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재빨리 이미숙의 팔을 안았다.“어렵게 놀러 나오셨으니 저도 당연히 제대로 된 식사를 사드려야죠.”이미숙은 웃으며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소진헌은 담담하게 안으로 들어섰는데, 메뉴를 보자마자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이, 이게 뭐야. 제일 싼 스테이크가 50만 원이라니?”정은은 즉시 위로했다.“제가 이 집 회원이라 할인받을 수 있어요.”“아, 그럼 다행이고...”소진헌은 안심을 하며 레몬물을 마시더니 다시 물었다.“얼마 할인받을 수 있지?”“5%요.”“풉...”“아빠! 이미지에 신경 좀 쓰세요!”수민은 이미 옆에서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음식이 올라오자, 소진헌은 비싼 고기가 확실히 맛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다른 한편, 이순정 모자는 밖에서 음식을 좀 먹었지만 맛이 없었기에 전혀 만족을 하지 않았다.한식당에서 나온 후, 그녀는 눈짓을 했고, 철봉은 바로 입을 열었다.“엄마, 나 양식 먹고 싶어! 가장 비싸고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고 싶단 말이야! 아주머니, 절 속일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다 오늘 집에 돌아갈 수조차 없을 거예요.”서영숙은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인지, 서영숙은 마침 정은 일행이 있는 레스토랑을 골랐는데, 그곳도 그들과 인접한 룸이었다.레스토랑의 룸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기에, 인접한 방에서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그러니 대화하는 소리도 더욱 잘 들렸다.종업원은 메뉴판을 들고 와서 주문을 받았다.이순정은 양식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철봉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철봉은 메뉴도, 자신의 엄마도 보지 않았다. 그는 음탕한 눈빛으로 눈앞의 늘씬하고 섹시한 종업원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종업원은 애써 구역질을 참으며 뒤로 물러서더니 철봉과 거리를 두었다.이순정은 철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무슨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철봉은 그저 종업원을 바라보고 있
식사를 마친 후, 수민은 친구의 전화에 불려갔고, 정은은 부모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무척 힘들었지만, 소진헌은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며 여전히 무척 흥분했다.“야, 이 주자 그리고 이 도자기 말이야...”복도에서 소진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이미숙은 신이 난 소진헌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정은은 묵묵히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가끔 소리를 내어 맞장구를 쳤다.세 식구는 웃으며 7층으로 올라갔고, 정은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고 했다.이때 맞은편 문이 열렸다.“어? 조 교수, 지금 나가는 길인가?” 소진헌이 반갑게 인사했다.정은은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웃음을 머금은 눈빛과 마주쳤다.재석은 오늘 하얀 반팔 셔츠에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심플하고 깨끗하며 도도하면서도 차분했다.지난번 정은이 술에 취한 이후로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자신이 그때 취했을 뿐만 아니라 재석을 붙잡고 술주정을 한 것을 떠올리니 정은은 마음이 찔려서 시선을 돌렸다.남자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소진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실험실에 가려고요.”“이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건가?”“아직 두 조의 데이터가 남았거든요.”“그래. 그럼 얼른 가서 일봐, 다음에 시간 있으면 같이 바둑을 두자!”“네.”...다른 한편, 서영숙은 간신히 이순정 모자에게서 벗어났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지쳐서 호텔로 돌아가 쉬어야 했기에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서영숙은 녹초가 되어 소파에 누웠다. 온몸에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어지러웠다.“엄마! 나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강서정은 위층에서 뛰어내려와 서영숙의 옆에 앉았다.그녀는 오늘 마침내 서비대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전공은 생물정보학이었고 교수님은 송지혜였다.‘그동안 송 교수님에게 인삼과 전복을 드린 보람이 있군!’이것들은 모두 전에 오미선에게 주고 싶었지만 거절을 당한 물건이었다.‘이렇게 되면
말하면서 서영숙은 저도 모르게 정은 일가족을 떠올렸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소정은을 받아들이는 건데...”‘그럼 적어도 이렇게 쪽팔리고 무식한 사람과 접촉할 필요가 없잖아.’서정도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그때 엄마가 소정은을 받아들였다면, 두 사람은 지금 아이까지 낳아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그럼 그 여자도 대학원 입학시험에 참가해서 내 자리를 빼앗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아쉽게도 후회해 봤자지.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깐.’...수민은 전화 한 통을 받고 바로 레스토랑을 떠났다.가기 전에 계산까지 했다.그녀는 정은에게 경고했다.“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쏘는 거니까, 넌 그냥 가만있어.”말을 마친 후, 수민은 성큼성큼 레스토랑을 나서며 차를 타고 바로 사라졌다.30분 후, 그녀의 차는 메이플 엔터테인먼트 앞에 세워졌다.한 젊은 남자가 회전문 옆에 서 있었는데, 수민의 차를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바로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누나, 왜 이제야 왔어요.”남자는 도민우라고, 웹드라마로 데뷔한 배우였다.민우는 생김새가 괜찮고 피부가 아주 희며 키가 1미터85센티미터 넘어, 외모가 상당히 훌륭했다. 심지어 성격이 좋고 애교까지 넘쳐 수민이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었다.“왜 급하게 날 부른 거야? 무슨 일 있어?”민우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매니저 형이 식사 자리를 하나 마련했는데, 좀 무서워서요. 저와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말을 마치자, 민우의 눈시울도 따라서 빨개졌다. 피부가 하얬기에 더욱 선명했다. 특히 조심스럽고 불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수민은 전혀 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래, 같이 가줄 테니까 겁먹지 마.”“누나, 정말 누나밖에 없어요...”민우는 바로 웃었고, 참았던 눈물도 따라서 쏟아졌다.수민은 또 마음이 약해지더니 남자의 턱을 어루만졌다.“그만 울어, 넌 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하는 거야?”“제
