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벚꽃이 흩날리던 스무 살 봄. 놀이공원에서 만난 네 살 연상의 남자, 강휘웅은 윤지호의 첫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 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호는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뜻밖의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끝났다고 믿었던 첫사랑이 다시 찾아온 순간,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설렘과 그리움 사이. 잊고 있던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리는 청춘 로맨스. 죽어 있던 연애세포를 깨우는 간질간질한 수채화 같은 첫사랑 이야기.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더 보기벚꽃이 속절없이 흩날리던 4월이었다.
학생식당 구석 자리에 마주 앉은 배유진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배유진은 지호와 같은 과 신입생이었다.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말을 놓고 친해진, 사람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낯가림이 심한 지호와는 정반대였지만, 이상하게도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지호야, 나 남자친구 생겼어.”
윤지호는 국에 말아 넣은 밥을 천천히 떠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축하해.”
“근데 그 오빠 친구가 아직 여자친구가 없대.”
유진의 눈이 반짝였다.
“동학 오빠 말로는 진짜 잘생겼다던데? 학교에서 인기 엄청 많대.”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삶을 살아온 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국물을 삼켰다. 하지만 ‘잘생겼다’는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유진이 이야기한 남자의 이름은 강휘웅.
그때의 지호에게는 그저 처음 듣는 타인의 이름일 뿐이었다.“그래서?”
“이번 주말에 놀이공원 가기로 했어.”
“갑자기?”
“너도 같이 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지호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스무 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자신이 그런 자리에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됐어.”
“왜?”
“괜히 나만 어색하잖아.”
유진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윤지호. 너 대학 와서 이러고 살 거야?”
“뭘.”
“예쁜 옷도 좀 입고, 연애도 좀 하고 그래야지.”
지호는 대답 대신 물컵을 들었다.
연애.
그 단어는 늘 자신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예쁜 친구들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다가왔고, 지호는 늘 그 옆에서 축하만 해주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잘생겼다는 말 때문이었다.강휘웅.
유진이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 이름이었다.
그때의 지호는 아직 몰랐다.며칠 뒤 만나게 될 그 남자가, 자신의 스무 살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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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지호는 집을 나서기 전, 옷장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입었다 벗기를 세 번쯤 반복한 끝에 무난한 흰색 셔츠와 청바지를 골랐다.
거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 눈에 띄는 몸매도 아니었다.괜히 기대하지 말자.
잘생긴 남자는 원래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지호는 지하철을 갈아타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토요일 오후의 놀이공원 정문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 사진을 찍으며 웃고 떠드는 커플들 사이로 유진과 동학이 먼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휘웅이 왔다!”
동학이 정문 쪽을 가리켰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스트라이프 셔츠에 블랙 팬츠를 입은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포카칩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지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키가 컸다. 멀리서 봐도 단번에 눈에 들어올 만큼 훤칠한 체격이었다. 어깨는 넓었고,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은 단단해 보였다.
짙은 눈썹 아래로 길게 내려앉은 눈매는 차분했고, 콧대는 반듯하게 뻗어 있었다. 웃고 있지 않은데도 어딘가 느긋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잘생겼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화려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미남이라기보다는, 오래 바라볼수록 더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오면서도 주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사람.
지호는 그제야 유진이 왜 며칠 동안 휘웅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휘웅아, 얘가 윤지호.”
동학의 소개에 휘웅은 지호를 한 번 바라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낮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귓가에 남았다.놀이공원 안으로 들어선 뒤, 유진과 동학은 신이 난 아이들처럼 앞장서 걸었다.
자연스럽게 뒤에는 지호와 휘웅만 남았다.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둘 사이에는 포카칩 씹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오도독.
오도독.
지호는 괜히 발끝만 내려다봤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냈다.“포카칩 좋아하세요?”
휘웅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지호를 바라보던 그는 말없이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응, 많이.”
지호는 얼떨결에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휘웅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며 덧붙였다.“다행이다.”
“네?”
“같이 먹을 사람 생겨서.”
툭 던진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걸까. 아니면 그냥 별뜻 없는 말일까.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때 유진이 멀리서 소리쳤다.
“저거 타자!”
고개를 들자 거대한 바이킹이 눈앞에 들어왔다.
지호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나 저런 거 진짜 못 타.”
