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삼킨 밤의 계약

너를 삼킨 밤의 계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By:  6jay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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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몰락 뒤 빚과 파산 위기의 패션 브랜드 ‘루네’를 떠안은 윤채원. 그녀 앞에 8년 전 가난한 장학생이었던 첫사랑 차도현이 성공한 투자사 대표이자 새 집주인으로 나타난다. 도현은 채무 소멸과 투자 심사를 조건으로 30일 계약 동거를 제안한다. 복수라 의심했던 채원은 과거의 거짓말과 사업 위기를 헤쳐 나가며, 계약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도현을 다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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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1화 · 보류의 대가

윤채원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지 않았다.

화면에는 루네의 지난 분기 재구매율이 떠 있었다. 광고비를 줄였는데도 단골은 남았다. 채원은 그 사실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은편의 투자사 상무가 자료를 덮기 전까지는.

“브랜드 힘은 인정합니다. 윤 대표님 감각도 여전하고요.”

칭찬 뒤에 붙는 말은 늘 같았다.

“다만 지금은 위험 부담이 큽니다. 주거래 유통사 재계약도 확정되지 않았고, 단기 차입금 만기가 이번 주죠?”

“이번 투자금은 생산 일정을 안정시키는 데 우선 쓰겠습니다. 가을 캡슐 컬렉션의 사전 반응도 지난 시즌보다 좋고요.”

“현금이 마르기 전에 옷이 팔린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보장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죠. 이미 오른 값에 사는 사람만 있을 뿐.”

상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원은 웃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려고 준비한 자리가 아니었다. 숫자로 가능성을 증명하러 왔고, 상대는 그 숫자보다 채무자의 이름을 먼저 보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조건부 확약이라도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결정은 보류입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채원은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명함을 돌려받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보류하기 어려운 숫자를 들고 오죠.”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외울 만큼 자주 본 번호였다.

“윤채원입니다.”

―태강채권관리 박 과장입니다. 오늘 오후 4시로 상환 유예 기간이 종료됐습니다.

로비의 시계는 4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일부 상환하겠다고 전달했을 텐데요.”

―기존 채권자가 내부 승인 전에 검토하던 유예안이라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양수인은 새 조건으로만 협의하겠다고 합니다.

“누구로요?”

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통지서는 회사로 보냈습니다. 확인하시는 게 빠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채원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전에 정돈한 화장은 멀쩡했다. 몰락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안쪽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겉은 마지막까지 말끔했다.

택시 안에서 서민지에게 연락했다.

“민지야. 등기 우편 왔어?”

―응. 근데 너 놀라지 말고 와. 변호사님도 부르는 중이야.

민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루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퇴근하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채원이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대표실까지 지나가자 애써 시선을 피했다.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는 배려가 오히려 또렷했다.

민지가 문을 닫고 두꺼운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사무실 건물 소유권 이전 통지. 그리고 네 집 낙찰 이후 인도 협의 안내.”

“직원들한테는 어디까지 말했어?”

“건물주가 바뀐 것만. 이번 달 급여는 사흘 뒤에 나간다고 했고.”

“예정대로 보내. 샘플실 보증금 일부 돌려받으면 가능해.”

“그러면 다음 생산 계약금이 비어.”

“오늘 투자만 됐어도 둘 다 막았겠지.”

채원은 실패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 책상에 놓았다. 좌절을 헤아릴 시간에 무엇을 먼저 지킬지 정해야 했다. 이번에도 사람부터였다.

