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우선 비를 피할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천둥 날씨에 나무 밑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상식이었다.번개가 치는 순간, 하늘이 밝아졌고, 정은은 멀지 않은 곳에 1미터 정도 되는 암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 움푹 들어간 부분은 천연적인 구멍을 형성했다.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비는 점점 더 크게 쏟아졌고, 콩알만 한 빗방울이 몸에 떨어지니 정은은 심지어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대체적인 방위를 향해 달려갔다.곧 도착할 때, 정은은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더니 몸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였다.이곳은 마침 비탈길이었다. 정은은 넘어진 후 또 앞으로 구르면서 전혀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유일하게 다행스러운 것은 경사면에 어떤 식물을 심었기 때문에 촉감이 잔디밭과 유사하여 일정한 완충 작용을 했다. 게다가 비에 젖은 흙도 상대적으로 푹신했다.그렇게 정은은 언덕 밑으로 떨어져서야 마침내 멈출 수 있었다.그녀는 온몸이 아프고 눈빛은 초점을 잃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반응을 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때,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온통 어둠뿐인 곳에 있으니, 정은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망연함을 느꼈다.그러나 정은은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냉정해지려 했다.정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옆의 잡초와 나무줄기를 잡고 몸을 받쳤다.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발목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왔다.그녀는 얼른 쪼그리고 앉아 검사했다. 휴대폰 스크린의 미약한 빛을 빌어 정은은 엄청 부은 자신의 복사뼈를 보았다.다행히 피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또 한번 움직여 보았다. 비록 아프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었다.‘골절은 아닌데. 아마도 좀 삔 것 같아.’정은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이어서 그녀는 또 가방속의 씨앗을 검사했다. 배낭은 이미 진흙으로 가득했고, 안의 물품은 모두 어느 정도 파손되었지만 다행히 씨앗은 무사했다.그녀는 한숨을 돌리
“그래!”두 사람은 곧바로 발걸음을 떼며 가장 가까운 A구역으로 질주했다.도중에 진호 일행을 만났다.신호는 그들의 다급한 모습을 보고, 무슨 일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예전의 원한 때문에 그는 일부러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한번 말해 봐?”민지는 건달과 같은 진호를 보자마자 그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평소였다면 민지는 즉시 받아쳤겠지만, 지금 정은이 너무 걱정되었기에 전혀 진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신진호는 입이 달아서, 오는 길에 줄곧 차 안에서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잖아? 혹시 연락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신진호, 너 우리를 책임진 교수님의 핸드폰 번호 알아? 톡도 돼!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진호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눈알을 굴렸다.‘급한 일이라니...’“앗, 나한테 확실히 연락처가 있지!”민지는 눈빛이 밝아졌다.“나에게 보내줄 수 있어?”“그래, 잠깐만, 내가 찾아볼게...”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뒤지기 시작했다.민지는 정말 진호가 자신을 돕고 있다고 믿었지만, 뜻밖에도...두 사람은 인내심이 거의 바닥날 정도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진호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정말 미안해, 나한테 없는 것 같아.”진호는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 없으면 없다고 말할 것이지, 우리를 놀리는 게 재미있어?!”신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재밌지, 너희들은 아니야?”“너 정말 깐족거리네. 특히 이 간사한 모습, 정말 꼴도 보기 싫어.”“다시 한번 말해봐?!”“너 정말 간사하다고!”진호가 말했다.“사실대로 말하지. 난 교수님의 연락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그 분이 어디에 계시는지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안 알려줄 거야. 뭐 어쩔 건데?”서준은 말투가 차가워졌다.“정은 누나가 실종됐어. 지금은 교수님을 찾아야만 기지 측에 연락할 수 있고, 책임자들이 인원을 조직하여 재빨리 누나를 구조할 수 있어
