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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집의 며느리로 위장취업

원수의 집의 며느리로 위장취업

아버지를 무너뜨린 원수의 집에 며느리로 들어간 강은서. 10년간 모욕을 삼키며 증거를 모은 그녀에게 남편이 내연녀를 데려와 이혼을 요구한다. 쫓겨날 줄 알았던 며느리가 꺼낸 것은 눈물 대신 장부. 이제 이 집에서 빈손으로 나갈 사람이 누구인지 가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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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35화(외전): 출근
다음 해 봄, 첫 현장 점검은 아침 아홉 시였다.나는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에 눈을 떴다. 창밖에서 쓰레기 수거 차량이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누가 돌아온 줄 알고 일어났을 소리였다. 이제는 이 동네의 수거 요일을 알고 있었다.주방에서 밥을 데우고 전날 사 둔 달걀을 부쳤다. 노란 컵은 새로 산 것이었다. 물을 따르다가 휴대전화 화면에 뜬 날짜를 봤다.3월 14일.한동안 달걀이 익는 소리만 들었다. 작년 이날, 나는 피 묻은 입술로 도진에게 이혼 소장을 받았다. 현관 밖으로 내 옷이 날아갔고 밤새 비가 왔다.오늘 일기예보에는 비가 없었다.뒤집개를 들었다. 가장자리가 조금 탔지만 달걀은 잘 뒤집혔다. 밥 위에 얹어 앉아서 먹었다. 다 먹은 그릇을 물에 담근 뒤 가방을 챙겼다.현관 거울 앞에서 옷깃을 폈다.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백금 열쇠를 만지던 손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대신 재킷 주머니에 작은 수첩을 넣었다.첫 장에는 오늘 확인할 현장 문제가 적혀 있었다.출입로 물 고임. 휴게 공간. 지난달 지급 확인.차에 오르자 민혁이 태블릿을 건넸다."점검 후 회의는 열한 시입니다. 법무 보고는 내일 정기 회의 자료에 넣었습니다. 오늘 따로 결정하실 내용은 없습니다.""그럼 내일 볼게요."도진과 서린에 관한 소식도 한동안은 보고서에서 이름부터 찾았다. 어느 날부터는 민혁이 표시한 확인 사항을 먼저 읽게 됐다. 아직 남은 절차가 있었고, 내가 직접 살피지 않아도 정해진 날에 보고가 올라왔다.차는 추모공원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현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께는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그날 나는 회사 이야기를 조금 하고, 태운 생선 이야기를 더 오래 했다.현장 입구에서 안전모를 받아 썼다. 정애 씨가 작업 조끼 차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성우환경의 계약이 끝난 뒤 새로 선정된 업체로 옮겼고,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대표님, 저쪽으로 오세요. 어제 청소하다 보니까 물이 아직 남더라고요."그가 가리킨 출입로 모서리
최신 업데이트: 2026-09-27
Chapter: 제34화(외전): 식탁
이사한 지 삼 주가 지나서야 식탁 의자를 두 개 더 샀다.민혁과 비서실의 윤 대리, 정애 씨를 저녁에 초대했다. 정애 씨는 밀린 임금을 받은 뒤에도 현장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사진으로만 본 생선구이를 이번에는 내가 대접하고 싶었다."제가 대표님 댁에 가도 됩니까?"전화 속 목소리가 높아졌다."불편하시면 밖에서 먹어도 돼요.""아니요. 아들이 자꾸 잘 다녀오라네요.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요."과일 한 봉지만 가져오시라는 말에 정애 씨가 웃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메모지에 세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손님 명단을 쓰면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아직 낯설었다.토요일 오후, 시장에서 고등어를 샀다. 된장을 풀고 채소를 썰었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익숙했다.도진의 결혼기념일 상도 이런 순서로 준비했었다. 국을 먼저 끓이고, 고기를 재우고, 늦게 오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불을 줄였다. 나는 칼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손등을 식혔다.오늘은 여섯 시에 먹기로 했다. 늦는 사람이 있어도 그 시간에 먹으면 됐다.첫 손님은 윤 대리였다. 그는 문 앞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다가 굳었다."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외투부터 벗어요."그가 휴대전화를 꺼내려다 다시 넣는 것을 봤다. 나는 거실 한쪽을 가리켰다."오늘 보고할 일은 없어요. 저도 메일 안 열었고요."곧 정애 씨가 귤을 들고 왔고, 민혁은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식탁에 그릇 네 벌을 놓자 비어 있던 자리가 채워졌다."그릇이 예쁘네요."정애 씨가 접시 가장자리를 살폈다. 나는 어디에서 샀는지 이야기하다가 생선을 뒤집을 시간을 놓쳤다. 주방으로 달려가니 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불을 끄고 창문을 더 열었다. 까맣게 붙은 껍질을 보는 순간 입에서 사과가 먼저 나왔다."죄송해요. 다시 할게요. 금방……"손이 젖은 행주를 더듬었다. 등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자 어깨가 저절로 올라갔다."은서 씨, 불은 꺼졌어요.
