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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끝난 인연

달빛 아래 끝난 인연

Oleh:  월이Tamat
Bahas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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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성이 승상의 자리에 오른 날, 승상부로 돌아온 그가 서하영에게 처음 꺼낸 말은 고예진을 평처로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서하영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그녀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의 서하영은 하윤성이 어느 시녀에게라도 눈길을 주었다는 말만 들어도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직접 고예진을 평처로 맞이하는 의식을 주관하고 있었다. 의식은 성대했고, 준비 과정 또한 빈틈이 없었다. 그 규모와 격식은 자신이 혼례를 올리던 날보다도 훨씬 더했다. 예전의 서하영은 늘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하윤성의 서재로 탕과 다과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바깥출입을 삼가며 조용히 지낼 뿐, 더 이상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예전의 그녀는 매일 정성껏 단장하며, 혹시라도 그의 눈길 한 번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꾸미지 않은 채, 조용히 처소에 머물 뿐이었다. 심지어 하윤성이 먼저 그녀의 처소를 찾아와 입을 맞추려 했을 때조차, 서하영은 조용히 그를 밀어냈다. “소첩은 오늘 몸이 불편하여 서방님을 제대로 모시기 어려울 듯합니다. 예진 동생은 승상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서방님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입니다. 허니 서방님께서는 동생의 처소로 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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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제1화

순간 하윤성은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하영을 바라보았다.

촛불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예전처럼 자신을 향해 웃음을 머금던 눈빛도,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던 마음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그저 담담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

“서하영.”

하윤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번 달에 내가 네 처소를 열 번이나 찾았다. 헌데 넌 번번이 몸이 불편하다고 했지. 내가 그 정도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무심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그리 쉽게 속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냐?”

서하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맑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소첩이 어찌 감히 서방님을 속이겠습니까. 정말 몸이 불편했습니다.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지나간 뒤에도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예진 동생은 이제 막 승상부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서방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허니 서방님께서 그 곁을 지켜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윤성은 그녀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도 뜻을 굽힐 기색조차 없는 모습에, 가슴속에 오래 눌러 두었던 답답함만 더욱 커졌다.

그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진이의 처소에는 내가 알아서 갈 것이다. 허나 오늘은 네 처소에서 묵겠다. 이번 달 내내 그 아이의 처소에만 머물렀으니, 이번에도 네 처소를 찾지 않는다면 승상부 사람들은 네가 총애를 잃었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서하영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하윤성과 거리를 두었다.

“소첩은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괘념치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은 데다, 며칠 전부터 앓던 풍한도 채 낫지 않았습니다. 혹여 서방님께 병을 옮길까 염려됩니다.”

하윤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서하영은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고, 호흡 또한 흐트러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하영.”

참다못한 하윤성은 끝내 참아 왔던 화를 터뜨렸다.

“아직도 그때 그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그는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그래, 한때 내 마음에 예진이뿐이었던 것은 인정한다. 허나 네 아버지의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너와 예진이를 다르지 않게 대하겠노라고 분명 약조하지 않았느냐. 헌데 넌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 게냐? 대체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서방님께서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소첩은 그저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서방님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또 저 표정이야! 무슨 말을 해도 꿈쩍하지 않고, 무엇에도 미련이 없어 보이는 저 표정!’

하윤성은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치 힘껏 내지른 주먹이 허공만 가른 듯했다.

풀 곳을 잃은 분노는 가슴속에 더욱 깊이 응어리졌다.

“좋다.”

그는 가까스로 화를 눌러 삼켰다.

“허면 내일 다시 오겠다.”

“내일도 어렵습니다.”

서하영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했다.

“소첩은 내일 법당에서 아버님의 명복을 빌며 하루 종일 경을 외워야 합니다.”

“허면 모레.”

“모레도 어렵습니다. 침선 장인이 오기로 되어 있어 가을옷을 몇 벌 맞춰야 합니다.”

하윤성의 표정이 굳었다.

“그다음 날은!”

