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로 돌아올 때, 세정은 두 직원이 작은 소리로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위에서 책임을 물었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찾지 못하면 당장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한다.만약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도 해고될 것이라고.“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렇게 든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야?’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그 두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다.‘대단하긴 개뿔! 우리 오빠가 버린 걸레 주제에!’지금 도겸에게 전화가 오자, 세정은 바로 정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뭐? 정은이 실종됐다고?! 어떻게 실종될 수가 있지? 너 지금 어디야?” 도겸은 똑바로 앉더니 술잔을 꽉 쥐었다. 하마터면 진을 깨뜨릴 뻔했다.세정은 약간 멍해졌다.[아니, 소정은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야?]도겸은 눈을 붉히며 또박또박 말했다.“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정은이 왜 실종됐는데?! 어디서 실종됐어?! 너 지금 어디야?”세정은 깜짝 놀랐다.[나, 나도 방금 정은이 식물기지의 열대우림 구역에서 실종되었다는 방송통지를 들었을 뿐이야. 지금 전반 기지가 다...]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겸은 이미 전화를 끊었다.선우는 한창 신나게 보고 있었다. 이번에 판돈은 재차 두배로 늘어나, 두 대의 차와 두 채의 별장으로 되었다. 이때, 그는 갑자기 옆에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뒤돌아보니 선우는 깜짝 놀랐다.“아니, 방금 나간 사람 우리 도겸이 형이야? 토끼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무슨 일 생겼어?”...캄캄한 숲속에서.정은은 발을 다쳤기에 제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비는 이미 그쳤다. 고요한 이 깊은 밤에 청력도 더욱 예민해진 것 같다.미처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나뭇잎을 따라 지면의 움푹 들어간 작은 물웅덩이에 떨어지면서 틱틱 소리를 냈다.그리고 밤에 깨어난 새와 벌레들도 수시로 목을 가다듬었다.모든 미세한 소리는 고요한 밤에 몇 배로 확대되었다. 다행히
“심 대표님, 나 여기에 있어요!” 정은은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식물 기지의 열대 지역은 우림이 우거져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길을 잃기 쉬웠다.현빈은 들어오기 전에 민지에게 물어봤지만, 지금도 그저 대략적인 방향만 알고 있었다.깊은 곳으로 갈수록 불빛이 희미해져서 후에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현빈은 비록 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색 범위가 제한된 데다가, 전등의 빛도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걸으면서 정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다행히 현빈은 운이 좋았다.약 30분 후, 물웅덩이를 밟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떠나려 하자마자 정은의 대답이 들려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갈게”“좋아요!”‘목소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 아마도 어디 심하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현빈이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는 즉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앞으로 찾아갔고, 마침내 두 개의 암석 사이에서 정은을 찾았다.비록 전등으로 얼핏 비췄지만, 현빈은 여전히 낭패한 정은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몸에 진흙이 묻은 데다가 머리카락도 헝클어졌고, 가방도 찢어졌다.현빈은 얼른 다가가서 정은을 부축했다.“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현빈은 방금 민지의 전화를 받고, 최악의 결과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정은이 기절하지 않고, 몸에 진흙이 많지만 피가 없는 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큰 문제는 없어요. 그냥 발을 삐었을 뿐이에요. 대표님 혼자 왔어요?”“내가 왔을 때, 기지는 인원들을 집결하고 있었어. 그 사람들도 곧 찾아올 거야.”현빈은 정은이 흠뻑 젖은 것을 보고 즉시 자신의 외투를 벗어 걸쳐주었다.“어느 발을 다쳤는데? 계속 부상 입지 않도록 고정해줄게.”“고마워요.” 정은은 오른쪽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전에 빨갛게 부은 발목은 이미 멍이 들었고, 무척 끔찍해 보였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정은의 발목을 검사
