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출국을 이틀 앞둔 7월 3일 밤.
진천의 훈련 거점에서 가져온 짐을 펼친 잠실 아파트 거실 마루 위에는 대형 하드 캐리어 두 개와 스포츠 더플백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채아는 자신의 캐리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태극 마크가 박힌 공식 유니폼과 주황색 맞춤 카본 스파이크, 회복용 압박 타이즈를 정갈하게 개어 넣고 있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특수 열접착 무봉제 방식으로 제작된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복.
채아는 옷깃의 솔기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지퍼 파우치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맞은편에서는 도현이 자신의 더플백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끝의 촉각을 활용하여 T11 규격의 공인 암전 고글 스페어 두 개와 나일론 테더, 휴대용 폼롤러, 점자 라벨이 붙은 단백질 보충제 통을 파우
3년 뒤인 2031년 봄, 다시 찾아온 서한체육대학교 대운동장.눈이 시리도록 맑은 아침 햇살이 푸른 하늘 아래 붉은 우레탄 트랙 주로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오전 6시,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는 트랙 위로 경쾌한 스파이크 핀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타박, 타박, 타타탕!몸을 풀던 신입생 후배들이 경외에 찬 눈빛으로 메인 주로 한편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야, 저기 봐. 윤채아 선배님이랑 차도현 선배님 오셨어.""올림픽 준결승 9위의 전설이랑 LA 패럴림픽 금메달리스트 부부…… 대박, 진짜 멋있다."후배들의 존경 어린 시선 속에서도 두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벤치 앞에 서 있었다.어느덧 스물여덟.전생에서 채아가 차가운 지하 월세방 복도 끝에서 심장이 멎어가던 바로 그 비극의 나이였다.스물여덟의 초겨울, 몽당연필로 낡은 탁상달력에 적어 두었던 마지막 메모.'다음엔 내 경기도 준비해야지.'하지만 지금의 스물여덟 살 윤채아는 만성 염증으로 닳아 없어진 발목 대신, 탄력 넘치는 근육과 세계 최정상급 기량을 갖춘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 스프린터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옆에 선 도현도 태준과 다음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잘 맞던 출발이 어긋나는 날이면 연구진과 영상을 다시 봤다. 금메달을 받았다고 매번 같은 기록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는 잘 안 되는 날을 혼자 숨기지 않았다.
늦가을의 청명한 햇살이 서울 근교 야외 가든 웨딩홀의 푸른 잔디밭 위로 황금빛 카펫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화려하고 번잡한 호텔 예식장 대신 두 사람이 선택한 곳은, 붉은 우레탄 트랙의 유려한 곡선을 본떠 단아하게 꾸며진 야외 잔디 주로였다.하객들이 마주 보는 버진로드는 새하얀 양탄자가 아니었다.육상 트랙을 닮은 출발선과 피니시 라인이 흰색 분필로 그려진, 두 사람이 직접 고른 특별한 주로였다.양옆으로는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와 억새풀이 싱그럽게 피어 있었고, 청명한 가을바람이 축복의 종소리처럼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갔다.하객석에는 대한민국 육상계의 살아있는 역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대학 시절부터 함께한 서민경 감독, 가이드 러너 한태준, 패럴림픽 대표팀 장병호 감독, 대학 동기 이진희와 라이벌 강이솔, 그리고 두 사람의 재기를 묵묵히 지원했던 체육지원처 식구들까지.그 누구도 파벌이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오직 정직한 땀방울로 일어선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예식 시작 30분 전, 신부 대기실.채아는 거울 앞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순백의 실크 드레스는 지면을 끌며 발을 얽매지 않도록 발목 위로 우아하고 경쾌하게 재단되어 있었다.그리고 채아의 발밑에는 하이힐 대신, 레이스 장식이 가미된 순백의 맞춤형 카본 러닝화가 단정하게 신겨져 있었다."채아야, 너 진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다."진희가 꽃바구니를 든 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입국 게이트.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순간, 스타디움을 방불케 하는 300여 명 취재진의 폭발적인 플래시 세례와 환호성이 공항 로비를 하얗게 뒤흔들었다.LA 올림픽 여자 100미터 준결승 11초 08로 대한민국 단거리 역사상 올림픽 최고 순위인 세계 9위의 신기원을 세운 윤채아.그리고 LA 패럴림픽 남자 100미터 T11에서 개인 최고 10초 99로, T11 전향 후 처음 10초대를 달리며 금메달을 거머쥔 차도현.두 사람이 나란히 입국 게이트를 걸어 나오는 순간, 방송사 중계 카메라와 마이크 수십 개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도현은 가이드 러너 한태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팀 네이비 단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가슴에 빛나는 황금빛 메달을 걸고 있었고, 채아는 당당하고 싱그러운 미소로 도현의 곁에서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수백 개의 플래시 불빛이 번쩍이는 혼란 속에서도, 도현은 오른손에 쥔 탄소 섬유 케인으로 바닥의 유도 블록을 가볍게 확인하며 자립적인 보폭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걸어 나갔다."차도현 선수! T11 전향 후 처음으로 10초대에 진입하면서 패럴림픽 금메달까지 획득하셨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윤채아 선수! 올림픽 무대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의 레이스를 펼치셨는데, 두 분이 함께 일궈낸 이 찬란한 동반 도약의 비결이 무엇입니까!"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 속에서 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낮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이 메달은 저 혼자만의 기적이 아닙니다. 제 눈이 되어 완벽한 주로를 함께 뛰어준 한태준 선수, 그리고 각자의 트랙
