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이는 신이 났다.그는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비싼 쇼핑백에 담아서 건네줬다.“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항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히죽히죽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서 까불었다.“이거 좀 봐, 내가 인형을 잘 빚을 수 있다니깐. 그 손님 엄청 좋아하잖아!”[에헴! 정신 차려! 그 오빠가 좋아하는 건 그 예쁜 언니지, 네가 빚은 인형이 아니라고!][그래서, 그 오빠 혼자 몰래 달려와서 인형을 사간 거야?][아직 고백을 하지 못한 것 같은데.][어머, 형사님이세요? 눈치도 참 빠르시네요!]...정은은 물을 사고 돌아온 재석이 손에 쇼핑백 하나 들고 있는 것을 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건 뭐예요?”“그냥 뭐 좀 샀어.”그래서 그녀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 길을 건너 보행로를 따라 앞으로 가면 도심이었다.정은은 손목 시계를 보았는데, 이미 오후 4시였다.‘이제 돌아가야 하나?’그런 생각을 하기도 무섭게 재석이 입을 열었다.“며칠 후에 난 세미나를 참가하러 K시에 가야 돼. 그곳의 날씨가 많이 따뜻해서 겨울의 양복을 입을 수 없거든. 마침 요앞이 백화점이니 날 도와 옷 한 벌 골라 주면 안 될까?”“좋아요.”지나친 요구가 아니었기에 정은은 동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남성복은 5층에 있었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했다.한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정은은 소리를 내어 불렀다.“심 대표님?”현빈이 고개를 돌렸다.정은을 본 순간, 현빈은 놀라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쪽에 있는 재석을 발견하자, 그의 눈빛은 어두워졌다.“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정은아.” 말하면서 현빈은 웃으며 재석을 바라보았다.“또 만났네요, 조 교수님. 여긴 어쩐 일이죠?”정은이 대답했다.“선배님을 위해 얇은 양복 한 벌 골라주려고요. 대표님도 쇼핑하러 왔어요?”“응. 우리 할아버지에게 구두 사드리려고...”이때 현빈은 자연스럽게 난처함을 드러냈다.“하지만 어떤 걸
재석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회색이 괜찮은 것 같아.”정은은 눈에서 빛이 났다.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아!’재석은 점원에게 말했다.“그럼 이걸로 할게요. 카드로 계산해줘요.”재석은 다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 정은은 그의 옷깃을 가리켰다.“여기 접혔어요.”그는 정리를 했지만 옷깃은 여전히 접혔다.그래서 정은은 직접 재석을 도와주었다.남자는 키가 커서 정은은 까치발을 해야 했고, 두 사람은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여자아이에게서 나는 독특한 향기를 맡자, 재석은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는 정은의 가녀린 손가락이 옷깃을 가볍게 뒤집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손끝이 무심하게 목을 스치자, 마치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으며 짜릿한 느낌은 온몸에 퍼졌다....강서원은 오늘 다른 귀부인과 식사 약속이 있었다. 시간이 아직 일러서 먼저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자신의 물건을 사고 기사에게 차에 실으라고 한 다음, 또 빈손으로 5층에 올라가서 소기봉과 세 아들에게 사주려고 했다.‘어쩔 수 없지 뭐, 하나는 내 남편이고, 세 아들은 또 모두 솔로잖아.’여러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것을 보지 못하자, 강서원은 서서히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심심하게 안에서 걷고 있었다.이때, 강서원은 쇼윈도에 있는 양복에 시선을 빼앗겼다.멈춰 서서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쇼윈도 유리를 통해 가게 안의 1남 1녀를 보았다.‘어머, 저 사람 우리 재석이 아니야?! 그것도 한 여자와 같이 있다니!’강서원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이 정도면 충분히 큰 서프라이즈인 줄 알았는데, 뒤에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그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손도 남자의 옷깃에서 거두어들였다. 그렇게 예쁘고 익숙한 얼굴이 예고도 없이 강서원의 눈에 들어왔다.‘그 여자아이잖아! 동서와 사이가 아주 가까운 그 다례사!’강서원은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콧대가
고개를 들어 정은을 본 순간,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에 순식간에 웃음기가 감돌았다.어르신에게 신발을 사야 하니 디자인만 보아서는 안 되며 편안함도 고려해야 한다.그렇다고 편안함만 따지고 디자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정은은 서점에서 이춘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양복 조끼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마치 신사와 같은 기질을 내비쳤다.옷차림에도 신경을 많이 썼으니 신발도 잘 골라야 했기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흔한 구두 재질은 그 몇 가지밖에 없었기에 정은은 가장 편한 두 가지 재질을 선택했고, 이어서 점원에게 이 두 가지 재질로 만든 신발을 모두 골라내라고 했다.그사이 재석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곧 정은은 두 켤레를 골랐다.“이 두 켤레가 다 괜찮은 것 같아요. 심 대표님이 하나 골라요.”현빈은 직접 카드를 꺼냈다.“뭘 골라? 두 켤레 다 포장하면 되지. 네가 골랐으니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엄청 좋아하실 거야.”정은은 믿지 않았다.“에이, 설마요.”“나중에 시간 나면 우리 할아버지 뵈러 가지 않을래? 그럼 두 분이 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 수 있을 거야.”“나도 그러고 싶어요. 두 분 다 아주 친절해 보이시거든요...”현빈의 눈빛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점원이 포장할 때, 현빈은 정은에게 차 한잔 따라줬다. 물이 좀 식은 것을 발견하고 또 다른 점원에게 물을 끓이라고 했다.그리고 나서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차 좀 마셔, 따끈따끈해.”“고마워요.” 정은은 잔을 받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진열대에 떨어졌다.그녀는 소진헌에게 한 켤레 골라주고 싶었다.현빈은 정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더 마실래?”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고마워요.”그는 일어나더니 정은의 손에 있는 빈 잔을 가져왔다.그리고 이 장면은 마침 안으로 들어온 이미윤에게 발각되었다.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그리 놀라지 않았다.이미윤은 현빈이 바람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수가 있어, 여자를 갖고