서하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날도... 몸이 선뜻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윤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서방님, 앞으로는... 굳이 이곳을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첩은 몸도 아직 성치 않고, 이곳을 찾는 이도 드무니 행여 병을 옮겨 서방님께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서방님께서는 이미 예진 동생과 마음이 통하셨으니, 이제는 소첩을 없는 사람이라 여기셔도 됩니다.체면 때문에 억지로 발걸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날마다 동생의 처소에 머무신다 해도 소첩은 결코 원망할 일 없습니다.”

“너...!”

하윤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억누르던 감정이 한순간에 치솟아 거친 숨이 새어 나왔고, 그의 눈빛에는 서늘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서하영, 지금 내게 일부러 이러는 것이냐? 앞으로 함께할 세월이 얼마나 긴데, 설마 끝까지 나를 밀어낼 작정이냐? 장군부가 몰락하여 네게 의지할 곳조차 남지 않은 지금, 내게 이리 고집을 부려 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냐?”

서하영은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맑고 준수했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더없이 평온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소첩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방님께서 예진 동생을 마음에 두고 계시니, 앞으로는 그 아이와 서로 의지하며 백년해로하십시오. 소첩은... 분수를 지키고, 두 분께 폐가 되지 않겠습니다.”

하윤성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오 년 동안 곁에 두고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여인을 마주한 듯했다.

서하영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했다.

“좋다!”

하윤성은 소매를 거칠게 떨치며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굳어 있었고, 온몸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서하영, 오늘 네가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훗날 후회하지 말고!”

쾅!

문이 세차게 닫혔다.

그 충격에 들보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서하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서늘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그때 창밖에서 시녀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보아하니 또 나리와 다투셨나 보네. 정말 마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원래도 나리의 마음을 얻지 못하셨는데, 이제 친정마저 기울었으면 어떻게든 나리의 마음을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헌데도 계속 나리를 밖으로 밀어내기만 하시니...”

“그러게 말이야. 앞으로 이 승상부는 완전히 둘째 마님의 세상이 될 텐데. 우리도 얼른 방도를 찾아 이 처소를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 앞날 없는 주인을 계속 모셔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맞아. 둘째 마님이 들어오신 뒤로 나리가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몰라. 남해 진주에 서역 향료까지, 귀한 물건은 죄다 둘째 마님의 처소로 들어간다잖아! 어제는 둘째 마님께서 무심코 강남 음식을 드시고 싶다 하셨는데, 나리께서는 궁에 있는 상궁마마까지 불러 음식을 차리게 하셨다지 뭐야!”

“쉿! 목소리 낮춰. 마님께서 아직 잠들지 않으셨어!”

“무서울 게 뭐 있어? 지금 마님은 제 앞가림조차 어려운 처지인데, 우리를 뭘 어찌하시겠어? 내 말은, 차라리 얼른 둘째 마님께 잘 보여 두는 편이 낫다는 거야. 잘만 하면 우리도 덕을 볼 수 있지 않겠어...”

시녀들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서하영은 차갑게 식은 찻잔을 손에 쥔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희미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회색빛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와 창살을 가볍게 쪼았다.

서하영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비둘기 다리에 묶인 작은 대나무 통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펼쳤다.

아버지가 변방에서 보내온 서찰이었다.

거친 필체에는 먼 변방의 바람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내 딸아, 그동안 무탈하느냐?

네가 화리(和離)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아비가 며칠을 고민하였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 여겨지지 않는구나.

조정의 법도상, 사내가 화리서를 내어주지 않은 채 여인이 먼저 이별을 청하려면 경조부(京兆府)에 가서 철정형(鐵釘刑)을 받아야 한다.

그 형벌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가혹하며,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긴다고 들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아비의 잘못이다. 그때 권세를 앞세워 하윤성과 혼인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지금 이토록 마음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을...

허니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절대로 경솔히 결정하지 말거라!

아비는 비록 변방에 있으나 아직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철정형...

서하영은 서찰 속 글자를 바라보며,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곧 담담한 얼굴로 서찰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불꽃이 닿은 종이는 서서히 오그라들었다. 검게 타들어 가던 글자는 이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했는가?’

서하영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 고통이 아무리 지독하다 한들, 연모하는 사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괴로울까.’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날들보다 괴로울까.’

그녀는 이미 결심을 마쳤다.

