증거로 인정됐다. 법원은 브리에의 문제 제품 판매를 금지했고, 태강은 폐기 비용과 루네의 손해 일부를 배상하기로 했다.태준은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채원은 그 이름을 론칭 홍보에 쓰지 않았다.“보도 자료는 정말 안 내?”민지가 물었다.“문의가 오면 판결과 조정 내용만 답해. 새 시즌 첫 문장을 이태준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배상금은 예정대로?”“야근 수당하고 협력 공장 손실분부터 지급해. 남는 건 부채 상환 계정에 넣고.”8년 전의 거짓말은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었다. 대신 동문회에는 공개에 합의한 사실확인서와 관련자 진술 요약본이 전달됐다. ‘윤채원이 장학생의 고백을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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