다 먹은 뒤, 이미윤은 계산하러 갔다.두 사람 모두 얼마 먹지 않아서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았다.이쪽의 두 어머니는 수심이 가득했지만, 그쪽의 현빈과 재석은 각기 수확을 얻었다.하나는 양복을, 하나는 구두를 샀기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현빈이 말했다.“앞에 밀크티 가게 있는데, 뭐 마실래?”재석도 같은 시간에 입을 열었다.“그 케이크 가게가 엄청 유명한데...”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고, 서로를 힐끗 보더니 적의를 드러냈다.“정은아, 우리 같이 밀크티 사러 갈래?”“들어가서 한번 볼래?”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뭐야, 왜 또 이래!’“그냥 각자 사러 가세요. 난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교수님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지 않으시겠죠?”“만약 심 대표님이 사는 거라면 한 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그래요.”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를 갈고 있었다.“그리고 보답으로 내가 심 대표님에게 케이크를 사줄게요.”이 말을 듣자, 현빈은 더욱 화가 났다.두 사람은 각자 줄을 섰다.정은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현빈은 양손에 밀크티 한 잔씩 들고 있었고, 탁자 위에 한 잔 남아 혼자 들 수 없었다.그는 종업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들게요.”두 사람은 말하면서 케이크 가게로 갔다.“서원아? 서원아?!”“응? 뭐라고?”“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다니.” 이미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케이크 가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강서원은 손을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그 여자아이, 뜻밖에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니. 심지어 웃고 떠들며 함께 밀크티까지 마시면서 쇼핑을 하고 있어! 그건 커플끼리 하는 일 아니야?!’비록 그 남자의 뒷모습만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옷차림과 기질만 보아도 조건이 나쁘지 않다
이때 정은은 다른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에 매료되어, 두 남자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재석은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정은이 한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5층으로 된 케이크에 한층마다 정교한 피규어를 놓았다.“예뻐?”“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었어요.”그리고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선배님, 이 안경 쓰고 눈살을 찌푸리는 피규어 말이에요, 선배님과 닮지 않았나요?”재석은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언제 자주 눈살을 찌푸렸지?”“눈살을 찌푸렸지만, 선배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지금이요.”재석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장난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궁핍하고 마음이 찔렸다.“하하...”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선배님 정말 귀엽네요.”세 사람이 케이크 가게를 막 나서자, 재석의 핸드폰이 울렸다.“네, 어머니.”[재석아, 집에 한번 돌아와.]강서원의 목소리는 심각하고 엄숙했다.“무슨 일이세요?”[돌아와서 얘기하자.]“네.”통화를 마치자, 재석은 집에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했다.“미안,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고, 마침 현빈도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 현빈은 재석을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저희 집에도 일이 좀 생겼네요. 하지만 그전에 전 먼저 정은을 집에 데려다줄 테니, 교수님은 얼른 일 보러 가세요.”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두 분 다 얼른 가서 일 봐요!”재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정은은 재빨리 말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텐데, 아무도 데려다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현빈을 보았다.“심 대표님도 빨리 가요. 중요한 일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현빈과 재석은 눈을 마주치며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정은의 재촉으로
