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 쪽 다리만 다친 거지 숨만 붙어 있는 게 아니였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으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더 멋지게 살아갈 거라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안심이 돼.” 심미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린아, 앞으로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할 거야.” “고마워.”신하린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맞다. 미연아, 너도 빨리 유진 씨랑 혼인신고 해. 너를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해줬는데 지금까지 니 곁에 있어주는 것도 쉽지는 않았잖아.” “응. 그럴려고. 오빠가 경성에 돌아오면 바로 결혼할 거야.” 심미연의 눈빛에 미소가 가득했다. 박유진이 그녀에게 잘해준 모든 것, 그녀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연히 그와 결혼해야 했다. “내가 대신 다 기뻐. 미연아, 꼭 행복해야 해.” 신하린은 마음 속으로 알았다. 지금의 그녀는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앞으로는 혼자 외롭게 늙어갈 거라고. 심미연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어떤 모습이 되든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있어. 하린아, 마음 가는 대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 내서 고백해.” 그 말에 그녀는 도진혁이 떠올랐다. 며칠 전, 갑자기 휴가를 냈고 뭘 하러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았어.” 신하린은 밝게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엔 씁쓸함이 묻어났다. ‘도진혁이 전에 나에게 고백하더니 결국 그 사람도 사라졌잖아...’ ‘이런 쓸모없는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가자. 내가 방까지 데려다 줄게. 일찍 쉬어야 해.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니까 너무 늦게까지 버티면 안 좋아.” 신하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미연은 그녀를 소파에서 일으켜 휠체어에 앉힌 후 1층에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여기서 자. 내가 침대 시트 바꿔줄게.” “좋아.” 신하린은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는 침대 시트나 이불을 교체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린아, 어디 있어? 내가 지금 찾으러 갈게.”이진영의 목소리는 매우 급박했다. 그는 신하린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진영, 제발 나에게 살 길을 줘. 다시는 연락하지 마.” 신하린은 이진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유나가 그녀를 거의 목 조르던 그 장면이 떠올라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떨렸다. “하린아,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평생 너와 함께할 거야.” 이진영의 말투는 갑자기 강압적이 되었다. 그에게는 신하린이 없으면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너랑 평생 함께하는 게 나를 집에 가두고 다른 여자들이 나를 모욕하게 만드는 거라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과거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며 신하린의 마음은 아프게 찢어졌다. 자신이 지난 생에서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번 생에서 이진영과 만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도 한유나가 대체 어떻게 들어갔는지 몰라. 제발 믿어줘.” 이진영은 급히 해명했다. “한유나가 어떻게 들어갔든 내가 본 건 단 하나야. 한유나가 나를 죽일 뻔했다는 거야.”신하린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진영, 제발 그만해. 나 좀 놔줘.”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고 번호를 차단 리스트에 추가했다. 핸드폰을 끄고 신하린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그냥 지나가게 놔둬.’ 이진영은 전화기에서 나오는 차단 음성을 듣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 수 없었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던졌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밖으로 나갔다. 신하린이 예전에 살았던 방으로 가서 공기 속에 아직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음을 느꼈다. 순간 그의 눈가가 붉어졌고 마음속에서 큰 고통이 밀려왔다. ‘하린아, 예전에 우리가 정말 행복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을까?’ “도련님.” 문 밖에서 가정부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진영은 감정을 가라앉히며
이진영이 그녀를 보러 온 것은 여전히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는 뜻이다. 한유나는 자세를 낮추어 그가 분명히 병원에 데려다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진영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으며 그에게서 나는 남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한유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영 씨가 이제 뭘 하려는 걸까?’ “진영 씨... 당... 당신.” 한유나는 너무 흥분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진영이 한 번이라도 그녀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그가 그녀 앞에 서자 그녀는 흥분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그녀는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영 씨, 뭐 하는 거예요?” 이진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한 번 경험해봐. 목 조르는 기분이 어떤지. 제대로 느껴봐.” 한유나는 순간 그의 의도을 알아챘다. 이진영이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신하린을 위한 복수였다. 신하린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몸이 망가졌고 이제는 장애까지 입었는데 이진영이 왜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는지 한유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 부족했을까? 이진영의 손은 점점 더 세게 조여졌고 한유나는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눈은 커다랗게 떠졌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졌다. ‘고작 신하린의 복수를 하려고 날 죽이는 건가?’‘내가 신하린보다 못 한게 뭔데?’ “다음에 다시 하린이에게 손 대면 널 공해에 던져버릴 거야.”이진영은 살기를 가득 담아 말하며 그 말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한유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진영 씨의 얼굴이 왜 이렇게 잔인해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 후로 한유나는 더 이상 이진영의 목소리도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완전히 어두운 곳에 빠져들었다. 이진영은 그녀가 의식을 잃자 손을 풀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심미연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이야? 말해봐. 태하가 무슨 실수를 했든지 엄마는 다 용서할게.” 어차피 세 살인 아이에게 실수를 하지 않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큰 실수를 하면 먼저 혼을 내고 그 후에 다시 가르쳐줄 것이다. 그는 뛰어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인성이 나쁘면 안 되었다. 심태하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엄마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심미연은 그가 고민하는 걸 알아채고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침대에 눕히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강요하지 않을 거야.”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엄마는 그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향기와 부드러운 입술에 심태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사실은...” 하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그는 또다시 말을 멈췄다. “이제 자자.”심미연은 웃으며 그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해.” 그녀는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애처로워서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실은 내가 그 이모를 일부러 화나게 해서 나를 납치하게 했어요. 그럼 내가 탈출할 기회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건 그 이모가 동생까지 잡아갔다는 거예요.” 심태하는 힘을 주어 한 번에 말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너 일부러 그 이모를 화나게 했어? 혹시 널 때렸어?” 그녀는 항상 심태하가 똑똑한 아이란 걸 알았지만 이렇게 큰 결단을 내릴 줄은 몰랐다. 세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성인 여자를 화나게 하고 또 강지한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했을지 상상도 못했다. 심태하는 고개를 흔들었다.“안 때렸어요. 그냥 엄청 화내시더니 엄마를 욕했