진호는 펄쩍 뛰며 재운을 때리려 했다.“너 바보야? 이 시간에 책임자들은 벌써 퇴근했다고, 네가 누굴 찾아가!”재운은 머리를 긁적였고, 고민 끝에 결국 결정을 내렸다.“찾든 못 찾든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되지!”말이 끝나자 진호가 미처 반응하지 못할 때, 쏜살같이 달려갔다.진호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서준과 민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A구역을 가로지르면서 아무도 못 봤던 것이다.민지는 급해서 울기 직전이었다.“어떡하지? 정은 언니가 실종된 지 벌써 두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는 아직도 교수님을 찾지 못했잖아. 전혀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준은 민지가 눈물을 왈칵 쏟는 것을 보고 당황해지기 시작했다. 영롱하고 투명한 눈물은 마치 그의 마음에 떨어진 것 같았다.“울, 울지 마, 지금 방법을 생각하고 있잖아...”“그럼 무슨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없잖아! 흑흑... 정은 언니가 너무 걱정돼. 날이 이렇게 어두운 데다가 비까지 펑펑 쏟아졌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서준아, 너 엄청 똑똑하고, 너희 집안도 엄청 대단하잖아. 집안 어르신에게 부탁할 순 없는 거야? 엉엉...”‘집안...’서준은 눈빛이 밝아졌다.‘내가 어떻게 이걸 깜박했지! 젠장!’“알았어.”“뭘?”“내가 우리 집안 할아버지에게 부탁하겠다고.”“그, 그래도 될까? 나도 그냥 해본 말이지, 굳이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야...”지난번에 서준의 집에 가서 생일파티를 참가할 때, 민지는 그제야 그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서준 일가족은 무척 겸손하고 정직했다.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큰 집인데, 뜻밖에도 비데라곤 없었다. 일반 변기나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봐야 했다.민지는 임씨 가문이 얼마나 소박한지를 제대로 느꼈다.방금 그런 말을 한 것도 정은에게 무슨 생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서준은 핸드폰을 꺼내며 설명했다.“네가 일깨워줘서 다행이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고, 곧 7시가 되어 갔기에, 회의도 막바지에 이르렀다.사회자가 재석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 이번 세미나를 위해 마지막 축사를 했다.그 사이, 핸드폰이 두 번 진동했지만 재석은 받을 수가 없었다.왠지 모르게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면서 재석은 마음이 불안해졌다.그는 먼저 세미나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간단한 총결을 했는데, 깊이가 있는 발언에 무대 아래의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흥미진진하게 들었다.그러나 재석의 보고를 자주 듣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그가 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평소라면 재석의 보고는 세밀하고 총결하는 과정에 점차 결론에 들어섰지만, 오늘은 오히려 가장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끝냈다. 재석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후, 동료들이 놀라운 시선을 마주하며 성큼성큼 회의장을 나섰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차가운 안내음이 울렸다.“고객님이 통화 중이어서...”차단당한 게 아니라 민지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재석이 전화를 받지 않자, 민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실험실 커팅식 날, 컴퓨터 대학의 성달수도 찾아왔고, 정은과 사이가 좋아 보였다.‘성 교수님은 인맥이 넓으시니 우릴 도와주실 수 있겠지?’성달수는 최근 프로그래밍 팀을 이끌고 X국에 가서 경기를 참가했다. 민지의 전화를 받을 때, 그는 경기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가뜩이나 긴장해서 쩔쩔맸는데, 정은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고 성달수는 더욱 초조해졌다.‘재석은 요즘 일정이 빡빡해서 전화를 받지 못한 것도 정상이지. 다른 사람을 찾으려면...’성달수의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더니, 그는 생각할수록 적합하다고 느꼈다.[지금 곧 경기가 끝날 거야. 난 자리를 떠날 수 없으니 내가 이따가 문자로 번호 하나 보낼게. 넌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줘. 그럼 그 사람은 꼭 방법을 생각해 낼 거야.]“네, 교수님 감