“어머니!” 재석은 강서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마음이 없다고.”강서원은 꾹 참더니 잠시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여자친구 생겼지?”재석은 멈칫하다가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강서원은 믿지 않았다.“그럼 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양복은 어떻게 된 거야? 너 혼자 사러 갔어?”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쇼핑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이게 양복인 줄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강서원은 가슴이 찔렸다.“그 로고가 얼마나 선명한데. 그 집은 양복만 만들었으니 또 뭐 다른 게 있겠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니?”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와 함께 골랐어요.”“친구? 남자야 여자야? 어떤 친구인데?” 강서원은 계속해서 물었다.“어머니, 오늘 단지 이런 걸 물어보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일 없으면 저 먼저 실험실로 돌아갈게요.”강서원은 한참 동안 재석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표정관리를 완벽하게 하여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강서원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조기봉은 갑자기 찻잔을 내려놓았다.“당신도 이제 그만 좀 해. 재석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래도 당신의 전화 한 통 때문에 바로 달려왔잖아. 그런데 또 뭐가 불만인 거야?”강서원도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그 얄미운 계집애가 계속 뻔뻔하게 우리 재석이 곁에 남게 할 수는 없잖아? 정말 안달이 나네!’...심씨 가문에서.이미윤 역시 아들을 집으로 불렀는데, 강서원에 비해 그녀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완곡하게 떠볼 필요 없이 이미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요즘 만나는 애 바꿨어?”‘여자친구’가 아닌 아무런 호칭도 없는 ‘만나는 애’였다.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
젊었을 때 사고를 안 쳐본 재벌 2세가 어디 있을까?그러나 놀아도 되지만 절대로 여자에게 빠질 수는 없었다.이미윤도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가 불편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됐기 때문에, 그녀는 은근히 일깨워줄 수밖에 없었다.“남녀 방면의 일은 너도 좀 주의해.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 그러나 제대로 다칠지도 몰라.”현빈은 영문을 몰랐다.“어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죠?”이미윤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내가 닥터 성에게 연락했는데, 네 할머니의 눈과 몸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더라. 시간 좀 잡아줘. 나도 어르신들 만나고 싶으니까.”닥터 성은 심씨 가문이 투자한 병원의 유명한 안과 과장이며 봉수진을 다년간 치료해온 주치의이기도 했다.이미윤은 미리 병원에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봉수진의 몸이 호전되면 즉시 전화로 자신에게 통지하라 했다.“전에 네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며 당분간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 의사도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으니 날 막을 이유가 또 뭐가 있어?”이미윤은 현빈을 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벌써 알아차린 것 같다.현빈은 말이 막혔지만 그래도 완곡하게 주의를 주었다.“할머니는 호전되셨지만 정신상태는 여전히 매우 안 좋지 않아요. 일단 자극을 받으시면 쉽게 악화될 수 있으니 될수록 방해를 하지 않는 게...”“자신의 딸을 만나는 것일 뿐, 무슨 자극을 받을 수 있겠어?”현빈은 이미 조심스럽게 표현을 했지만, 이미윤은 여전히 노발대발했다.“나는 네 할머니의 딸, 유일한 딸이라고! 수십 년이나 지났는데, 두 분은 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지?!”“어머니...”“내가 보기에, 네 할머니는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었어! 그동안 누가 곁에서 두 분 챙겨줬는데? 또 누가 두 분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원을 찾아줬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이미윤은 이를 갈며
잠든 추억이 다시 깨어났다.조각난 기억이 스치자, 이미윤은 절망적이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떠올렸고, 그것은 여러 차례 자신의 꿈에 나타났다.그녀는 목이 쉬었다.“이미숙이 납치된 것은 우리 가문을 겨냥한 나쁜 사람들 때문인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내가 이미숙과 같이 외출해서?” “그 여자가 실종된 것을 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면, 난 차라리 내가 납치를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 날 엄청 그리워하시겠지?”이미윤은 마치 어떤 추억에 잠긴 듯 멍을 때리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했다.현빈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봉수진이 최근 에 푹 빠진 것을 떠올리며, 그는 이미윤에게 말했다.“할머니는 최근 이라는 추리 소설을 엄청 좋아하셔요. 작가의 사인, 특히 인사말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이미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자, 현빈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시 주의를 주었다.“할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사인 받은 책을 구하신 다음, 먼저 저에게 통지하세요. 그때 가서 제가 다 안배할 테니까...”그렇지 않으면 이미윤은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그래, 알았어.” ‘그냥 책 하나일 뿐이잖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문제도 아니지.’현빈은 희망을 잔뜩 품은 이미윤을 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건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때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리해야 할 긴급서류가 있다고 해서 현빈은 회사로 달려갔다.이미윤은 집사를 찾아와 신신당부했다.“작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책 제목을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최근에 새로 나온 추리 소설이니, 얼마를 쓰든, 무슨 방법을 쓰든 꼭 구해야 해요!”“방금 도련님께서는 작가님의 인사말을 받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셨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