최신 업데이트: 2026-09-27
Chapter: 제33화(외전): 열쇠
새집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두 번이나 반대로 돌렸다.업무용 숙소에서는 카드 한 장이면 됐는데, 이 오래된 아파트는 보조 잠금장치에 열쇠가 필요했다. 중개인이 설명해 준 방향을 떠올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넓지 않은 거실에 오전 햇빛이 들어와 있었다. 가구점에서 먼저 보낸 식탁과 의자 두 개, 아직 비닐을 벗기지 않은 소파가 전부였다. 창문 아래에는 이삿짐 상자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나는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시어머니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도진이 자고 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몸은 자꾸 집 안의 소리를 먼저 찾았다.냉장고가 낮게 울었다. 그뿐이었다.첫 번째 상자에는 업무용 옷이 들어 있었다. 검은 재킷과 흰 셔츠를 옷장에 걸고, 빈 칸을 세었다. 절반 이상이 남았다.옛 저택에서는 내 옷이 도진의 계절 지난 코트 옆에 끼어 있었다. 옷걸이 하나를 더 걸 때마다 시모가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물었다. 나는 벌어둔 돈이 있으면서도 값싼 옷의 가격표를 보여주곤 했다.옷장 문을 닫지 않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접시 네 장과 수저, 냄비 하나가 나왔다. 모두 새 물건이었다. 나는 접시를 꺼내다가 손을 멈췄다. 식탁은 두 사람용인데 왜 그릇은 네 벌을 샀을까.누가 올지도 정하지 않은 집이었다.초인종이 울렸다. 손에서 접시가 미끄러질 뻔했다."대표님, 한민혁입니다. 맡기신 서류를 가져왔습니다."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민혁은 납작한 보관함을 들고 있었다. 옛 일기장과 재판에 쓰인 자료 중 내가 직접 보관하기로 한 것들이었다."서재 안쪽에 두면 될까요?""제가 받을게요. 무겁죠?""책 몇 권 정도입니다."그는 보관함을 식탁 위에 놓았다. 나는 손잡이를 잡아 들어봤다. 10년을 담은 물건이었지만, 양손으로 옮길 만했다. 서재의 잠금장치가 있는 수납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열쇠는 현관 열쇠와 다른 고리에 끼웠다.민혁이 빈 벽을 둘러봤다."책상이 아직 안 왔군요.""주문을 취소했어요. 회사 것보다 큰 걸
최신 업데이트: 2026-09-27
Chapter: 제32화(외전): 지급
성우환경 대표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왔다.그가 가져온 화분은 비서가 접견실 밖에 두었다. 나는 악수를 마치자마자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어젯밤 재무팀이 정리한 지급 내역과 아직 서명하지 않은 재계약서가 놓여 있었다."새 간판을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선친께서도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습니까.""어제 받으신 대금부터 확인하죠."그의 시선이 재계약서에 머물렀다."그 건으로 연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돈은 들어왔습니다. 다만 그동안 저희도 급한 곳이 많아서요. 현장을 유지하려면 융통성이 필요합니다.""직원들에게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셨더군요.""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이 이체 확인서의 수취 계좌를 짚었다."입금 사실은 확인하셨습니다. 밀린 임금의 지급 일정과 내역을 요청드립니다."성우 대표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변호사님까지 나오실 일이 아닙니다. 직원들하고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강 대표님도 앞으로 사업하시다 보면……""제게 사업을 가르치러 오신 건가요?"그의 웃음이 어색하게 멎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서로 편하게 일하자는 말씀입니다. 박 회장하고도 그렇게 오래 맞춰왔으니까요."그가 재킷 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두께를 보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봉투는 내 찻잔 옆으로 밀려왔다.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가져가세요.""취임 축하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직원 월급은 못 주셨다면서요."그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계속 이런 식이면 인력 배치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현장 네 군데를 누가 치웁니까?"나는 재계약서를 덮었다."지금 계약은 남아 있습니다. 이행하실 업무와 지급하실 임금을 설명해 주세요. 다음 계약을 먼저 약속하지는 않겠습니다."민혁이 준비해 온 확인 항목을 건넸다. 기존 계약의 이행 상태와 새 계약에 필요한 자료가 구분돼 있었다. 갑자기 직원을 내보내 현장과 생계를 함께 흔들지 않도록 대체 운영 계획도 관리팀이 검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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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31화(외전): 봉투
