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다시 출발선에 섰다

너와 다시 출발선에 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By:  YuIm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goodnovel12goodnovel
Not enough ratings
30Chapters
41views
Read
Add to library

Share:  

Report
Overview
Catalog
SCAN CODE TO READ ON APP

스물한 살의 봄으로 돌아왔다. 전생에는 시력을 잃어 가는 차도현의 곁을 지키다 내 선수인생을 잃었다. 이번엔 내 이름으로 선발전에 나설 것이다. 그런데 도현도 그 시간을 기억한다. 이번 생에서 우리는 사랑과 각자의 출발선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

View More

Chapter 1

1화. 0.00 — 다시, 출발선

발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릴 때마다 윤채아는 낡은 운동화 끈을 더 세게 조여 매곤 했다.

가장자리가 닳아 헤진 스파이크 밑창, 뒤꿈치가 터져 나간 낡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을 신고 얼마나 많은 트랙의 흙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셀 수도 없었다.

남자 100미터 10초 23, 국가대표 스프린터 차도현.

그 눈부신 이름이 서서히 어둠에 잠겨 갈 때, 그의 곁을 지키며 7년을 보낸 것은 채아였다.

시력이 떨어져 혼자서는 레인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도현을 위해 새벽마다 손목 끈을 쥐었다. 그가 다시 달릴 수만 있다면 제 하루쯤 갈아 넣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다.

원정 숙소를 잡고, 보조 장비를 챙기고, 치료비와 진행비가 모자라면 밤마다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채아야, 넌 괜찮아?"

도현이 어두운 눈을 깜빡이며 물어올 때마다, 채아는 늘 바보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선배, 난 당연히 괜찮죠. 내 걱정은 말고 내일 훈련 리듬이나 생각해요."

괜찮다는 말은 편리했다.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동안 채아의 이름은 국가대표 선발전 명단에서 영원히 지워졌고, 무리한 보조 주행으로 발목 인대는 회복 불능으로 닳아 없어졌다.

스물여덟의 초겨울. 지하 월세방 탁상달력 한구석에는 몽당연필로 눌러 쓴 마지막 메모가 남아 있었다.

‘다음엔 내 경기도 준비해야지.’

그러나 다음은 오지 않았다.

도현의 사촌 에이전트의 밀린 잡무를 밤새 정리하고 돌아오던 복도 끝에서, 채아의 심장은 뚝 멎어 버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뺨이 닿는 순간까지도 채아는 제 손목에 묶여 있던 붉은 끈의 서글픈 감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비참하게 끝난 줄 알았다.

***

"야, 윤채아! 멍하니 서서 뭐 해? 서민경 코치님이 스타트 기록표 가져오래!"

귀를 찌르는 외침과 함께 폐부로 밀려든 것은 쓰러졌던 복도의 퀴퀴한 냄새가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봄바람.

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우레탄 트랙의 고무 냄새와 운동장 특유의 싱그러운 흙내음이었다.

채아는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허억……!"

"어라? 채아야,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얗게 질렸어? 어디 체하기라도 한 거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형광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이진희였다. 서한체육대학교 육상부 동기.

분명 5년 전 실업팀에 입단하며 연락이 뜸해졌던 친구가 스물한 살의 생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채아는 떨리는 손으로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군살 없이 단단하게 다져진 탄력 있는 종아리. 바닥을 굴러 보아도 뼈마디를 갉아먹던 만성 염증과 끔찍한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 액정에는 선명한 날짜가 떠 있었다.

[2024년 4월 7일 일요일 13:42]

스물한 살. 서한체육대학교 2학년의 봄이었다.

‘돌아왔어…… 내가, 정말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꿈인가 싶어 뺨을 꼬집자 얼얼한 통증이 생생하게 번졌다.

"채아야, 목타면 물이라도 마실래?"

진희가 가리킨 벤치로 다가가 물병을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푸하앗! 쿨럭, 쿨럭!"