반드시 하윤성과 화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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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asan-ulasan

문명림
문명림
복사급으로 비슷비슷한 내용들...구토나와
2026-09-03 12: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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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순간 하윤성은 멈칫했다.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하영을 바라보았다.촛불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하지만 예전처럼 자신을 향해 웃음을 머금던 눈빛도,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던 마음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그저 담담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 “서하영.”하윤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이번 달에 내가 네 처소를 열 번이나 찾았다. 헌데 넌 번번이 몸이 불편하다고 했지. 내가 그 정도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무심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그리 쉽게 속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냐?”서하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맑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소첩이 어찌 감히 서방님을 속이겠습니까. 정말 몸이 불편했습니다.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지나간 뒤에도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예진 동생은 이제 막 승상부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서방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허니 서방님께서 그 곁을 지켜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윤성은 그녀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무슨 말을 해도 뜻을 굽힐 기색조차 없는 모습에, 가슴속에 오래 눌러 두었던 답답함만 더욱 커졌다.그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예진이의 처소에는 내가 알아서 갈 것이다. 허나 오늘은 네 처소에서 묵겠다. 이번 달 내내 그 아이의 처소에만 머물렀으니, 이번에도 네 처소를 찾지 않는다면 승상부 사람들은 네가 총애를 잃었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그 말을 듣고 서하영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하윤성과 거리를 두었다.“소첩은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괘념치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은 데다, 며칠 전부터 앓던 풍한도 채 낫지 않았습니다. 혹여 서방님께 병을 옮길까 염려됩니다.”하윤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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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오 년 전, 서하영은 대장군 서영배가 금이야 옥이야 아끼며 키운 외동딸이었다.나라의 기둥이라 불릴 만큼 공을 세운 아버지는 어린 딸을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며 길렀다. 덕분에 서하영은 밝고 당당한 성정을 지녔으나, 세상의 험난함을 알지 못한 순진한 아가씨이기도 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서영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런 그녀의 삶에 처음으로 변화가 찾아온 것은 경림연(瓊林宴)이 열리던 날이었다.그날 서하영은 아버지를 따라 입궁했다가 어화원에서 길을 잃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장원 급제자인 하윤성을 만났다.아직 관례도 올리지 않은 젊은 사내였지만, 그의 모습은 남달랐다.달빛처럼 희고 단정한 장포를 걸친 그는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반듯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그는 동년 급제자들과 함께 시국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남다른 식견과 여유가 배어 있었다.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조차 그의 빛나는 풍채를 가리지 못했다.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연모하는 이 앞에서 서하영은 제 마음을 숨기는 법을 몰랐다.하윤성을 향한 마음을 깨달은 뒤, 그녀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일부러 그와 마주칠 기회를 만들었다.처음 하윤성은 그저 예의만 갖춘 채 거리를 두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태도는 더욱 차가워졌다.그럼에도 서하영은 물러서지 않았다.거절당할수록 오히려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서영배는 그런 딸의 마음을 눈치챘다.그리고 하윤성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본 뒤, 사위로 삼기에 부족함 없는 인물이라 여겼다.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바로 하윤성이 고씨 가문의 아가씨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고씨 가문의 문벌은 결국 서씨 가문에 미치지 못했다.서영배는 끝내 결심했다.어느 날 궁중 연회가 끝난 뒤, 그는 술에 취한 하윤성을 서하영의 규방으로 들였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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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날 밤, 서하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옆 처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고예진의 처소에서는 늦은 밤까지 웃음소리와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예전의 서하영이었다면 그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졌을 것이다.하윤성이 다른 여인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하며 밤새 뒤척였을 것이다.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서하영에게 그 소리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였다.밤이 깊어지자 옆 처소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놀란 외침과 다급하게 오가는 발걸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분명 무슨 일이 생긴 듯했지만, 서하영은 몸을 뒤척였을 뿐이었다.