채원은 첫 장부터 끝까지 빠르게 읽었다. 루네가 세 들어 있는 청담동 건물은 에이원홀딩스가 매수해 소유권이 이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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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 보류의 대가
윤채원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지 않았다.화면에는 루네의 지난 분기 재구매율이 떠 있었다. 광고비를 줄였는데도 단골은 남았다. 채원은 그 사실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은편의 투자사 상무가 자료를 덮기 전까지는.“브랜드 힘은 인정합니다. 윤 대표님 감각도 여전하고요.”칭찬 뒤에 붙는 말은 늘 같았다.“다만 지금은 위험 부담이 큽니다. 주거래 유통사 재계약도 확정되지 않았고, 단기 차입금 만기가 이번 주죠?”“이번 투자금은 생산 일정을 안정시키는 데 우선 쓰겠습니다. 가을 캡슐 컬렉션의 사전 반응도 지난 시즌보다 좋고요.”“현금이 마르기 전에 옷이 팔린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보장이 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죠. 이미 오른 값에 사는 사람만 있을 뿐.”상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원은 웃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려고 준비한 자리가 아니었다. 숫자로 가능성을 증명하러 왔고, 상대는 그 숫자보다 채무자의 이름을 먼저 보고 있었다.“오늘 안으로 조건부 확약이라도 필요합니다.”“죄송합니다. 저희 결정은 보류입니다.”완곡한 거절이었다.채원은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명함을 돌려받는 동작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검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보류하기 어려운 숫자를 들고 오죠.”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외울 만큼 자주 본 번호였다.“윤채원입니다.”―태강채권관리 박 과장입니다. 오늘 오후 4시로 상환 유예 기간이 종료됐습니다.로비의 시계는 4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이번 주 금요일까지 일부 상환하겠다고 전달했을 텐데요.”―기존 채권자가 내부 승인 전에 검토하던 유예안이라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양수인은 새 조건으로만 협의하겠다고 합니다.“누구로요?”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통지서는 회사로 보냈습니다. 확인하시는 게 빠르겠습니다.전화가 끊겼다. 채원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전에 정돈한 화장은 멀쩡했다. 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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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 · 한 사람을 향한 매입
자신이 살던 서래마을 빌라는 아버지 회사가 무너질 때 담보로 잡혔다가 결국 경매로 넘어갔다. 소유 법인은 달랐지만 등기상 업무 연락처가 같았다.아르덴파트너스.“벤처 투자사가 왜 부동산 두 채를 동시에 사?”민지가 낮게 물었다.“투자 목적이면 수익성 좋은 물건부터 샀겠지.”채원은 다음 서류를 넘겼다. 직원과 거래처 지급을 위해 본인 명의로 진 개인 고금리 차입채무와 루네의 단기 대출 일부를 양수했다는 통지서였다. 그제야 흩어진 조각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누군가 돈을 벌기 위해 산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닿는 길을 골라 산 것이다.맨 아래 적힌 대표자 이름에서 시선이 멈췄다.차도현.기억 속 이름은 낡은 후드 소매와 함께 남아 있었다. 창업 동아리방 구석, 남들 앞에서 말할 때마다 큰 안경을 고쳐 쓰던 마른 남자. 발표 자료를 건네면 고맙다는 말 대신 밤새 수정한 데이터로 답했던 사람.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돈을 택해 사라진 사람.“설마 네가 아는 그 차도현?”“동명이인이겠지.”그렇게 말했지만 채원은 이미 아르덴파트너스 대표의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화면 속 남자는 기억과 닮은 곳이 거의 없었다. 구부정했던 어깨는 반듯했고, 안경 뒤에 숨던 눈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여러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를 수십 배로 키운 투자자. 판단이 빠르고, 손절은 더 빠르다는 평가가 따라붙었다.사진 아래의 이름만 같았다.“차도현 맞네.”민지가 작게 중얼거렸다.인터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대표님, 아르덴파트너스에서 오셨습니다.채원은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들어오시라고 해.”문이 열리고 남자 둘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한지혁 전략실장이 명함을 건넸고, 뒤따른 남자가 대표실 한가운데 멈췄다.차도현은 기사 사진보다 더 낯설었다. 짙은 회색 슈트에는 흔한 장식 하나 없었다. 큰 체격을 과시하지도, 성공한 사람 특유의 여유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다만 한 번 들어온 시선이 곧장 채원에게 고정됐다.“오랜만이야, 윤채원.”낮고 정돈된 목소리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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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 30일짜리 선택