심미연은 마음이 아팠다. 만약 그녀가 강지한과의 관계를 더 빨리 정리했더라면 아들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텐데. “엄마, 미안해요. 걱정 끼쳐서.” 심태하는 심미연이 말하지 않자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잡으며 귀엽게 말했다. “다음엔 안 그럴게요.” 심미연은 아들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녀는 아들을 꽉 안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자자.”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것도 모자라 아들은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며 사과를 했다. 심미연은 가슴이 찢어지 듯 아팠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 심태하는 심미연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는 우리 태하가 꼭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심미연은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으로 아들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 나 여기 떠나고 싶어요. 괜찮겠어요?” 심태하가 물었다. “왜?” 그녀는 아들의 이유가 설득력이 있으면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싫어요.” 심태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 대표님은 엄마랑 나를 두고 싸우고 강 대표님의 여자친구는 나를 해치려고 해요. 그들 때문에 엄마가 마음 아프잖아요. 나는 엄마가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심미연의 가슴이 짓눌리듯 아파왔다. 세 살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매일 행복하라고 생각하다니. 이 아이는 정말로 하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엄마, 만약 떠나는 게 싫으면 여기 계속 있어도 돼.”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엄마가 여기 일 처리하는 대로 아빠랑 같이 이곳 떠나자. 괜찮지?” 아빠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박유진은 하루 종일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쪽 상황은 괜찮을까?’ “좋아요. 약속해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새끼손가락을 잡으며 말했다. “약속 꼭 지키기!” 심미연은 아들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들은 손가락을 걸고
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아침부터 대체 누가 찾아온 거지?’ ‘혹시 이진영인가?’ ‘설마 하린이를 데려가려고 하는 걸까?’ “도련님은 아래층에 있나요?”심미연이 물었다. “도련님과 신하린 씨가 거실에서 놀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찾아왔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심태하와 신하린이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신하린의 표정이 밝았다. 심미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제 일로 신하린이 쉽게 회복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우였던 것 같다. “엄마, 좋은 아침!” 심태하가 그녀를 보자마자 해맑게 인사했다. “우리 태하도 좋은 아침.” 심미연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모랑 잘 놀고 있어.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 “엄마, 무슨 급한 일 있어요?” 심태하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아니야. 걱정하지 마.” 그녀는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계속 놀아.” 신하린의 눈에 불안함이 스쳤다. ‘혹시 이진영이 찾아온 걸까?’ ‘그래서 미연이가 직접 확인하러 가는 건가?’ 이진영은 지금 미쳐가고 있다. ‘혹시 미연이를 해치면 어쩌지?’ “하린아, 태하랑 잘 놀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심미연은 신하린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읽고 부드럽게 말했다. “응.” 신하린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곧장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강지한?’ ‘이 사람이 왜 여기에?’ “태하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과하려고 왔어. 미연아, 미안해.” 강지한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심미연의 예쁜 도화 눈이 차갑게 가늘어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 말했어? 다 했으면 이제 가.”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지한이 찾아온 목적이야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이나 그의 말에 넘어간 결과가 뭔가? 아들이 끌려갔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미안해해도 그가 아무리 후회해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상미가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결국 남의 집의 아이였다. “그럼 난 가볼게.”강지한은 심미연이 최소한 한 번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냉정했다. 그녀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갈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착잡한 감정을 느꼈다. 눈앞에 어린 딸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왔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는 수없이 그 모자를 상처 입혔고 이젠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심미연이 문을 닫고 들어가자 그는 무심코 문틈을 바라봤다. 잠시 스치듯 보인 것은 심태하의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순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 아이가 자기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엔 오직 차가운 증오만 담겨 있었다. 조용히 문을 바라보다가 강지한은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차에 올라탄 순간,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성무진의 전화였다. “대표님, 임지혜 씨가 들어올 때 영상 찾았습니다.” “지금 당장 회사로 갈게. 사무실에서 기다려.” 그는 단숨에 차를 돌려 회사를 향해 달렸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향했고 들어가자마자 성무진이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화면 속에서 문소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입 닥쳐.” 강지한이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들이 돌아오길 제일 바랐던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박시훈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전처랑 완전히 끝난 거 맞지?” ‘그렇다면 이제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너, 한 마디만 더 해봐.” 강지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새파래졌다. 설령 심미연이 자신과 끝난다 해도 박시훈 같은 놈을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겠어.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러 가지 뭐.” 박시훈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쥔 채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 박유진 하나로도 모자라서 또 다른 남자까지 꼬드기고 있는 건가?’ ‘정말 남자를 끌어들이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군.’ 심미연의 저택.아침 식사 도중 심미연은 재채기를 했다. “엄마, 여기.” 심미연이 재채기하자마자 심태하가 재빨리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의 작은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엄마, 감기 걸린 거야?” 엄마가 아프면 힘들어하니까 심태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냐. 감기 안 걸렸어. 걱정 안 해도 돼.” 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심태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린은 괜히 가슴이 찡했다. ‘이런 기특한 아들을 키우는 기분은 대체 어떨까?’ ‘나도 아들 하나 낳고 싶어지네.’심미연은 사용한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아들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태하는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지?” 다른 집 아이들은 이 나이면 그저 먹고 놀기에 바쁠 텐데 심태하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그게 안쓰러워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때 심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남자는 여자를 챙겨줘야 하는 거라고.”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