“벌써요?” 정은은 깜짝 놀랐다.재석은 가볍게 응답을 하며 가방에서 물병 하나를 꺼냈다.“비를 맞았으니 옷이 다 젖었겠지? 먼저 뜨거운 물부터 좀 마셔.”그는 보온병을 챙겨왔다.온수를 마시자, 정은은 따뜻한 기운을 느꼈고, 몸 전체가 뜨거워졌다.정은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선배님, 뜨거운 물까지 챙겼다니!”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현빈의 어두운 눈빛을 마주했다.“조 교수님, 준비를 충분히 하신 것 같은데요?”재석은 말투가 담담했다.“난 먼저 준비를 잘하고 출발하는 습관이 있어서요. 만약 정은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면, 제때에 약을 먹거나 응급처치를 해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 생길지 모르잖아요.”‘지금 날 욕하고 있는 것 같은데.’정은이 입을 열었다.“참, 선배님,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나요?”“날이 이렇게 어두운 데다가 방금 또 비가 내렸잖아. 난 방금 널 찾아올 때, 특별히 방향을 분별한 적이 있지만,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면 꽤 난이도가 있어.”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자신이 없는 거예요?”“80% 정도의 자신은 있는데.”정은은 눈에서 빛이 났다.“선배님도 너무 겸손하네요. 그럼 우리 먼저 선배님의 지휘를 따를게요. 중간에 기지 직원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좋아.” 두 사람은 모두 이 방안에 동의했다.하지만...재석이 물었다.“좀 쉬지 않을래?”정은은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빨리 나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그 후, 현빈은 정은을 업고, 재석은 전등으로 길을 밝게 비추었다.세 사람은 함께 움직였지만,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어색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밤, 두 남자는 저마다 걱정거리를 품고 있었다.예전 같으면 정은은 이미 어색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비를 맞아서 그런지, 그녀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곧 잠이 든 순간, 재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 이제 내가 정은이를 업을까요?”현빈은 그의 손을 무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큰 식물원 기지에 야근도 없는 건가? 아니면 몰래 잠을 자고 있을지도...”현빈은 계속 누르려고 했다.그러나 그가 손가락을 올리기도 전에 경보기가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이게 무슨 상황이죠?” 현빈은 좀 어리둥절했다.정은은 갑자기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재석의 표정을 보았을 때, 정은은 바로 자신의 예감이 맞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너무 조급하게 누르지 말았어야 했어요.”자세히 확인하기도 전에 경솔하게 누르다니.현빈은 영문을 몰랐다.“위에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잖아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죠?”“노란 방울은 두가지 함의가 있는데, 하나는 당신이 말한 긴급상황에서 외부에 연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경보라 할 수 있죠.”“경보요?”“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날카로운 소리가 바로 경보예요. 이런 식물원에 맹수가 존재할 가능성은 아주 작지만, 뱀과 벌레, 쥐와 개미 등 동물들이 많죠. 그중에는 독이 있는 종류가 있을 수도 있고요.”“그래서 이 버튼의 역할은 위험을 피하라는 거예요.”정은이 말했다.“방금 문 잠그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들었어.”말하면서 그는 유리문을 검사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구역의 유일하게 출구가 강제로 잠겼다.“잠겼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현빈은 눈썹을 찌푸렸다.“줄곧 잠겨 있지 않았어요?”“안에서 완전히 잠긴 거예요.”비밀번호를 통해 열 수 있던 문은 경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바람에 완전히 잠겼다.정은이 물었다.“비밀번호로도 열 수 없나요?”“응.”“미안해요, 제가 너무 다급했네요.”현빈은 죄책감을 느꼈다.분명히 나갈 희망을 보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실망에 빠졌다니. 정은은 약간 괴로웠다.다행히도 출구에 전기와 불이 있고, 신호까지 있어 마침내 어둠을 벗어났다.재석은 핸드폰을 꺼냈다.“기지 책임자에게 연락해 볼게요.