“공개된 재무 자료만으로는 거기까지 모를 텐데요.”“채권을 사기 전에 실사했어. 네가 직원 퇴직금과 거래처 대금을 먼저 갚았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확인했고.”“그래서요. 기특하다고 유예 기간이라도 주시게요?”“네가 기특해서 온 게 아니야.”도현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살릴 가치가 있어서 왔어. 루네도, 너도.”채원의 펜촉이 서류 위에 작은 점을 남겼다. 루네 뒤에 자신의 이름을 같은 무게로 놓은 도현의 말이 거슬렸다.그때 민지가 끼어들었다.“대표님, 채권 상환하고 임대차 문제를 함께 협의하러 오신 거라면 조건부터 말씀해 주세요.”도현은 한지혁에게 눈짓했다. 검은 가죽 파일이 책상 위에 놓였다.“개인 고금리 채무는 내가 소멸시킨다. 루네에는 긴급 운영자금 투자 심사를 열고, 결과가 날 때까지 이 건물에서 나갈 필요 없어. 살던 집도 당장 비우지 않아도 되고.”조건만 들으면 구명줄이었다. 채원은 파일을 열지 않았다.“대가는요?”“30일.”“무슨 뜻이죠?”“한남동 내 집에서 나하고 살아.”대표실이 고요해졌다. 민지가 노골적으로 도현을 훑었다. 이 남자가 지금 멀쩡한 정신인지 확인하려는 눈이었다.도현은 검은 파일을 채원 쪽으로 밀었다.“공식 일정 세 번에 내 연인으로 동행해. 외부에서 도는 정략결혼설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해.”“세상에 여자는 많을 텐데요.”“내가 필요한 건 너야.”도현은 한 치도 돌아가지 않았다.채원은 그제야 계약서를 펼쳤다. 채무 소멸, 투자 검토, 임대차 유예. 눈앞이 어지러울 만큼 유리한 조항 아래에 동거와 연인 역할이 적혀 있었다. 침실 분리와 접촉에 관한 문장도 보였지만 자세히 읽지 않았다.“내가 거절하면?”“법정 유예 기간 이후 절차대로 처리해.”“결국 쫓아내겠다는 말이네요.”도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류 위에 얹었던 손이 무릎 위로 내려갔다.“네가 어떤 대답을 해도 오늘 당장 길에 세우진 않아. 생각할 시간은 내일 오전까지 주지.”“친절하시네.”“네가 기억하는 내가 비겁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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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 차도현의 조건
“선택해.”그 말은 차도현이 떠난 뒤에도 대표실에 남아 있었다.채원은 밤새 계약서를 읽었다. 채무 양수 계약, 소멸 합의, 투자 검토 부속서까지 조항마다 색색의 메모지가 붙었다. 새벽 2시가 지나자 민지가 편의점 샌드위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먹으면서 해. 네가 쓰러지면 저 남자 집에 입주가 아니라 입원부터 하겠다.”“내가 입주한다고 했어?”“안 할 거야?”채원은 대답 대신 빨간 펜으로 한 문장을 그었다. ‘필요한 범위의 공개적 신체 접촉에 협조한다.’ 필요한 범위를 정하는 주체가 빠져 있었다.“할 거야.”채원은 이 거래가 공정하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가장 궁한 날 내민 조건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서명을 미루면 먼저 다치는 사람은 직원과 거래처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존심을 세울 말이 아니라, 불리한 거래 안에서도 빼앗기지 않을 조항이었다.다만 굴복한 채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대신 차도현이 생각한 계약은 아닐 거야.”오전 10시, 도현은 정확히 대표실에 나타났다. 어제와 다른 검은 슈트였고, 밤을 새운 흔적은 없었다. 채원의 앞에 쌓인 서류와 빈 커피 잔을 본 뒤 그가 말했다.“수정할 게 많나 보네.”“허점이 많더군요.”“들어 보지.”채원은 새로 작성한 부속 합의서를 펼쳤다.“첫째, 방은 층까지 분리합니다. 출입은 각자 허락을 받아야 하고요. 둘째, 연인 역할을 이유로 한 접촉은 매번 사전 동의를 받습니다. ‘필요한 범위’ 같은 편리한 표현은 삭제해요.”“동의해.”망설임 없는 답에 채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현은 반박당해 불쾌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순순히 끌려오지 않는 윤채원을 확인한 듯, 오히려 시선이 또렷해졌다.“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루네의 투자 심사는 이 계약과 완전히 분리합니다. 계약을 끝내거나 공개 일정에서 실수했다는 이유로 심사를 중단할 수 없어요. 경영권, 인사권, 디자인 권리에 아르덴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넣죠.”“투자 계약이 체결된다면 일반적인 주주 권한은 필요해.”“재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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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 한남동의 첫 저녁