"야! 그거 내 레몬맛 전해질 음료야! 네 파란 보냉병은 저기 있잖아!"

진희가 기겁하며 등을 찰싹 두드렸다. 새콤한 전해질 음료가 목구멍을 찌르는 순간 기침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쿨럭, 아하하…… 미안, 목이 너무 타서."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의 세포마다 피어올랐다. 숨이 온전히 쉬어졌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4월 7일이라는 날짜가 머릿속을 벼락처럼 스쳤다.

춘계 대학 육상 선수권 겸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참가 신청 마감일. 마감 시각은 오늘 오후 5시였다.

전생의 이날, 채아는 신청서를 내지 못했다.

선배 최수아가 ‘졸업 앞둔 4학년들한테 양보하는 게 관례’라며 서류를 가로막았고, 마정호 감독도 ‘팀 화합을 위해 이번엔 양보하라’며 어깨를 두드렸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시야가 흐려져 공포에 떨던 차도현의 방으로 불려 가 적응 훈련을 돕느라 제 인생의 가장 찬란했을 출발선을 스스로 날려 버렸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양보 안 해.’

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남의 인생을 대신 뛰어 주는 것으로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다시 쥐었다. 접수 마감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오늘은 제 이름부터 올릴 것이다.

"진희야, 나 본관 행정실 좀 다녀올게!"

"어? 서 코치님 기록표는?"

"행정실 다녀와서 바로 가져다드릴게!"

채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트랙을 박차고 달렸다.

타앙, 타앙!

스파이크가 아닌 일반 러닝화였음에도 지면을 차고 나가는 탄력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

대회 접수 때문에 휴일에도 문을 연 체육지원 행정실. 벽걸이 시계는 1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채아? 무슨 일이야? 땀을 뻘뻘 흘리고."

"선배님, 춘계 대회 참가 신청서 내러 왔어요. 여자 대학부 100미터 단거리 개인전이요."

채아는 벽에 비치된 양식을 꺼내 능숙하게 볼펜을 놀렸다.

[소속: 서한체육대학교 육상부 / 성명: 윤채아 / 종목: 여자 100m / 공인 개인 최고 기록: 11초 48]

전생의 채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던 제 이름 석 자였다. 조교가 서류를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4학년 최수아 선배가 여자 단거리는 자기가 취합해서 감독님 결재받고 낸다고 했는데? 너 수아 선배한테 말 안 하고 온 거야?"

전생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채아는 생긋 웃으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이번 대회 참가 요강 확인했어요. 기준 기록을 통과하면 학교에 개별 신청서를 낼 수 있더라고요. 제가 직접 서명한 신청서로 접수해 주세요."

"어? 규정상으로는 그렇긴 한데……"

평소 고분고분하던 후배가 참가 요건을 짚어내자 조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아 선배 취합본이랑 겹치면 나중에 시끄러워질 텐데."

"겹치면 전산에서 중복 확인하고 제 자필 서명 본으로 확정해 주세요. 전 제 손으로 직접 내러 왔으니까요."

채아는 서류 하단에 정자로 서명했다.

"선배님, 접수 도장 지금 찍어 주시겠어요?"

똑 부러지는 태도에 조교는 마지못해 붉은 접수인을 쾅 찍었다.

‘접수 완료: 2024.04.07 14:18’

손바닥만 한 접수증 사본을 품에 꼭 쥐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전율이 솟구쳤다. 전생에 맥없이 도둑맞았던 첫 번째 출발선을 드디어 제 손으로 되찾아 온 것이다.

***

대운동장으로 돌아왔을 때, 채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운동장 한구석, 4레인 스타팅 블록 근처.

봄바람을 등지고 홀로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있었다.

186센티미터의 균형 잡힌 체격. 짙은 흑발 아래 날카로운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

차도현이었다.

대한민국 단거리 육상의 독보적인 에이스이자, 전생의 채아가 7년 동안 청춘과 온몸을 바쳐 지키려 했던 사람.