추모공원에서 돌아오니 오후 네 시였다.현판식 때 걸어둔 꽃장식이 아직 로비에 남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서류철을 비서에게 맡기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직원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앉으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탁자에는 복직자들의 배치표와 다음 달 현장 일정이 놓여 있었다. 맨 끝자리의 여자는 자료 대신 낡은 봉투를 쥐고 있었다. 가슴에 단 방문증이 뒤집혀 있었다."저분도 오늘 면담 대상인가요?"옆에 서 있던 관리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협력업체 직원입니다. 현판식에 오셨다가 대표님을 꼭 뵙겠다고 하셔서요. 저희가 따로 안내하겠습니다."그가 문 쪽으로 손을 내밀자 여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빈 의자를 당겼다."어떤 일로 오셨는지 먼저 듣죠."여자는 앉지 않고 봉투부터 내밀었다."현장 청소하는 김정애입니다. 오늘 돈을 다 주셨다고 해서요. 그런데 저희 사장님은 아직 못 받았답니다."관리팀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대금은 오전에 전부 지급했습니다. 업체 내부 사정까지 저희가 알 수는 없고요.""그럼 이건 어디에 물어봐야 합니까?"봉투에서 접힌 급여 명세서 두 장이 나왔다. 정애 씨는 구겨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마지막 장에는 붉은 펜으로 날짜가 두 번 고쳐져 있었다."두 달 밀린 월급입니다. 사장님이 원청 돈 들어오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까지 기다렸습니다."조금 전 광장에서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한 대가를 제때 받게 하겠다는 약속. 나는 지급 완료 보고서에 서명했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하지만 이 여자는 그 박수 속에서도 봉투를 내려놓지 못했다."업체 이름이 어떻게 되죠?""성우환경이요."관리팀장이 노트북을 돌렸다. 오전 열 시 이전에 이체가 끝난 내역이 있었다. 받는 사람도 성우환경이었다. 나는 금액과 계좌 명의를 확인한 뒤 민혁을 봤다."오전 지급분에 어느 현장 대금이 포함됐는지 확인해 주세요.""계약서와 정산 내역을 대조하겠습니다."정애 씨의 손가락이 봉투 입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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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30화: 새출발
경기도 북부의 양지바른 추모공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로 서늘하고 맑은 솔바람이 불어와, 품에 안은 새하얀 국화꽃 다발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꽃집에서 뿌린 물방울이 꽃잎 사이에 남아 있었다.나는 줄기를 감싼 종이를 다시 여몄다. 10년 전, 피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의 장례를 홀로 치러야 했던 그 혹독하고 시리던 겨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을 바쳐 일군 한양건설을 원수 박태식에게 도둑맞고, 수백억의 부도 어음과 억울한 누명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내 아버지.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나를 조롱하던 원수들의 비열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음을 삼키고 스스로 독사를 품었다. 그날 이후 시작된 10년간의 처절했던 위장 잠입. 시어머니의 각질투성이 발을 주무르고, 남편의 손에 뺨을 맞으며, 화장실 변기를 닦으면서도 결코 칼날을 거두지 않았던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또각. 또각.내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고요한 추모관 복도를 울렸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은, 따스한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故 강창수 회장의 유골함 앞이었다. 유리벽 너머, 생전의 모습 그대로 인자하고 따뜻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흑백 영정 사진.나는 가슴에 품고 온 가죽 서류철을 꺼내 선반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다.[주식회사 한양건설 법인 등기사항전부증명서 (대표이사 강은서)][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판결문: 피고인 박도진 징역 12년, 피고인 신서린 징역 5년][태성그룹 상호 변경 및 한남동 대저택 인도 집행 완료 확인서]그리고 지난 10년간 내 살갗을 찢어가며 피눈물로 기록했던 낡은 검은색 복수 일기장. 가문을 공중분해시키고 원수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내 20대를 송두리째 바쳐 완성한 피 묻은 장부들이었다."아버지."마침내 내 입술 사이로 메마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목덜미에 10년간 걸려 있던 작은 백금 열쇠 펜던트를 풀어,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약속 지켰어요. 아버지의 한양건설도, 도둑맞았
최신 업데이트: 2026-09-27
내 아이의 유치원 앞을 서성이는 전남편

내 아이의 유치원 앞을 서성이는 전남편

5년 전 이혼한 전남편이 어느 날 네 살 아들 하람의 유치원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아빠가 되겠다며 매일 나타나고, 윤서진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버틴다. 하지만 아이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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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30화: 동화책과 잠꼬대 폭탄