도현이 산 것은 시간이었다. 누구의 시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채무 소멸은 서명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는 거죠?”“응.”“확인서부터 주세요.”한지혁이 준비해 온 공증 서류를 건넸다. 채원은 법률대리인과 세무대리인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빚이 없어지면서 새로 내야 할 세금과, 그것을 나눠 낼 때 매달 감당할 금액까지 확인한 뒤에야 이름을 썼다.윤채원.도현도 개인 계약 당사자로 그 아래 서명했다. 채무 소멸 부속서에는 채권자인 디에이치브리지의 법인 인감과 ‘대표이사 차도현’이라는 자격 표시가 따로 찍혀 있었다. 차도현이라는 세 글자가 채원의 이름과 나란히 놓이자 기묘하게 오래된 약속처럼 보였다.“오늘이 1일째입니다. 30일째 24시에 자동 종료.”“알아.”“잊지 말라고 확인한 거예요.”도현은 막 닫으려던 펜을 멈췄다.“내가 날짜를 잊을 것 같아?”그 시선 앞에서 채원이 먼저 서류를 거두었다.***짐은 여행용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채원은 집을 빼는 게 아니라 30일 동안 자리를 옮기는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인했다. 옷 몇 벌과 노트북, 스케치북을 담았다. 민지는 현관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봤다.“불편하면 바로 나와. 회사 회의실에 간이침대 놔 줄 테니까.”“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하겠어?”“차도현이 잡아먹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야. 넌 버티겠다고 결심하면 네 마음부터 굶기잖아.”채원이 가방 지퍼를 닫았다.“30일뿐이야.”“그래. 그런데 그 남자는 30일짜리 얼굴이 아니던데.”무슨 얼굴이냐고 묻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도현이 보낸 기사가 와 있었다. 채원은 마지막으로 거실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회사가 무너지고 남은 것들을 정리한 뒤 간신히 지켜 낸 집이었다. 그것마저 이제 도현의 소유였다.“반드시 다시 올 거야.”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선언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한남동 펜트하우스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와 낮은 가구, 흠집 하나 없는 밝은 돌 바닥. 모델하우스처럼 완벽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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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화 · 빛바랜 사진 속의 그녀
저녁 식탁에는 지나치게 맵거나 단 음식이 없었다. 담백한 흰살생선과 구운 채소, 소스가 따로 놓인 샐러드. 채원은 음식보다 맞은편 남자를 관찰했다. 도현은 식사 속도가 빨랐고, 휴대전화가 몇 번 울려도 뒤집어 둔 채 확인하지 않았다.“평소에도 이렇게 차려 먹어요?”“아니.”“그럼 요리사에게 내 취향도 알려 줬겠네요.”“맵고 단 소스를 싫어하고, 드레싱은 따로. 틀렸어?”“맞아서 불쾌하다고 하면 이상하겠죠.”“이상하지 않아.”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네가 기억하지 않는 일을 내가 기억한다고 해서, 반가워할 의무는 없으니까.”채원은 포크 끝으로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잘랐다. 예전의 도현은 이런 문장을 한 번에 말하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이다 노트북 화면으로 도망가곤 했다.“많이 달라졌네요.”“너도.”“실망했어요?”“왜?”“차 대표님 기억 속 윤채원은 빚 독촉 받으면서 남의 집에 들어오는 여자는 아니었을 테니까.”도현이 포크를 내려놓았다.“내 기억 속 윤채원은 서버가 세 번 끊긴 발표에서도 끝까지 투자자를 설득했어. 지금도 똑같아.”채원의 목 안쪽이 따끔해졌다. 동정은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되고 정확한 평가였다.“그때 일은 잘도 기억하네요.”“잊을 이유가 없었어.”도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는 머신 오른쪽 두 번째 칸. 산미 없는 원두로 바꿔 뒀어. 하지만 밤 8시 이후엔 디카페인 마셔.”“그것도 기억해요?”“밤에 카페인 마시면 새벽까지 패션쇼 영상을 돌려 보잖아. 잠이 안 온다고 하면서.”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무심했다. 그러나 채원은 한동안 식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8년 전 자신은 그와 많은 말을 나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기획을 설명했고, 발표를 함께 준비했고, 가끔 늦은 시간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다. 채원에게는 바닥까지 무너진 인생 앞에서 희미해진 한 계절이었다.도현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새벽 1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채원은 물을 찾으러 나왔다가 복도 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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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화 · 가십의 한가운데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계약 3일째가 되도록 그 문장은 채원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채원은 생각을 떨치듯 귀걸이를 채웠다. 