그녀는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아침까지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손질하고 있을 때, 창밖에서 시녀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었는가? 어젯밤 둘째 마님께서 갑자기 심병이 도져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대.”“그러게 말이야! 그때 얼마나 위급했는지, 영은사 뒷산에서만 난다는 빙백초(冰魄草)가 아니었다면 살리지 못했을 거라더군! 헌데 그때는 이미 성문이 닫힌 뒤라 아무도 성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잖아!”“그 뒤로 어찌 되었는지 아느냐? 나리께서 둘째 마님을 살리겠다고 한밤중에 글쎄... 직접 성문을 넘어 성 밖으로 나가 약초를 구해 오셨다지 뭔가. 덕분에 둘째 마님의 목숨을 살리셨다지 뭐야!”“세상에! 성문을 넘으셨다고? 그건 죽을죄잖아!”“누가 아니래! 허나 폐하께서 나리를 중히 여기시니, 오늘 조회에서 곤장 서른 대와 석 달 녹봉 삭감으로 끝내셨대. 해서 다들... 나리께서 둘째 마님을 정말 끔찍이 아끼신다고 그러더라.”“참, 역시 사람마다 타고난 팔자가 있다더니...”시녀들은 저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해 한숨을 내쉬면서도, 슬며시 방 안의 서하영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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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시 눈을 떴을 때, 서하영은 자신의 처소에 있는 익숙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힘겹게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침상 곁에 앉아 있는 하윤성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서하영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하윤성의 눈빛에는 순간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그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평소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정신이 드느냐? 몸은 좀 어떠한가? 아직도 많이 아픈 것이냐? 의원을 다시 부를까?”서하영은 눈앞의 하윤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을 향한 그의 표정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고,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무감각해져 있었다. “아닙니다.”서하영의 목소리는 처참할 만큼 쉬어 있었다.하윤성은 순간 멈칫했다.“허면... 몸이라도 추스를 수 있도록 사람을 시켜 인삼탕이라도 좀 달여 오게 하는 게 어떠냐?”“됐습니다.”“...혹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 주방에 일러 준비시키겠다.”“괜찮습니다.”거듭된 거절에 하윤성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평소라면 진작 불쾌한 기색을 보였을 텐데, 오늘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인내심을 보였다.“허면 원하는 게 뭔가? 말해 보거라. 다 들어주겠다.”서하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듯,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하윤성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이 길어질수록, 하윤성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마침내 서하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방님께서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하윤성은 순간 굳어졌다. 그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방금... 뭐라 했느냐?”“제 방에서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서하영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지금 당장.”순간, 하윤성의 얼굴이 굳었다.하지만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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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허면 푹 쉬거라. 이따 다시 들르겠네.”하윤성은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그 후 며칠 동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예진 곁에서 보냈다.그럼에도 하루 한두 시진 정도는 서하영의 처소를 찾아왔다.서하영이 매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를 돌려보내도 마찬가지였다.그러던 어느 날, 하윤성 대신 그의 서재에서 시중드는 측근 시녀 홍단이 찾아왔다.그녀는 공손히 예를 올리고,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님, 나리께서 요 며칠 입맛이 없으시다며 갑자기 마님께서 만드신 칠교 화과자가 몹시 생각나신다고 하셨습니다. 해서 특별히 소인을 보내 마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마님께서 혹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서하영은 창가에서 난초 화분의 마른 잎을 다듬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그녀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칠교 화과자는 과거 그녀가 그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궁에서 물러난 대령숙수에게 배운 음식이었다.복잡한 공정과 까다로운 재료 선정 탓에, 한 번 만들 때마다 꼬박 반나절이나 걸렸다.그때 하윤성은 한입 먹고는 드물게 칭찬 한마디를 건넸다.“괜찮군.”그 한마디에 그녀는 기뻐하며 어쩔 줄 몰랐다.하지만 그가 만드는 법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만큼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그래야 훗날 그가 다시 칠교 화과자가 생각나면 가장 먼저 그녀를 찾을 것이고, 그녀 또한 줄곧 그를 위해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바람이었다.서하영은 손에 든 가위를 내려놓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네. 자네는 지금 나 따라 부엌으로 오너라. 그리고 내가 만드는 걸 곁에서 잘 보아 두거라. 만드는 법도 하나하나 익혀 두고.”홍단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으로 들어선 서하영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반죽을 치대고, 소를 만들고, 틀에 모양을 잡는 손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과정마다 필요한 요령을 조용히 일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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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연심아.”