딸깍. 104동 302호의 작은 아이 방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천장에는 형광 별 스티커들이 은은하게 야광 빛을 발하고 있었고, 방 안 가득 베이비파우더 향기와 따스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침대 머리맡, 네 살배기 윤하람은 잠옷 차림으로 이불을 턱 끝까지 덮은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 카펫 바닥에는 태혁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무보수 육아 기사 계약서 특약 제6조.[외압 방어 완수 시, 1일 1회 하람이 야간 목욕 및 취침 동화 구연권 부여.] 조금 전, 태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람이의 머리를 감기고 뽀송뽀송하게 물기를 닦아주었다. 작은 발가락 하나, 통통한 배를 타월로 감싸 안을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의 손에는 두툼한 양장본 서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어린이를 위한 백악기 공룡 대탐험》. 태혁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월가 투자자들을 상대로 수천억 원짜리 프레젠테이션을 펼치던 명석한 두뇌가 오직 네 살짜리 청중 한 명을 위해 풀가동되기 시작했다."옛날 옛적, 울창한 숲속에 용감하고 힘센 티라노사우루스가 살고 있었단다.""삼촌, 목소리가 너무 신사 같아서 재미없어! 티라노는 훨씬 무서운 소리를 낸단 말이야!"하람이가 이불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며 주문을 넣었다. 태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체면 따위는 개나 준 지 오래였다.태혁은 두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얼굴 옆에 올리더니 포효했다."크아아아앙—! 내가 바로 백악기의 제왕,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강력한 꼬리치기로 날려버리겠다!""꺄르르르!"태혁의 리얼한 성대모사에 하람이가 배를 잡고 뒹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태혁은 신이 나서 트리케라톱스의 뿔 들이받기, 하늘을 나는 익룡의 날갯짓까지 온몸으로 열연을 펼쳤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밤새도록 쥐라기 공원을 통째로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신 업데이트: 2026-09-30
Chapter: 제29화: 대표님의 밀가루 특훈
"차태혁 씨, 지금 남의 아파트 단지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새벽안개 자욱한 조깅 트랙 위, 쓰레기봉투를 든 서진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달려오던 태혁이 멈춰 서며 20kg 쌀포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 모습은 사모펀드 대표가 아니라 올림픽을 앞둔 역도 선수 같았다."서, 서진아…… 벌써 깼어?"태혁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멋쩍게 웃었다. 서진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태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새벽엔 쌀 배달부 코스프레예요? 왜 이래요, 정말?""가을 운동회 2구간이 쌀포대 점프거든. 하람이한테 티라노 텐트 안겨주려면 하체 근력이랑 순발력을 길러야 해."태혁의 진지한 눈빛에 서진은 헛웃음을 삼켰다. 네 살배기 아들의 장난감 텐트를 따겠다고 쌀포대를 메고 새벽 트랙을 질주하다니. 한심했지만, 땀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어진 얼굴을 보자 왠지 가슴 한편이 찌릿했다.서진은 겉옷 주머니에서 시원한 이온음료 한 캔을 꺼내 태혁에게 툭 던졌다."마시고 들어가요. 동네 주민들이 보면 또 112 신고하니까."차가운 캔을 품에 안은 태혁의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서진이 먼저 건네는 호의에는 여전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태혁은 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감격의 눈물을 찔끔 흘렸다.돌아선 서진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 사라졌다.***오전 10시, 서울 테헤란로 태원인베스트먼트 42층 대회의실. 원목 테이블 중앙에 백설 밀가루가 산더미처럼 쌓인 대형 은쟁반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밀가루 한가운데에는 알록달록한 포도맛 사탕들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대표님, 세팅 완료되었습니다!"초시계를 든 한준우와 백민석이 외쳤다. 태혁은 최고급 명품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쟁반 앞에 섰다."1구간 밀가루 사탕 먹기 시뮬레이션이다. 안면 침투와 폐활량만으로 사탕을 낚아챈다. 출발!"태혁은 주저 없이 얼굴을 밀가루
최신 업데이트: 2026-09-30
Chapter: 제28화: 맘카페 잠입과 굴욕의 퀴즈
"골드 회원? 그깟 인터넷 동호회 등급 따위가 왜 난공불락이라는 건데?"차태혁은 코웃음을 치며 태원인베스트먼트 42층 대표이사실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월가 헤지펀드 서버도 뚫어본 그였다. 수조 원 규모의 글로벌 기업 인수합병도 데이터 분석 하나로 단숨에 해치웠던 대한민국 최고의 투자 귀재였다.그런 그에게 동네 맘카페 회원 등업 따위는 장난감 블록 맞추기보다 쉬워 보였다."비켜 봐. 내가 직접 푼다."태혁은 백민석을 밀쳐내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모니터 화면에 신도시 최대 규모의 맘카페, [달콤맘 신도시 네트워크]의 회원가입 화면이 떴다.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가입 퀴즈 목록을 본 순간, 태혁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질문 1. 생후 6개월 초기 이유식 2단계 진입 시, 소고기 안심과 쌀가루의 이상적인 배합 비율을 서술하시오.] [질문 2. 국민 문짝과 에듀테이블 중 생후 9개월 아이의 소근육 발달에 더 적합한 완구와 그 이유를 쓰시오.] [질문 3. 밤 기저귀 핫딜이 가장 자주 뜨는 요일과 빅스마일데이 쿠폰 중복 적용 경로를 약술하시오.]"……이게 대체 무슨 암호문이야?"태혁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확률 모델보다 더 난해하고 기괴한 문제들이었다. 옆에서 들여다보던 한준우가 혀를 끌끌 찼다."태혁아, 네가 아는 건 EBITDA랑 PER밖에 없잖아. 쌀가루 배합비를 네가 어떻게 알아?""시끄러워! 구글링하고 논문 검색해! 당장 국내외 소아청소년과 학술지 전부 뒤져!"태혁의 불호령에 엘리트 펀드매니저 셋이 머리를 맞대고 이유식 비율과 기저귀 할인율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차 제출 결과는 처참했다.[알림: 관리자에 의해 가입 신청이 거절되었습니다. 사유: 광고 대행업자 의심 및 기계적 단답형 서술.]"탈락? 내가 탈락이라고?!"태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효했다. 어설프게 의학 논문을 인용한 답변이 맘카페 베테랑 매니저의 의심을 산 것이었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 새벽