민우는 고분고분 수민 옆에 앉은 뒤, 술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세 잔을 마신 다음, 민우는 웃으며 계속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오늘의 주인공은 중간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판타지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연예계의 유명한 스폰서인 성택준이었다.성택준은 수민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수민아, 넌 언제부터 연예계의 비즈니스에 관심을 돌린 거야?”“관심은 없고, 그저 막 놀고 있을 뿐이에요.”“젊으니까 노는 것도 나쁠 건 없지. 내 도움이 필요한가?” 성택준은 민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민과 말만 했다.“관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촌. 저는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니 이제 저 좀 그만 놀리세요.”성택준과 수민의 아버지 소기동은 좋은 친구였기에 수민은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그들의 대화를 듣고, 민우의 눈빛이 변했지만, 놀라움도 잠시일 뿐이었다.‘어쩐지 형이 오늘 밤 꼭 누나를 데리고 가라고 신신당부하셨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성 대표님, 수민 누나는 확실히 연예계의 일에 관심이 없으세요. 전에 이런 일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재밌지만, 접촉하면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하셨거든요.”“하하... 확실히 수민이의 성격답군. 그런데 넌 누구지?”성택준은 그제야 민우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웃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저는 도민우라고, 메이플 엔터테인먼트의 배우로 데뷔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대표작이 없습니다.”“음, 참 성실한 젊은이군. 이런 장소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거든.”민우는 얼른 손을 흔들었다.“대표님 앞에서 어떻게 감히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수민은 갑자기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잘 참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요. 먼저 가볼게요.”성택준은 기분 나쁘긴커녕 오히려 수민을 관심했다.“죄송하긴, 얼른 가서 일봐. 돌아가서 네 아버지에게 전해, 나중에 차
민우는 당황해졌다.“누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다 매니저 형이 시키신 거예요. 누나가...”“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거야. 그리고 넌 날 이용해 택준 삼촌의 주의를 끌었어. 이건 사실이잖아? 설마 이것도 다 네 매니저가 가르쳤다고 할 거야? 그럼 그 사람도 너무 대단하네!”“누나, 제 설명 좀 들어보세요... 저는 누나를 속인 적도, 이용한 적도 없어요. 저는 정말 이런 자리가 부담돼서 누나를 부른 거라고요.”“부담돼? 방금 여유롭게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며 아주 즐기고 있는 것 같던데, 지금 부담이라고 했어?”“저는...”민우는 할 말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야. 나중에 만나면 그냥 모르는 척하자.” 수민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그러나 이때, 남자의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날 차버리려고요? 내가 쉽게 동의할 것 같아요?”수민은 고개를 돌렸다. 줄곧 해맑고 솔직했던 민우가 지금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빛은 탐욕으로 가득 넘쳤다.“2억 원, 그리고 이 인기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자리를 나에게 줘요. 그럼 나도 더 이상 누나에게 매달리지 않을 거예요.”수민은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민우에게 다가갔다.“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민우는 이를 악물었다.“그렇다고 할 수 있죠.”“네가 뭔데? 날 협박할 자격이 있는 거야?”“나한테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잔 사진이 있어요. 이래도 내가 자격이 없는 거예요?”수민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었다.“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건데? 그 사진을 공개할 거야?”“맞아요.”“그래, 그럼 공개해.”“뭐라고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난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나쁘지 않지.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부족한 곳이 없잖아. 그런데 너는? 그 사진이 공개되면 네가 여자와 자서 유명해졌다는 소문이 쫙 퍼질 텐데. 나야 상관없지. 난 연예계에 진출하고 싶지도 않고,