그러자 유진이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과학적으로 말이야, 사람이 심장이 뛰면 설렘으로 착각한대.”
“뭔 소리야.”
“그러니까 같이 타.”
“나는 안 탄다고.”
하지만 유진과 동학은 이미 양쪽에서 지호를 끌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휘웅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전바가 내려왔다. 바이킹이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꺄악!”
지호는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겨우 놀이기구에서 내려왔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휘웅이 처음으로 웃었다.그 웃음이 너무 선명해서 지호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진 말대로라면, 지금 뛰는 심장은 단순히 놀이기구 때문이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눈앞의 남자 때문인 것 같았다.해가 기울 무렵, 네 사람은 회전목마 앞에 멈춰 섰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휘웅이 회전목마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릴 때 좋아했었어.”
“회전목마를요?”
“응. 안 무섭잖아.”
지호는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다.그런데 가만히 보면,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질녘.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노을빛이 휘웅의 옆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지호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잘생겼다는 생각보다 이상하게 편안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윤지호.”
휘웅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이름 예쁘네.”
순간, 지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남자 이름 같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봤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지호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꼭 쥐었다.“고마워요.”
휘웅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날 밤.
지호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일기장을 펼쳤다. 적고 싶은 건 많았다.포카칩.
바이킹. 회전목마.그리고 노을 아래에서 들었던 그 한마디까지.
하지만 결국 펜 끝에서 나온건 [강휘웅] 뿐이었다.휴대폰이 진동했다.
유진이었다.[어땠어?]
지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큰일 났어.]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ㅋㅋㅋㅋ 내가 뭐랬어]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스무 살.
윤지호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문득 가방 속에 넣어 둔 즉석사진이 떠올랐다.
놀이공원에서 네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지호는 별생각 없이 사진을 꺼내 들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 평범한 사진 한 장이 조용히 흔들렸다.그리고 그 순간.
지호의 숨이 멎었다. 사진 속 휘웅은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고개를 살짝 돌린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지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다시 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침대 위에 던져 둔 휴대폰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망설이던 지호가 메시지를 열었다.[잘 들어갔지?]
“지호야, 이쪽으로 와!”유진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지호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시작은 그저 조별 과제 뒤풀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진이 다른 과 동기들과 미리 짜 둔 과팅 자리였다. 좁은 룸 안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가득했고, 다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소개를 주고받고 있었다.“유진아, 나 이런 얘기 못 들었는데.”지호가 작게 속삭이자, 유진이 눈을 찡긋했다.“그냥 밥만 먹고 가면 돼. 재밌을 거야.”재밌을 리가.지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이 뭔가 열심히 말을 걸어왔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숨이 막혔다. 웃어야 할 타이밍에 웃고, 대답해야 할 타이밍에 대답했지만, 정작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았다.'그냥, 집에 가고 싶다.'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지호는 결국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화장실 좀.”유진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지호는 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화장실 대신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선 지호는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문이 절반쯤 닫히려던 순간이었다.“어.”누군가 손을 뻗어 문을 다시 열었다.지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강휘웅이었다.“오빠가 여긴 왜…….”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휘웅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동학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다.휘웅은 대답 대신 지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짧게 물었다.“왜 혼자 나와.”“그냥… 답답해서요.”솔직한 대답이었다. 휘웅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음부터 과팅 같은 거 나가지 마.”“…네?”지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휘웅은 이미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뒤였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장난인지,