오늘 동행할 갈라는 벤처 투자 업계와 패션계가 공동으로 여는 자선 행사였다. 도현이 말한 세 번의 공식 일정 가운데 첫 번째였다.드레스룸 문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준비됐어?”“잠깐만요.”채원은 거울 앞에서 옷자락을 한 번 정리했다. 협찬 목록에서 고르지 않고 루네의 미출시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검은 새틴 위로 비대칭 재단이 어깨선을 드러냈고, 움직일 때마다 안쪽의 짙은 청색이 가늘게 보였다. 위기를 감추려고 화려하게 장식한 옷이 아니라, 남길 선만 정확히 남긴 디자인이었다.문을 열자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던 손을 내렸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계약 연인에게 미흡한 점이라도?”도현의 시선이 채원의 어깨에서 허리로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없어.”“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는데.”“미흡해서 보는 게 아니야.”짧은 대답이 이상할 만큼 직접적이었다. 채원은 클러치를 집어 들며 시선을 피했다.“오늘 드레스는 협찬이 아니라 루네 제품이에요. 누가 물으면 다음 시즌 프리뷰라고 해요.”“샘플 번호 L-27.”채원이 돌아봤다.“그것까지 외웠어요?”“투자 검토 자료에 있었어.”도현은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검은 턱시도 위로 반듯하게 놓인 등을 보며 채원은 입술을 다물었다. 계약 상대의 옷을 확인하는 투자자는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샘플 번호까지 외우는 투자자는 드물었다.차 안에서 도현은 일정만 설명했다. 포토월, 주최 측 인사, 만찬. 필요한 순간에만 연인처럼 보이면 된다고 했다.“허리에 손을 대거나 팔을 잡아야 할 때는 먼저 신호할게.”“어떻게요?”“차에서 내리면 손을 내밀 거야. 로비까지는 사진이 따라붙을 테니까.”“통보예요?”“예고야. 놀라서 내 손을 쳐 내면 그것도 기사거리가 될 테고.”“그건 조금 보고 싶네요.”“나는 별로.”도현은 창밖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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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 루네를 입은 사람
“아르덴은 인연보다 수익률을 보죠. 저도 그 기준으로 검토받고 있습니다.”채원은 잔을 들어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갔다. 도움받는 여자라는 자리에 자신을 세워 두려는 말에 일일이 상처받을 여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약점을 냄새 맡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데 굶주려 있었다.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길을 막았다.“두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이태준이었다.짙은 남색 턱시도를 입은 그는 대학 시절보다 말끔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태강캐피탈 전무라는 명함은 예전부터 있던 오만에 명분을 더해 줬다.“윤 대표. 연락을 여러 번 했는데 답이 없어서 걱정했어.”“상환 협의가 아니라 지분 포기 각서를 들고 온 연락에는 답할 필요가 없었죠.”“회사를 살릴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한 거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태준의 시선이 도현에게 옮겨 갔다.“그런데 차 대표가 먼저 채권을 샀더군. 남의 부실 자산을 모으는 취미가 생긴 줄은 몰랐어.”“가치 판단이 다를 뿐이지.”도현의 대답은 짧았다.“가치라.”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채원이는 예전부터 사람 눈을 끄는 데 능했지. 다만 지금은 드레스보다 다음 달 원단 대금을 걱정해야 하지 않나? 차 대표 옆에 서면 은행 만기일이 잠깐 잊히는 모양이야.”주변의 대화가 느려졌다. 대놓고 듣지는 않아도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도현이 한 걸음 움직이려는 순간 채원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짚었다. 도현은 그 손을 내려다보고 제자리에 멈췄다.“전무님은 아직도 담보가 없으면 가치를 못 보시네요.”채원이 태준을 똑바로 보았다.“미결제 원단 대금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문이 돌아오지 않는 회사였다면 태강이 상표권과 과거 디자인까지 묶어 세 번이나 인수를 제안할 이유가 없겠죠.”태준의 웃음이 얇아졌다.“부실 회사를 정리해 주겠다는 호의였지.”“빚은 싫다면서 브랜드의 이름과 기억은 탐냈군요.”가까이 있던 패션 유통사 대표가 채원의 드레스 소매를 가리켰다.“오늘 입으신 것도 루네 제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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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화 · 8년 전에도 네 편