최신 업데이트: 2026-09-30
Chapter: 제27화: 티라노를 향한 비상소집
"엄마! 이거 봐봐! 알림장에 진짜로 떴단 말이야!"하람이는 작은 손으로 스마트폰을 꽉 쥔 채 거실 바닥을 콩콩 뛰었다. 화면 속에는 굵은 고딕체로 쓰인 안내문이 번쩍이고 있었다. [햇살반 유치원 가을맞이 가족 한마음 운동회] — 메인 종목: ‘아빠들의 목숨 건 100m 장애물 달리기’ — 1등 우승 상품: 초대형 한정판 티라노사우루스 캠핑 텐트!"민우네 아빠는 특전사 출신이라 매일 아침 아령 들고 뛴대! 유치원에서 제일 빠르다고 민우가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하람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차태혁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 서슬 퍼런 눈빛은 마치 무능한 부하를 질책하는 사령관의 눈초리와도 같았다."삼촌, 저 텐트 못 따오면 우리 계약 파기야. 삼촌이랑 다시는 안 놀고 마이쮸도 안 뺏어 먹을 거야!"태혁은 하람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이는 경품 텐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들의 인정과 사랑, 그리고 5년 동안 비워두었던 아빠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승부처였다.태혁은 결연하게 가슴을 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람아, 삼촌이 누구냐. 대한민국 1등 투자 전문가이자…….""달리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거든? 삼촌 다리 길기만 하고 엄청 느리잖아. 저번에 편의점 뛸 때도 헉헉댔으면서."태혁은 달리기와 투자 실력이 무슨 상관인지 더 잇지 못했다. 식탁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서진이 피식 실소를 흘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차태혁 씨, 김칫국 마시지 마세요. 그 종목, 규정상 보호자로 등록된 사람만 출전할 수 있어요. 그냥 삼촌이라고만 하면 신청서 접수도 안 된다고요."태혁은 신청서를 내려다봤다. 가족관계 서류에 이름이 있다고 유치원의 인계 명단까지 저절로 바뀌지는 않았다. 서진이 맡겨도 된다고 동의해야 했다. 그는 식탁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서진아, 나도 추가 보호자로 등록해줄래? 신청할 수 있으면 하람이랑 같이 뛰고 싶어. 텐트도 탐나지만."서진은 그가 당겨 앉은 의자와 신청서를 번갈아 봤다. 말만 앞서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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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6화: 5년 만의 진심과 새로운 계약 조항
서진의 묵직한 돌직구 질문에 설거지를 마친 차태혁의 두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식탁 조명 아래 마주 앉은 서진의 눈동자는 티끌만 한 거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투명하고 깊었다. 태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식탁 맞은편 의자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태혁은 조신하게 손을 모은 채, 한 글자 한 글자 심장을 깎아내듯 입을 열었다."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진심이었어, 서진아."태혁은 눈가가 붉어진 채, 목에 걸린 다음 말을 힘겹게 꺼냈다."5년 전엔 내가 어머니의 오만함을 방관하고 가문의 체면 뒤에 숨었던 천하의 비겁자였어. 내 알량한 자존심과 미성숙함 때문에 너한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지."태혁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서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하지만 지금의 내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오직 너와 하람이뿐이야. 태원인베스트먼트의 수천억 지분이든, 재벌 후계자 타이틀이든 너희 두 사람과 바꿀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어. 만약 어머니가 또다시 너희를 괴롭힌다면 난 주저 없이 모든 걸 내던질 거야."태혁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계산도, 오만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5년간의 뼈저린 후회와, 남은 생을 다 바쳐서라도 지켜내겠다는 순수한 결의만이 담겨 있었다. 거실 안에는 벽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서진은 따뜻한 보리차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하고 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단단히 얼어붙어 있던 빙벽 한 귀퉁이가 쩌적, 금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돈과 가문이 전부인 줄 알았던 오만한 남자가, 자신과 아이를 위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는 순간이었다.태혁의 그 진실한 눈빛 앞에서, 서진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오랜 원망과 응어리가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서진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무너지는 여자가 아니었다. 서진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서랍에서 검은색 볼펜 한 자루를 꺼내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그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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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5화: 맘카페의 레이더망과 302호의 온기
