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엄청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성준은 오히려 무척 불편했다. 간신히 다 먹은 다음, 그는 서둘러 작별을 하며 떠났다.방안은 즉시 조용해졌고, 정은은 식탁을 치우며 머릿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서정의 말을 떠올렸다.‘위천공이라고...’이렇게 한눈을 팔다 정은은 실수로 그릇을 깨뜨렸다. 그녀는 얼른 손으로 줍다 오히려 그릇 조각에 베였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손등에 떨어졌다.도겸과 함께 한 시간은 6년, 그것은 6일도 아니고 6개월도 아니었다. 어떤 습관은 이미 정은의 뼛속에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가 입원했다는 것을 들은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걱정을 하며 병원에 달려가고 싶었다.다행히 이성은 이런 본능을 가로막았다.‘이제 강도겸을 걱정하지 말고, 또 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말자.’처음에 정은과 도겸은 무척 달콤한 사랑에 빠졌지만, 서로의 곁을 함께 하는 동안 지겨움이란 감정이 나타나더니 심지어 이렇게 헤어졌다.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은 틈이 나타났다.‘강도겸이 처음으로 약속을 어겼을 때부터? 아니면 그 남자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을 때부터?’지금 돌이켜보니 뜻밖에도 기억은 무척 모호해졌다.6년이란 시간은 행복할 수도, 슬플 수도 있지만, 또한 언급할 가치가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하이힐을 신은 서정은 씩씩거리며 밖으로 돌진했다. 너무 급하게 걸어서 그녀는 심지어 복도 안의 쓰레기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 화가 난 서정은 욕설을 퍼부었다.“이게 뭐야? 이 낡고 냄새나는 곳을 집이라고! 정말 짜증 나!”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오빠, 왜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야? 의사가 푹 쉬라고 했잖아?”그녀는 한창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도겸이 환자라는 생각에 말투가 좀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조금 딱딱했다.병원에서, 도겸은 잠에서 깨자마자 서정이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정은 누나 찾아오겠다고 하면서 나갔어요.”선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우리가 도저히 말릴 수가 있어야지.’
7월 초, 기온이 점차 높아지면서 기상청은 폭염주의보를 발표했다.35도란 고온이 이미 일주일간 지속되었고, 조재석의 실험은 반복적인 계산과 검증을 거친 후, 마침내 새로운 진전을 가져왔다.모처럼 휴식시간이 생긴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7층까지 올라가며 한잠 푹 자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맞은편에서 한바탕 소리가 들려왔다.재석은 동작을 멈추었고, 굳게 닫힌 정은의 문을 바라보며 다가가서 노크했다.“정은아, 집에 있어?”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재석이 경찰에 신고할까 말까 망설일 때,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정은이 머리를 내밀었다.“무슨 일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치 재석이 갑자기 문을 두드려서 나온 것일 뿐,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고,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재석은 지금의 정은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만 같았다. 마치 수분을 잃고 바짝 말라가는 장미처럼.재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정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영문을 몰랐다.이때, 재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진도는?”“두 주일 전에 다 썼는데, 이미 발표했어요. 이 두 달 동안 줄곧 복습하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고요.”재석은 안경을 밀었다.“지금 내 손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논문 한 편이 있는데. 좀 검사해볼래?”20분 후, 재석의 집에서, 정은은 소파에 앉아 논문을 훑어보면서 눈빛이 밝아졌다.재석이 그녀에게 준 논문의 제목은 생물 서열에 관한 것이었고, 생물의 초기 변화치를 토론하는 내용이었다.과제는 참신한 편은 아니지만, 아이디어가 기발한 데다 검증 방식도 전례가 없는 새로운 결론과 새로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혁신을 하려면 대량의 데이터로 증명을 해야 했다.“이게 선배님의 논문이에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대학교 2학년 때 쓴 거야.”정은은 심정이 많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도 생물정보학의
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얻기 힘든 기회였다.“만약 관심이 있다면 이 논문 가져가서 자세히 읽어봐.”말하면서 재석은 USB를 하나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이 안에 상세한 실험 자료가 있어.”정은은 눈을 들더니 은근히 흥분해하고 있었다.“고마워요, 잘 생각해 볼게요.”10시, 정은은 집에 돌아가야 했다. 재석은 그녀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난 바로 이 맞은편에서 살고 있으니, 특별히 배웅할 필요가 없어요.” 정은은 웃으며 말했다. 재석은 오히려 그녀가 무심코 드러낸 손가락을 힐끗 바라보며 주의를 주었다.“반창고를 너무 오래 붙이면 안 돼. 요오드 볼트로 소독한 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좋을 거야.”정은은 얼른 검지를 숨겼다.“고마워요, 그렇게 할게요.”재석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려 분홍색 다육식물 하나를 가져왔다.“이거 줄게.”정은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손바닥만 한 다육식물은 잎사귀가 통통했고, 초록색에서 점차 핑크로 변하니 또 무척 예뻤다.“이거 너무 귀여운데, 정말 나에게 주는 거예요?”“응, 며칠 전에 꽃집을 지나다가 이것만 하나 남았길래. 지난번에 매운탕을 대접한 답례라고 생각해.”정은은 입술을 구부렸다.“이번에는 그냥 받을게요. 하지만 친구 사이에 같이 밥을 먹었다고 굳이 선물을 살 필요가 있나요? 다음에 답례하지 마요.”그녀는 눈을 깜박였고, 맑은 눈동자는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빛이 났다.“응.” 재석은 마음이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병실에서. 이른 아침, 고동건과 전선우는 병문안을 오기로 약속했다.동건은 그럴듯하게 보온병까지 들고 왔다.“도겸아, 내가 널 얼마나 관심하는지 좀 봐. 이렇게 죽까지 챙겨왔잖아! 헤헤! 넌 위가 안 좋아서 담백한 것만 먹어야 하니가, 내가 특별히 우리 집 셰프에게 아침 일찍 죽을 끓이라고 했어. 이게 비록 많진 않지만, 재료가 다 비싼 거라서, 다 먹으면 바로 힘이 펄펄 날 거야!”선우는 향기가 그윽하고