서하영은 곧장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를 불렀다.곧 문이 열리고 연심이 안으로 들어왔다.“가서 서 의원을 모셔 오너라. 내 몸이 편치 않으니, 한번 와서 살펴봐 달라고 전하면 된다.”“예.”연심은 곧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서 의원은 예전 아버지 휘하에 있던 군의관의 후손이었다. 의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성품 또한 강직하여, 아버지께서는 혹여 그녀에게 변고가 생길까 염려해 특별히 그를 도성에 남겨 곁을 지키게 하였다.하윤성은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심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한 분 모시고 들어왔다. 머리와 수염은 이미 희끗했지만, 눈빛만큼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고 기운 또한 정정했다. “서 의원님.”서하영은 서 의원을 향해 가볍게 예를 올렸다.“번거로우시겠지만, 제 옆 처소에 있는 둘째 마님의 맥을 한번 짚어 주십시오. 대체... 어떤 독에 중독된 것인지 직접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서 의원이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예, 아씨.”처음에는 고예진이 한사코 진맥을 거부했다. 하지만 서하영이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하윤성마저 허락하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서 의원이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나리, 마님.”그는 하윤성과 서하영을 향해 예를 갖춘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맥 결과를 밝혔다. “둘째 마님의 맥은 지극히 안정적입니다. 속에 열이 조금 쌓인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물론 중독된 증상은 더더욱 없습니다!”순간 하윤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뭐라?”그는 곧바로 방 한쪽에 무릎 꿇은 채 덜덜 떨고 있던 승상부 의원을 바라보았다.“어서 말하거라. 대체 어찌 된 것이냐?”하윤성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의원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나리, 살려 주십시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두, 둘째 마님께서 은자 백 냥을 주시면서 독에 중독된 것처럼 거짓 진맥을 하고, 그 누명을 마님께 뒤집어씌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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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하윤성은 멀어져 가는 서하영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무언가에 이끌린 듯, 그는 무심코 그녀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자 뒤에서 고예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성 오라버니...”하윤성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그리고 결국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그 후 며칠 동안 서하영은 처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하윤성이 새로 들인 마님을 얼마나 아끼는지, 또한 본처인 자신을 얼마나 냉대하는지에 대한 소문이 도성 안팎을 떠돌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하윤성이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하영아, 오늘 밤 도성에 연등 축제가 열린다고 하더구나. 꽤 성대하다던데... 함께 나가 보지 않겠느냐?”서하영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매년 연등 축제가 열릴 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함께 가자며 몇 번이고 졸라댔다.하지만 하윤성은 늘 공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그랬던 사람이 이제 와서 먼저 가자고 하다니.“가고 싶지 않습니다.”서하영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하윤성은 그녀의 무덤덤한 얼굴을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가슴 한켠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그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곧바로 하인에게 명했다.“마차를 준비하거라.”잠시 뒤, 서하영은 거의 떠밀리다시피 승상부를 나섰다.그런데 마차가 막 대문을 나서는 순간, 화려하게 차려입은 고예진이 환한 얼굴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윤성 오라버니, 형님. 두 분도 연등 축제에 가시는 건가요? 마침 저도 혼자 처소에 있으니 답답하던 참이었는데,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하윤성은 담담한 얼굴로 서 있는 서하영을 바라보았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서하영은 아무 말 없이 먼저 마차에 올랐다.고예진도 곧 뒤따라 마차에 올랐고, 좁은 마차 안에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큰한 향기가 은은히 퍼졌다.마차는 곧 주작거리로 접어들었다.축제를 맞은 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거리마다 내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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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다시 눈을 떴을 때, 서하영은 자신의 처소에 누워 있었다.온몸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뼈마디가 모조리 부서진 듯했고,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을 찢어놓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실감 나지 않았다.침상 곁에는 하윤성이 앉아 있었다.며칠 밤을 꼬박 지새운 듯 그의 얼굴은 초췌했고, 눈가에는 핏발이 가득했다.서하영이 깨어난 것을 본 순간, 하윤성의 눈빛에 기쁨이 번졌다.그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하영아, 정신이 드느냐? 몸은 좀 어떤가? 아직도 많이 아프더냐?”예전 같았으면 그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기뻐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서하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저 텅 빈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하윤성의 얼굴에 떠올랐던 기쁨은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표정은 죄책감으로 바뀌었다.