도현은 스타팅 블록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겉보기엔 여전히 서늘하고 오만한 천재의 모습이었지만, 채아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다.

바닥의 흰색 레인 선을 내려다보는 각도, 초점을 맞추지 못해 미세하게 기울어지는 고개, 발끝으로 블록을 툭툭 차며 위치를 더듬는 불안정한 동작까지.

‘망막색소변성증…… 저때도 보이지 않는 걸 혼자 숨기고 있었구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저려 왔다.

달려가 "선배, 괜찮아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채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멈춰 섰다.

‘이번 생에는 네 곁에 있을게. 대신 내 출발선도 지킬 거야.’

채아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잔디밭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도현이 스파이크 가방을 메고 보조 경기장 지하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외 트랙의 눈부신 햇살에서 어두컴컴한 그늘막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급격한 명암 차이에 도현의 발걸음이 크게 엉켰다.

통로 입구에는 수리 중인 철제 허들이 놓여 있었다.

터널처럼 시야가 좁아진 도현에게는 사각지대의 철골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발끝이 허들에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선배, 조심해요!"

채아가 달려가 도현의 옷자락을 낚아채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도현의 손이 벼락처럼 허공을 갈랐다.

파악!

거칠고 단단한 손이 채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정확하게 낚아챘다. 손목뼈가 얼얼할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앗……"

그늘 속에서 차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채아를 향했다.

초점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러나 사나운 맹수처럼 잔뜩 경계심을 품은 서늘한 눈동자였다.

도현이 숨을 죽인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거기, 누구 있어?"