롤스로이스 행렬이 매캐한 배기가스를 뿜으며 단지 밖으로 사라진 후. 104동 앞 화단 벤치에 차태혁은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일시에 풀려나간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후들거렸다.온몸은 땀과 흙탕물로 엉망이었고, 헐렁한 노란 티셔츠의 목둘레가 늘어져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보다 태혁을 짓누르는 것은 처절한 자괴감이었다. 자신이 서진과 하람이를 지켜주겠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결국 또다시 본가의 추악한 소동에 두 사람을 노출시키고 만 것이었다.태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한편, 그 시각 신도시 최대 규모 맘카페는 실시간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자유게시판 | 실시간 104동 앞 레전드 사건 목격함 (feat. 샤넬 할머니)]— 내용: 104동 앞에 롤스로이스 타고 온 샤넬 풀착장 재벌 시어머니 같은 할머니가 쳐들어옴. 근데 햇살반 훈남 삼촌이 온몸으로 막아서면서 '호적 파겠다'고 소리 지름 ㅠㅠ 거기다 햇살반 귀요미 하람이가 물총으로 샤넬 재킷에 물 쏴서 완벽 격퇴함 ㅋㅋㅋ진짜 드라마 한 편 찍었네요. 그 수트 삼촌 순정남 인정합니다. 댓글 창은 1분 만에 수백 개의 찬사로 도배되었다.— 와, 호적까지 파겠다고요? 저런 남자가 어딨어 ㅠㅠ — 하람이 물총 사이다 대박이네요 ㅋㅋㅋ 햇살반의 영웅이다!— 104동 수트남 삼촌, 우리 맘카페 공식 명예 삼촌으로 임명해야 함! 동네 엄마들의 뜨거운 반응은 순식간에 수천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불타올랐다. 온 동네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줄도 모른 채, 태혁은 벤치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웅크려 있었다.어스름한 저녁노을이 붉게 번져가며 바람이 태혁의 젖은 등을 쓸어내렸다.그때였다.저벅, 저벅. 단정한 슬리퍼 소리가 모래밭을 밟으며 다가왔다. 태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장바구니를 든 서진이 벤치 앞에 우뚝 서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군만두와 어묵 국물 포장 용기가 들려 있었다. 서진은 흙투성이가 된 태혁의 꼴을 무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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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생에는 당신의 신부가 되지 않겠습니다

아홉 번째 생에는 당신의 신부가 되지 않겠습니다

여덟 번 죽고 마지막 꼬리만 남은 구미호 윤해원. 아홉 번째 생에서 정략결혼을 거부한 그녀 앞에, 매번 죽음의 끝에서 마주친 수사관 차시헌이 손을 내민다. 살인자인가, 구원자인가. 조작된 혼인계약의 진실을 쫓으며 두 사람은 빚도 운명도 아닌 서로의 선택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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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030화. 기계보다 먼저 아는 것
“8개요.”스피커 너머 서이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통제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해원은 자신의 등 뒤를 확인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남은 꼬리는 여전히 하나였다.“형태를 더 설명해 주세요.”시헌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실체가 있습니까?”“반투명해요. 푸른색이고…….”이나가 잠깐 말을 멈췄다.“병실을 열 때마다 꼬리 하나가 사라집니다.”이선경이 즉시 생체신호 지도를 확대했다. 8층 B구역에는 14개의 점이 떠 있었다.그중 복도 중앙을 이동하는 검은 표시 하나.“장비상 미확인 개체는 없습니다.”현장 분석관이 말했다.“생체도 영체도 0입니다.”해원이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있어요.”분석관이 돌아봤다.“무슨 근거입니까?”“냄새가 나요.”“여기는 1층 통제실입니다.”“그래도 납니다.”해원은 눈을 감았다.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사이로 희미한 탄내가 섞여 있었다.불에 탄 털.자신의 꼬리가 소멸할 때마다 맡았던 냄새였다.첫 생에서는 죽기 직전.다섯 번째 삶에서는 정신을 잃기 전.여덟 번째에는 숨이 끊어진 뒤라 기억할 수 없었다.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맡은 냄새만으로 충분했다. 해원이 8층 평면도를 가리켰다.“이 복도 아니에요.”장비가 초록색으로 표시한 동쪽 통로였다.“저기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분석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현재 유일하게 영력 오염 수치가 정상인 구간입니다.”“그래서 이상해요.”“정상이라서요?”“네.”해원이 손목을 들어 보였다. 검은 감시각인은 동쪽 통로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조금씩 선명해졌다.“이게 저 길을 좋아합니다.”시헌은 바로 물었다.“반대쪽은요?”해원이 서쪽 서비스 복도를 짚었다. 장비에는 붉은 위험 표시가 빽빽했다.“저쪽은 아파요. 그런데 끌리지는 않아요.”분석관이 고개를 저었다.“오염농도 기준치의 4.8배입니다. 현행 매뉴얼상 진입 금지입니다.”시헌이 말했다.“매뉴얼 근거는 기록해 두십시오.”그리고 평면도 위의 진입선을 서쪽으로 바꿨다.분석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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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029화. 백야병동