그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고, 쉰 목소리로 설명했다.“하영아, 미안하다. 그날 네가 신호를 보낸 뒤, 나는 곧바로 사람을 이끌고 너를 뒤쫓으려 했다. 허나... 예진이가 갑자기 심병으로 쓰러졌고, 위급한 상황이라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겨우 그녀를 안정시킨 뒤 다시 너를 찾아 나섰으나, 이미 늦은 뒤였더구나... 밤새도록 찾아 헤맨 끝에야 절벽 아래에서 너를 발견했다...”하윤성의 말은 갈수록 두서없이 이어졌다.그는 그날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서하영에게 용서를 받고 싶었다. 서하영은 천천히 하윤성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설명할 필요 없습니다.”하윤성은 순간 굳어졌다.“이제는 놀랍지도 않습니다.”서하영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눈동자에는 미움도 원망도 없었다.그저 모든 것이 다 메말라 버린 듯한 공허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어차피... 저는 나리께 기대한 적이 없었으니까요.”순간 하윤성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날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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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하윤성은 고예진과 함께 광제사에서 사흘을 머물렀다.속세와 떨어진 절은 고요했다. 은은한 단향이 사방에 퍼지고, 어디에서도 소란스러운 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도 하윤성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밤마다 그는 번번이 잠에서 깨곤 했다.꿈속에서는 늘 한 쌍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텅 비고 황량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하윤성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그것은 서하영의 눈이었다.고예진 역시 그의 이상한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그녀는 경전을 베껴 쓰던 붓을 내려놓고 조용히 하윤성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성 오라버니,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십니까? 혹... 서하영을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까?”하윤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불경을 내려놓았다.“괜한 생각 하지 말거라. 그저... 요즘 조정 일이 많아 조금 피곤했을 뿐이다.”고예진은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허면… 우리 조금만 더 이곳에 있으면 안 될까요? 이곳이 워낙 고요해서인지, 온 뒤로 몸이 전보다 훨씬 편해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오라버니께서 제 곁에 계시니 마음이 놓여요. 이대로라면 병도 금세 좋아질 것 같아요.”하윤성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짙어진 저녁빛이 산사를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 불편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날 하윤성은 고예진을 위해 평안부 하나를 구해 직접 목에 걸어 주었다.그러나 떠나기 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적 하나를 더 받아 손에 쥐었다.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은 다듬지 못한 가장자리가 손에 닿을 때마다 거슬렸다.하윤성은 손안의 부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승상부로 돌아가 서하영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뒤에 건네면 될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서먹함도 사라지고, 두 사람의 사이도 다시 괜찮아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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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노인은 하윤성의 섬뜩한 표정에 겁을 먹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그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저, 저는 모릅니다... 그 아가씨께서 은전을 건네며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저, 저도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하윤성은 손안의 화리서를 놓지 못했다.얇은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천 근보다 무거웠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쥔 탓에 서찰이 구겨졌고,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종이를 펴 보았다.그때 서찰에 남은 마른 핏자국이 손끝에 묻어났다.차갑고 끈적했다.순간, 하윤성의 머릿속에 며칠 전 상처투성이 몸으로 침상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며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기대한 적이 없었다고 담담히 말하던 서하영의 눈빛이 떠올랐다.그제야 하윤성은 깨달았다.상처받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고.하지만 아니었다.그날 서하영이 했던 말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붙잡기 위해 일부러 던진 말도 아니었다.서하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이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결심까지 끝낸 뒤였다.설령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떠나려 했던 것이었다.“하영아...”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를 부축하려 다가온 고예진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고 곧장 마구간으로 달려갔다.“윤성 오라버니!”고예진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하윤성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서하영을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 찾아야 한다!호위무사가 건넨 고삐를 빼앗듯 받아 든 그는 지체 없이 말 위에 올랐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채찍을 내리쳤다.말이 놀라 길게 울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내달렸다.하윤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조부를 향해 질주했다.고예진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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