Expand
Next Chapter
Download

Latest chapter

More Chapters

To Readers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No Comments
30 Chapters
1화. 0.00 — 다시, 출발선
발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릴 때마다 윤채아는 낡은 운동화 끈을 더 세게 조여 매곤 했다.가장자리가 닳아 헤진 스파이크 밑창, 뒤꿈치가 터져 나간 낡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을 신고 얼마나 많은 트랙의 흙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셀 수도 없었다.남자 100미터 10초 23, 국가대표 스프린터 차도현.그 눈부신 이름이 서서히 어둠에 잠겨 갈 때, 그의 곁을 지키며 7년을 보낸 것은 채아였다.시력이 떨어져 혼자서는 레인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도현을 위해 새벽마다 손목 끈을 쥐었다. 그가 다시 달릴 수만 있다면 제 하루쯤 갈아 넣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다.원정 숙소를 잡고, 보조 장비를 챙기고, 치료비와 진행비가 모자라면 밤마다 아르바이트를 뛰었다."채아야, 넌 괜찮아?"도현이 어두운 눈을 깜빡이며 물어올 때마다, 채아는 늘 바보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선배, 난 당연히 괜찮죠. 내 걱정은 말고 내일 훈련 리듬이나 생각해요."괜찮다는 말은 편리했다.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동안 채아의 이름은 국가대표 선발전 명단에서 영원히 지워졌고, 무리한 보조 주행으로 발목 인대는 회복 불능으로 닳아 없어졌다.스물여덟의 초겨울. 지하 월세방 탁상달력 한구석에는 몽당연필로 눌러 쓴 마지막 메모가 남아 있었다.‘다음엔 내 경기도 준비해야지.’그러나 다음은 오지 않았다.도현의 사촌 에이전트의 밀린 잡무를 밤새 정리하고 돌아오던 복도 끝에서, 채아의 심장은 뚝 멎어 버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뺨이 닿는 순간까지도 채아는 제 손목에 묶여 있던 붉은 끈의 서글픈 감각을 떠올렸다.그렇게 모든 것이 비참하게 끝난 줄 알았다.***"야, 윤채아! 멍하니 서서 뭐 해? 서민경 코치님이 스타트 기록표 가져오래!"귀를 찌르는 외침과 함께 폐부로 밀려든 것은 쓰러졌던 복도의 퀴퀴한 냄새가 아니었다.눈이 시리도록 맑은 봄바람.햇빛을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우레탄 트랙의 고무 냄새와 운동장 특유의 싱그러운 흙내음이었다.채아는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2화. 세 걸음, 반 걸음
손목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실린 힘은 매서웠다.그러나 채아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가만히 숨을 골랐다.살갗을 파고드는 단단한 굳은살의 감촉. 7년 동안 새벽 트랙을 함께 달리며 지겹도록 쥐어 보았던 차도현의 오른손이었다."……차도현 선배님."채아가 나직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도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늘 속에서 초점을 찾지 못해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윤…… 채아?""네. 2학년 윤채아예요."도현의 시선이 채아의 얼굴 어딘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초점이 닿지 않는 눈동자에는 지독한 불안과 방어 본능이 서려 있었다.그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더니, 불에 덴 사람처럼 채아의 손목을 홱 놓았다."……여기서 뭐 해."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자신의 취약한 순간을 후배에게 들켰다는 수치심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돋아나 있었다."서민경 코치님 기록표 가져다드리러 가던 길이었어요."채아는 아린 손목을 매만지며, 도현의 발끝 바로 앞에 놓인 수리용 철제 허들을 가리켰다."통로 입구에 수리 중인 허들이 있어서요. 선배 발에 걸릴까 봐 불렀어요."도현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었다.그는 어두운 바닥을 내려다보려 했지만, 밝은 야외 트랙에서 어두운 지하 통로로 급격히 들어온 탓에 암순응(Dark Adaptation)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통로에 드리운 그늘 속에서는 남아 있던 빛의 차이마저 희미해졌다.도현은 허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다.채아는 전생의 자신처럼 호들갑을 떨며 도현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듯 동정의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다만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차분하게 방향을 일러주었다."오른쪽으로 세 걸음만 비켜서 가시면 돼요. 벽 쪽에 안전 난간이 있어요."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알아서 해."그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걸음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끝이 삐져나온 허들 다리에 툭 걸리며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칫……!"도현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3화. 한 장의 접수증