8월 22일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보랏빛 몬도 주로 위로 서치라이트가 쏟아졌다. 네 페어가 각각 두 개의 레인을 배정받아, 선수와 가이드 여덟 명이 출발 구역에 서 있었다.2028 LA 패럴림픽 남자 100미터 T11 파이널(Final).지구상에서 시각을 잃고도 가장 빠르게 달리는 네 명의 영웅들과 그들의 파트너가 마침내 세계 정상을 가리기 위해 결전의 주로 위에 집결했다.지하 소집실에서 주로로 걸어 나오는 동안, 경쟁자들의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5·6레인의 펠리페 고메스 페어, 1·2레인의 프랑스 대표팀 티모테 아돌프 페어, 7·8레인의 나미비아 아니아스 시콩고 페어까지. 도현과 태준에게는 3·4레인이 배정되어 있었다.예선을 거친 뒤 남은 네 페어였다. 누구도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을 상대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출발선 뒤편에서 고메스가 도현의 이름을 불렀다. 태준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알려주자 도현도 주먹을 뻗었다. 두 선수는 손등을 가볍게 맞대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섰다.짧은 인사 뒤로 스파이크가 바닥을 긁는 소리만 남았다. 도현은 태준에게 블록 간격을 다시 물었다.4레인에 선 차도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깊었다. 그의 곁에는 가이드 한태준이 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직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Quiet, please(모두 조용히 해 주십시오)."심판장의 낮고 엄중한 영어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자, 스타디움 전체를 뒤흔들던 8만
8월 21일 오전,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경기장 상공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메인 스타디움의 공기는 숨이 멎을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남자 100미터 T11(시각장애) 예선과 준결승이 하루에 연이어 치러지는 결전의 날이었다.스타디움 지하 1층, 패럴림픽 육상 최종 소집실(Call Room).각국을 대표하는 시각장애 스프린터들과 그들의 가이드 러너들이 팽팽한 적막 속에서 장비 검사를 받고 있었다.장비 검사 담당자들이 선수들의 아이패치와 불투명 안대를 확인했다.안대가 얼굴에 잘 밀착되는지, 빛이 들어올 틈은 없는지 차례로 점검했다. 도현은 담당자의 지시에 따라 고개를 조금씩 돌렸다.테더는 비탄성 재질인지, 손목 고리까지 포함한 전체 길이가 30cm 이내인지 확인했다. 연결부의 길이와 매듭 상태도 살폈다.도현은 의자에 조용히 앉아 안대 검사를 담담하게 마쳤다.회귀 직후 서한체육대학교 트랙에서 처음으로 시각 차단 안대를 착용했을 때의 공포가 문득 스쳐 지나갔다.발밑이 낭떠러지로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던 서늘한 칠흑의 공포, 장애를 수치스러워하며 어떻게든 숨기려다 트랙에서 구르고 채아의 등 뒤로 비겁하게 숨었던 전생의 참담한 후회.하지만 지금의 도현은 달랐다.자신의 장애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최고의 스포츠 과학과 파트너십으로 극복해 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평정심과 긍지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시각을 잃었다고
8월 10일 오후 2시 30분,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입국장.투명한 아치형 유리 천장 너머로 한여름의 눈부신 LA의 햇살이 입국장 대리석 바닥 위로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올림픽 100미터 준결승 일정을 명예롭게 마치고 LA 시내 스포츠 비즈니스 센터 게스트하우스에서 열흘 남짓의 개인 휴식을 취하던 채아는, 단정한 흰색 린넨 셔츠에 슬랙스 차림으로 B 입국 게이트 앞 벤치에 서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시원한 얼음 생수 두 병과, 서한체대 및 수원시청 육상팀의 응원 문구가 작게 적힌 미니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그동안 채아는 매일 아침 숙소 인근 공원 산책로를 가볍게 조깅하며 피로를 털어냈다.만성 염증으로 뼈마디가 갉아 먹히던 전생과 달리, 부상 하나 없이 팽팽하게 살아 숨 쉬는 근육과 관절의 탄성은 매일 아침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수원시청 구단과 대한육상연맹에서는 올림픽 9위라는 역대 최고 성적에 대한 특별 격려금과 다음 시즌 해외 전지훈련 전액 지원 확정 공문을 보내왔다.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자유와 풍요로움이었다.그리고 오늘, 채아는 그 찬란한 여유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공항에 나와 있었다.전생의 채아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전생에서 채아는 원정 공항에 도착할 때마다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도현의 무거운 하드 캐리어 세 개를 혼자 끌어내리느라 진땀을 뺐다.사촌 차진우의 잡다한 영수증과 서류 가방을 챙기고, 도현의 시각 보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