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그쪽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현빈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재석은 통화를 마치고 두 사람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바로 이때, 하늘에서 또 다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울렸다. 바람은 습한 수증기를 감싸고 불어왔다. 정은은 눈썹을 찌푸렸다.“또 비가 올 것 같아요.”“앞에 정자가 있으니 거기에 가서 대피하자.” 현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쉴 수 있는 작은 정자를 발견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열리기 전에 그들은 제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현빈은 정은을 업고 정자로 향했다.정은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제 내려줘요.”현빈은 조심스럽게 정은을 내려놓았고, 재석도 옆에서 지켰다. 만약 정은이 넘어지면 그도 얼른 부축할 수 있었다.다행히 정은은 한쪽 발을 다쳤을 뿐, 다른 한쪽 발로 제자리에 설 수 있었다.그녀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한쪽 발에 의지한 채 정자에 앉았다.재석은 가방을 열어 보온병을 꺼냈다.“아직 뜨거운 물 있으니 좀 더 마셔.”정은은 홀짝홀짝 마시면서 재석이 마술사처럼 가방에서 여성 운동복 한 벌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옷과 바지까지 챙긴 것을 보며 정은은 참지 못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너무 촉박해서 오늘 길에 하나 샀어. 일단 갈아입어.”현빈은 기분이 언짢았다.이 소식을 들었을 때, 현빈의 머릿속은 온통 정은뿐이었고, 이런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운동복을 보며 말했다.“너 지금 온몸이 흠뻑 젖었으니 즉시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해. 나는 조 교수님은 저 멀리 가 있을 테니까, 다 갈아입으면 우리 불러.”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재석은 가방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운동복과 함께 건네주었다.“꼭 머리카락 닦아.”“고마워요.”이 순간, 정은은 목이 멨다.그녀는 오래전부터 재석이 아주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낀 것을 이번이 처음이었다.정은은 이 젖은 옷을 입으면서 온몸이 추웠고, 심지어 소름이 돋았다. 그 밤바람까지 맞았으니 정말 괴로웠
현빈은 정은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걸치려 했다.재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의 외투도 젖었으니 내 외투를 걸치는 게 좋을 거예요.”말을 하는 동시에 이미 지퍼를 내리며 정은에게 걸쳐주었다.현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정은은 몹시 추웠다. 분명히 뜨거운 물을 마셨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그 한기는 마치 뼛속에 스며든 것 같았다. 찬 기운이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렸다.한밤중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잽싸게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지만 유난히 오래 쏟아졌다.뒤따라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정자에는 천장 하나밖에 없었고, 몇 개의 기둥으로 지탱을 했기에 사방은 아무런 가림막도 없었다. 바람은 사람을 향해 몰아쳤다.정은의 목소리가 떨렸다.“추... 추워요...”그녀는 재석의 외투를 입고 자신의 두 팔을 힘껏 껴안았지만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 눈도 점점 감겨졌다.졸려서 눈을 좀 붙이고 싶었지만, 눈을 감으면 또 잠이 안 왔다.현빈은 찬바람을 무릅쓰고 자신의 스웨터를 벗어 정은에게 걸쳤다.재석은 막지 않고 묵묵히 가방에서 온도계를 꺼냈다.“지금 정은이가 열나고 있는 것 같아요.”...다른 한편.도겸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가장 빠른 속도로 식물 기지에 도착했다.세정은 마침 대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포츠카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급정거를 하더니 삐익 하는 소리를 냈다.다음 순간, 도겸은 문을 열고 내려왔다. 표정은 싸늘하고 눈빛은 차가운 채 곧장 세정 앞으로 걸어갔다.“정은이는? 지금 어디 있어?”세정은 이렇게 무서운 오빠를 마주하며 잔꾀를 부리지 못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도겸은 세정의 말을 듣고 긴 다리를 내디디며 직접 통제실로 들어갔다.통제실에 앉아 있던 책임자는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도겸에 의해 자리에서 들려났다.힘을 얼마나 썼는지, 뚱뚱한 중년 책임자는 이렇게 쉽게 들려졌다.“너, 너도 서비