체육관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 계단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앞서 걸어가는 4학년 최수아의 발걸음은 거칠었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는 신경질적인 숨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그 뒤를 따르는 윤채아의 걸음은 차분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복도 벽면에는 서한체육대학교 육상부가 과거 전국체전과 종별선수권에서 획득한 트로피와 빛바랜 사진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겉보기에는 화려한 영광의 전당이었지만, 그 속내는 마정호 감독과 몇몇 유력 선수들의 사리사욕으로 곪아 터진 썩은 환부였다.전생의 채아는 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기 바빴다.‘내가 조금만 참으면 팀이 평화로워지겠지.’‘선배들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나한테도 차례가 돌아오겠지.’그 착하고 미련했던 체념이 결국 제 청춘을 갉아먹고 스물여덟의 고독사로 이끌었던 독약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선배들의 스파이크를 대신 닦아주고, 원정 숙소에서 잡무를 도맡으며 ‘착한 후배’라는 칭찬 몇 마디에 스스로의 권리를 지워버렸던 바보 같은 세월.하지만 지금 채아의 두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벌컥!수아가 감독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갔다."감독님!"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마정호 감독이 찻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무슨 일이야? 훈련 시간에 복도가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수아가 기다렸다는 듯 마 감독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감독님, 이것 좀 보세요. 2학년 윤채아가 제멋대로 행정실에 가서 춘계 선발전 개인 참가 신청서를 냈답니다."마 감독의 짙은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꿈틀거렸다."뭐? 개인 신청서?"수아가 채아를 째려보며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제가 분명히 4학년 졸업반 취합해서 감독님 결재받고 올린다고 공지했잖아요. 실업팀 스카우트 앞둔 선배들 자리 먼저 챙겨주는 게 우리 팀 전통인데, 후배가 이렇게 위아래도 없이 치고 나가면 팀 기강이 뭐가 됩니까? 저번 계주 때도 후배들 희생 덕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4화. 8레인으로 밀려난 이름
이튿날 오전, 대운동장 락커룸 앞 게시판.육상부 훈련 레인 및 시간 배정표가 새롭게 공지되자마자 선수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야, 이거 배정표 너무한 거 아니야?""오전 9시부터 11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메인 트랙 3, 4, 5레인이 전부 최수아 선배랑 4학년 전용이네.""윤채아는 어디야?""채아? 정오 12시 뙤약볕 타임에…… 그것도 우레탄 다 뜯겨 나간 8레인이랑 보조 흙구장 배정됐어."게시판을 확인한 채아의 동기 이진희가 분통을 터뜨렸다."채아야! 이거 마 감독이랑 수아 선배가 대놓고 너 테스트 망치라고 텃세 부리는 거잖아! 정오에 트랙 지열이 40도까지 올라가는데 거기서 어떻게 스타트 연습을 해? 게다가 8레인은 빗물 배수구 옆이라 바닥이 울퉁불퉁하다고! 발목 나가면 어쩌려고!"주변의 2학년 후배들도 눈치만 볼 뿐 감히 마 감독의 배정표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채아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마정호의 전형적인 보복 수법이었다.서류로 누르지 못하니 훈련 환경을 망가뜨려 선수의 컨디션을 갉아먹는 치졸한 수작.하지만 채아는 화를 내며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다."진희야, 괜찮아. 트랙 탓하면서 시간 버릴 여유 없어."채아는 배정표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어 증거로 남긴 뒤, 곧장 본관 1층 트랙 관리실 옆 서민경 코치의 연구실로 향했다.똑똑.노크 후 문을 열자, 태블릿으로 선수들의 구간 기록을 분석하던 서 코치가 고개를 들었다."들어와라, 채아야."서 코치는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차가운 표정이었다.책상 위에는 마 감독이 결재한 편파적인 배정표 사본이 놓여 있었다."배정표 봤지? 마 감독이 수아 편 들어주려고 아주 대놓고 판을 깔았더구나.""네, 코치님. 하지만 전 핑계 대고 싶지 않습니다. 대체 훈련 일정과 장소를 상의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서 코치의 눈빛에 흐뭇한 감탄이 스쳤다.서 코치는 말없이 옆 의자를 빼주었다. 채아는 그제야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얹었다.선수 시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5화. 붉은 테더의 시작