3월 8일 오전 열 시가 넘어 도착한 백야병원 앞에는 구급차보다 정부 차량이 더 많았다.해원은 차에서 내리기 전 건물부터 올려다봤다. 본관은 정상적으로 불이 켜져 있었다.문제가 생긴 곳은 별관 8층.창문 12개가 모두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밤도 아닌 오전인데, 그 층만 햇빛과 무관하게 발광하고 있었다.“그래서 백야병동인가요?”해원이 물었다.이선경이 고개를 저었다.“원래 이름입니다. 중증 이능력자 신경정화 병동이라 야간에도 조명을 끄지 않는 데서 붙은 명칭이고요.”“지금 저 빛은?”“정상 현상 아닙니다.”시헌이 태블릿을 해원에게 보여 줬다. 8층 평면도 일부가 검게 지워져 있었다.“07시 42분에 B구역 격리문이 닫혔습니다. 07시 49분부터 내부 CCTV 영상이 23분 전 기록을 반복 재생하고 있습니다.”“사람은 몇 명 있죠?”“등록상 의료진 9명, 환자 4명.”“등록상?”“실제 생체신호는 14개입니다.”한 명이 더 있었다.해원은 협약을 맺던 날 새벽에 온 첫 알림과 오늘 아침의 검사 결과 문자를 떠올렸다.서이나.“그 사람도 안에 있습니까?”“네.”시헌이 화면을 넘겼다.서이나.31세.정화능력자.백야병원 정기검사 대상자.사진 속 여자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단정한 인상이었다.해원의 손목이 욱신거렸다.“이번 생에서 이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현재 확인한 이번 생의 접점도 없습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의 검사 알림이 제 번호로 왔죠?”“그걸 확인하려는 겁니다.”해원은 차에서 내렸다.시헌이 바로 뒤따르지 않았다.“윤해원 씨.”“왜요?”“이번 사건은 협약상 의무 참여 대상이 아닙니다.”해원은 그를 돌아봤다.“또 확인하는군요.”“네.”“갑니다.”“알겠습니다.”그제야 시헌이 같이 움직였다. 병원 로비에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몰려 있었다.직원들은 8층 사고를 전기시설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천장 모니터에는 이미 국가이변관리청 재난 코드가 떠 있었다. 해원과 시헌이 별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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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028화. 꼬리 하나의 악몽
3월 8일, 공식 신고가 접수되기 전의 백야병원.서이나는 같은 꿈을 3일째 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하얀 복도 끝에 여우가 앉아 있었다.아주 큰 여우였다.등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이상한 건 꼬리였다.단 하나.여우는 매번 자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문이 열리면, 안쪽에서 검은 손들이 나와 여우의 꼬리를 잡아당겼다.이나는 꿈속에서 늘 소리쳤다.도망가라고.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오늘은 달랐다.여우가 처음으로 이나를 향해 걸어왔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뒤, 사람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네 것이 아니야.’이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서이나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담당의가 손전등으로 동공을 확인했다.이나는 거친 숨을 골랐다.“네.”“현재 위치는요?”“백야병원. 신경정화센터 검사실.”“오늘 날짜는?”“3월 8일.”답은 정확했다.의사는 안도한 듯 기록지에 체크했다.“영력 폭주 수치는 안정됐습니다.”이나는 손을 내려다봤다.손끝에서 새어 나온 하얀 빛은 사라졌지만 손바닥에는 낯선 푸른 잔광이 남아 있었다.“이건 뭐죠?”의사가 잠시 망설였다.“검사 중 일시적인 색 변화가 있었습니다.”“제 정화력은 흰색이에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파란색이죠?”“정확한 원인은 분석 중입니다.”누가 분석하는지, 누가 결과를 쥐고 있는지는 빠져 있었다.이나는 그 빈칸이 싫었다.누가 분석하고 있는지.누가 알고 있는지.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지.그런데 지금까지는 한 번도 깊게 묻지 않았다. 센터에서 정상이라고 하면 정상인 줄 알았다.“오늘 검사 기록 보여 주세요.”의사의 표정이 굳었다.“내부 분석이 끝나면—”“제 기록이잖아요.”“서이나 씨.”“제가 봐도 되는 거 아닌가요?”처음으로 따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의사가 답하려는 순간 복도에서 경보가 울렸다.삐이익.검사실 조명이 꺼졌다가 켜졌다.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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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027화. 과거의 윤해원
3월 8일 새벽.백야병원 신경정화센터에서 서이나가 눈을 떴다.손끝에 하얀 빛이 불규칙하게 맺혔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고, 아직 꿈속인 것처럼 침대 발치를 더듬었다.“여우가…….”간호사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서이나 씨, 악몽 꾸셨어요?”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꼬리가 하나뿐이었어요.”간호사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웠다. 담요 아래에서 푸른 불꽃 한 점이 피어났다가 꺼졌다.***같은 날 오전 10시.해원은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 모니터를 확인했다.차시헌 혼자였다.“들어오세요.”그는 서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지우는 도로가 막혀 5분쯤 늦는다고 연락을 보낸 참이었다.