엄청난 인기척에 수많은 학생과 직원들은 통제실을 에워싸고 구경했다.“이 사람은 누구야? 왜 이렇게 날뛰는 거지?”“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난번 MT에서 심경혜와 같이 온 사람 아니야? 심경혜의 남자친구라 한 것 같아.”“아닐 걸? 이 사람은 사업가인데, 돈이 엄청 많아! 잡지에도 여러 번 나타났고.”“돈이 있으면 다야? 나라의 식물 기지조차 마음대로 망치려 하다니, 쯧쯧...”주위의 목소리가 커지자 책임자는 화를 꾹 참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는 원래 도겸과 따지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그래도 제대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 식물 기지는 사업가의 투자를 받고 운영하는 게 아니었다.다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서준과 민지가 군중을 헤치며 다급하게 달려왔다.“원장님, 저희는 소정은과 한 팀인 학생들이에요. 이미 찾았나요?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죠?”원장은 민지의 태도가 좋은 것을 보고도 뜸을 들이지 않고 직접 말했다.“우리는 이미 그 학생의 구체적인 위치를 찾아냈어. 현재 세 사람은 모두 무사하고 큰 문제가 없어.”민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찾으면 됐어요.”서준도 마음을 놓았다.“찾은 이상 왜 아직 나오지 못한 거죠?”“경보 버튼을 잘못 건드려서 출구 문을 잠갔기 때문에 당분간 나올 수가 없어. 하지만 우리 기지의 프로그래머가 이미 달려오고 있어.”“대략 얼마나 더 걸려야 하나요?”“아마도 몇 시간.”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먼저 먹을 거라도 좀 보내줄 순 없을까요?”“이건 안 될 것 같아.”정은을 이미 찾았다는 말에 도겸은 그만 멍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반응했다“세 사람? 왜 세 사람인 거지? 정은이 혼자만 실종된 거 아니었어?”원장은 도겸을 보더니 말투가 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두 시간 전에 조 교수님과 심 대표님이 이미 도착하셨어. 다만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열대 구역에 들어가셨거든. 지금은 이미 그 학생을 찾으셨고, 세 사람 함께 출
“그러니까 우리 모두 서로를 이해하자고!”도겸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적어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원장의 말을 귀담아들은 게 분명했다.경혜는 한숨을 돌렸지만, 주위의 손가락질하는 사람과 수군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약간 뻘쭘했다.자신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위해 대중 앞에서 발광을 한 데다가, 그 여자는 심지어 자신과 같은 학년, 같은 전공이지만 다른 교수님을 선택한 학생이었다. 이것 만으로도 사람들은 헛된 소문을 퍼뜨리기에 충분했다.세상에는 구경꾼이 가장 많았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사람들은 구경거리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지예는 이 사람들이 정은을 위해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며 즉시 냉소를 지었다.“정말 정신이 나갔어!”‘난 또 무슨 큰일인가 했더니... 이게 다야? 소정은은 아직 잘 살아 있잖아? 이미 찾은 이상,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시킨 거야?’“그러게.”진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자신이 길을 잃어놓고선 이렇게 민폐를 끼치다니. 한밤중에 사람들 자지도 못하게 이게 뭐야? 소정은은 자신이 무슨 여왕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모두들 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냐고?”민지가 말했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 그래도 같은 학교인데, 우릴 도와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사람들 앞에서 꼭 이렇게 이간질을 해야겠어?”서준도 입을 열었다.“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 우리도 너희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으니까. 신진호, 그렇게 원망을 하고 싶다면, 일찍 돌아가서 씻고 자. 우리도 꼭 네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남의 발목을 붙잡지 말았으면 좋겠어!”“그래! 나도 원래 갈 생각이었어! 한겨울에 누가 여기에 있고 싶은 줄 알아?!”말을 마치자, 진호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지예도 눈을 부라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아, 졸려, 돌아가서 자야지.”다른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어차피 하늘이 무너지면 원장이 있는 데다가 구경할 만한 것도 없어서 남아도 재미없었다.잠시 후, 현장에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