체육관 앞 플라타너스 가로수길.한낮의 따스한 봄 햇살이 연둣빛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렸지만, 차도현의 주위를 감도는 공기는 한겨울 서리처럼 시렸다.서민경 코치의 완강한 진료 지시를 받은 도현은 굳은 얼굴로 스파이크 가방을 고쳐 메고 있었다.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듯 그의 눈동자는 흙바닥의 명암 경계선을 불안하게 더듬고 있었다."차도현 선배님."등 뒤에서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도현이 흠칫하며 돌아보자, 땀을 닦아내고 가벼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윤채아가 서 있었다.도현의 날카로운 턱선이 팽팽하게 긴장했다.자신의 취약한 상태를 가장 먼저 목격한 후배였다. 또다시 동정이나 어설픈 위로를 건네려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차갑게 쳐낼 생각이었다."왜 부르지? 난 지금 바빠.""대학병원 가시는 거죠? 외래 진료 혼자 가실 생각이면 같이 가 드릴게요."도현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내가 왜 너랑 병원을 가야 하지?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간 것뿐이야. 별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선배, 자존심 세울 때 아니에요."채아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도현의 흔들리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그녀의 눈빛에는 동정의 기색이 없었다. 오직 매일 얼굴을 맞대는 동료 스프린터로서의 담담한 이성뿐이었다."접수창구도 찾고 검사실도 옮겨 다녀야 하잖아요. 아까 통로에서도 부딪힐 뻔했고요. 제가 길은 봐드릴게요. 검사받을지 정하는 건 선배지만, 혼자 가다가 다치지는 마요."도현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정확하게 제 시야의 약점을 찌르는 지적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너…… 내 눈 상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확신하듯 말하지?""아무것도 몰라요. 전 의사가 아니니까요."채아는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그래서 전문의한테 확인받으러 가자는 거예요. 병원 동행은 가 드리겠지만, 진료실에 같이 들어가진 않을게요. 검사 결과를 감독님이나 팀에 알릴지 말지도 온전히 선배가 결정할 몫이에요. 전 길만 봐 드릴 뿐이에요."결과 공개와 판단의 주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6화. 오후 5시의 조건
손바닥에 닿는 붉은 나일론 테더의 감촉은 낯설고도 차가웠다. 도현은 주먹을 꽉 쥐어 테더를 움켜쥐었다.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말의 구원이 뒤섞여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내가…… 이걸 잡고 뛰라고?"도현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난 국가대표였어. 혼자서 10초 23을 뛰던 차도현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와 끈을 묶어야 뛸 수 있다는 거야?"채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차갑게 응수했다."10초 23은 선배가 세운 기록이죠. 하지만 지금은 통로의 허들도 놓치고, 트랙에서 발을 헛디뎠잖아요. 선배도 아까 검사받고 나와서 제대로 걷지 못했고요. 제가 못 본 척한다고 달라져요?"뼈를 때리는 현실적인 지적에 도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받아들이세요. 눈이 멀었다고 해서 심장이 멈춘 건 아니잖아요.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왜 지레 포기해요?"채아는 테더를 쥔 도현의 손을 가볍게 툭 쳤다."혼자 못 뛰면 둘이 뛰는 법을 배우면 돼요. 서민경 코치님께 상태를 솔직하게 보고하고, 안전한 저속 적응 훈련부터 시작하세요. 그게 선수가 트랙에 남는 유일한 방법이에요."채아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병원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도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손바닥 속 붉은 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손바닥을 펼칠 때마다 붉은 끈이 손금 사이에 걸렸다. 병원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었다. 도현은 채아가 사라진 출구 쪽을 한참 향하고 있었다.***다음 날 오후 3시 50분, 서한체대 트랙 연구실.서민경 코치는 도현이 내민 대학병원 정밀 검사 진단서를 들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망막색소변성증…… 결국 이거였구나."서 코치의 눈가에 짙은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스쳤다.대한민국 단거리 육상의 보물 같은 에이스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하지만 도현의 표정은 어제와 달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코치님, 육상을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의 T11 등급 규정을 찾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7화. 카본 플레이트의 균열