“먼저 꺼내 놓으세요. 검토는 지우가 오면 시작하고요.”시헌은 어제 앉았던 식탁 끝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해원은 자신의 수첩과 바느질 함을 치웠다. 다 마신 커피잔 자리에는 물 한 잔을 뒀다.시헌은 밀려 있던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해원은 그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잠깐 살폈다. 식탁 위로 펼친 문서 외에는 손대지 않았다.잠시 뒤 지우가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나 왔어. 시작하자.”“90일 협약 원본입니다. 수정된 조항 모두 반영됐습니다.”해원은 첫 장부터 읽었다.공동수사 우선.투약 동의권.정보 공유.일방 감독 금지.언제든 종료 요구 가능.협약을 정할 때 고쳤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별도 부속서가 있네요.”“현재 확인된 위험요소 목록입니다.”첫 번째는 감시각인.두 번째는 거울형 공간왜곡.세 번째는 월흔 반응.네 번째 항목에서 해원의 손이 멈췄다.[반복기억과 관련된 정신오염 가능성 — 미확인.]“이건 뭐죠?”시헌이 물잔을 내려놓았다.“월흔에 접촉할 때 과거와 현재의 감각이 겹칠 가능성이 있습니다.”“저를 정신이상으로 분류하는 겁니까?”“아닙니다.”시헌은 즉시 답했다.“기억의 진위와 별개로 감각 중첩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그의 시선이 멎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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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026화. 새 문 앞의 운동화
2401호 앞에 짐이 내려졌을 때, 해원은 마지막 상자부터 열었다.코트 위의 신발 상자를 열어 운동화를 꺼냈다. 구두 옆에 나란히 뒀다. 현관에 신발이 2켤레 놓이자 빌린 방 같던 집이 조금 달라 보였다.시헌이 아래층에서 가져온 종이를 건넸다.“차량 적재함까지 확인했습니다. 남은 짐 없습니다.”해원은 종이에 적힌 상자 수를 세었다.큰 것 2개, 작은 것 1개.지우가 빈 손을 털었다.“생각보다 적네. 차 두 대 부를 뻔했어.”“오늘 전부 가져오진 않았어.”“응. 보관품은 내가 일정 잡아서 받을게.”지우는 수첩이 든 상자를 발끝으로 가리키고 휴대전화를 받았다. 재단 담당자였다. 반납할 대여품이 몇 벌인지 다시 물어 오는 모양이었다.해원은 통화하는 친구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한 뒤, 시헌에게 말했다.“작은 상자만 식탁에 부탁드릴게요.”그는 신발을 벗고 상자를 옮겼다. 뚜껑이 벌어져 수첩 모서리가 보였지만 그대로 내려놨다.해원은 방문을 열어 여권 지갑을 침실 서랍에 넣었다. 열쇠는 가방 안쪽으로 옮겼다. 어느 칸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리는 전화는 하지 않았다.거실로 돌아오니 시헌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시게요?”“짐은 다 옮겼습니다.”해원은 아직 씻지 못한 컵을 내려다봤다.“커피 한 잔만 하고 가세요.”그가 잠깐 머뭇거렸다.해원은 주방으로 돌아섰다.“계약 이야기는 내일 지우가 오면 해요. 오늘은 한 잔만.”“그럼 얻어 마시겠습니다.”지우는 통화를 끊고 외투를 집었다.“나는 사무실 갈게. 인수표 원본 맡겨야 해.”해원이 돌아보자 지우가 식탁 끝을 톡 두드렸다.“짐 들였다고 밤새 정리하지 말고. 내일 10시에 와서 볼 거야.”“아이도 아니고.”“어제도 그 말 하고 약관 읽었잖아.”지우가 나간 뒤 해원은 머그컵을 씻었다. 펜 자국이 묻은 바닥을 몇 번 더 문질렀다. 거울 속에서 무언가 나올까 경계하던 손으로 지금은 컵을 닦고 있었다.시헌은 식탁에서 물러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자 하나가 의자 절반을 차지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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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025화. 내 것이 아닌 옷장
해원은 옷걸이를 도로 걸었다.“제가 입던 옷은 어디 갔어요?”관리인이 안쪽 붙박이장을 가리켰다.“촬영 의상이 들어와서 뒤로 옮겼어요. 봄옷은 이쪽으로 꺼내 뒀고요.”겉옷 안쪽에 작은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업체 이름, 대여 기간, 반납 예정일. 지우가 휴대전화를 꺼내 목록을 띄웠다.“이번 행사에 입었던 것도 섞였어?”“네. 세탁 끝나면 함께 반납할 예정이었습니다.”“그럼 비닐 벗기지 말고 그대로 두죠.”해원은 안쪽 장문을 열었다.접힌 니트와 청바지가 보였다. 맨 위의 검은 바지 허리에는 단추 대신 실밥만 남아 있었다. 바느질 함에 남아 있던 단추 하나가 이 옷에서 떨어진 것이었다.“찾았다.”“뭐?”지우가 돌아봤다.“내 옷.”해원은 바지를 팔에 걸쳤다. 그 아래에서 얇은 면 티셔츠를 꺼내자 지우가 눈을 찌푸렸다.“그건 너무 늘어났는데.”“잘 때 입으면 돼.”“같이 사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긴 하다.”해원이 복도 쪽을 흘끗 봤다.시헌은 빈 상자를 내려놓고 전화 중이었다. 지우도 시선을 따라갔다가 어깨를 으쓱했다.“맞은편 집은 옆집이지.”“알아.”괜히 대답이 빨라졌다. 해원은 티셔츠를 개서 상자 밑에 눌러 넣었다.지우는 웃지 않았다. 장 안쪽에서 바닥까지 끌린 치맛자락을 걷어 주느라 바빴다.해원은 자기가 산 코트 2벌을 따로 걸었다. 재단에서 지급한 정장은 남겼고, 선물 받은 옷은 판단이 서지 않아 별도 보관을 부탁했다.반납할 옷만으로 이동식 행거가 찼다. 관리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렇게 두고 가시면 당장 입으실 게 없어요. 급하게 인터뷰라도 잡히면요?”해원은 뚜껑이 닫히지 않는 상자를 눌렀다.“잡힌 거 없어요.”“그래도 미리 준비는…….”“필요하면 그때 살게요.”말을 마친 뒤 한 번 숨을 골랐다. 관리인은 자신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늘 옷이 늦지 않게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해원도 그 덕에 쉽게 나가곤 했다.“그동안 챙겨 주신 건 알아요.”관리인이 접고 있던 손을 멈췄다.“그러니 다 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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