정은은 조깅을 마치고 돌아와서 샤워를 한 다음, 베란다에 줄지어 늘어선 모양이 각기 다른 녹색 다육식물에 분홍색이 더 많아진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지로 살짝 눌렀는데, 말랑말랑한 식물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책상 위의 핸드폰이 윙윙거렸다. 선우의 번호인 것을 보고, 정은은 호기심에 전화를 받았다.[선우야? 이 시간에 왜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무슨 일 있어?]“정은 누나, 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요?”[그럭저럭이야. 너는?]기회다 싶은 선우는 바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난, 난 별로 좋지 않아요.”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왜?]“밤새 술을 마셔서인지 속이 안 좋네요. 정은 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딱 누나가 끓인 죽이 너무 먹고 싶은 거 있죠? 정말 너무 먹고 싶은데... 지금 시간 있어요?”도겸이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선우는 이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비록 정은은 도겸을 통해 선우를 알게 되었지만,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선우와의 관계도 나름 좋았다.상대방이 위가 아프다고 하니 정은도 거절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시간 있어. 나 지금 장 보러 나갈 테니까 점심에 와서 가져가.]“네! 고마워요, 정은 누나! 누나밖에 없네요! 사랑해요, 누나! 그럼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점심시간이 되자, 선우는 내비게이션에 정은이 보낸 주소를 입력한 다음, 먼저 서비대학교에 도착했다. 그 후 또 여러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서야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다.길가에 차를 세우고 가로숫길을 건너자, 선우는 정은이 지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았다. ‘7층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니.’선우는 눈을 들어 아파트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5분 후, 그는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고, 마치 사우나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땀투성이로 되었다.정은은 문을 열어 선우를 들여보낸 다음, 얼른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괜찮
심현빈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것도 다 선우가 정은 씨에게 자기가 먹고 싶다고 거짓말을 해서 정은 씨가 끓여준 거야. 그러니 어떻게 병문안 하러 오겠어?”도겸은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고, 선우를 차갑게 쳐다보았다.“내가 언제 가라고 했어? 누가 시킨 거냐고?”선우는 목을 움츠리더니 가볍게 기침을 했다.“형 요 며칠 줄곧 밥을 먹지 않아서 나도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요. 정은 누나가 죽을 만들지 않았다면, 형은 아직도 굶고 있을 거예요.”도겸은 싸늘한 표정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참, 방금 정은 누나 집에 갔는데, 지금 지내는 곳이 얼마나 작고 낡은지, 심지어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거 있죠? 그렇게 매일 7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니, 딱 봐도 고생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게 분명해요.”선우는 말하면서 도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입으로는 싸다고 말했지만, 눈빛에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다.‘음, 마음에 아직도 정은 누나가 있는 모양이야.’선우가 계속 말을 하려 할 때, 간드러진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오빠!”선우와 현빈은 징그러워서 몸서리를 쳤다.‘소름이 쫙 끼치네...’연희는 며칠간 도겸의 문자를 받지 못했고, 전화해도 그가 받지 않아 결국 동건에게 물어봤는데, 그제야 도겸이 위병으로 입원한 것을 알았다.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수업까지 튀고 병원으로 달려왔다.이때 도겸이 환자복을 입고, 안색까지 창백한 것을 보니, 연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오빠, 미안해요. 저도 방금에야 오빠가 입원한 사실을 알았어요.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거예요? 제가 의사 불러올까요?”그녀의 질문에 도겸은 짜증이 났다. 그리고 더욱 짜증 나는 것은 바로 오자마자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겸뿐만 아니라 선우와 현빈도 시끄럽다고 생각했다.도겸은 미간을 비볐다.“지금은 이미 괜찮으니까 울지
도서관에 간 정은은 연속으로 두 장의 시험지를 풀었는데, 모두 마지막 문제에서 사로가 막혔다.정은은 한참이나 계산했지만, 줄곧 풀리지 않았다. 전에 어느 책에서 비슷한 문제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일어나서 관련 자료와 문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몇 분 만에 찾은 다음,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에 정은은 그 옆에 놓인 책에 시선을 빼앗겼다.책 제목은 『유전자 서열의 재조합과 융합』이었다. 그녀는 조재석이 한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그 책을 꺼냈다.간단하게 훑어보니, 뜻밖에도 이 책의 관점은 정은의 관점과 아주 비슷했다. 그녀는 계속 읽기 시작했고, 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예 그 속에 빠져들었다.이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는데, 조수민이었다.[나 지금 어디게?]정은은 그녀가 장난치고 있는 줄 알고 바로 답장을 하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너 학교에 왔어?!][빙고!]