공개 테스트 당일 아침 8시, 체육관 1층 여자 육상부 락커룸.경기를 앞두고 감도는 공기는 유난히 서늘하고 건조했다.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속에는 멘톨 파스 냄새와 오래된 우레탄 고무 냄새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라커룸 벤치에 앉아 발목에 단단하게 산화아연 테이핑을 감던 동기 이진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건넸다."채아야, 근데 오늘 아침 6시 좀 넘어서 수아 선배가 라커룸 쪽에 어슬렁거리는 거 봤거든? 보냉병 찾으러 왔다면서 두리번거리던데, 뭔가 표정이 쎄하더라."진희의 무심한 한마디가 채아의 뇌리에 날카로운 경종을 울렸다.‘최수아……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전생의 기억이 오버랩되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채아는 서둘러 테이핑을 마무리하고 사물함으로 다가갔다.채아는 자신의 사물함 번호 키를 능숙하게 누르고 문을 열었다.선반 맨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검은색 스포츠 신발 주머니를 꺼냈다.이틀 동안 서민경 코치와 새벽마다 킥 앵글을 가다듬으며 갈고닦은 주황색 카본 스파이크였다.가방 지퍼를 열고 오른발 스파이크를 꺼내 든 순간, 채아의 손끝에 낯설고 이질적인 촉감이 걸렸다."……!"밑창의 탄소 섬유 플레이트 측면.스파이크 핀이 박힌 전족부와 아치를 잇는 가장 중요한 지지대에 날카로운 공업용 커터칼 자국이 깊게 그어져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뒤꿈치를 단단하게 감싸야 할 힐컵 내부의 지지 봉합선이 안쪽에서 교묘하게 실밥이 뜯겨 나가 있었다.육상 스프린트의 역학을 잘 아는 자가 저지른 악의적인 테러였다.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튀어 나가는 순간, 스프린터의 발목에는 자기 체중의 4배가 넘는 폭발적인 하중이 실린다.플레이트 지지대가 버티지 못하면 착지 때 발이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발목 바깥쪽 인대를 다칠 위험을 알고 있기에, 채아는 손상된 밑창에 체중을 싣지 않았다.발을 넣으면 상처는 가려질 것이었다. 채아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겉만 보고 신었다면 출발선을 박차기 전까지도 몰랐을 손상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8화. 빌려 신은 은빛 스파이크
수아의 입꼬리에 걸린 비열한 비웃음.마치 채아의 스파이크가 찢어졌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교만하고 뻔뻔한 태도였다.그 뒤에 선 4학년 선배들도 팔짱을 낀 채 혀를 차며 채아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러게 진작 선배들한테 양보했으면 이런 망신은 안 당하잖아.""어디서 남 탓을 하려고 수작을 부려?"비열한 조롱이 좁은 코치실 공기를 어지럽혔다.하지만 채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손에 든 훼손된 주황색 스파이크를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놓으며, 수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수아 선배님."채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제가 언제 못 뛴다고 했나요?"수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뭐?""제 기권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신발은 코치님과 상의해서 해결할 테니까, 선배님은 본인 출발 준비하세요. 전 트랙에서 기다릴게요.""너……!"수아가 핏대를 세우며 쏘아붙이려던 찰나, 서민경 코치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최수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트랙으로 나가서 웜업이나 해라. 테스트는 정각 9시에 시작한다."서 코치의 서슬 퍼런 기세에 수아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수아와 선배들이 나가자마자 서 코치가 연구실 안쪽 장비실 금고를 열었다.그녀가 꺼내온 것은 짙은 네이비색 가죽 스파이크 케이스였다."채아야, 이리 와봐라."케이스가 열리자, 은색 알루미늄 광택이 도는 탄소 섬유 플레이트 스파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내가 현역 시절 마지막 아시안게임 100미터 결승에서 신었던 스파이크다. 240밀리미터, 네 발 사이즈와 정확히 같아. 밑창 강성과 탄성은 내가 직접 점검해 뒀다."채아의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 들었다.스승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혼이 깃든 신발.서 코치는 공구함을 꺼내 스파이크 바닥의 핀을 능숙하게 교체했다."오늘 트랙 상태에 맞춰 핀을 새로 끼웠다. 7밀리미터야. 먼저 신어보고 발을 밀 때 불편한 곳이 없는지 말해라."채아가 스파이크를 발에 넣고 끈을 조였다.발등을 감싸는 가죽의 단단한 밀착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9화. 11.46 — 기록의 반격