달빛은 휘영청 밝고, 찬바람은 휙휙거리며 지나갔다.그러나 술집 안은 여름처럼 더웠다.전선우는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은 한창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1대2, 내가 이겼네! 하하, 네 페라리는 이제 내 거야!”“그건 아니지! 한 판 더!”“쯧쯧, 이러면 안 돼! 그래, 내가 한 판 양보할게, 하지만 다음 판에 내가 다시 이기면 넌 네 해변의 별장가지 같이 줘야 돼.”“그래!”‘집 한 채에 차 한 대일 뿐, 내가 못 주는 것도 아니고!’선우는 도박을 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을 했다. 첫판 끝나자, 선우는 도겸이 혼자 소파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형, 왜 오자마자 술을 마시는 거예요? 오늘 애들 엄청난 물건을 내걸고 있는데, 형도 한 판 하지 않을래요?”도겸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너희들끼리 놀아.”말하면서 또 술을 따르려 했다. 도겸은 물 마시 듯 비싼 와인을 꿀꺽꿀꺽 마셨다.선우는 이가 다 아팠지만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다시 구경하러 갔다.도겸이 차가운 표정으로 계속 술을 따를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경혜였다.그는 받기 싫었지만, 전에 경혜가 몇 번이나 자신을 도와주었기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응.”도겸의 숨소리가 좀 거칠었다. 목소리도 차갑고, 배경음악도 시끄러워 경혜는 흠칫 놀랐다. 잠시 후, 그녀는 도겸이 술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내일 밥 먹는 일에 대해서만 말했다.도겸은 마음에 두지 않은 듯 나른하게 말했다.“미안. 내일 저녁에 접대가 있어서.”경혜는 이때 눈치 있게 전화를 끊어야만, 자신이 그를 개의치 않는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도겸이 원하는 ‘협력 파트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경혜는 저도 모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물었다.“오늘 기말고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맞아요, 그리고 아주 특별한 시험이라 할 수 있죠.]“왜?” 도겸은 별다른 생각
호텔로 돌아올 때, 세정은 두 직원이 작은 소리로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위에서 책임을 물었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찾지 못하면 당장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한다.만약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도 해고될 것이라고.“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렇게 든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야?’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그 두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다.‘대단하긴 개뿔! 우리 오빠가 버린 걸레 주제에!’지금 도겸에게 전화가 오자, 세정은 바로 정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뭐? 정은이 실종됐다고?! 어떻게 실종될 수가 있지? 너 지금 어디야?” 도겸은 똑바로 앉더니 술잔을 꽉 쥐었다. 하마터면 진을 깨뜨릴 뻔했다.세정은 약간 멍해졌다.[아니, 소정은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야?]도겸은 눈을 붉히며 또박또박 말했다.“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정은이 왜 실종됐는데?! 어디서 실종됐어?! 너 지금 어디야?”세정은 깜짝 놀랐다.[나, 나도 방금 정은이 식물기지의 열대우림 구역에서 실종되었다는 방송통지를 들었을 뿐이야. 지금 전반 기지가 다...]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겸은 이미 전화를 끊었다.선우는 한창 신나게 보고 있었다. 이번에 판돈은 재차 두배로 늘어나, 두 대의 차와 두 채의 별장으로 되었다. 이때, 그는 갑자기 옆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뒤돌아보니 선우는 깜짝 놀랐다.“아니, 방금 나간 사람 우리 도겸이 형이야? 토끼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무슨 일 생겼어?”...캄캄한 숲속에서.정은은 발을 다쳤기에 제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비는 이미 그쳤다. 고요한 이 깊은 밤에 청력도 더욱 예민해진 것 같다.미처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나뭇잎을 따라 지면의 움푹 들어간 작은 물웅덩이에 떨어지면서 틱틱 소리를 냈다.그리고 밤에 깨어난 새와 벌레들도 수시로 목을 가다듬었다.모든 미세한 소리는 고요한 밤에 몇 배로 확대되었다. 다행히