도서관 밖에서, 정은은 내려오자마자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수민을 보았다.“갑자기 학교에 왜 온 거야?”“마침 이 근처에 들렀는데, 너한테 맛있는 거 주고 싶어서.” 수민이 손을 들자, 향기가 넘쳤다.“배달 마쳤으니 가볼게.”“나랑 같이 먹지 않고 그냥 가려고?”수민은 손을 흔들었다.“원래 너에게 주려고 산 거야. 게다가 나 요즘 좀 바쁘거든.”여기까지 말하자, 수민은 한숨을 쉬었다.“최근에 새 프로젝트 하나 책임졌는데, 3일 동안 총 8시간밖에 자지 못했어.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우리 아빠가 날 집으로 부르셨고. 사는 게 정말 힘들다 힘들어!”수민은 디자이너였다. 1년에 대외적으로 몇 개의 큰 주문만 받았지만, 하나하나 무척 복잡했기에 바쁘면 휴식시간이 거의 없었다.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임명을 받은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프로 대신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참, 이번 일은 강씨 가문과 관계가 좀 있어.” 수민은 눈알을 굴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관심 있어?”“없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은은 직접 끊어버렸고,
도겸은 꾹 참고 듣다가 결국 폭발했고, 전화를 끊은 다음 비행 모드를 켰다.이번에 차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집에 들어서자, 도겸은 그제야 마음이 평온해졌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위층으로 올라갈 때, 그는 갑자기 방향을 돌리더니 저도 모르게 주방으로 향했다.주방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기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눈앞에 정은이 바삐 움직이는 장면이 아른거렸다.그녀는 전날 저녁에 식재료를 깨끗이 씻고 물에 담가야 했기에, 죽을 끓이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다시 식재료와 쌀을 함께 솥에 넣은 다음 삶았다.도겸은 힘드니까 정은에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다음날 퇴근하고 돌아오면, 항상 따끈따끈한 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후에...’그는 더 이상 정은을 설득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그녀가 잘해 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생각에 잠긴 사이, 밖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도련님?”왕순자는 서영숙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도겸이 병원을 떠나자,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은 서영숙은 도겸이 혼자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왕순자에게 전화를 했다.도겸은 담담하게 분부한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모님, 죽 좀 끓여줘요.”‘왜 또 죽을 끓이라는 거지? 정인 아가씨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정말 너무 힘들다 힘들어...’마음속으로 불평을 했지만, 왕순자는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죽을 다 끓이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도겸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잠들었어도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왕순자는 죽을 내려놓은 다음, 주방에 가서 깨끗이 정리한 후, 조용히 떠났다.한밤중에 도겸은 위가 불에 타는 것만 같았고, 몸은 마치 땡볕을 쬐는 것처럼 무척 더웠다. 차가운 바늘이 혈관을 찌르며 액체를 수송하자, 그는 그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매우 더웠다.서영숙은 침대 앞
외롭고 쓸쓸한 밤, 맞은편에서 가볍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은아, 나 아파.”자세히 들어보니, 남자의 목소리는 은근히 떨렸다.그 순간, 정은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아팠다.도겸은 잘난 체하고 고집이 세서, 피를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 때문에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모두 흔한 일이었다.그동안 정은은 도겸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많은 방법을 고민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꼼꼼히 챙기고, 틈틈이 상태를 살피는 것은 물론, 한의원을 찾아가 안마법까지 배워왔다.엄청난 공을 들인 데다, 또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겸의 위가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런 일이 귀찮았다. 가끔 짜증이 나면 심지어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고 싫어하곤 했다.이미 잊혀져 가던 과거가 이 순간에 다시 떠올랐고, 방금 나타난 애틋한 감정도 곧 사라졌다.[난 의사가 아니야. 그렇게 아프면 그냥 병원에 가.]도겸은 정은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네가 끓인 죽 마시고 싶단 말이야.”정은은 조용히 듣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은편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마치 소리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결국 정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도겸은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가 잠든 줄 알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지만, 도겸이 아직 깨어 있으며 안색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도련님, 지금...”간호사는 약간 의아해했다.도겸은 그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피곤함에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이튿날, 정은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일어났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위 좀 어때? 괜찮아? 죽 더 먹을래?”선우는 한창 달콤하게 자고 있었는데,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정은 누나!][아, 정은 누나가 만든 죽이 너무 맛있어서, 몇 입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