동건은 피식 웃더니 바로 수민을 쫓아갔다.‘여자친구가 실연당했으니 나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민우는 초라하게 룸으로 돌아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스폰서들에게 술을 따랐다.수민은 그를 차버렸고, 심지어 민우의 협박조차 듣지 않았기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전 대표님, 저희 예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죠. 오늘 처음으로 대표님과 술을 마시는 것이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습니다.”전에 민우는 이런 식사 자리에 나온 적이 있었지만, 스폰서들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으니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선우는 쌀쌀하게 웃으며 가슴을 안았다.“도... 이름이 뭐라고?”“도민우입니다.”“그래, 도민우. 너 주량이 꽤 좋은 것 같은데?”“에이, 아닙니다. 그저 몇 잔 정도 마실 수 있을 뿐입니다.”“오늘 성 대표님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서 나왔다며?”민우는 진지하게 말했다.“전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못 주는 것도 아니지. 안 그래요, 성 대표님?”성택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비록 선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민우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선우는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아주 작은 요구가 있어. 너에게 있어 아마도 큰 문제가 아닐 거야.”“말씀하세요.”“이 테이블 위의 모든 술을 다 마셔. 그럼 남자 주인공을 너로 정할게.”이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잇달아 시선을 돌리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민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전 대표님, 농담도 참.”“농담? 난 엄청 진지해. 물론 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은 당연히 남에게 줘야겠지.”테이블 위에 여러 종류의 술이 있었다.와인, 소주, 맥주.이것을 다 마시면 죽지 않아도 병원에 한동안 입원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민우는 잠깐 망설이더니 바로 결정을 내렸다.“마실게요.”선우는 박수를 쳤다.“그래.”민우가 고개를 쳐들고 술을 마
“에이, 그건 네 착각이고. 다른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 조수민은 감정이 없는 여자야.”동건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쯧쯧, 넌 왜 자꾸 웃어?”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울라고?”“그래, 내가 휴지 줄게.”동건은 말없이 라이터를 꺼냈다.수민이 손을 흔들자, 그는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이야, 이 여자가 드디어 눈치 있게 불을 붙여주려는 건가?’하지만 이것 역시 동건의 착각이었다.탁.수민은 동건의 손을 세게 내리쳤다.“담배 달라고! 왜 엉뚱하게 라이터를 주는 거야? 넌 눈치도 더럽게 없네...”동건은 어이가 없었다. 먼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이번에 수민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얌전하게 라이터로 그녀를 위해 불을 붙였다.불빛은 여자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수민은 고개를 숙였다. 하얀 이빨로 담배꽁초를 문 다음 붉은 입술을 가볍게 오므리자, 담배꽁초에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 나타났다.동건은 뜻밖에도 그 모습이 넋을 잃었다.“야, 불 꺼.”“어? 아!”동건은 라이터를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두 사람은 클럽에서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었다. 와인 한 병을 마시고 나왔을 때, 이미 새벽이 되었다.둘 다 술을 마셨기에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수민은 대리를 부르려고 했지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야,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 전부 클럽이잖아. 한밤중이라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그럼 직접 택시 하나 잡으면 되겠다. 내일 시간 내서 다시 내 차 몰고 가야지.”그러나 그 결과, 택시를 타려면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수민은 말문이 막혔다. 이때 그녀는 눈알을 굴리더니 동건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돌아갈 거야?”“난 어디도 안 가.”“그게 무슨 뜻이야?”“맞은편 호텔 봤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어, 그런데?”“내 거야.”“그래서?”“직접 호텔에서 자면 되잖아. 귀찮게 왜 집에 가? 너 바보 아니야?”수민은 그제야 깨달았다.“역시 너야. 그럼
이 말을 듣고 동건은 미간을 찌푸렸다.‘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데.’“필요 없어, 그냥 데리고 가.”지배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지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치 있게 물러났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지연이 물었다.“도련님께서 호텔에 오시면 꼭 여자를 찾으셨다면서요? 왜 오늘은...”“전에는 줄곧 그랬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이야. 도련님께서 여자 때문에 호텔에 오신 줄 알아?”“그런데 저는...”지연은 어렵게 이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지배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도련님의 생각에 달렸으니까. 탓하고 싶으면 너 자신을 탓해. 어쩜 이렇게 운도 없는 거야? 도련님께서 오늘 지치셨기 때문에 쉬고 싶으신 거겠지. 넌 얼른 가서 일이나 해. 주제넘은 생각하지 말고...”여자가 이를 갈았다.다른 한편, 수민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동건인 줄 알았다.“밤늦게 무슨 일... 어?”동건이 아닌 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수민을 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미안해요, 내가 문을 잘못 두드린 것 같아요.”“괜찮아.” 말을 마치자마자 수민은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문을 받치며 그녀가 닫지 못하게 막았다.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또 다른 일 있어?”“정말 날 모르는 거예요?”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섭섭함으로 가득 찼는데 은근히 울먹이고 있었다.수민은 웃으며 진지하게 그를 훑어보았다.그녀는 처음부터 문을 잘못 두드렸다는 이유를 믿지 않았다.이곳은 꼭대기층이었고, 스위트룸이 딱 두 칸밖에 없었으니까.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건의 방이었다.남자는 자신이 문을 잘못 두드렸다고 했지만, 한밤중에 이렇게 입고 동건을 찾으러 갈 리가 없었다.그는 흰색 티셔츠에 연두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운동화까지 신고 있으니 그야말로 해맑은 대학생이었다.‘청춘이여!’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