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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끝난 인연
달빛 아래 끝난 인연
Autor: 월이

제1화

Autor: 월이
순간 하윤성은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하영을 바라보았다.

촛불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예전처럼 자신을 향해 웃음을 머금던 눈빛도,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던 마음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그저 담담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

“서하영.”

하윤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번 달에 내가 네 처소를 열 번이나 찾았다. 헌데 넌 번번이 몸이 불편하다고 했지. 내가 그 정도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무심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그리 쉽게 속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냐?”

서하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맑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소첩이 어찌 감히 서방님을 속이겠습니까. 정말 몸이 불편했습니다.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지나간 뒤에도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예진 동생은 이제 막 승상부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서방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허니 서방님께서 그 곁을 지켜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윤성은 그녀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도 뜻을 굽힐 기색조차 없는 모습에, 가슴속에 오래 눌러 두었던 답답함만 더욱 커졌다.

그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진이의 처소에는 내가 알아서 갈 것이다. 허나 오늘은 네 처소에서 묵겠다. 이번 달 내내 그 아이의 처소에만 머물렀으니, 이번에도 네 처소를 찾지 않는다면 승상부 사람들은 네가 총애를 잃었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서하영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하윤성과 거리를 두었다.

“소첩은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괘념치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은 데다, 며칠 전부터 앓던 풍한도 채 낫지 않았습니다. 혹여 서방님께 병을 옮길까 염려됩니다.”

하윤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서하영은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고, 호흡 또한 흐트러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하영.”

참다못한 하윤성은 끝내 참아 왔던 화를 터뜨렸다.

“아직도 그때 그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그는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그래, 한때 내 마음에 예진이뿐이었던 것은 인정한다. 허나 네 아버지의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너와 예진이를 다르지 않게 대하겠노라고 분명 약조하지 않았느냐. 헌데 넌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 게냐? 대체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서방님께서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소첩은 그저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서방님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또 저 표정이야! 무슨 말을 해도 꿈쩍하지 않고, 무엇에도 미련이 없어 보이는 저 표정!’

하윤성은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치 힘껏 내지른 주먹이 허공만 가른 듯했다.

풀 곳을 잃은 분노는 가슴속에 더욱 깊이 응어리졌다.

“좋다.”

그는 가까스로 화를 눌러 삼켰다.

“허면 내일 다시 오겠다.”

“내일도 어렵습니다.”

서하영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했다.

“소첩은 내일 법당에서 아버님의 명복을 빌며 하루 종일 경을 외워야 합니다.”

“허면 모레.”

“모레도 어렵습니다. 침선 장인이 오기로 되어 있어 가을옷을 몇 벌 맞춰야 합니다.”

하윤성의 표정이 굳었다.

“그다음 날은!”

서하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날도... 몸이 선뜻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윤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서방님, 앞으로는... 굳이 이곳을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첩은 몸도 아직 성치 않고, 이곳을 찾는 이도 드무니 행여 병을 옮겨 서방님께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서방님께서는 이미 예진 동생과 마음이 통하셨으니, 이제는 소첩을 없는 사람이라 여기셔도 됩니다.체면 때문에 억지로 발걸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날마다 동생의 처소에 머무신다 해도 소첩은 결코 원망할 일 없습니다.”

“너...!”

하윤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억누르던 감정이 한순간에 치솟아 거친 숨이 새어 나왔고, 그의 눈빛에는 서늘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서하영, 지금 내게 일부러 이러는 것이냐? 앞으로 함께할 세월이 얼마나 긴데, 설마 끝까지 나를 밀어낼 작정이냐? 장군부가 몰락하여 네게 의지할 곳조차 남지 않은 지금, 내게 이리 고집을 부려 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냐?”

서하영은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맑고 준수했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더없이 평온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소첩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방님께서 예진 동생을 마음에 두고 계시니, 앞으로는 그 아이와 서로 의지하며 백년해로하십시오. 소첩은... 분수를 지키고, 두 분께 폐가 되지 않겠습니다.”

하윤성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오 년 동안 곁에 두고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여인을 마주한 듯했다.

서하영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했다.

“좋다!”

하윤성은 소매를 거칠게 떨치며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굳어 있었고, 온몸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서하영, 오늘 네가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훗날 후회하지 말고!”

쾅!

문이 세차게 닫혔다.

그 충격에 들보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서하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서늘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그때 창밖에서 시녀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또 나리와 다투셨나 보네. 정말 마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원래도 나리의 마음을 얻지 못하셨는데, 이제 친정마저 기울었으면 어떻게든 나리의 마음을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헌데도 계속 나리를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시니...”

“그러게 말이야. 앞으로 이 승상부는 완전히 둘째 마님의 세상이 될 텐데. 우리도 얼른 방도를 찾아 이 처소를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 앞날 없는 주인을 계속 모셔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맞아. 둘째 마님이 들어오신 뒤로 나리가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몰라. 남해 진주에 서역 향료까지, 귀한 물건은 죄다 둘째 마님의 처소로 들어간다잖아! 어제는 둘째 마님께서 무심코 강남 음식을 드시고 싶다 하셨는데, 나리께서는 궁에 있는 상궁마마까지 불러 음식을 차리게 하셨다지 뭐야!”

“쉿! 목소리 낮춰. 마님께서 아직 잠들지 않으셨어!”

“무서울 게 뭐 있어? 지금 마님은 제 앞가림조차 어려운 처지인데, 우리를 뭘 어찌하시겠어? 내 말은, 차라리 얼른 둘째 마님께 잘 보여 두는 편이 낫다는 거야. 잘만 하면 우리도 덕을 볼 수 있지 않겠어...”

시녀들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서하영은 차갑게 식은 찻잔을 손에 쥔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희미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회색빛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와 창살을 가볍게 쪼았다.

서하영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비둘기 다리에 묶인 작은 대나무 통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펼쳤다.

아버지가 변방에서 보내온 서찰이었다.

거친 필체에는 먼 변방의 바람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내 딸아, 그동안 무탈하느냐?

네가 화리(和離)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아비가 며칠을 고민하였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 여겨지지 않는구나.

조정의 법도상, 사내가 화리서를 내어주지 않은 채 여인이 먼저 이별을 청하려면 경조부(京兆府)에 가서 철정형(鐵釘刑)을 받아야 한다.

그 형벌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가혹하며,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긴다고 들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아비의 잘못이다. 그때 권세를 앞세워 하윤성과 혼인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지금 이토록 마음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을...

허니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절대로 경솔히 결정하지 말거라!

아비는 비록 변방에 있으나 아직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철정형...

서하영은 서찰 속 글자를 바라보며,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곧 담담한 얼굴로 서찰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불꽃이 닿은 종이는 서서히 오그라들었다. 검게 타들어 가던 글자는 이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했는가?’

서하영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 고통이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연모하는 사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괴로울까.’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날들보다 괴로울까.’

그녀는 이미 결심을 마쳤다.

반드시 하윤성과 화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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