지호는 밤새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어젯밤 휘웅이 보낸 짧은 문자 한 통이 자꾸 눈에 밟혔다.[못 들어갈까 봐 내심 기대했는데. 아쉽다. 잘 자, 지호야.]분명 장난스럽게 보낼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부터가 진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지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몇 번이나 뒤척였다. 휴대폰을 끄면 될 텐데, 자꾸만 화면을 켰다. 문자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다음 날 점심 무렵, 유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카페에서 자료 정리 다시 하자. 동학 오빠도 같이 와서 도와준대.]그리고 잠시 후, 한 줄이 더 올라왔다.[그리고… 휘웅 오빠도 온다네?]지호는 화면을 내려다본 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휘웅 오빠가 왜…?'조별 과제 팀원도 아니었다. 굳이 시간을 내서 올 이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약속 장소인 카페 문을 열자, 이미 유진과 동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진 앞에는 자료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동학은 그 옆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그리고 맞은편. 강휘웅이 먼저 와 있었다.오늘은 어제와 또 다른 분위기였다. 베이지색 바지에 흰 옥스퍼드 셔츠. 깔끔하게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과 단정한 가죽 시계. 꾸민 것 같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오히려 그 단정함 때문에 큰 키와 넓은 어깨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지호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그 순간, 휘웅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왔어?”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보였다. 고작 한마디였는데, 지호의 얼굴이 괜히 뜨거워졌다.“안녕하세요.”“잠은 잘 잤어?”“…네.”휘웅은 지호를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거짓말 같은데.”순간 지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젯밤 문자 때문에 뒤척였다는 걸 들킨 기분이었다.“아닌데요.”“눈 밑에 다 써 있어.”휘웅이 턱짓으로 지호의 얼굴을 가리켰다. 지호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
경주에서의 꿈같은 시간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창밖으로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 위를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만이 창문을 따라 길게 흘러갔다.유진은 동학의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휘웅은 창가에 턱을 괸 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반면 지호는 한시도 편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하는 횟수만 벌써 열 번이 넘었다.오후 아홉 시 십육 분. 아홉 시 십칠 분.. 아홉 시 십팔 분..시간이 흐를수록 심장은 점점 더 조여 왔다.지호에게 밤 열 시는 단순한 통금 시간이 아니었다.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집안의 규칙이었다. 딱 한 번, 중학교 때 친구 생일 파티에 늦었다가 현관문 앞에서 한 시간을 벌벌 떨며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지호는 단 한 번도 열 시를 넘긴 적이 없었다.지금 바로 버스를 갈아타도 간당간당한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늦는 순간, 아버지는 정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호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그 뒤를 휘웅이 느긋한 걸음으로 따라왔다.“왜 이렇게 서둘러, 보호자님.”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는 걸음을 늦추지 못한 채 급하게 대답했다.“저 열 시까지 무조건 들어가야 해요.”“그래?”“아빠가 통금에 엄청 엄격하시거든요.”휘웅이 피식 웃었다.“스무 살인데?”“그러니까요.”지호는 울상을 지은 채 휴대폰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아홉 시 오십 분.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십 분 남짓이었다.“조금만 더 있다 가.”휘웅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안 돼요. 진짜 큰일 난단 말이에요.”“보호자님 생각보다 되게 모범생이네.”“모범생 아니거든요.”“아닌데 통금이 열 시야?”지호는 대꾸할 힘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늦으면 끝이다.골목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휴대폰 화면에는 아홉 시 오십삼 분이 떠 있었다. 지호는 거의 울먹일 지경이었다.“열 시 넘으면 아빠가 문 안 열어
터미널에서의 아찔했던 소동이 지나고, 마침내 네 사람은 경주행 버스에 올랐다.유진과 동학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지호와 휘웅은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창가 쪽에 앉은 지호는 애써 태연한 척 창밖만 바라봤지만, 시선은 자꾸만 옆자리로 향했다.연청바지에 보라색 니트. 놀이공원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는 모습마저 이상하게 그림 같았다.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어깨가 스쳤다. 그럴 때마다 지호는 자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려도, 차창에 희미하게 비친 옆모습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조별 과제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대강 마쳤을 무렵,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늦봄의 바람이 불어오자 가로수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흔들렸고, 네 사람은 터미널 근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유진과 동학은 어느새 앞서 걸으며 시시한 장난을 주고받고 있었다.“오빠,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방금 밥 먹었잖아.”“그래도 먹고 싶단 말이야.”투덜거리던 동학은 결국 길 건너 편의점으로 뛰어갔고, 유진은 그런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지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조금 신기했다.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고, 또 그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그걸 들어주는 관계. 지호에게는 아직 낯선 풍경이었다.“부러워?”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휘웅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아, 아니거든요.”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휘웅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표정이 딱 그런데.”“무슨 표정인데요?”잠시 생각하던 휘웅이 느릿하게 말했다.“나도 저런 거 해 보고 싶다, 하는 표정?”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호는 괜히 발끝만 내려다봤다.다행히 휘웅은 더 놀리지 않았다. 대신 아무 말 없이 자판기 앞으로 걸어가더니 캔커피 하나와 복숭아 음료 하나를 뽑아 들고 돌아왔다.“이거.”지호는 얼떨결에 음료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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