스타팅 블록의 페달이 발바닥을 단단하게 받쳐주었다.대운동장 메인 트랙 5레인.채아는 양손을 흰색 출발선 바로 뒤에 짚은 채, 거칠게 요동치려는 호흡을 아랫배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옆 4레인에 엎드린 최수아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귓전을 찔렀다.수아는 턱을 비틀며 채아를 째려보았지만, 채아의 시선은 오직 100미터 전방의 붉은 피니시 라인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차려(Set)."스타터의 구령과 함께 엉덩이가 번쩍 들려 올라갔다. 온몸의 근육과 인대가 팽팽한 활시위처럼 응축되었다.피니시 라인 인근에 모여든 육상부 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동기 진희는 주먹을 꼭 쥔 채 발을 동동 굴렀고, 4학년 선배들은 팔짱을 낀 채 최수아의 압승을 당연시하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수아 선배는 지난주 측정 때 11초 50까지 찍었잖아.""채아가 악바리처럼 덤벼도 4학년 관록을 어떻게 이겨. 게다가 신발까지 급하게 바꿨는데."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타팅 블록까지 낮게 깔렸다.하지만 5레인에 엎드린 채아의 귓가에는 그 어떤 잡음도 들어오지 않았다.오직 서민경 코치가 손수 갈아 끼워준 7밀리미터 세라믹 피라미드 핀의 단단한 지지력과, 자신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박동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짧은 정적.탕-!귀를 찢는 출발 총성과 함께 하얀 화약 연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스타트 반응 속도 0.128초.수아의 반응 속도 0.164초를 압도하는 완벽한 반사신경이었다.채아의 몸이 용수철처럼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콰아앙!블록을 밀어낸 힘이 첫발로 이어졌다. 낯선 신발 안에서 발이 헛돌지 않았다.7밀리미터 세라믹 피라미드 핀이 우레탄 트랙 표면을 빈틈없이 물고 뜯으며 폭발적인 추진력을 뿜어냈다.낮게 깔린 상체, 블록을 끝까지 밀어낸 첫걸음.새벽 훈련에서 번번이 먼저 들리던 상체가 이번에는 버텼다. 채아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고 다음 발을 내디뎠다.10미터, 2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10화. 기다리는 사람의 교대
서민경 코치의 신속한 조치와 체육지원처 감사팀의 개입으로 육상부의 판도는 하룻밤 사이에 뒤집혔다.공개 테스트에서 11초 46으로 압승을 거둔 채아의 춘계 대회 100미터 단거리와 400미터 계주 앵커(마지막 주자) 출전이 연맹 전산에 공식 확정되었다.반면 최수아는 라커룸 도어록 출입 로그와 CCTV 증거, 후배의 목격 진술서가 감사실에 정식 제출되면서 ‘장비 고의 훼손 및 후배 선수에 대한 위력 행사’ 혐의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마정호 감독 역시 편파적인 배정표 작성과 비리 의혹으로 체육처의 특별 감사를 받게 되면서, 더 이상 채아의 출전권을 쥐고 흔들 수 없게 되었다.부당한 억압을 스스로 깨부순 채아의 훈련 환경은 완전히 정상화되었다.최수아의 징계 회부 소식은 육상부 전체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늘 선배라는 완장을 차고 후배들을 억압하던 카르텔이 단숨에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후배들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며 채아의 락커룸 사물함 앞에 비타민 음료와 응원 쪽지를 몰래 두고 갔다.‘채아 선배님, 멋있어요!’‘선배님 덕분에 이제 눈치 안 보고 훈련할 수 있게 됐습니다!’쪽지들을 보며 채아는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채아는 쪽지를 접어 훈련 일지 안에 넣었다.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은 쪽지도 있었다. 감사실에 이름을 낸 민지가 떠올라,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이제 메인 트랙 4레인은 온전히 윤채아의 훈련 주로였다.***오후 5시 정각, 대운동장 보조 트랙.채아는 자신의 100미터 인터벌 훈련을 완벽하게 끝내고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아냈다.약속된 시각, 벤치에서 차도현이 일어섰다.도현의 왼손 손목에는 붉은 나일론 테더가 걸려 있었고, 눈에는 칠흑 같은 암전 안대가 단단히 씌워져 있었다."선배, 30분 훈련 시작할게요."채아가 다가가 자신의 오른손 손목에 테더의 반대편 벨크로를 감았다.50cm의 팽팽한 연결선."오늘은 저속 조깅에서 50미터 가벼운 빌드업 주로까지 보폭을 맞출 거예요. 급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