채원은 드레스 허리의 여밈을 바꿨다. 정면의 주름이 사라지고 선이 곧게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채원의 집안 이야기를 엿듣던 사람들이 이제 옷의 구조를 보기 시작했다.회색 머리의 투자자가 행사 사무국 직원을 불렀다.“다음 주 실무 미팅을 잡아 주시죠. 숫자보다 생산 과정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공장 일정과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태준은 더 웃지 않았다. 채원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드레스가 아니라, 옆에 선 도현의 손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돈보다 소유권을 먼저 셈하는 눈이었다.도현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다가온 주최 측 회장에게 채원을 소개했다.“윤채원 대표입니다. 제 동행이기 전에, 아르덴이 정식 심사 중인 루네의 창업자입니다.”불쌍한 옛 동창도, 보호해야 할 연인도 아니었다.창업자.채원은 도현을 한 번 바라본 뒤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루네의 윤채원입니다.”만찬이 시작되기 전 포토월 추가 촬영 요청이 들어왔다. 도현은 채원의 눈앞에 손을 펼쳐 보였다. 허리를 감아도 되느냐는 신호였다.채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손바닥이 드레스 위 허리선에 닿았다.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체온이 얇은 천을 지나 선명하게 번졌다. 채원은 카메라를 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옆얼굴을 올려다봤다.도현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연기라면 렌즈를 향해 웃었어야 했다. 그러나 둘 다 그러지 못했다. 사진사는 오히려 좋다며 셔터를 더 눌렀다.“조금 더 가까이 부탁드립니다.”채원이 먼저 반 걸음 다가섰다. 도현의 손가락이 아주 잠깐 굳었다. 넥타이 아래로 움직인 목울대가 가까이서 보였다.“불편하면 말해.”그가 채원에게만 들리게 말했다.“차 대표님 손이 떨리는 게 더 불편하네요.”“안 떨려.”“그럼 긴장했나 봐요.”도현이 카메라를 향한 채 답했다.“네가 이만큼 가까우면 그래.”채원은 더는 그를 놀리지 못했다.***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행사장에서 벗어나자 도현은 약속대로 허리에서 손을 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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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기억하지 못한 저녁
8년 전에도 네 편이었다.채원은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도현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먼저 차에 내려 뒷문만 열어 두었다.채원은 결국 묻지 않았다.그 말을 받아들일 자리가 자신 안에 아직 없었다.계약 4일째 아침, 채원이 주방에 내려왔을 때 도현은 재킷을 걸친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식탁에는 2인분의 아침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의 앞에는 물잔만 놓였다.“안 먹어요?”“8시 회의가 있어.”“씹는 데 회의 자료보다 오래 걸리는 음식은 없어 보이는데요.”도현이 시계를 보았다.“아침은 원래 안 먹어.”“남한테는 밤에 커피 마시지 말라더니, 본인은 공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채원은 토스트 한 장을 냅킨에 싸서 그의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투자자가 먼저 쓰러지면 심사는 누가 합니까.”도현의 시선이 토스트에서 채원에게 옮겨 왔다.“걱정해?”“이해관계 관리예요.”“그렇군.”말은 무심했지만 그는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채 자료를 넘기는 모습이 생각보다 순순해서 채원은 괜히 커피 머신으로 몸을 돌렸다.높은 선반에 놓인 텀블러를 꺼내려 손을 뻗는 순간 등 뒤에서 팔이 올라왔다. 도현이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둔 채 텀블러만 내려 주었다. 셔츠 소매에서 희미한 우디 향이 스쳤다.“말하면 꺼내 줄 텐데.”“내 키로도 충분해요.”채원이 돌아서자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그의 가슴이 있었다. 한 걸음 물러나려 했지만 뒤에는 조리대가 닿았다. 도현은 곧장 팔을 거두고 옆으로 비켜났다.“차 대표님, 이제 좀 비켜 주시겠어요?”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긴장하면 말이 더 정중해지는 것도 그대로네.”채원은 턱을 들었다.“사람 말투 분석이 취미예요?”“다른 사람 건 몰라.”도현은 재킷 단추를 잠갔다.“네 것만 기억나.”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채원은 한동안 커피를 내리지 못했다.그날 밤, 두 번째 공식 일정의 의상안을 확인하던 채원은 공용 드레스룸 안쪽에서 도현과 마주쳤다. 둘이 비키려 할 때마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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