“심 대표님, 나 여기에 있어요!” 정은은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식물 기지의 열대 지역은 우림이 우거져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길을 잃기 쉬웠다.현빈은 들어오기 전에 민지에게 물어봤지만, 지금도 그저 대략적인 방향만 알고 있었다.깊은 곳으로 갈수록 불빛이 희미해져서 후에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현빈은 비록 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색 범위가 제한된 데다가, 전등의 빛도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걸으면서 정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다행히 현빈은 운이 좋았다.약 30분 후, 물웅덩이를 밟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떠나려 하자마자 정은의 대답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갈게”“좋아요!”‘목소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 아마도 어디 심하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현빈이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는 즉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앞으로 찾아갔고, 마침내 두 개의 암석 사이에서 정은을 찾았다.비록 전등으로 얼핏 비췄지만, 현빈은 여전히 낭패한 정은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몸에 진흙이 묻은 데다가 머리카락도 헝클어졌고, 가방도 찢어졌다.현빈은 얼른 다가가서 정은을 부축했다.“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현빈은 방금 민지의 전화를 받고, 최악의 결과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정은이 기절하지 않고, 몸에 진흙이 많지만 피가 없는 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큰 문제는 없어요. 그냥 발을 삐었을 뿐이에요. 대표님 혼자 왔어요?”“내가 왔을 때, 기지는 인원들을 집결하고 있었어. 그 사람들도 곧 찾아올 거야.”현빈은 정은이 흠뻑 젖은 것을 보고 즉시 자신의 외투를 벗어 걸쳐주었다.“어느 발을 다쳤는데? 계속 부상 입지 않도록 고정해줄게.”“고마워요.” 정은은 오른쪽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전에 빨갛게 부은 발목은 이미 멍이 들었고, 무척 끔찍해 보였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정은의 발목을 검사
“벌써요?” 정은은 깜짝 놀랐다.재석은 가볍게 응답을 하며 가방에서 물병 하나를 꺼냈다.“비를 맞았으니 옷이 다 젖었겠지? 먼저 뜨거운 물부터 좀 마셔.”그는 보온병을 챙겨왔다.온수를 마시자, 정은은 따뜻한 기운을 느꼈고, 몸 전체가 뜨거워졌다.정은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선배님, 뜨거운 물까지 챙겼다니!”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현빈의 어두운 눈빛을 마주했다.“조 교수님, 준비를 충분히 하신 것 같은데요?”재석은 말투가 담담했다.“난 먼저 준비를 잘하고 출발하는 습관이 있어서요. 만약 정은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면, 제때에 약을 먹거나 응급처치를 해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 생길지 모르잖아요.”‘지금 날 욕하고 있는 것 같은데.’정은이 입을 열었다.“참, 선배님,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나요?”“날이 이렇게 어두운 데다가 방금 또 비가 내렸잖아. 난 방금 널 찾아올 때, 특별히 방향을 분별한 적이 있지만,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면 꽤 난이도가 있어.”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자신이 없는 거예요?”“80% 정도의 자신은 있는데.”정은은 눈에서 빛이 났다.“선배님도 너무 겸손하네요. 그럼 우리 먼저 선배님의 지휘를 따를게요. 중간에 기지 직원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좋아.” 두 사람은 모두 이 방안에 동의했다.하지만...재석이 물었다.“좀 쉬지 않을래?”정은은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빨리 나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그 후, 현빈은 정은을 업고, 재석은 전등으로 길을 밝게 비추었다.세 사람은 함께 움직였지만,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어색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밤, 두 남자는 저마다 걱정거리를 품고 있었다.예전 같으면 정은은 이미 어색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비를 맞아서 그런지, 그녀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곧 잠이 든 순간, 재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 이제 내가 정은이를 업을까요?”현빈은 그의 손을 무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